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영혼의 중앙역   -박정대

키냐르, 키냐르……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저녁마다 너를 만나던 이 지상의 물고기 자리에서
나는 왜 네 심장에 붙박이별이 되고 싶었는지
네 기억의 붉은 피톨마다 은빛 비늘의
지문을 남기고 싶었는지
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외로운 몸짓으로
네 몸을 거슬러 오를 때도
내 영혼은 왜 또 다른 생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
생이 더 이상 생일 수 없는 곳에서,
생이 그토록 생이고만 싶어하는 곳에서
부르지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은밀해서 생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확실한 생이
겨자씨처럼 작은 숨결을 내뿜으며
덜컹거리는 심장의 비밀을 데리고
저녁처럼, 문지방처럼, 음악처럼
네 영혼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가을 저녁寺  -박정대
 
나는 걸어서 가을저녁寺에 당도합니다
한 사내가 물거울에 자신의 낯을 비추어보며 추억을 빨래하고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잉걸불처럼 타들어가는 개심사 배롱낭구 꽃잎에는 어느 먼 옛날 백제 처녀의 마음도 하나 들어 있을 테지요
저녁 예불을 드리던 개심사 범종 소리는 서른두 번째에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마지막 종소리는 가을 저녁寺로 불어오는 바람에게나 내어주고요
가을 저녁寺에 호롱불이 돋는 地上의 유일한 저녁입니다
한 사내가 연못거울에 어두워지는 낯을 비추어보며 끝내 자신이 걸어가 당도할 집을 생각하는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 저녁입니다
나는 걸어서 가을 저녁寺를 내려옵니다
 
장만옥  -박정대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사곶 해안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사랑이 빠져 나간 뒤 남은 부드럽고 견고한 생,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대 문지방을 넘어서는 또 다른 활주로는 무엇인가?
 
 
구름 저편에 있는 나  -박정재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하루 종일 나무를 바라보던 마음이,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처럼, 딱딱한 입술로 중얼거리네, 새들은 날아다니는 저마다의 섬인 거, 그 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물결을, 공기의 물결을 밀어서, 누군가의 생각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 거,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바다, 푸른 바다, 검은, 푸른 바다, 검은, 깊은 푸른 그녀, 어젯밤 누가 그녀를 헤엄쳐 건넜는가, 오늘은 또 누가 그녀 속에서 익사하는가, 추억의 헛간 같은,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호수를 닮은 영혼들, 머리카락 휘날리며 바람 속을 달려가는 나무들, 물 속의 나무들, 나무들 속을 흐르는 격렬한 침묵들, 오래된 추억 때문에 태양은 더욱 더 뜨거워져가는데, 바다, 그녀의 정맥 속으론 왜 차가운 구름장들이 흐르는가, 구름의 발바닥들, 잎사귀의 무릎들, 아니 <나문닙>의 관절들, 그 동그란 발음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나와 나 사이엔 혹은 나와 나 사이엔, 뭐가 있나, 흐르는, 뭉쳐진 구름들, 흩어질 시간들,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거기에서 누가 침묵의 노래를 부르나,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깊은, 아주 먼, 먼 먼, 나.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박정대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고요히 촛불을 밝히는 시간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서
촛불을 켜 들고, 그래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음악들-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눈물도 음악이 될수 있다면  -박정대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생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불멸이 아니어서 -박정대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리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 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찾아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들 찾아 나섰다
그런데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 낯설었는데,
어쨌든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내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랫동안 불멸을 꿈꾸었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사랑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숨쉬고 존재하며,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그대를 찾아 나섰다가 나는 불멸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불멸이 몹시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불멸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불멸이 아니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불멸에 닿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열대야 --박정대
 
곳은 창문 너머로
야자수 같은 게 흔들거리는 슬픈 열대야
아니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물풀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어
지금은 오래된 유행가처럼
어디선가 한 소절 바람이 불어온다
슬픈 열대야,
나 지금 대야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어
지금은 안 보이는,
너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씻고 있어
그러나 내 발밑
깊은 땅속으로는
스무 량을 단 밤열차가
기적도 없이 흘러가지, 전갈처럼
제 몸을 물어뜯어서라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어,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뜨거운 목울대로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가끔은, 인간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한다
이곳은 슬픈 열대야 




Eva Cassidy - Ain't No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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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2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은 들리지 않지만 시 좋아서 퍼갈게요.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비가 내리지, 하는 이 시인의 시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