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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ㅣ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무서록 - 오래되었지만 신선한 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에 입맛이 길들기 마련이고, 씀바귀나물이니 톡쏘는 흑산홍어회엔 도리질을 치기 마련이다. 모든 취향이 나이에 따라 변해간다. 입맛도 나이에 따라 늙는다고 할 수 있을까. 열 몇 살 때는 싸르르한 박인환의 시가 좋았고, 스무살 무렵엔 화려한 장석주 시가 좋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무렵에 이태준의 수필은 무미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은 또 다르다. 이런 게 나이를 먹는 징조라면 징조겠다. 노자와 장자와 금강경이 전에 없이 읽히고 피천득의 수필도 무리없이 읽힌다면 이건 명백히 조로(早老) 증세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아직 염려할 단계는 아니다. 아직 내 애창곡들은 비트가 강한 쪽이다. 김광석보다는 나는 안치환 쪽으로 기운다. 반듯한 것보다는 삐딱한 쪽으로 기우는 성향도 여전하다. 이건 체질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아직 나이를 덜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제 방을 청소할 때만해도 그랬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며 장식물들이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몇 개는 치워 버렸다. 다소 삽상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삽상한 느낌도 책장을 마주하면 싸그리 사라지고 만다. 좋다 싶으면 장르 불문하고 읽어대고, 아니다 싶으면 팽개쳐버리는 독서습관은 책장을 아주 무정부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독서 취향의 변천사가 그 책장 안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번잡하고, 두서없고, 무질서하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요령부득이다. 책장을 보면서 내가 저 책들을 배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빈방이니까. 크고 텅 빈 방.
문득 남해금산 보리암 근처 부산여인숙의 빈 방이 생각났다. 덩그마한 빈 방에 아내와 단 둘이 누워있으려니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새벽 범종소리는 가히 우주를 흔들어 깨우는 듯했었다, 그런 고요와 내 책방의 분위기는 너무 멀다. 한지로 도배된 작은 방에 조그만 상 하나를 가져다 놓고 파초 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에 귀를 열고 싶다는 운치와 멋을 내것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멋을 내기엔 이르다. 그윽한 시선으로 난초와 자기(磁器)를 완상(玩賞)하면서 깊은 차맛을 음미하며 무위의 경지를 소요(逍遙)하고 싶은 맘도 없다.
왠지 청승맞아 보인다. 이런 나에게는 완물상지(玩物喪志)란 말이 반갑다. 완물(玩物)에 마음을 빼앗겨 뜻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 어떤 멋스러움에 마음을 의탁할 나이는 아직 아닌 듯하다. 텃밭도 가꾸며 전원의 한미(閑微)함도 즐길 수 있는 전원주택도 내 뜻하는 바는 아직 아니다. 사계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있는 저택은 내 경제력으로도 요령부득이지만 거저 준다고 해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켕긴다.
단지 커다랗고 조용한 빈 방이 하나 있었음 좋겠다. 가끔은 이거저거 벗어버리고 운주사나 송광사쯤에서 적요함의 세례를 맞아 보아도 좋겠다. 명상음악과 작설차와, 난초, 파초는 너무 멋스러워서 사양할란다. 뜨아, 하품이나 하면서 점심 때쯤 눈꼽이나 떼고 창문을 열어 길게 한번 호흡할 수 있는 그런 빈방이 하나 있음 좋겠다.
그런 방에 어울리는 것은 하품이지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태준의 이런 책은 괜찮을 듯싶다. 제목부터가 무덤덤한 『무서록無序錄』, 책 제목을 풀이하자면 순서가 없다쯤 될 것이다. 순서가 없으니 어떤 페이지를 먼저 읽든 상관은 없다.
일찍이 시인 지용은 산문하면 이태준을 꼽았단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두 세 시간 쯤을 이런 명편에 할애한다는 것은 꽤 괜찮은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