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sterdam Sur Eau (물위의 암스테르담) - Claude Ciari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다가 암스테르담과 만난다. 보통은 암스테르담의 건물들이 보여주는 심플함에 매료된다. <런던의 현관은 고대 신전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암스테르담의 현관은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고, 기둥과 석고를 피하여 단정하고 장식 없는 벽돌을 택했다. 건물은 가장 좋은 의미에서 현대적이었으며, 질서와 청결과 빛을 옹호했다.>
 
'심플'이라고 발음하면 입술이 심플하게 한 번 열렸다 닫힌다. 우리가 심플함을 바라는 것은 삶이 심플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장식도 없이 문양도 없이, 꿈도 없이, 저 밋밋함 속으로 가서, 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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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자주
어둠 속에서, 그리고 기쁨 없는 낮의 많은 형체들 속에서,
안타까운 몸부림이 소용없고
이 세상의 열병이 내 심장의 고동에 매달렸을 때에,
마음 속에서 얼마나 자주 나는 그대를 향했던고,
오, 숲이 우거진 와이 강이여! 그대 숲 속의 방랑자여,
내 영혼은 얼마나 자주 그대를 향했던고!
  -틴턴 사원 몇 마일 위에서 지은 시,워즈워드
 
내가 세상과 뒤섞이면서도
내가 가진 소박한 즐거움에 만족하며,
하찮은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멀리하며 살아왔다면,
그것은 그대 덕분이다.
그대 바람과 요란한 폭포  그대 덕이다.
그대 산이여, 그대의 덕이다, 오, 자연이여!
  -서곡, 워즈워드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랑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책> 중에서
 
 
Belle Sebastian -there's too muc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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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이 굳어버린 것 같은 산맥이 가없이 뻗어나가다 산정들이 강렬한 파란색 하늘의 가장자리에서 스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왜 절망이 아니라 환희를 느낄까?.....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사막의 돌과 남극의 얼음 벌판에 쓰인 교훈이다. 이 교훈은 아주 웅장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우리를 초월한 것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러한 장대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고 돌아올 수 있다. 경외감은 어느새 숭배하고 싶은 욕망으로 바뀌어질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중에서
 
                  카바티나
 
그래, 기껏 해봤자 우리는 저 위대함의 영원한 '꼬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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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딘스키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권영필 옮김, 열화당 2000)에서 형태언어와 색채언어에 관해 재미있는 착상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보라를 "냉각된 빨강"이라고 부르더군요. 같은 빨강이라도 노랑에 의해 인간에게로 더 가까이 오면서 생겨나는 색이 주황이라면, 보라는 빨강이 파랑에 의해 인간에게서 멀어져감으로써 생겨난 색입니다. 그래서 보라색 내부에서는 빨강의 뜨거움과 파랑의 차가움이 늘 갈등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나아가 탄생과 죽음, 현실과 이상,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여성성과 남성성, 감정과 이성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확대시켜 볼 수 있겠지요. 중간색들이 갖는 불균형, 소멸과 죽음에 대한 경사, 슬프고 병적인 심리, 석탄찌꺼기처럼 연소되고 남는 재의 이미지…보랏빛은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의 내면을 자꾸 보랏빛과 연관짓는 것도 그런 인상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중략) 그럼 왜 보랏빛에 이끌린 것일까. 이제 와서야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건 어쩌면 지난 몇 년간 저를 지나간 많은 일들이 빨강과 파랑의 극명한 대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설적으로 보랏빛의 균형감각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찢겨진 감정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갈등을 해소하려는 심리는 마치 빨강과 파랑이 제 고유의 색을 버리고 서로 한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작용과도 비슷하니까요. 그렇다면 보랏빛은 단순히 병적이거나 모호한 색이 아니라, 상처를 넘어서려는 치유력과 더불어 분열을 넘어서려는 역동성을 지닌 색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Moonlight-sting
 
스팅의 목소리를 색깔에 비유하면 보라색쯤에 해당될 것이다.
스산함, 그러나 드러내놓고 멜랑꼬리에 빠지지 않는 건조함,
절규를 안으로 간직하는 통어와 자제의 힘,
그런 힘들을 우리는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너무 익숙해서일까.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껴안는 저 보라의 균형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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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 [초특가판]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
피터 웨버 감독, 스칼렛 요한슨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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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외국 속담이 있다. 솔직한 것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이야기다. 솔직함의 미덕이야 백 번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모두 쏟아내는 것이 ‘솔직’이라면 이건 좀 곤란하다. 우리의 내면에는 순진함만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괴로움을 보며 즐거워하는 마음,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하는 마음,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마음, 타인을 내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마음... 그대로 표출되면 문제가 될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것, 내 욕망의 원칙대로 살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위험한 발상이다. 물론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내가 아닌 타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의 자유는 아무래도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장편 『진주 귀고리 소녀』를 영화화한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16세 소녀 그리트는 아버지가 시력을 잃자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베르메르는 장모와 아내, 여섯 아이의 가장이다. 그만큼 그는 책임이 무겁다. 베르메르는 색채와 빛 등 회화의 세계를 하나둘 알아보게 되는 그리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색을 보는 법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두 사람은 말없는 교감(交感)을 한다. 교감이란 마음의 주고받음이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의 주고받음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무척 관능적인 이 소녀를 화가인 베르메르는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영화는 어떤 누드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살갗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트는 고전적 의상에 감싸여 있다. 베르메르는 그녀에게 어떤 사랑도 고백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관객들조차 저들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의심이 간다. 가벼운 포옹도 없고, 입맞춤도 없다. 관능적인 장면을 기대했던 관객들로서는 이만저만 실망이 아닐 것이다.
 
  모든 욕망은 즉각적인 실현을 꿈꾼다. 식욕은 ‘먹음’을 꿈꾸고 성욕은 대상의 정복을 꿈꾼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의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잡아먹는 자, 즉 포식자의 욕망의 반대쪽에는 잡혀먹히는 자, 즉 피식자의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서로 충돌한다. 충돌하는 곳에는 반드시 다툼이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다툼은 힘센 자에 의해 평정된다. 힘센 자의 욕망만이 최후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문명의 세계다. 문명이 없는 곳에 예술도 없다. 예술은 욕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세계다.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이며 내 마음은 현재 이런 상태야, 라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런 기교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의 ‘꾸밈없는’ 내면을 바라보는 자는 몹시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노래를 참을 수 없어, 나는 노래하고 말 테야, 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노래를 불러 젖힐 수도 없는 일이다. 타인의 불쾌감을 고려하여 나는 내 욕망을 포장하고 꾸민다. 그러나 포장과 꾸밈 속에는 여전히 나의 욕망이 들어 있다. 단지 그것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화가 베르메르의 욕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술가는 욕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숨긴다. 그것은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고려다. 그것은 나의 욕망만이 보상받아야 할 최우선의 것은 아니라는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내 욕망을 보여주고 말할 권리가 있지만 당신에겐 그것을 보고싶지 않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다. 통속적인 예술가들은 이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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