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Goodbye-Camel

환멸과 갱생의 시공간


  망각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기억이다. 망각의 배후에 있는  기억의 힘이 그 완강한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는 이상 우리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그러나 기억으로부터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때, 기억은 존재를 유폐시킨다. 존재의 목을 조르고 감금한다.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그러나 악몽의 기억이 한사코 내 목덜미를 틀어쥘 때,  기억은 존재를 가두고 고문한다.  그러므로  어떤 악몽의 기억도 없는 망각의 땅, 그곳은 구원과 부활의 성소가 된다. 그곳에서 망각은 존재를 쇄신하고 갱신한다.

  축제는 망각의 공간, 무화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성(聖)과 속(俗)이 뒤범벅이 되고, 고귀함과 천박함이 뒤섞인다. 의미와 규정이 휘발되어 버린 축제의 공간에서 서열과 계급은 의미를  잃는다. 모든 일상은 전복된다.  축제의 공간은 그러므로 난장판의 공간이다. 무질서와 광기의 폭죽이 터지고,  욕망의 섬광이 작렬한다. 사물들은 갑갑한 의미의 옷을 벗고 스스로를 탕진한다.

무릇 탕진한 자만이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는 법. 이 날만은 아랫것들이 버릇없이 윗분들을 농락하기도 한다. 윗분들은 허허  웃으며 아랫것들을 용납한다. 잡스런 것들이 은근슬쩍 고귀하신 것들을 희롱해 본다. 찔러 본다. 윗분들은 한참 잘 참아 내다가도,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하면서 눈을  흘겨보지만, 그 눈흘김도 도가 지나치면 축제의 흥이 깨진다. 아랫것들도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불경이 된다. 적당히 놀고 제 자리에 갖다 놓을 때, 축제는 대동(大同)의 한마당이 된다.

 축제를 추동시키는 힘은 망각의 열정이다.  부어라, 마셔라, 잊어보자는 무의식적인 슬로건이 축제를 움직인다. 그러나 축제의 일원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대동(大同)은 말 그대로, 크게 '하나가  됨'이다. 아랫것들이 윗분들에게 은근슬쩍 찝쩍거려보는 것도, 관용의 웃음 속에서 하나가 되자는 뜻이지, 상대를 아프게 찔러보자는 뜻이  되어선 축제의 흥이 깨진다.  상처받고 피 흘리면서도 기꺼워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대동과 난장의 시간으로서의 망년회를 그려보는  것은 과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년회가 최소한  일방적인 도취와 망각의  시간이어서도 곤란하다.  궂은 일, 적당히 묻어버리고, 따져야 할 일, 두리뭉실 넘겨 버리자는 식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렇게 두리뭉실 넘겨봐야 언제나  손해보는 쪽은 '없는 사람' 쪽이다. 힘없는 사람 쪽이다. 망년회가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해서는 곤란하다. 뭘 자꾸 따져, 적당히 묻어두자는 식의 망년회는 그래서  달갑지가 않다. 고래고래 노래를 하고 춤을 춰봐도  상처는 안으로 곪기 마련이다. 잊을 건 잊어야 하지만 도려내야 할 건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망년회는 불행히도 짧다. 몇 잔 마시고 몇  마디 하다가 싱겁게 끝나기 일쑤다. 기껏해야 2차의 노래방이다. 고래고래 소릴 질러봐야 나쁜  기억을 지우기는커녕 귀가길만 휑덩그레할 뿐이다. 이런 망년회를 한 번도 아니고 두 세 번 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못해 고문이다. 혹사당하는 건 성대(聲帶)와 간장(肝腸)이다. 집 태우고 못 줍는 격으로, 이런 망년회에도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새벽의 속쓰림과 두통 속에 홀로 깨어,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자괴감 속에서 나 자신을 씁쓸하게 돌아보게 될 때, 문득 존재의 혁신을 꿈꾸어보게도 되는 것이다.  이거 인생을 확 바꾸어 버려, 다이어트라도 해버릴까, 이 나라를 아주  떠버릴까, 별별 희떠운 생각을 하게 될 때, 그나마 시들시들하고 고리타분한  삶에도 무슨 서광의 흐릿한 기미가 보이게도 되는 것이다. 삶의 임계온도,  더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우리의 삶은 비약을 꿈꾸게 되는 것은 아닌지.

  환멸을 밀고 나가면 그래도 길이 보이지 않을까. 문제는 환멸을 환멸답게 밀고 나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주질러 앉는  것이 문제다. 필요하다면 바닥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을 수렁으로 밀어놓음으로써 자신을 갱생시킬 수 있는 힘, 슬픔도 이렇게 해서  거름이 되기도 하는 법이 아닌가. 흥청망청 대는 망년회 대신 이런 수렁에라도 빠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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