프로이트와 사랑1)
            ―「쥐인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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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것은 사랑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애초에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네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없듯이, 내가 네 손을 잡아 줄 수 없음.
-이성복, 「그대에게 가는 먼길」

0. 시작하며

라깡은 스무 살 무렵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우리의 사랑의 관계는 욕망의 방식과 유사하다. 아니 차라리 우리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형태가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깡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므로, 혹은 상징계라는 계약(질서, 법)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므로 결여된 존재이고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기표)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 사물과 언어의 분리,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 아버지의 금지와 법에 의해서 모성적 만족 혹은 충만함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분리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자신의 분리를 결여로서 경험한다.2) 그리고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환상 속에, 욕망 속에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환상으로 혹은 욕망으로 분리는 메울 수 있는 것인가? 물론 대답은 ‘아니오’이다.
만약 메울 수 있다면 차라리 행복할 것이다.
욕망의 환유적 운동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망의 은유적 고착을 통해서 ‘그래 바로 이것이야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그것이야’라고 응답하는 순간 ‘정말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을까?’라는 뭔가 결여됨을 또다시 느낄 수밖에 없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은 욕망은 질문이며 욕망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 주체라고 말한 것일 게다.

사랑 또한 이러한 욕망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랑의 대상은 이러한 결여를 메울 수 있는 존재로서 상상되며 우리는 우리의 결여를 메워줄 대상기표로서 남자, 혹은 여자를 선택한다. 거꾸로 우리가 어떤 대상(기표)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의 결여를 보여준다(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어떤 대상들을 원하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러한 선택을 끊임없이 반복한다3). 상대방이 자신의 결여를 메우거나 혹은 상대방의 결여를 메우기를 바라면서. 자신(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해 주거나 혹은 자신(상대방)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온전히 사랑 받기를 환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원한다. 욕망 한다.
서로의 결여를 메우는 행복한 합일(혹은 완전한 합일감이 서로의 결여, 차이를 메우는)이야말로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 아닌가. 물론 고난과 장애가 그러한 합일을 위한 배경으로 드리워져야만 하지만.
그리고 이런 식의 합일, 충만함은 아닐 지라도 상대방을 자신의 거울, 또 하나의 자신으로 투사시키는 경우에, 즉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이상적 자아(자신이 되고 싶었던 완전한 모습)를 발견하고 이 이상적 자아에게 자신의 자아이상을 확인하려고 한다(자신이 아름답다던지, 착하다던지, 현명하다던지, 혹은 불행하다던지).
자신의 결여를 메우려는 환상이든, 혹은 자신의 자아이상을 확인하려는 환상이든 일단 사랑은 매혹에 근거한다. 실제 이런 매혹의 지점에서야 환상은 소급적으로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지도.
바로 이 매혹의 원인이 욕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내가 원하는 그 무엇(대상 a)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은 언제나 그 사람과 내 속에 있는 것을 넘어서는 과잉이다. 그래서 이 무엇(대상 a)은 욕망의 원인일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충동이 맴도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목소리, 응시 등은 욕망을 누비며 환상을 구성하지만 또한 그 환상을 넘어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구멍 속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사랑 혹은 욕망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치명적인 유혹 때문이리라.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우리의 증상을 통해서 불가능성(향락)의 한 복판에 서는 것이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무엇, 그 얼룩들, 구멍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사랑의 향락은  바로 이런 불가능성, 고통이지 않을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을 때에도 내 몸은 당신을 보고 있소. 당신의 벌거벗은 나체를.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나체를 말하려 하면, 당신의 몸은 다시금 ‘그리움’에서 ‘고통’으로 돌아오고 말아요. 당신의 몸은, 무어라 말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든, 그렇지 않든, 고통이오. 고통은, 그래요 고통은…… 편지를, 더 이상, 쓸수가 없소. 고통은…… 영원히 읽혀지지 않을 것이오.
-채호기의 「가벼운 편지」중(『밤의 공중전화』,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욕망의 회로 속에서 이 고통들을 보지 않고 지나치지 않게 자신의 욕망(사랑)에 충실하며 자신의 증상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지니…….


1.

사랑할 때 우리는 도착증자이고 강박증자이며 히스테리자이다. 왜냐면 우리의 결여를 메우기 위한 모든 시도, (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들은 욕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강박증은 상대를 무화시키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타자는 그의 결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박증자냐, 히스테리자냐, 정신병자냐 등의 비하적인 낙인이나 두려운 의심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낙인이나 의심은 오히려 더 심각한 신경증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신경증자이며 정상/비정상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정신분석의 담론들은 좀 더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는 프로이트가 들려주는 ‘강박증자들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혹은 사랑의 방식이 어떻게 고착되었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라깡주의자(특히 지젝)의 얘기들을 참조하면서 그의 사랑의 방식(혹은 욕망의 방식)과 그 증상 그리고 증상의 해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강박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랑과 미움, 존경과 비웃음 등의 양가감정을 기본 축으로 해서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될 수 있는 전치의 과정처럼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의 엉킨 실타래를 보여준다.
 강박증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의 혼란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증상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미워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강박증에 있어서는 미움이 어쩌면 더 강한 본능일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프로이트는 그의 방식대로 과거,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원장면에서 강박증적 사랑의 방식은 고착되었다. 어떻게? 쥐인간의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자.


2. 아버지, 그리고 여자

프로이트에 의해서 ‘쥐인간’이라 명명된 어떤 남자가 그의 진료실에 찾아왔다. 그의 고통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쥐인간의 망상:
“돈을 갚으면 여자와 아버지에게 쥐를 이용한 벌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A중위에게 3.80크로넨을 갚아야 한다.”

쥐인간은 군대에 있을 때 한 중위(N중위)로부터 쥐를 이용한 끔찍한 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이상한 망상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망상에 대한 죄의식으로 수수께끼 같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우체국 아가씨에게 돈을 간접적으로 빌린 일이 있는데 이 아가씨는 그가 얼마 전부터 마음에 들어한 아가씨였다. N중위가 돈을 A중위에게 갚아야 한다라고 실수 한 것을 근거로 그는 사실은 우체국아가씨에게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A중위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는 맹세를 계속 지키려고 하며 심지어는 우체국아가씨에게 돈을 갚고 난 뒤에도 그 맹세를 실행하려는 유혹을 계속 받았다.
이 망상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과 여자에 대한 양가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쥐인간이 실수한 N중위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N중위와 아버지를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가 실수할 리 없어, 라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또 한편으로는 실수한 명령(불가능한 명령)을 따름으로써 아버지를 조롱하는 양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은 자신의 성적 만족(우체국여자를 만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죄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죄의식은 성적 만족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방해자로 아버지와 자신의 연인4)을 증오함으로써 오는 죄의식이라 함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는 이런 죄의식5) 때문에 불가능한 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제재를 가한다.

쥐인간은 어릴 적 자신의 성적 만족(리비도)을 억압하는 아버지에게 극단적인 미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쥐인간은 자신의 과도한 증오에 스스로 놀라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을 벌하거나 혹은 반대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증오를 억압한다.
이후에도 쥐인간의 사랑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계속 흔들리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혹은 사랑) 때문에 그 여자를 미워한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이 부재한 곳에서만 정상적인 성관계가 가능하다.
연인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반복한다. 사랑과 미움, 특히 그 중에서 미움의 감정은 너무 과도해서 억압되지만 죄의식으로 혹은 과도한 애정으로 변화된다. 강렬한 미움과 강렬한 사랑이 한 쌍으로 붙어 있어 강박증자는 우유부단해지고 자신의 사랑조차 의심하게 된다.
길을 가다가 돌을 발견해도 쥐인간은 고뇌한다. 자신의 연인이 지나 다니는 이 길에서 그녀가 다치지 않게 돌을 치웠다가(과도한 사랑) 다시 돌아와 자신에 행동에 어이없어 하며 돌을 되가져 놓는다(프로이트는 이것을 미움의 승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랑의 방해자는 모두 죽기를 바라는(애인이 돌보는 병든 가족, 그리고 애인과 친밀한 관계인 사촌)망상을 하고 또 한편 그러한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쥐인간 사례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사랑의 방식이 결정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쥐인간의 증례에서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어머니와의 결합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위행위와 같은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혹은 금지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6). 이러한 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쥐인간은 신경증자인 것이라고 라깡은 말했을 것이다7). 이제 여기에서 프로이트와는 강박증을 분석하는 방법이 좀 차이가 있는 라깡은 강박증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쥐인간의 사례에서는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
라깡은 강박증자는 분리(결여)를 마찬가지로 환상 속에서 메우는데 그는 자신이 결여된 혹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고집하면서이다. 그는 자신에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그의 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에게 대상이란 자신의 결여를 메워 줄지도 모를 ‘대상 a’를 가진 존재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화되는 순간(대표적으로 오르가즘)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대상과 거리를 두려한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 스스로 교묘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하거나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을 한다.
라깡 식으로 보자면 쥐인간은 자신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방해자 아버지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을 방해자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사랑(죄의식)으로 대체하여 자신의 사랑(혹은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아버지가 죽었으면 했던 상상도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며 자신의 애인의 가족이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애인이 보고 싶은 그의 과도한 애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애정을 방어하기 위해 죄책감을 발동시키려는 전략이다. 그가 길가의 돌과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애인을 미워하는 감정이 승리했다고 프로이트는 말하지만 라깡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그녀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혼란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전략. 음 이렇게 보니 놀라운 전략가로군.). 전반적으로 죄의식의 승리. 아니 방어의 승리인가?
그러나 스스로를 분리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는 강박증자가 금지와 억압의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자신은 이미 금지 당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 졌을까? 대상(혹은 대상 a)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인가? 아니면 아버지는 벌써 죽었다고 안심해서인가?
자신의 리비도를 억압했던 아버지(실제의 아버지가 그러했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단지 한 두 번의 가벼운 질책이 그에게 그러한 확신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를 미워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죄의식)으로 자신의 만족을 억압하려는 쥐인간.
그런 의미에서 쥐인간의 욕망의 원인을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목소리(초자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8) 그러나 실제 쥐인간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충실하다기보다 자신의 만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욕망의 고착을 ‘아버지’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욕망의 환유적 흐름으로 이끄는 대상 a는 ‘쥐를 이용한 잔인한 벌(증오의 기표)’정도일 것이다. 이 증오의 기표를 통해 죄의식을 촉발시키고 결국에는 자신의 사랑,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증상은 타협형성이며 억압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타협이란 만족과 억압의 타협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증상은 만족을 유혹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쥐인간의 리비도적인 충동은 어디를 맴돌고 있을까? 아마도 신체대상으로서는 항문이며 정념은 미움, 가학적인 것이 아닐까한다. ‘쥐를 이용한 벌’이 항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 쥐인간의 증상이 심해진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어떤 것(충동)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쥐인간은 제한적인 만족(향락)이라는 증상을 드러내게 된 것이라고(증환으로서의 증상9)).
왜 그것이 만족인가? 쥐인간은 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이미 그의 그런 망상자체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고, 암호 같은 메시지로 언어화하는 것(증상)에 성공함으로써 만족을 가능하게 했다. 비록 그것이 강박증자의 특징적인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강박증자는 생각하는 것 자체로 성적인 것을 대체하기 때문에 그가 만족을 얻었다는 것은 가능한 가정이 아닐까한다.


3. 신경증, 강박증의 해소

프로이트는 분석치료란 “의식에 의해서 무의식을 대체하는 일, 혹은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10)”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번역은 분석가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하게 해야한다. 그러나 의식으로 떠오를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의식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전이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분석가는 먼저 ‘전이’가 가능하도록 해야 하며 억압이 이루어졌던 장면을 다시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반복하게 하고 “자신의 동원 가능한 모든 심리적 힘들을 통해서 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결말이 나도록 이끌어야11)”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모호하기도 하다. 특히 동원 가능한 모든 심리적 힘들이라니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자아나 초자아를 지칭하는 것들이 아닐까한다. 다시 말해 금지와 억압의 잣대를 구성하는 이 심리적 힘들이 “좀 더 유화적이 되고 일정한 만족을 허용할 정도로 융통성을 발휘(프로이트, 『강의』 645쪽)”하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던 자아가 왜, 어떻게 융통성을 발휘하게 되는가? 프로이트는 여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신분석의 성과(정상이냐 비정상이냐의 구분은 상대적이며 인간은 누구나가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성욕을 가지고 있다. 등등)를 같이 공유함을 통해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 수 있는 과정12)을 자신의 분석치료에서 실행하고 있었다.
쥐인간의 분석치료 중에도 이러한 ‘전이’가 일어나며 쥐인간은 프로이트를 아버지의 위치에 갖다놓고 그를 과도하게 사랑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를 자극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미움을 폭발시켰다. 그리고는 프로이트(아버지)가 화가 나서 자신을 때리려 일어선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물론 프로이트는 일어섰을 뿐…….). 그리고 자신의 반응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던지며 이해하게 된다(어 내가 왜 그랬지? 왜 일부러 프로이트를 화나게 만들려고 했을까? 내 무의식이 정말 원하는 것은 뭐지? 나는 정말 아버지를 미워했나 ).
이것을 라깡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그는 자신의 환상을 무대화하면서 자신의 환상을 해석하고 욕망의 타자성과 그 타자의 결여를 체험함으로써 횡단한다.
그러나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 ‘대리만족을 주는 자신의 증상(프로이트)’을 포기하려고 할 것인가?
지젝은 여기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쥐인간의 사례에서처럼 증상은 ‘만족(향락)’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여된 주체에게 주어진 간헐적인 만족(향락)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이 만족이란 무엇인가? 물론 최초의 만족, 충만함은 아닐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실재계의 잔여물, 찌꺼기로서의 (잉여)향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또 이 실재계란 무엇인가? 실재계는 사후적으로 전제된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 상징화에 저항하는 상징계의 빈 구멍, 불가능성이다. 바로 이런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능성(외상적 중핵)으로 인해 (잉여)향락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회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만족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욕망 속에서 어떻게든 이러한 구멍, 결여를 메울 환상을 구축하며 환상-대상을 뒤좇는다. 그러나 모든 방해와 더불어  구멍, 결여, 불가능성, 향락은 증상을 통해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증상은 억압과 만족, 봉합(환상)과 결여가 뒤엉켜 있는 고리이다.
이러한 증상의 해소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증상은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 중핵(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 증상의 해소란 곧 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억압(상징계)이 없는 세계는 곧 정신병적 세계(죽음충동에 굴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상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 환자가 자기 증상의 실재 속에서 자기 존재의 유일한 실정물을 인정 할 수 있는 순간에 분석과정은 종결된다(지젝, 『숭고』 136쪽)”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0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랑이 서로의 결여를 메우려는 욕망이라면 오직 착각(나르시즘적인) 속에서만13) 두 사람의 합일,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 사랑은 역시 욕망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환상이야”라고 냉소적으로 코웃음치고 돌아서 버릴 것인가?
사랑(혹은 욕망)이 이런 식의 환상에 근거한다는 말은 단지 그것이 허위의식, 가짜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식의 환상을 통한 오인이나 착각은 필연적이며 이런 오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자체가 오히려 치명적인 착각이다.
진리는 환영을 통한 오인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사랑에 있어서도 유효하다14).
그러므로 돌아선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환상을 횡단하지 않는다면 정말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실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부연하자면 환상은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타자(상징계) 혹은 주체의 결여,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결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은 상징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공백을 중심으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실재는 바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재하는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오인의 형식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 환상(욕망)을 통해서만이 진실15)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을 횡단하기란 “라깡이 환상을 횡단하기라고 부른 것은 정확히 환상-대상에 대한 그러한 전도의 경험에 있다. 주체는 언제나 결여되어 있는, 욕망의 대상-원인이 어떻게 그 자체로 결여를 객체화하고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를 체험”(지젝, 『숭고』, 329쪽)하는 것이다.

환상을 횡단한 다음은 증상이 사라지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증상은 우리의 실정적 조건이며  횡단할 수 없는 향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우리의 증상 속에서 결여를, 분리를, 차이를 메우려는 환상, 욕망만이 아니라 바로 그 욕망(환상)속에서 ‘내 속에 있는 나 자신보다 더한 것’, ‘네 속에 있는 너 자신보다 더한 것’을 대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불가능이다.
사랑에 대한 얘기들은 문학 속에서, 영화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속에서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등장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열병이 우리를 인간, 자신, 타자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냉소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냉소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사랑의 증상 속에서 보여지는 의미화할 수 없는 기표들을 아슬아슬하게 어떤 문형으로 포착해놓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사랑의 증상과의 동일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이 글에 잠정적인 마침표를 찍을까한다.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을 결코 풀어헤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외디푸스가 아니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 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뿐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어떤 명백함이라는, 그런 지혜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있을 그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

1) 사실 이 글은 사기에 가깝다. 라깡의 글을 간접적으로만 읽고 마음대로 혹은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글도 다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지식을 모두는 아니겠지만 최대한  동원해서 해석한 잠정적 결론이다. 주로 참고한 텍스트는 프로이트의 「쥐인간」(『늑대인간』,열린책들), 『정신분석강의 하』(열린책들), 브루스 핑크의 『라깡과 정신의학』(민음사), 김상환․홍준기 『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삐딱하게 보기』(시각과 언어)

2) 이러한 결여는 전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상징계는 자신은 결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컵은 컵이고 법은 법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배제/결여를 감추기 위한 베일/환상인 것이다. 환상은 자신의 결여를 감추는 형식, 그렇기  때문에 그 형식 속에 자신의 결여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징계의 결여는 환상을 통해서 봉합되지만 바로 또 그 환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3) 반복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고착이 일어나 한 대상만을 고집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대상을 찾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이지 않을까?

4) 여기에서 그의 연인은 위치는 다중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축에 서기도 하고 또 한편 아버지와 동일하게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5)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에서 양심, 죄의식이라 불리는 것들은 초자아의 명령에 의한 것인데, 초자아는 이드의 첫 번째 대상리비도 집중이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흔히 알고 있듯이 초자아가 자아에 의해 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초자아는 의식보다는 이드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 그런데 왜 초자아가 자신을 현시하는 것은 주로 죄의식을 통해서인가. 프로이트는 그것이 이드 안에 있는 파괴본능(죽음충동)때문이라고 한다.(정신분석 세미나 쥐인간팀 발제문 중에서)

6) 그래서 쥐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한밤중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망상, “내가 이런 짓을 하면 내세의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다.”라는 죄의식, 제재에 의해서 중단된다.

7) “라깡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곧 (신경증)증상이라고까지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고(원인), 이것 때문에 주체가 신경증자가 된 것이 아니라(결과)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신경증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홍준기,「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2002. 48쪽

8) ‘쥐 인간’의 환상이나 강박증적 관념 속에서 표현되는 아버지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 브루스 핑크의 지적처럼 쥐 인간의 욕망의 원인에 접근하는 데 용이할 것 같다. ‘아버지’라는 타자는 ‘쥐인간’에게 최초의 타자이면서 브루스 핑크에 의하면 바로 그의 아버지가 ‘쥐인간’에게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라는 것이다. 대상 a란 내가 어떤 남자에게 강하게 끌렸을 때. 여기서 말한 어떤 남자는 나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남자 안에 바로 주체가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 a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정신분석 세미나 쥐인간팀 발제문 중에서)

9) 증환으로서의 증상에 대해서 지젝은 “향락이 스며있는 기표물이며 사회적인 유대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될 수 없는 얼룩,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실정적 조건(지젝, 『숭고』, 137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재계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기표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언어, 상징적 그물에도 걸려들지 않음으로 그것은 주체에게 만족(향락)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만 상징계가 구조 지어짐으로 상징계의 실정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충동이라는 것도 증환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재계의 압력을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0) 프로이트,「전이」,『정신분석강의 하』,임홍빈․홍혜경옮김, 열린책들 1997. 615쪽

11) 프로이트, 「분석요법」, 『정신분석강의 하』, 임홍빈․홍혜경옮김, 열린책들 1997. 643쪽

12) 새로운 자아라는 것은 라깡 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상징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따라서 분석치료란 단순히 기존의 질서로 의식화하는, 혹은 언어화하는 의미라기보다 의식화와 언어화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3) 혹은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나?)

14)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자신의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증상에서 증환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117쪽.

15) 어떤 진실? 주체와 타자가 결여된, 분리된 존재라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분리가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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