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현학과 재치



돈 주고 사긴 아깝고 관심의 영역에서 추방하자니 조금 아쉽기도 한 소설이 있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소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도 뭐 그런 종류의 글이려니 했다. 수서역 구내 서점에서 덤핑으로 사분의 일의 가격에 이 책을 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제값을 주고 구해 읽을 엄두를 못 냈을것이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고도 종국엔 아니야, 이건 아니야를 연발한 적이 얼마나 잦았던가.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제목부터가 다소 선정적이고 천박하지 않은가. 드러내놓고 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오, 선전하고 있는 것 같고 약간은 도발적인 제목으로 행인의 눈길을 끄는 것 같아 애초엔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원제가 밋밋하기 그지없는 『The Romantic Movement』임을 감안한다면 제목의 선정성은 작가의 탓이 아니라 상업적 계산에 밝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의 장삿속 탓이다.

 원제를 보고 제목에 대한 반감이 누그러뜨려지긴 했다. 게다가 신림동 스피노자 안경점 주인 고일희씨가 그 소설 그런 대로 깜찍해요, 하는 말에 얇은 내 귀가 그만 솔깃했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별 셋쯤은 줄만 했다. 달리 말하면 그리 나쁜 소설은 아니라는 거다. 읽어서 시간 낭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런 대로 성공한 독서인 셈이 아닌가. 사실 별 하나 주기에도 아까운 소설에 기껏 시간을 빼앗기고 내 무딘 선구안(選球眼)을 탓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젊고 명민한 작가는 비트겐쉬타인, 프로이트 등 여러 이론가들의 논리와 현학적인 텍스트들을 동원하여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를 상당한 수준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그런 분석이 서걱이지 않고 그런 대로 소설에 잘 녹아들어 있다. 이 책을 독파한 후에 소설책 한 권과 에세이집을 동시에 읽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마도 그런 때문.

 소설은 서사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관한 내 지론이었다면 지론이었는데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은 그런 평소의 내 소설관을 기분좋게 유린한다. 일단 길게 숨을 쉬고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워홀은 보잘것 없는 통조림 깡통을 소재로, 프라톤의 견해처럼 예술이 현실의 사물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와일드의 말처럼 그 사물의 가치를 확대시킨다는 기적을 실행에 옮겼다. 캠벨 회사의 통조림은 분명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 깡통을 다른 사람과 함께 본다면, 누군가가 주의를 기울여 가치 있는 사물로 변형시켰다면, 그래서 그 사물이 예술적인 고매함을 얻어 박물관의 벽에 걸린다면, 우리가 느끼는 우울함은 얼마나 가벼워질 것인가? 오랫동안 재현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고 '일상적 사물'이라는 경멸적인 범주로 취급받아 왔던 그 모든 것들, 이를테면 깡통이나 햄버거, 헤어드라이기나 립스틱, 샤워꼭지나 전등의 스위치 따위들이, 이제는 예술가의 손에 다루어진다는 이유로 진지한 비평가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들은 먹고 있던 감자 스프 너머로, 이전에는 무의미하게 지나쳤던 온갖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돈나와 비너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태와 더불어 미학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일상적인 것들이 미학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사물의 형태와 색, 소리와 반향 등을 타성적으로 무시하려던 경향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공식이 보편화되었다. <여기, 이 속에도 특별한 것이 살아 숨쉬고 있음> 시릴 코널 리가 정의한 대로, 단지 한 번만 생각해 볼 어떤 것이 저널리즘이고 재차 눈길을 끄는 것이 문학이라면 캠벨 회사의 깡통은 워홀의 손끝에서 문학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단지 소량의 액체를 담기 위해 제작된 일회용 물품으로서 저널리스틱한 것이었다. 당신이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던 콧등이나 손등의 주근깨를 보고 연인이 감탄하는 일과 워홀이 물감으로 해낸 일에는 유사점이 있지 않은가?

<중략>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에 경탄하는 것은 통조림 깡통이 벽에 걸리는 일만큼이나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도 더 넓고 더 중요한 전체, 즉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떤 세부적인 특징이 보다 큰 전체의 일부로 비쳐질 때, 그것은 단순히 사소한 것 이상의 지위를 얻게 된다.



 팝아티스트 앤디워홀의 캠벨 스프 깡통을 빌어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감정을 분석하는 작가의 필치는 경쾌하지만 자칫 <이런 것도 소설이야>하는 비난을 살 만하다. 그러나 장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소설이 꼭 소설이어야 한다는 법 있나>하는 심사로 읽어 내려간다면 거기서 느끼는 재미도 쏠쏠할 듯. 다음은 역자 후기의 한 토막. <특유의 현학적인 분석, 지적 유희, 사소한 것들에 대한 영민한 눈길, 거대함과 진지함의 무게를 더는 재치는 역시 이 소설에도 가득하다.>
 이런 구절도 곱씹을 만하다.


 어떤 학문 분야에서는 투명성에 반대하고 그에 상응하여 난해한 텍스트를 존중하는 편향이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다. 칸트나 헤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밀도 높은 글에 전념하는 학자들은 그속에 담겨 있다고 그들이 말하는 빛나는 사상들에 사로잡힐 뿐 아니라, 서툰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꼬이고 왜곡된 언어의 미로 속에서 이 사상들을 발견하는 순수한 어려움에 이끌리기도 한다.

 <중략> 독자를 고생시키는 저작은 명확하고 투명하게 읽히는 책보다 더 심오하고도 유효하며 더 진실하다고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 예민한 사람이 하이데거나 후설에 빠져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얼마나 심오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분명 저자가 나보다 똑똑하기 때문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해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그 책을 한쪽으로 집어던지고 참을 수 없는 헛소리로 가득한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시킨다면, 까다로운 연인이 솔직 명료하고 예측가능하며 제시간에 전화를 걸어주는 연인보다 어떻게든 더 가치 있다는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종교적 낭만적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유형의 손쉬운 사랑은 비난이나 회피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훌륭한 문체로 빛나는 산문이 교육받은 20세 청년에게 이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속에 담긴 사상을 조롱하고 마는 학자들처럼 행동한다.



 상당히 솔직한 분석이다. 난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모리스 블량쇼에 대한 내 무능한 독해 실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블량쇼는 언제나 내 이해 수준을 웃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블랑쇼 블랑쇼 할 때, 저들이 진정으로 블랑쇼를 이해하고 하는 말일까 의아했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나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아마도 그들도 블랑쇼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이 블랑쇼에게 보여 주었던 열광은 자신의 이해 수준을 웃도는 그 난해성에 대서 기웃거려 본 작가들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그런 독서는 필경 실패한 찬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정도의 난해함의 수준쯤이야 나도 이해할 수 있어, 라고 하는 어떤 지적 나르시시즘이 블랑쇼에 대한 찬사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에 대한 이 정도의 격려라면 나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한 한심한 나르시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보니 <소설은 서사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라는 내 믿음을 내 스스로 져버렸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의 서사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말이다. 일독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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