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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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마포의 스카이라인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간다. 30층이 훌쩍 넘는 엄청난 고층빌딩이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한강을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들은 도심으로 불어가는 강바람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작년만 해도 주방의 작은 창으로 손바닥만큼 보이던 한강의 모습도 새로 짓는 아파트로 차단된 지 오래다. 럭셔리함을 강조하는 본때없는 건물들이 부의 위용을 과시할 뿐이다. 비움의 미학, 절제의 미학, 느림의 미학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한 치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보겠다는 생산과 효율의 논리다. 이런 논리 앞에서 침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존재를 도드라지게 알리기 위해서 간판의 불빛은 요란해지고, 스트레스를 걷어버리겠다는 의지로 악을 써대는 노래방의 소음은 귀를 괴롭힌다.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짚어보기도 어렵다. 곤혹스럽다.바로 이 곤혹스러움이 승효상이 가슴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승효상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비움'이다. 꼭꼭 채우지만 말고 이제는 좀 비우자는 말이다. 건축주들은 내 것 내가 알아서 하는 데 참견 마시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래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한 인터뷰(조선일보, 2003.01.16)에서 승효상은 말한다. "우리의 도시환경은 꽉꽉 채우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비워두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 대가로 우리 삶은 많이 망가져 있지요. 비움의 대표적인 예가 '마당'인데요, 옛 선조들은 양반이나 평민이나 한 마당을 다용도로 함께 썼어요. 공동체 공간이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마당이 있습니까? '길'도 그래요. 예전에 '길'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마을사람들의 토론장이고 아낙네들의 빨래터였는데, 요즘 '길'은 그냥 통행기능만 하잖아요. '공동체 공간'을 잃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극도로 이기주의에 빠지고 서로 마음을 닫고 살지요." 건축이 개인의 사유물이라는 생각, 건축물이 치부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건축이우리의 삶을 담는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건축의 비전을 찾자는 이야기다. 버릴 게 없는 말씀이다.
 
인터뷰는 이어진다. "천민 자본주의가 문제입니다. 오래된 집을 자꾸 허물고 그 자리에 더 비싼 집을 짓는 것은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에 대한 기억을 허무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들이 집에 대한 귀소본능을 못 느끼게 돼요. 이러다간 전국이 다 똑같은 모양의 신도시처럼 될까봐 걱정입니다." 왜 아니겠는가. 기억은 공간에 거주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건물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인간의 기억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본가들은 망각한다. 바로 그 공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이 한 인간의 존재의 뿌리라는 사실도 그들은 망각한다. 오직 채움의 욕망만이 그들을 추동한다.
 
그는 늘 비움과 절제를 역설한다. 모두 17개 건축물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건축, 사유의 기호>의 텍스트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비움과 절제'를 말한다.  화려한 외관과 장식을 배제하고 공간을 틔워 인간을 연결하는 건축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승효상은 고백하고 있다. 승효상이 그런 고백을 할 때 그 글을 읽는 나도 조금은 헐렁하게 호흡할 수 있다.
 
책은 무미건조한 건물들만 잔뜩 모아 놓았다. 대단한 건축물을 기대했던 이들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채근담에서 홍자성은 "농비신감 비진미(膿肥辛甘 非眞味), 진미 지시담(眞味 只是淡)-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라 했다. 건빵도 오래 씹으면 감칠맛이 나는 법이다. 자극적인 맛은 오래 가지 못한다. 승효상의 건축 미학, 빈자의 미학도 홍자성의 말하는 '담백의 미학'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책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의 미하엘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하우스를 소개한다. 왕궁과 마주 서 있는 이 건물은 일체의 장식 없이 기능적 요소로만 구성된 이 6층짜리 집이다. 1911년 완공 당시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궁에 대한 모독이란 비난까지 받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시민계급이 신분적 열등감을 덮기 위해 과시적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일삼던 문화적 퇴행을 잘라내고 모더니즘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든 혁명적인 건축물로 평가된다. 승효상은 로스하우스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절제와 여유와 침묵을 잃어버린 우리네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둘러보시라. 대체 부석사 무량수전과 개심사를 건축한 민족, 시가(詩歌)마다 안분지족(安分知足)과 한중진미(閑中珍味)를 노래하던 저 여유의 미학은 어디에 있는가.
 
읽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책의 운명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사유에서 비롯된 책이 다른 이에게 건네져 사유는 더 농밀해지고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밝은 전망을 갖는다. 승효상의 <건축, 사유의 기호>는 그렇게 읽힐 책이다. 사족이지만 이 책은 무욕을 말하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에 있다는 르 토로네 수도원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한동안 시달리고 있다. 침묵의 세례를 받고싶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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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Goodbye-Camel

환멸과 갱생의 시공간


  망각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기억이다. 망각의 배후에 있는  기억의 힘이 그 완강한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는 이상 우리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그러나 기억으로부터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때, 기억은 존재를 유폐시킨다. 존재의 목을 조르고 감금한다.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그러나 악몽의 기억이 한사코 내 목덜미를 틀어쥘 때,  기억은 존재를 가두고 고문한다.  그러므로  어떤 악몽의 기억도 없는 망각의 땅, 그곳은 구원과 부활의 성소가 된다. 그곳에서 망각은 존재를 쇄신하고 갱신한다.

  축제는 망각의 공간, 무화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성(聖)과 속(俗)이 뒤범벅이 되고, 고귀함과 천박함이 뒤섞인다. 의미와 규정이 휘발되어 버린 축제의 공간에서 서열과 계급은 의미를  잃는다. 모든 일상은 전복된다.  축제의 공간은 그러므로 난장판의 공간이다. 무질서와 광기의 폭죽이 터지고,  욕망의 섬광이 작렬한다. 사물들은 갑갑한 의미의 옷을 벗고 스스로를 탕진한다.

무릇 탕진한 자만이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는 법. 이 날만은 아랫것들이 버릇없이 윗분들을 농락하기도 한다. 윗분들은 허허  웃으며 아랫것들을 용납한다. 잡스런 것들이 은근슬쩍 고귀하신 것들을 희롱해 본다. 찔러 본다. 윗분들은 한참 잘 참아 내다가도,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하면서 눈을  흘겨보지만, 그 눈흘김도 도가 지나치면 축제의 흥이 깨진다. 아랫것들도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불경이 된다. 적당히 놀고 제 자리에 갖다 놓을 때, 축제는 대동(大同)의 한마당이 된다.

 축제를 추동시키는 힘은 망각의 열정이다.  부어라, 마셔라, 잊어보자는 무의식적인 슬로건이 축제를 움직인다. 그러나 축제의 일원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대동(大同)은 말 그대로, 크게 '하나가  됨'이다. 아랫것들이 윗분들에게 은근슬쩍 찝쩍거려보는 것도, 관용의 웃음 속에서 하나가 되자는 뜻이지, 상대를 아프게 찔러보자는 뜻이  되어선 축제의 흥이 깨진다.  상처받고 피 흘리면서도 기꺼워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대동과 난장의 시간으로서의 망년회를 그려보는  것은 과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년회가 최소한  일방적인 도취와 망각의  시간이어서도 곤란하다.  궂은 일, 적당히 묻어버리고, 따져야 할 일, 두리뭉실 넘겨 버리자는 식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렇게 두리뭉실 넘겨봐야 언제나  손해보는 쪽은 '없는 사람' 쪽이다. 힘없는 사람 쪽이다. 망년회가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해서는 곤란하다. 뭘 자꾸 따져, 적당히 묻어두자는 식의 망년회는 그래서  달갑지가 않다. 고래고래 노래를 하고 춤을 춰봐도  상처는 안으로 곪기 마련이다. 잊을 건 잊어야 하지만 도려내야 할 건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망년회는 불행히도 짧다. 몇 잔 마시고 몇  마디 하다가 싱겁게 끝나기 일쑤다. 기껏해야 2차의 노래방이다. 고래고래 소릴 질러봐야 나쁜  기억을 지우기는커녕 귀가길만 휑덩그레할 뿐이다. 이런 망년회를 한 번도 아니고 두 세 번 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못해 고문이다. 혹사당하는 건 성대(聲帶)와 간장(肝腸)이다. 집 태우고 못 줍는 격으로, 이런 망년회에도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새벽의 속쓰림과 두통 속에 홀로 깨어,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자괴감 속에서 나 자신을 씁쓸하게 돌아보게 될 때, 문득 존재의 혁신을 꿈꾸어보게도 되는 것이다.  이거 인생을 확 바꾸어 버려, 다이어트라도 해버릴까, 이 나라를 아주  떠버릴까, 별별 희떠운 생각을 하게 될 때, 그나마 시들시들하고 고리타분한  삶에도 무슨 서광의 흐릿한 기미가 보이게도 되는 것이다. 삶의 임계온도,  더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우리의 삶은 비약을 꿈꾸게 되는 것은 아닌지.

  환멸을 밀고 나가면 그래도 길이 보이지 않을까. 문제는 환멸을 환멸답게 밀고 나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주질러 앉는  것이 문제다. 필요하다면 바닥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을 수렁으로 밀어놓음으로써 자신을 갱생시킬 수 있는 힘, 슬픔도 이렇게 해서  거름이 되기도 하는 법이 아닌가. 흥청망청 대는 망년회 대신 이런 수렁에라도 빠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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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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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 오래되었지만 신선한 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에 입맛이 길들기 마련이고, 씀바귀나물이니 톡쏘는 흑산홍어회엔 도리질을 치기 마련이다. 모든 취향이 나이에 따라 변해간다. 입맛도 나이에 따라 늙는다고 할 수 있을까. 열 몇 살 때는 싸르르한 박인환의 시가 좋았고, 스무살 무렵엔 화려한 장석주 시가 좋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무렵에 이태준의 수필은 무미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은 또 다르다. 이런 게 나이를 먹는 징조라면 징조겠다. 노자와 장자와 금강경이 전에 없이 읽히고 피천득의 수필도 무리없이 읽힌다면 이건 명백히 조로(早老) 증세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아직 염려할 단계는 아니다. 아직 내 애창곡들은 비트가 강한 쪽이다. 김광석보다는 나는 안치환 쪽으로 기운다. 반듯한 것보다는 삐딱한 쪽으로 기우는 성향도 여전하다. 이건 체질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아직 나이를 덜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제 방을 청소할 때만해도 그랬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며 장식물들이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몇 개는 치워 버렸다. 다소 삽상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삽상한 느낌도 책장을 마주하면 싸그리 사라지고 만다. 좋다 싶으면 장르 불문하고 읽어대고, 아니다 싶으면 팽개쳐버리는 독서습관은 책장을 아주 무정부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독서 취향의 변천사가 그 책장 안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번잡하고, 두서없고, 무질서하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요령부득이다. 책장을 보면서 내가 저 책들을 배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빈방이니까. 크고 텅 빈 방.

문득 남해금산 보리암 근처 부산여인숙의 빈 방이 생각났다. 덩그마한 빈 방에 아내와 단 둘이 누워있으려니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새벽 범종소리는 가히 우주를 흔들어 깨우는 듯했었다, 그런 고요와 내 책방의 분위기는 너무 멀다. 한지로 도배된 작은 방에 조그만 상 하나를 가져다 놓고 파초 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에 귀를 열고 싶다는 운치와 멋을 내것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멋을 내기엔 이르다. 그윽한 시선으로 난초와 자기(磁器)를 완상(玩賞)하면서 깊은 차맛을 음미하며 무위의 경지를 소요(逍遙)하고 싶은 맘도 없다.

왠지 청승맞아 보인다. 이런 나에게는 완물상지(玩物喪志)란 말이 반갑다. 완물(玩物)에 마음을 빼앗겨 뜻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 어떤 멋스러움에 마음을 의탁할 나이는 아직 아닌 듯하다. 텃밭도 가꾸며 전원의 한미(閑微)함도 즐길 수 있는 전원주택도 내 뜻하는 바는 아직 아니다. 사계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있는 저택은 내 경제력으로도 요령부득이지만 거저 준다고 해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켕긴다.

단지 커다랗고 조용한 빈 방이 하나 있었음 좋겠다. 가끔은 이거저거 벗어버리고 운주사나 송광사쯤에서 적요함의 세례를 맞아 보아도 좋겠다. 명상음악과 작설차와, 난초, 파초는 너무 멋스러워서 사양할란다. 뜨아, 하품이나 하면서 점심 때쯤 눈꼽이나 떼고 창문을 열어 길게 한번 호흡할 수 있는 그런 빈방이 하나 있음 좋겠다.

그런 방에 어울리는 것은 하품이지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태준의 이런 책은 괜찮을 듯싶다. 제목부터가 무덤덤한 『무서록無序錄』, 책 제목을 풀이하자면 순서가 없다쯤 될 것이다. 순서가 없으니 어떤 페이지를 먼저 읽든 상관은 없다.

일찍이 시인 지용은 산문하면 이태준을 꼽았단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두 세 시간 쯤을 이런 명편에 할애한다는 것은 꽤 괜찮은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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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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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십자가도 없는 따라지 인생들


  마이너리그 / 은희경 / 창작과비평사

 97년 동서문학상(타인에게 말걸기), 98년 이상문학상('아내의 상자'), 2000년 한국소설문학상('내가 살았던 집')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작가, 은희경이 펴낸 소설집의 제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이너리그』다.

 58년 개띠 동창생 네 명의 변두리 인생들을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용띠나 범띠도 아니다. 하다 못해 쥐띠나 돼지띠도 아니다. 그들은 개띠다. 58년 개띠. 이들은 개띠답게 개같이 살아간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2류 인생들, 김형준, 장두환, 조국, 배승주. 이 네 아이콘들의 배경무늬는 유신시대, 월남파병, 10․26과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이다.

 그 배경무늬들은 이 네 명의 아이콘들과는 무관하다.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한 가운데 놓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가. 작가야 시대와 무관하게 음풍농월의 삶을 살았든 말든, 모든 진지한 작품들은 그 시대를 비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모든 진지한 작품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과장해야 했다. 심지어는 삼류 포르노그라피까지도 욕망으로 달아오르는 몸뚱이를 숨기기 위해 시대와의 불화를 과장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모든 진지한(?) 소설들은 몸보다 마음이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여기 네 개의 아이콘이 있다. 그 네 개의 아이콘을 클릭하면 한 시대를 살아온 비루한 속물들의 창이 열린다. 그 속물들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다. 40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삶을 차분히 관조할 수 있는 나이다. 그 성찰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떤 것일까.

 뼈아픈 회고도 없다. 이 뼈아픈 회고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삶은 엇박자로 자꾸 지리멸렬해지는데 의식만은 깨어있어 삶을 아프게 옥죈다. 그러나 진정 아픈 것도 아니다. 반성을 위한 반성, 이런 것도 자꾸 하면 식상하는 법이 아닌가. 시간의 물살을 연어처럼 거슬러 오르는 기차를 타고 달리면 달릴수록 울음이 쏟아지는 이창동의「박하사탕」, 어떠한 교묘한 이론을 들어 그것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반성 일변도라면 그것도 좀 머쓱한 일이다.

 이런 생각에서일까. 은희경은 『마이너리그』에서 섣불리 반성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지리멸렬, 어차피 그런 게 삶이 아니냐고. 시대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예언자적 삶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따라지 인생들도 있는 게 아니냐고. 그런 변두리 인생들에 대해서 조금 따스한 시선을 가졌다 해서 그것이 무슨 크게 흠이 되겠느냐고. 둘러보면 오히려 이런 끗발 없는 인생들이 우리네 이웃들이 아니냐고. 왜 '있어야 할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당위의 짐을 벗어버리고 현실을 조금 유쾌하게 저공비행했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 큰 잘못이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런 볼멘 소리에 대한 차가운 냉소도 만만치 않다. "중산층 베스트 셀러 작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복고 시류에 영합한 통속 소설이 아닌가".

 곽경택의 영화,『친구』가 영 못마땅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은희경에 대해서도 여전히 흔쾌한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것이다.『새의 선물』에서 보여주었던 막강한 기억력을 동원하여 시대의 소품들을 온통 쏟아부었지만, 거기에 어디 시대에 대한 아픔의 흔적이 있느냐고, 그들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을 것이다. 소품은 있지만 시대는 없고, 삶은 있지만 인생은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들은 고까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은희경이 소위 잘 나가는 '메이저리그' 작가이기에 그들의 미간은 더욱 구겨질 것이다.

 이 땅의 40대는 누구인가. 정확히 58년 개띠들은 누구인가. 386세대의 치열함도 없다. 총화단결로 수출 백억불 시대의 쾌거를 이룩한, 70년대에 20대를 보낸 산업전사들의 피와 땀도 없다. 분신의 열정도 없고 화염병을 던질 열혈성도 없다. 그 비루한 40대들이 이 소설을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작가 은희경의 바람이란다. 은희경은 이 소설의 냉소적인 코웃음이 마이너들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이들을 마이너로 만든 사회적 상황들에 대한 사회적 조롱이라고 첨언을 한다. 글쎄, 은희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말자.

 애초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면 모든 게 못마땅한 법이다. 삶도 그렇다. 견제구 하나 제대로 던지지 못하고 만루에 번번이 홈런을 허용하는 삼류 인생들. 이런 인생이 못 마땅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지는말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게 마이너리그가 아닌가, 한 수 접어줄 수 있다면 이 소설을 마뜩찮게 볼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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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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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현학과 재치



돈 주고 사긴 아깝고 관심의 영역에서 추방하자니 조금 아쉽기도 한 소설이 있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소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도 뭐 그런 종류의 글이려니 했다. 수서역 구내 서점에서 덤핑으로 사분의 일의 가격에 이 책을 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제값을 주고 구해 읽을 엄두를 못 냈을것이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고도 종국엔 아니야, 이건 아니야를 연발한 적이 얼마나 잦았던가.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제목부터가 다소 선정적이고 천박하지 않은가. 드러내놓고 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오, 선전하고 있는 것 같고 약간은 도발적인 제목으로 행인의 눈길을 끄는 것 같아 애초엔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원제가 밋밋하기 그지없는 『The Romantic Movement』임을 감안한다면 제목의 선정성은 작가의 탓이 아니라 상업적 계산에 밝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의 장삿속 탓이다.

 원제를 보고 제목에 대한 반감이 누그러뜨려지긴 했다. 게다가 신림동 스피노자 안경점 주인 고일희씨가 그 소설 그런 대로 깜찍해요, 하는 말에 얇은 내 귀가 그만 솔깃했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별 셋쯤은 줄만 했다. 달리 말하면 그리 나쁜 소설은 아니라는 거다. 읽어서 시간 낭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런 대로 성공한 독서인 셈이 아닌가. 사실 별 하나 주기에도 아까운 소설에 기껏 시간을 빼앗기고 내 무딘 선구안(選球眼)을 탓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젊고 명민한 작가는 비트겐쉬타인, 프로이트 등 여러 이론가들의 논리와 현학적인 텍스트들을 동원하여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를 상당한 수준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그런 분석이 서걱이지 않고 그런 대로 소설에 잘 녹아들어 있다. 이 책을 독파한 후에 소설책 한 권과 에세이집을 동시에 읽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마도 그런 때문.

 소설은 서사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관한 내 지론이었다면 지론이었는데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은 그런 평소의 내 소설관을 기분좋게 유린한다. 일단 길게 숨을 쉬고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워홀은 보잘것 없는 통조림 깡통을 소재로, 프라톤의 견해처럼 예술이 현실의 사물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와일드의 말처럼 그 사물의 가치를 확대시킨다는 기적을 실행에 옮겼다. 캠벨 회사의 통조림은 분명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 깡통을 다른 사람과 함께 본다면, 누군가가 주의를 기울여 가치 있는 사물로 변형시켰다면, 그래서 그 사물이 예술적인 고매함을 얻어 박물관의 벽에 걸린다면, 우리가 느끼는 우울함은 얼마나 가벼워질 것인가? 오랫동안 재현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고 '일상적 사물'이라는 경멸적인 범주로 취급받아 왔던 그 모든 것들, 이를테면 깡통이나 햄버거, 헤어드라이기나 립스틱, 샤워꼭지나 전등의 스위치 따위들이, 이제는 예술가의 손에 다루어진다는 이유로 진지한 비평가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들은 먹고 있던 감자 스프 너머로, 이전에는 무의미하게 지나쳤던 온갖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돈나와 비너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태와 더불어 미학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일상적인 것들이 미학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사물의 형태와 색, 소리와 반향 등을 타성적으로 무시하려던 경향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공식이 보편화되었다. <여기, 이 속에도 특별한 것이 살아 숨쉬고 있음> 시릴 코널 리가 정의한 대로, 단지 한 번만 생각해 볼 어떤 것이 저널리즘이고 재차 눈길을 끄는 것이 문학이라면 캠벨 회사의 깡통은 워홀의 손끝에서 문학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단지 소량의 액체를 담기 위해 제작된 일회용 물품으로서 저널리스틱한 것이었다. 당신이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던 콧등이나 손등의 주근깨를 보고 연인이 감탄하는 일과 워홀이 물감으로 해낸 일에는 유사점이 있지 않은가?

<중략>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에 경탄하는 것은 통조림 깡통이 벽에 걸리는 일만큼이나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도 더 넓고 더 중요한 전체, 즉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떤 세부적인 특징이 보다 큰 전체의 일부로 비쳐질 때, 그것은 단순히 사소한 것 이상의 지위를 얻게 된다.



 팝아티스트 앤디워홀의 캠벨 스프 깡통을 빌어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감정을 분석하는 작가의 필치는 경쾌하지만 자칫 <이런 것도 소설이야>하는 비난을 살 만하다. 그러나 장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소설이 꼭 소설이어야 한다는 법 있나>하는 심사로 읽어 내려간다면 거기서 느끼는 재미도 쏠쏠할 듯. 다음은 역자 후기의 한 토막. <특유의 현학적인 분석, 지적 유희, 사소한 것들에 대한 영민한 눈길, 거대함과 진지함의 무게를 더는 재치는 역시 이 소설에도 가득하다.>
 이런 구절도 곱씹을 만하다.


 어떤 학문 분야에서는 투명성에 반대하고 그에 상응하여 난해한 텍스트를 존중하는 편향이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다. 칸트나 헤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밀도 높은 글에 전념하는 학자들은 그속에 담겨 있다고 그들이 말하는 빛나는 사상들에 사로잡힐 뿐 아니라, 서툰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꼬이고 왜곡된 언어의 미로 속에서 이 사상들을 발견하는 순수한 어려움에 이끌리기도 한다.

 <중략> 독자를 고생시키는 저작은 명확하고 투명하게 읽히는 책보다 더 심오하고도 유효하며 더 진실하다고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 예민한 사람이 하이데거나 후설에 빠져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얼마나 심오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분명 저자가 나보다 똑똑하기 때문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해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그 책을 한쪽으로 집어던지고 참을 수 없는 헛소리로 가득한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시킨다면, 까다로운 연인이 솔직 명료하고 예측가능하며 제시간에 전화를 걸어주는 연인보다 어떻게든 더 가치 있다는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종교적 낭만적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유형의 손쉬운 사랑은 비난이나 회피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훌륭한 문체로 빛나는 산문이 교육받은 20세 청년에게 이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속에 담긴 사상을 조롱하고 마는 학자들처럼 행동한다.



 상당히 솔직한 분석이다. 난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모리스 블량쇼에 대한 내 무능한 독해 실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블량쇼는 언제나 내 이해 수준을 웃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블랑쇼 블랑쇼 할 때, 저들이 진정으로 블랑쇼를 이해하고 하는 말일까 의아했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나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아마도 그들도 블랑쇼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이 블랑쇼에게 보여 주었던 열광은 자신의 이해 수준을 웃도는 그 난해성에 대서 기웃거려 본 작가들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그런 독서는 필경 실패한 찬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정도의 난해함의 수준쯤이야 나도 이해할 수 있어, 라고 하는 어떤 지적 나르시시즘이 블랑쇼에 대한 찬사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에 대한 이 정도의 격려라면 나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한 한심한 나르시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보니 <소설은 서사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라는 내 믿음을 내 스스로 져버렸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의 서사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말이다. 일독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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