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딘스키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권영필 옮김, 열화당 2000)에서 형태언어와 색채언어에 관해 재미있는 착상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보라를 "냉각된 빨강"이라고 부르더군요. 같은 빨강이라도 노랑에 의해 인간에게로 더 가까이 오면서 생겨나는 색이 주황이라면, 보라는 빨강이 파랑에 의해 인간에게서 멀어져감으로써 생겨난 색입니다. 그래서 보라색 내부에서는 빨강의 뜨거움과 파랑의 차가움이 늘 갈등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나아가 탄생과 죽음, 현실과 이상,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여성성과 남성성, 감정과 이성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확대시켜 볼 수 있겠지요. 중간색들이 갖는 불균형, 소멸과 죽음에 대한 경사, 슬프고 병적인 심리, 석탄찌꺼기처럼 연소되고 남는 재의 이미지…보랏빛은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의 내면을 자꾸 보랏빛과 연관짓는 것도 그런 인상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중략) 그럼 왜 보랏빛에 이끌린 것일까. 이제 와서야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건 어쩌면 지난 몇 년간 저를 지나간 많은 일들이 빨강과 파랑의 극명한 대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설적으로 보랏빛의 균형감각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찢겨진 감정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갈등을 해소하려는 심리는 마치 빨강과 파랑이 제 고유의 색을 버리고 서로 한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작용과도 비슷하니까요. 그렇다면 보랏빛은 단순히 병적이거나 모호한 색이 아니라, 상처를 넘어서려는 치유력과 더불어 분열을 넘어서려는 역동성을 지닌 색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Moonlight-sting
스팅의 목소리를 색깔에 비유하면 보라색쯤에 해당될 것이다.
스산함, 그러나 드러내놓고 멜랑꼬리에 빠지지 않는 건조함,
절규를 안으로 간직하는 통어와 자제의 힘,
그런 힘들을 우리는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너무 익숙해서일까.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껴안는 저 보라의 균형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