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러시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솔출판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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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안과 폭력에 대한 미학적 보고서
 
  유미리의 신작,『골드러시』는 패륜에 관해 말한다. 한 소년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카즈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나이는 열네 살.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경계에 소년은 놓여 있다. 확실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으므로 경계에 서 있는 자는 불안하다. <불안>은 소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
  <가족>은 소년에게 또 다른 불안의 근원. 파칭코 가게를 경영하면서 탈세를 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아버지. 엄마는 그녀의 첫아들 히데끼가 ‘윌리엄스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자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종교에 빠져든다. 그녀는 철저하게 물질을 배격하는 정신의 삶을 선택한다.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육체적■정신적으로는 소년에 불과한 형, 원조교제에 빠져 있는 누나인 미호, 그녀는 내가 이러고 다닌다고 해서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당당하게 소리친다.
  소년 카즈키의 불행은 성장의 모델을 가질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아버지 히데모토는 떳떳하게 말한다. <경찰 신세만 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네가 필요하다면 아빠는 패션 모델 뺨치는 미인도 언제든 붙여줄 수 있다.>라고. 소년은 그런 아버지를 찌른다. 아버지는 어른이 아니다. 더러운 돈과 욕망의 어린아이.
  작가 유미리는 소년의 어머니 미키를 통해서 이렇게 폭력적인 세상에서 종교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왜 자식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치냐는 소년의 항변에 미키는 차갑게 대꾸한다.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  소년이 미키에게 돈을 주자 그녀는 돈을 불태운다. 그것이 애정표현의 옳은 방식이든 아니든, 자신이 건네준 돈이 불태워지자, 소년은 격노한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엄마의 뺨을 후려친다. 미키, 그녀는 어른이 아니다. 모든 정상적인 관계와 물질을 거부하는 비이성적 광신에 붙들려 있는 어린아이.
 소년에게 어른은 없다. 아버지와 엄마는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이 나이가 돼서 뭣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어지다니>라고 말하는 <카나모토>라는 사나이. 적어도 소년의 눈에 카나모토는 어른으로 비친다. 그는 적어도 삶을 반성한다. 반성하고 있다. 반성도 모르는 어른이라는 어린아이들이라니!
 아버지는 소년을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소년에게 어른을 강요했다.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파칭코 직원들은 소년에게 모두 존대말을 했다. 그렇다고 소년이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아버지를 죽이자.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나도 한번 어른이 되어 보는 거다.
  소년이 아버지를 죽였다. 소년은 불안하다. 자신은 어른이 되지 못했고 자신을 돌보아줄 어른을 잃었기 때문이다.소년은 어른 같이 말해본다. 남들의 코웃음을 살 뿐이다. 소년은 아버지의 정부와 또 그녀의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일 뿐, 그런 행위가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소년은 카나모토에게 복종하려 하지만 그는 소년에게 죄를 묻는다. 진퇴양난.
  소년은 주머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동물원에서 찍은 가족 사진.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기호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상실된 낙원의 기호. 소년의 가족은 오직 변색된 사진 속에서만 있다. 사진은 현실의 이미지요, 행복의 기호일 뿐이다. 소년의 가족은 현실 속에는 없고, 소년의 행복은 이미지와 기호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유미리의 <골드러시>는 이렇게 가족의 해체를 말한다. 해체된 가족이 어떻게 폭력을 낳는지를 말한다. 『골드러시』에서 희미하게나마 가족 안에 도사리고 있는 파괴의 힘이 어디에서 배태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엄마인 미키가 첫아들이 병자가 아니라 천재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첫아들에게 보여준 애정과 관심. 그 덕분에 누나인 미호와 소년은 철저하게 엄마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욕망은 결핍된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보상받으려고 한다. 소년은 자신의 형에게 화상을 입히고 꿈 속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폭력을 통해 결핍된 애정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소년의 아버지가 <장영창>이라는 한국인임을 짧게 말해주는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소년의 아버지 또한 일본 사회에서 <이지메>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이 소설에서 폭력은 전염된다. 일본 사회의 이지메의 폭력이 아버지를 폭력적으로 만들고, 아버지의 폭력이 또 다시 자식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폭력은 이렇게 확대 재생산된다.  
  유미리의 『골드러시』는 불안과 폭력에 대한 미학적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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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 - 가슴속에 묻어둔 성철 스님의 골방이야기
원정 지음 / 맑은소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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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철, 롤랑바르트, 프로레슬링

 토요일 오후에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AFKN에서 하는 WWF가 그것. 'RAW IS WAR'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레슬링 게임을 두고 어떤 이는 아메리카문화의 천박성의 극치를 보여준다고도 했던가. 아닌게 아니라 식자층(識者層)에서는 이 흥미진진한 프로 레슬링게임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눈치여서 대중문화에 상당히 우호적인 독서계급들도 이 프로레슬링에 대해서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는 데에 인색하다. 목사나 교사 같은 계도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프로레슬링에 대해선 곱지 않는 눈길을 주기는 마찬가지. 허긴 교직에 있는 나로서도 내놓고 학생들에게 프로레슬링의 관람을 권하는 열혈팬은 못 된다. 단지 특별한 스케쥴이 없는 토요일 오후를 무료하지 않게 넘기는 데엔 WWF가 손색이 없다는 정도.

 토요일 오후에 WWF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는 눈을 흘긴다. 다 큰 어른이 뭐 그런 걸 보느냐, 게다가 당신은 책께나 읽는 국어교사, 식자계층이 아닌가,하는 다그침이 그 흘겨보는 눈길에 섞여 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물어뜯고 비여하게 남성의 은밀한 곳까지를 강타하는 내용은 매우 비교육적이라는 것. 그러나 그런 험구가 프로레슬링을 즐기는 나의 재미를 배가시켰으면 시켰지 반감시키지는 못한다. 이럴 때 아내는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래프리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레프리는 무력해야 제 격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내의험담이 증폭시켜주는 재미에 아랑곳없이 ‘나 정말 이런 거 즐겨도 되는 거야’하는 일말의 석연치 않는 감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도 사실. 이런 석연치 않음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먼저 성철스님이었다.

 이제는 환속하여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원정(圓淨)은 한때 성철스님을 오랫동안 곁에서 모셨던 상좌 스님. 그가 쓴 <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맑은 소리 刊)를 보면 성철 스님은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를 아주 즐겨 보셨다는 것. 게다가 경허스님의 제자였던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청담 스님 또한 프로레슬링의 팬이었단다.그 두 분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은 내 프로레슬링 관람이 그렇게 험구의 대상이 될 것까진 없음을 증언해줄 가능성이 있는 대목.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내로라 하는 큰스님인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 두 사람이 한번은 어느 신도 집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묵었다는 것. 그런데 두 분 스님이 그곳에서 레슬링 경기를 정신없이 보다가 “우리도 레슬링 한번 하자.” 하며 서로 목을 끌어안고 뒹굴기 시작했단다.쿵쿵거리는 소리에 놀란 안주인이 달려와서 그 광경에 망연자실 하고 있을 때, 성철스님 변명하는 목소리로 왈 “우리 지금 레슬링하고 있는 거야.” 했다던가. 그 후 두 스님은 만날 때마다 그 레슬링 얘기를 하셨다고 한다. 심지어 차 안에서 ‘이 놈의 영감, 레슬링 한번 하자.’고 서로의 멱살을 잡곤 했다는 것. 어느날인가는 자꾸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청담 스님을 떼어 놓을 요량으로 성철 스님께서 “향곡이도 내가 이긴다구” 했단다. 향곡은 몸집이 남달리 크고 힘이 셌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경허와 만공이 한 조가 되고 성철과 청담이 한 조가 되어 벌이는 태그매치를 한번 연상해본다. 링은 조계종 앞마당! 그런 광경을 엿보시려고 감았던 눈을 뜨는 부처님!)그 후 청담스님이 입적하자, 그가 입관될 때 꼭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의 노장! 어서 일어나 우리 레슬링 한번 해야지!”
 
 늘 행동의 조심스러움과 묵중함으로 수도승들의 사표가 되어야 할 큰스님들이 이 무슨 해괴망칙한 난행이란 말인가,라는 내 볼멘 소리는 따지고 보면 은근한 구애의 표현이다. 어떻든 성철과 청담의 일화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대체 그들은 프로레슬링의 어디에 끌렸던 것일까. 이런 의구심을 지우지 않고 있을 때 롤랑바르트가 그 특유의 깔깔한 문체로 나에게 왔다. 롤랑바르트의 『현대의 신화』그 첫장의 제목은 바로 <프로레슬링을 하는 세계>. 다소 장황하지만 롤랑바르트의 몇 구절을 인용하자.

 프로레슬링이 천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스포츠가 아니라 구경거리이다. 그러므로 레슬링에서 재현하는 고통을 구경하는 것은 아르놀프나 앙드로마크(라신느 비극의 주인공들)의 괴로움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한 것이 아니다. . . . . 이 스포츠를 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이 조작된 스포츠라는 것에 대해 분개한다. . . . 관중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열정의 이미지이지 열정 자체가 아니라. 프로레슬링에서나 연극에서나 진실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 프로레슬링은 비극적 가면을 온갖 과장으로 확대해서 인간의 고통을 보여준다. . . . 실제로는 잔인하지만 은밀한 어떤 몸짓은 프로레슬링의 불문율을 위반하는 것이며, 미친 짓이나 불필요한 몸짓처럼 그 어떤 사회학적 효과도 갖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고통은 확대되고 확고하게 가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 뿐 아니라, 특히 그가 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 . . 프로레슬러들은 관중에게 정의라는 개념의 한계 자체를, 즉 규칙에서 조금 벗어나기만 하면 구속이 없는 세계의 문이 열리는 대치의 이러한 극한지대를 제의함으로써, 관중의 분노하는 힘을 아주 잘 부추길 줄 안다.


  롤랑바르트의 특유의 문체와 사유에 힘입어 프롤레슬링은 일약 기호학의 해체 대상이 된다. 아뭏든 이런 대목들과 만나면서 나는 그래, 그러면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프로레슬링이 그렇게 호락호락 얕잡아 볼 만한 츄잉껌은 아니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중학교땐 김일 선수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명찰에서 가운데 글자인 <보>를 반창고로 가릴 정도이기도 했던 나는 이 프로레슬링이 학생들의 폭력성을 부추긴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몹시 거슬린다. 오히려 프로레슬링은 어떤 마녀사냥보다 훨씬 도덕적이다. 뿐인가 프로레슬링은 반칙을 하는 자는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는 교육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레슬링은 결국 짜고 하는 놀이라는 놀이의 본질을 아주 다이내믹한 동작으로 웅변해주고 있다는 사실. 물론 프로레슬링은 감상자의 기대를 역전시키는 극적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보게 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그 유치성을 역설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WWF를 유심히 들여다 보면 선과 악은 태극처럼 한몸으로 뒤엉켜 있다. 그렇게 뒤엉키도록 만든 것이 바로 놀이의 본질이 아니던가. 넌 맨날 착한 나라 사람 노릇이고, 난 맨날 나쁜 나라 사람 노릇이라면 놀이는 금방 흥미를 반감시키지 않던가. 적어도 프로레슬링은 도덕에 충실하기보다 놀이에 충실하다. 더 정확히는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도덕은 놀이에 종속되어 있다.

  모든 예술은 뭔가 가미한 것이요, 조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술은 사기다. 아무리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에 감동한다고 해도 그 감동은 꾸며진 것들에 바쳐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예술의 그 꾸밈에 대해 항변하지 않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인 것, 만약 그 꾸밈이 싫으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만이다. 레슬링도 꾸며지고 조작되어졌다는 점에서 예술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코피가 나고 이마가 깨져도 프로레슬링 선수는 결코 죽지 않는다. 프로레슬러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로 죽은 것이다. 그는 반드시 부활한다. 부활하지 않으면 놀 수가 없으니까. 그는 자꾸 살아나는 것이다.
  죽고 죽이는 것은 오히려 권투다. 권투엔 인정 사정이 없다. 짜고 했다간 팬들 우롱하냐는 둥 환불소동 난리가 난다.어떤 심리학자에 따르면 권투 선수는 살의를 가지고 게임에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떤 얼빠진 권투 선수가 다시 일어날 정도로 내갈기겠는가. 적어도 권투 선수가 내갈길 때의 심리는 이렇다. 일어나지 마라. 열을 셀 동안, 아니 그 이상을 세어도 일어나지 마라. 그러나 프로레슬링에서 우악스럽게 주먹으로 내갈겼는데 상대방이 마치 죽은 듯 쓰러져 있다면 프로레슬러는 그럴 거다. 야, 이젠 일어날 때가 되었어. 이젠 니가 날 공격할 때야. 빨리 날 로프 쪽으로 집어 던지라고. 그럴 때 스러져 있는 레슬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야, 암만 프로레슬링이 조작이라고 해도 너 좀 아까 너무 심하게 친 거 아니야.

 자 프로레슬링에서의 캔바스사정이 이렇게 동화적인데도 어린이들에게 이 즐거운 흥미거리를 금지할 것인가. 한국의 아이들은 실제와 놀이를 분간 못할 정도로 둔감한 것인가. 성철이나 청담은 숙맥불변의 땡초들이라서 프로레슬링을 즐겼던 것일까. 오늘, 청담과 성철이 살아서 프로레슬링 무용론과 프로레슬링 망국론을 제기했다면 어떤 수행자가 그들에게 드롭킥을 내지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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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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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셀투르니에의 『짧은 글, 긴 침묵』


  대가(大家)들의 능청은 눈여겨 볼 만하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하지만 거기엔 간과할 수 없는 예지와 통찰이 있다. 초보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일단 열대숲의 구관조처럼 자신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의 화려한 외양에 흠뻑 만족해 한다. 대부분의 처녀시집(處女詩集)들은 이러한 종류의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젊음은 그 자체로도 보여줄 가치가 있는 것인데도 굳이 치장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심뽀’의 배후엔 인간의, 거의 본능적이랄 수 있는 자기현시욕이 있다.

 건물만 해도 그렇다. 졸부들의 거리,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빅토리아풍의 요란한 대리석 장식은 풍경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시각을 한껏 교란한다. 거기엔 침점된 ‘역사’는 없고 오직 ‘공간’만이 존재한다. 솜씨가 무르익지 않은 요리사가 재료와 양념을 혹사하는 법, 호들갑스럽지 않을 만큼의 양념에 살코기들을 적당히 버무림으로써도 어떤 이들은 맛깔스런 풍미를 식탁 위에 연출해낸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그렇고, 조선의 백자가 그렇고, 수필가 윤오영의 <방망이 깎는 노인>이 그렇다. 거기엔 지나친 자의식이 없다. 만드는 자의 주관은 재료와 형상에 조용히 자리를 양보해준다. 자신을 드러내놓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이런 겸손은 사실 쉬운 게 아니다. 자본의 논리는 이런 겸손을 아주 희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본은 일단 화려한 외양과 자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겸손이 얼마나 무능력한 처세술인가는 오늘날의 정치가 잘 웅변해준다. 정치는 일단 ‘말하는 자’의 몫이다. 어떤 대선 후보는 영화, ‘비욘드 랭군’에 감동했다고 하고, 어떤 후보는 <The cure>에 감동했다고 한다. 서태지를 좋아한다는 P.S도 그들은 빠뜨리지 않는다. 실제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 정치는 전략적으로 말해진다. ‘전략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정치의 속성이니 그것을 나무랄 수도 없겠지만 흔쾌히 용납할 만큼 달갑지는 않다.

  자신의 주관을 재료와 형상에 양보하는 겸손의 어법은 자신의 질서를 더 큰 질서 아래 포섭시키려는 구도자적 통찰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겸손의 어법은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최소한의 재료로 자신의 품위를 고즈넉하게 말하고 있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그래서 우리에게서 내뱉어진 너무 많은 말을 무참하게 한다. 자발없이 몸을 뒤챘고, 경박하게 떠들어 댔다는 자책감이 스스로를 아주 몹쓸놈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명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그 앞에서 우리의 ‘뿌리없음’을 스스로 실토하게 만드는 것,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하는 것.

  그러나 명품이 반드시 인간을 주눅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명품 앞에서 우린 엄숙해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론 후후, 적의(敵意) 없는 미소를 터뜨리기도 한다. 『짧은 글, 긴 침묵』의 작가 미셀투르니에는 엉덩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엉덩이에 대한 예찬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무슨 변덕을 부려서 인간이 가진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드럽고 피동적이고 맹목적일 만큼 푸근하게 믿기 잘하는 모든 것, 매질을 당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만이 본분인 그 모든 것이 와서 숨어 있는 이 둥근 구릉을 남자와 여자에게서 박탈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질 지경이다. 엉덩이는 언제나 수줍게 가려져 있기를 바라는 만큼 매맞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 보들보들한 살은 가장 요란스런 소리를 내면서 뽀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대개 학대하고 싶을 때만 엉덩이를 노출하도록 만든다.

 우린 이런 대목에서 후후, 웃으면 된다. 푸짐한 살덩어리, 엉덩이가 이렇게 충성스럽고, 친근한 내 몸의 기관이었던가를 새삼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으로 엉덩이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것이다. 조그마한 영광을 엉덩이에게 돌리는 투르니에의 호들갑스럽지 않은 이런 어법 속에서 질좋은 휴머니즘을 느껴보는 일은 재밌다.

  트루니에의 글은 매우 지적인 글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지적인 글이 빠뜨리기 쉬운 시적 감수성, 시적 감수성이 간과하기 쉬운 지적인 탄력성을 이 책은 잘 믹싱(mixing)해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절정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이 불러일으키는 이국취미(exotism)에 아직도 가슴이 설레인다면 지중해는 영원한 피안의 땅이 아니라 마땅히 내가 도착해야 할 세속의 땅이어야 한다. 트루니에는 지중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또한 저것이다>라고. 모든 귀한 것들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심지어 우린 그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든 것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짧은 글, 긴 침묵』의 호화 양장본의 뒷켠을 장식하고 있는 이런 카피가 맘에 들지 않는다.

 이 산문집은
 집, 도시들, 욱체, 어린이들, 이미지, 풍경, 책, 죽음 등
 각기 길이가 다른 8개의 장 속에
 짤막한 텍스트들로 묶여 분류되어 있다.
 그의 산문은 방만한 수필이 아니다.
 그것은 등푸른 생선이다.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는 생선이 아니라
 이제 막 아침빛을 받으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다.

  왜 미셀투리니에의 산문이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는 생선>이면 안될까. 그런 평가를 고스란히 수락하기에 미셀투르니에의 텍스트는 ‘쌀’. ‘엉덩이’, ‘머리털’,‘집과 도시들과 타잔’ 등 너무도 번다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담고 있다. 차라리 까뮈의 『결혼, 여름』이란 수필집이 ‘막 아침빛을 받으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라면 생선이랄 수 있겠다. 까뮈는 그 책에서 육체를 말하고 있지만 그 육체는 번다한 일상 속의 육체가 아니라 쏟아지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햇볕 속에 서있는 구릿빛의 육체다. 아직 까뮈가 젊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까뮈의 육체는 해학까지 말할 겨를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육체는 다르다. 그의 육체는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속스럽고도 성스럽고 탐미적이면서도 해학적이다. 엉덩이에 대해서 능청스런 해학을 떨던 그가 때론 이렇게 말한다.

  상처 입고, 치료 받고, 죽임을 당하고, 수의에 감싸이는 인간의 육체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서 형이상학적 현기증과 피학, 가학적 도취감을 자극하는 거대한 주체다. 이는 잔혹함과 애무, 죽임과 찬양이 교차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변증법이다.

 바로 이러한 지(知)와 정(情)을 넘나드는 트루니에의 이중성이 이 책의 독서에 좋은 리듬감을 불러일으킨다. 독서의 시간은 이완과 긴장의 반복 속에서 묘한 에로티즘과 만나게 된다. 어젯밤 내가 인터넷의 일본 포르노 사이트에서 접촉할 수 없었던 고즈넉함이 그 속에 있다. 그의 짧은 글 하나.

 인도에서 목격한 광경. 새 한 마리가 종려나무 위에 앉는다. 새가 싼 똥이 나무 둥치 아래 떨어진다. 그 속에 바냔 씨 한 알이 들어 있다. 새똥 덕분에 비옥해진 땅에 씨앗은 싹이 튼다. 바냔 싹이 자라 종려나무를 감는다. 거기에 두번째 싹, 그리고 세번째 싹, 이렇게 여러 개의 싹이 차례로 돋아나 합세하여 종려나무를 감아 올라간다. 마치 여러 개의 점점 더 억세어지는 손가락을 가진 손처럼, 땅에서 솟아난 어린 바냔 나무가 종려나무를 모질게 휘감아 뿌리를 뽑아 올린다. 뿌리뽑힌 종려나무는 바냔나무에 쳐들려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종려나무는 때로는 땅에서 몇 미터씩 쳐들린 채 나뭇가지들의 감옥 속에서 계속하여 생명을 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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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kino37 2005-10-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너무 잘쓰십니다~~~
 
뭉크 한길로로로 9
마티아스 아르놀트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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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크의 절규

  빗줄기가 기운 차게 둥근 후박나무 잎사귀를 때리고 있군요. 봄비 치곤 제법 빗줄기가 굵어 모처럼 창 밖의 초록이 흠뻑 젖고 있습니다. 간간히 뿌옇게 김이 서린 창 밖에 눈길을 주면서 ‘뭉크’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음침한 기후의 노르웨이 화가 뭉크를 읽게 된다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한적한 봄날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읽기를 바랍니다. 혹 저 빗줄기들이 뭉크의 어떤 흐느낌으로 들려 자주 독서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말입니다.

  누군가 ‘뭉크를 읽으면 뭉클하다’라고 했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가 아닐 것입니다. 미적인 쾌적함을 느끼기 위해 뭉크의 화폭 앞에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뭉크의 예술은 하나의 거친 항변입니다. 그 항변은 뭉크라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통에 뿌리박고 있기에 단순한 제스쳐로 읽히지 않습니다. 실상 자신의 작품에 고통의 아우라를 드리우기 위해서 고통을 과장하는 얼마나 많은 몸짓을 우리가 보았던 것일까요. 낭만적 허위, 혹은 치기 어린 열정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제스쳐 앞에서 고통은 고통 자체의 실물감을 잃고 장식적 소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지요. 차라리 그런 태도보다야 조금 경박하긴 해도 삶을 상큼하게 받아들이는 가벼움이 솔직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고통스런 자가 보여주는 어떤 여유와 해학이라면 그 이상이 없겠습니다. 가령 이중섭의 ‘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의 엽서 속에 그려진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은 세상을 향해 뿔로 치받는 <황소>의 ‘분노와 환멸’과 짝을 이룰 때 더욱 절실하게 읽혀집니다. 고통의 달인들은 이렇게 모순된 세계를 자기 안에 천연덕스럽게 거느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은 이런 영혼 속에서 단순한 수사학적 차원을 넘어서는 절실성의 계기를 얻습니다. 폐허 속에서 홀연 솟아오르는 동화의 세계! 피로가 불러 오는 황홀의 순간(ephipany)!

  여섯 살때의 어머니의 죽음과 열네 살때의 잇따른 누이의 죽음은 자연인으로서의 뭉크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예술가로서의 뭉크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불운이 그의 예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삶에 대한 공포가 나를 따라 다녔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유년 시절의 상실감은 컸던 모양입니다. 두 여인을 앗아간 삶에 대한 뭉크의 복수는 고작해야 여성 혐오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미혼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였겠죠. 그러나 어찌 뭉크에게도 일찍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으려는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는 기혼 여성인 헤이베르그 부인과의 관계에서 굶주렸던 어머니를 느끼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버림받지 않으려는 영혼은 하나의 거처를 영원히 안주할 거처로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영원히 안락한 곳은 없다’라는 상처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툴라 라르센이란 여자와의 관계는 또 어떠했습니까. 툴라와의 언쟁 끝에 총이 발사되어 뭉크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의 첫마디를 잃게 되지요.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여성의 파멸적인 위력’을 뭉크의 기억에 각인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때의 악몽을 야페 닐센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비열함이 나의 일생을 파괴했고, 나의 몸과 나의 영혼을 더럽히고 나를 나라에서 추방하여 온 세계의 파문자로 만들었네.... .기형이 된 손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상상할 수 있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아프고, 신의 기적이 만든 한쪽 손이 저열한 야만성으로 인해 파괴되다니....그런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네” 영국의 바이올린 주자 에바무도치도 한때 사랑한 여자에 불과하게 된 것은 왜일까요. 여자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선 그가 먼저 그녀들의 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한번 잃어버린 어머니를 더이상 잃어버리지 않게 위해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자기를 핵분열시켜 자기 안에 하나의 여성을 키우는 방법 말입니다. 내 몸 안에 갇혀진 또 하나의 여성, 근사하지 않습니까. 내 몸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이상 나는 그 여성으로부터 버림받을 위험이 없겠지요. 뭉크 속의 여성은 이렇게 말하지요. “ 내게는 내 그림 이외에 다른 자식들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뭉크 속의 여성은 결코 뭉크와 뭉크의 그림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뭉크는 제 몸 안에 하나의 어머니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상처를 주지 않는 어머니, 자신의 자식(그림)을 버리지 않는 어머니인 셈이지요.

  그가 모방하려고 했던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의 고통이었습니다. “문학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심장의 피로써 창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라고 말할 때, 뭉크는 이미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으며 “더 이상 실내 공간, 책 읽는 사람, 뜨개질하는 여인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 숨쉬고 느끼며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뭉크는 네덜란드의 화가 고호를 많이 닮았습니다. <폭풍이 치는 하늘 아래의 들판>에서 보이는 고통 서린 불안감과 불타오르는 확신으로 엇갈리는 모순에 가득 찬 고호의 예술은 이미 인상주의를 넘어 저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내적인 격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우린 또 하나의 인상주의자 뚤르즈 로뜨렉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뭉크가 단순히 정물적 풍경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적인 격정과 고통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단지 인물만이 존재할 뿐이다. 풍경은 부차적인 요소이며 그래야만 한다.순수한 풍경화는 야만인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로뜨렉과 같이 그의 예술을 그의 상처를 다스리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이유에서일지도 모릅니다.

 뭉크를 고호나 로뜨렉과 비교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인상주의자에 머무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상(impression)이란 무엇입니까. 풍경이 주체의 내부(im)에 각인(press)한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풍경이 그들의 우뇌에 남긴 흔적보다는 삶이 그들에게 남긴 흔적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회화는 자연을 기록하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상처를 기록하는 수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사실주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요.

 어떤 작가들의 작품은 나에게 읽히기 훨씬 이전에 읽힐 가능성을 지레 가지고 있는 것일 테지요. 뭉크가, 고호가 그리고 로트렉이 그런 작가일 거라고 당신은 이미 눈치 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런 고통의 단련이 없이도 현기증 나는 천진난만한 선율을 불러오는 장영주라는 어린 바이얼리니스트에게서 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뭉크나 고호나 로뜨렉의 예술에서만 감동이나 매혹을 느껴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고통이 고통답게 드러나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탈색된, 어쩌면 고통이 곁들일 여지가 없는 무구함도 경배되어야할 것은 아닌지요.

 어려서부터 죽음과 친숙했던 늙은 화가 뭉크에게는 죽음은 위협적인 존재일 수 없었습니다.“나는 태어났을 때 벌써 한 번 죽었다.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본래적인 탄생을 나는 아직 눈 앞에 두고 있다..부패한 나의 몸뚱어리에서 꽃들이 자라나고 나는 그 꽃들 속에 존재하겠지”라고 노년의 뭉크는 말하고 있습니다. 1940년 임종의 자리가 될 침대와 벽시계 사에에 거의 눈이 먼 팔순의 노인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게 되지요. <상자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이란 그림 속에 서 있는 여인의 누드는 단순한 오브제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모든 격정이 빠져나간 볼품없는 육체의 늙은이 옆에 서있는 여자의 누드는 무엇이었을까요. 공포 혹은 구원?

추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푸른 빛을 배경으로 관객을 향해 쏟아질 것처럼 두 귀를 막고 튀어나오는 한 해골 같은 사나이. 당신은 <절규>를 기억할 것입니다. 스트린드베리는 이 그림에 대해 “분노로 붉어진 자연, 신과 같아질 수 없으면서도 신이 되고자 망상하는 어리석은 미물들에게 뇌우와 천둥으로 말하기 시작한 자연 앞에서의 경악의 비명”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스트린드베리의 이러한 주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뭉크의 <절규>는 ‘신이 되고자 망상하는 어리석은 미물’들의 비명이 아니라 ‘신의 온순한 자식이 되고자 했던 자’의 비명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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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1 - 이주헌의 행복한 그림 읽기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으로만 떠나는 유럽 미술 체험           

               1.
  이 글은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 미술 체험」을 오로지 내 식으로 읽은 체험의 기록이다. 어떤 곳에서는 옛애인의 무덤에서처럼 오래도록 발길을 멈추고 어떤 곳에서는 무심한 구름처럼 지나쳐 간다.
               2.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 미술 체험」은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넘기에 비유할 만하다.  아내와 함께 한 살 짜리와 세 살 짜리의 두 아이를 데리고 유럽을 종단하고 횡단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게 마음에 달려있다지 않은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종아리의 피곤쯤은 접어둘 수 있다.  
               3.
  좀 부럽기도 하다. 마음이 몸을 불러내도 몸이 마음을 따라갈 수 없다. 가까운 서해라도 한 번 짬을 내서 다녀온다는 것이 맘만으로 그칠 때가 많다. 현실이 이럴진대 50일간의 外遊는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만 같다.  떠날 수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통한 대리 체험뿐, 달리 방법이 없다. 진품 앞에서 깊은 숨을 들이키며 명작의 정기(精氣)를 흠뻑 숨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4.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는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있다. 연인 햄릿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함으로써 미쳐버린 오필리아. 그녀가 물  위에 누운 채 이승을 하직하려 하고 있다. 죽음이 이렇듯 화사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대리석처럼 투명한 오필리아의 살빛을 죽음이 앗아가려 하는 순간이다. 죽음의 문지방 앞에 당도한 몸의 눈부심, 에로티시즘과 죽음이 아름답게 결함되는 순간이다.
               5.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에는 막 사랑의 행위를 끝낸 전쟁의 신 마르스가 죽음 같은 깊은 잠에 곯아 떨어져 있고, 비너스는 약간 홍조를 띈 생기 있는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사랑을 끝낸 두 남녀의 이 대조적인 모습을 보라. 장난꾸러기 사티로스들이 마르스의 귓가에 조개나팔을 불어도 마르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 사티로스는 마르스의 축 쳐진 손에 작은 막대를 받쳐 세운다. 미동이라도 하면 그 막대는 쓰러질 것이 분명하다.
  이 그림은 내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둔다. 격렬한 사랑은 곧 죽음이다. 바타이유는 그것을 ‘죽음으로 파고드는 에로티시즘’이라고 명명했던가. 쾌락의 절정에서 한 개체는 시들어 가고, 이 세계에 대한 엔트리가 새로운 개체에 주어진다. 그 엔트리를 얻은 기쁨이 비너스의 얼굴에 비치는 홍조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랑과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사티로스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해서 화폭에 해학이 넘친다. 무거움과 어두움에 물을 탈 수 있는 대가의 균형 감각이 놀랍다. 이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즐거운 그림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는 오늘날까지 깨어나고 있지 않다. 그의 잠을 보려면 런던까지 날아가야 한다.
               6.
  이주헌은 콩쿠르 형제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날을, 그 피로를, 그 스피드를, 그 신선한 공기를, 그 따뜻한 태양을, 땅 위에 날아와 박히는 그 태양의 광선을 즐겼다. 아름다운 날씨와 눈부신 빛의 광대한 강 위에서 살아있음의 거의 동물적인 즐거움에 취해 버렸다.> 그런 환경적 풍토 속에서 인상파가 탄생했으리라. 인상파 화가들의 가벼움 속에는 막 가속이 붙은 자본주의에 대한 열광과 도취가 은연중에 스며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상파 화가들은 이젤을 들고 집 밖으로 나온다. 약동하는 세계의 표정을 그들은  ‘쾌도난마의 붓길’로 그려낸다. 그들이 그린 것은 자연일까? 아니면 이성과 과학으로 상징되는 근대성에 대한 헌화(獻花)였을까. 어쨌거나 인상파의 햇빛은 그들의 화폭 속으로 양산을 들고 피크닉을 가고 싶다는 충동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주헌의 이런 언어를 빌리고 싶게 한다. “ 산다는 게 뭔가? 이 눈부신 햇볕 속에, 저 일렁이는 물결 속에 우리는 왜 온갖 세속의 잡사만을 늘어 놓아야 하는가? 자연은 저렇게 찬란하기만 한데■”
               7.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의 드가의 <욕조>, 그곳의 누드엔 형이상학적 깊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드가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는 그런 시대에 살았을 뿐이다.  몸은 어떤 유현한 깊이의 상징도 아니고 초월적 높이의 표지도 아니다. 그저 몸은 몸으로 있다. 파스텔톤의 육체는 아득하다. 무엇엔가 뿌옇게 가려져 있다. 그 운무와 같은 것은 시원(始原)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격절감의 표현이었을까.
               8.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의 앵그르의 <샘>, 그곳에서의 여체는 너무도 냉담하고 차분하다. 그녀는 정확히 말해 현실의 여인이 아니다. 흠도 티도 없는 여인, 이상화된 육체는 지금 있는 현실을 격렬하게 부정한다. 그녀는 다가설 수 없는 여인이다. 앵그르는 왜 그런 여인을 그렸을까. 미술사가들이 설명할 일이겠다. 나는 앵그르의 속내를 유추해보며 이 그림 앞에 오래 서있다. 너무 멀리 있는 것들은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먼 거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9.
  쿠르베는 말한다. “나는 천사는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주의의 엄숙한 자기 선언이다. 그러나 화가가 아니라면 누가 천사를 그릴 것인가.
               10.
  로댕의 조각들은 끝마무리가 안 되어 있다. 디테일[細部]에 충실할 수 없는 그의 역량 부족이라고 세인들은 말하기도 했지만 <청동시대>를 보라. 그의 기교는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주눅 들지 않을 만하다. 대체 로댕은 왜 끝[마무리]을 얼버무렸을까. 이주헌은 “창조의 결과만큼 창조의 과정과 그 과정 중에 빚어지는 표정도 중시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인체와 덩어리의 경계가 대부분 모호하고 또 인체들도 기왕의 아카데믹한 작품들과 달리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지 않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모를 일이다. 로댕은 모든 것을 제 손에서 끝내는 오만한 창조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듬어진 것과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병치시킴으로써 자연이 얼마나 거칠고 폭력적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그럼으로 순화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함으로써 자연을 순화시키는(엄격히 말해 그것은 순화가 아니라 정복이지만) 테크놀로지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내가 감당할 범위를 넘어 너무 멀리 가고 있다.)
               11.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는 삶의 아비규환을 냉정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자의 오만이 있다. 사르나팔은 적의 침공을 앞두고 자신의 왕비와 미희들, 말 등을 부하를 시켜 학살시킨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사르나팔은 이 광경을 냉정하게 지켜본다. 그는 미동도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차갑게 응시한다. 이 차가운 응시를 좋게 봐줄 것인가,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응시로 봐줄 것인가.  사르나팔을 사르나팔로만 볼 때, 그 응시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자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지만, 사르나팔을 사르나팔로 보지 않을 때, 가령 그것을 작가의 시선으로 읽을 때, 그것은 오염된 세계를 응시하는 관조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바라봄의 각(角)을 선택할 것인가는 보는 자의 몫이다. 하나의 각(角)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수한 각을 버린다는 것이지만 하나의 각이 무수한 각을 포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각(無角)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야 무엇을 바라겠는가. 온몸이 깨달음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날카로운 첫키스.
               12.
  암스테르담은 약(drug)을 하기가 쉽다고 한다. (이런 정보는 책읽기에서 얻는 부수입이다) 그래, 하고 눈이 번쩍 뜨인다. 그러나 약이 나를 이 세상 밖으로 튕겨버리지 않을까 해서 나는 약에 손 대기를 겁내고 있다. 이곳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정이 결국은 먼곳을 꿈꾸게 하는지도 모른다. 김현이 말했듯이 이곳에서 끝까지 살면서 별별 못볼꼴들을 다보고 싶다. 내 팔이 오그라지고 허리가 굽고 눈이 흐려지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하게 볼 것이다.
               13.
  암스테르담의 반고호 미술관으로 가자. 이주헌이 지적하듯 반 고호 미술관은 반 고호의 분위기를 배반하다. 독일 바우하우스풍의 세련됨은 차라리 마티스나 피카소의 분위기에 더 어울려 보인다. 그것은 너무 모던하다. 고호의 그림은 어떤가. 고호의 회화엔 형식에 내용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그의 정신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아니 그의 내적 에너지는 너무도 강해 곧잘 형식의 외피를 찢고 나온다.
  이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는 네덜란드의 풍광이 그렇듯 선천적으로 어둡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세례를 받은 1888년 作 <꽃이 핀 배나무>는 생동하는 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감자를 먹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얼마나 어두운 스케치인가. 어둠과 밝음이 묘하게 공존하는 이 북유럽의 사내에게서 빛과 어둠의 질료들은 그의 말기에 이르러 광기의 격렬한 형상을 얻어낸다. 아랍인이라도 쏘아죽여야 할 것 같은南佛 오베르의 강렬한 태양과 고호의 광기가 만나서 이루어낸 세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나 <해바라기>는 그 강렬한 노란색과 더불어 나태한 정신에 일침을 가한다. 깨어나라. 삶은 연소(燃燒)이다.  강렬한 정신들은 제 삶의 절정에서 뛰어내린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으로 몸을 던지는 女子.
               14.
  이주헌이 말한다. “때론 무언가를 조금만 음미하는 것이 욕심껏 위장을 채우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 확실히 그는 한국인이다. 적게 보는 것이 깊게 보는 것이다. 깊게 보는 것이 그윽하게 보는 것이다. 영화 ‘피아노’의 한 장면을 기억하자. 허비키틀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홀리헌터의 구멍난  스타킹에 손가락을 댄다. 그 아득한 구멍 사이로 비치는 속살.  허비키틀의 욕망은 그 구멍 넘어의 육체를 본다. 보이지 않는 육체, 조금 보이는 속살. 일부를 보는 것은 전부를 보는 것보다 황홀하다. 한국인들은 그런 엿보기의 즐거움을 체질적으로 아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엿보기에는 숨기면서 드러내는 이중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엿보기가 반드시 비난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솔직함을 전략적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제 욕망을 백주 대낮 빨래줄에 팬티 내걸 듯 전시하는 그 뻔뻔스러움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15.
 브뤼셀 왕립 미술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욕조 속엔 피살된 자코뱅의 혁병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소설가 김영하의 드라이한 문체가 생각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압축할 줄 모르는 자는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16.
  베를린 미술관, 렘브란트의 <수산나의 목욕>은 이주헌이 말하듯 절개를 찬양하면서 다소간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이율배반’을 보여준다. 사실 모든 도덕주의를 뒤집어 쓴 포르노물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도덕주의를 말하는 포르노물이 비열하다고 해서 도덕주의가 없는 포르노물이 솔직해서 좋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렘브란트의 회화를 속류의 음란물과 동류에 놓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램브란트와 속류 음란물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렘브란트는 자신의 욕망을 그리되 형식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욕망의 배출을 지연시키고 있지만, 속류의 포르노물은 헐거운 형식 속에서 쉽게 욕망을 뱉어낸다. 욕망을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렘브란트가 훨씬 문화적이다. 이를 두고 고급문화 콤플렉스 운운하는 논리는 문화를 고급과 저급으로 무쪽 가르듯 가르는 흑백논리와 많이 닮아 있다. 욕망의 무한 발산이 옳은 것도 아니고 그것의 일방적인 금제도 옳은 것은 아니리라. 형식으로써 욕망을 절제하고, 절제함으로써 욕망을 증폭시키는 그런 모순과 역설의 공간을 텍스트라 이름해보자. 
               17.
  베를린 미술관, 티에폴로의 <성아가사의 순교>는 아릿하다. 아가사의 창백한 아름다움은 이상한 마력으로 나를 화폭 속으로 이끈다. 무너진 고건축물의 계단에서 앞가슴을 가리운 아가사, 그녀는 로마 통치자의 구애를 거절하고 숱한 고문과 시련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죽어간다. 죽어가는 그녀는 마치 하늘에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 이것이 당신의 사랑입니까.”라고 말하는 듯한 허무한 표정, 만약 그 죽음 앞에서의 표정이 신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그림의 감동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18.
  빈 미술관에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클림트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화려한 관능으로 충만하다. 미술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이런 관능은 예술이 끊임없는 리비도와의 투쟁의 산물임을 암시해준다.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예술은 그 싸움에서 쉽게 리비도가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애인은 어렵게 얻을수록  그 아름다움이 간절하다.
               19.
  바젤 미술관의 홀바인의 작품들은 이주헌의 책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예수의 시체를 오직 해부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는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은 오브제 자체가 충격적이다. 그 예수에게선 일체의 형이상학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육체는 어떤 부활도 꿈꿀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 보인다. 바로 그 찌그러진 육체에 의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니, 바로 거기에 인간 예수의 위대함이 역설적으로 있는 것은 아닐까.
  홀바인의 <화가의 부인과 두 아이>에서 작가는 냉혹하리만큼 냉정하다. 자신의 두 아이와 부인을 아무런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아련하다. 치열한 자기 응시. 가족을 고생시킨 가장으로서의 회한의 감정을 철저하게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낸 그 냉정한 리얼리즘에서 그의 휴머니즘을 읽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주헌의 첨언이 홀바인의 휴머니즘을 잘 보여준다. <휴머니스트 하면 흔히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인정을 많이 베푸는 사람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홀바인을 보노라면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단순한 로맨티시즘을 넘어 무엇보다 자신부터 철저히 객관화해 볼 수 있는, 냉정하고도 냉철한 현실인식을 갖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20.
  우피치 미술관, 보티첼리의 <봄>은 그리스의 꽃의 여신 클로리스와 이탈리아의 꽃의 여신 플로라와 미의 여신 비너스를 보여준다. 그녀들은 살이 내비치지 않는 불투명한 의상을 입고 있다. 그러나 이주헌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는 시선은 세 명의 여신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알맞게 가리고 있다. 그녀들이 걸친 의상은 그녀들의 속살을 은근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 은근함이 이 작품을 천박함에서 구해준다. 이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왼편을 응시하고 있고 그들의 응시가 물길을 트고 있는 곳에는 마르스( 그가 마르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가 있다 그는 그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있다. 뒤돌아선 미소년의 수줍은 얼굴에서 나는 보티첼리의 수줍음을 본다. 이 미소년의 수줍음이야말로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욕망의 한갓 제물로 삼지 않게 해준다.
               21.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은 그 완벽함으로 해서 보는 이의 氣를 질리게 한다. 어쩌면 모든 근육들이 살아 있는 피와 맥박의 리듬을 그토록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까. 헬레니즘 시대의 <라오콘>은 사실주의적 정신이 이룩한 최고의 결정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최고의 작품이 항상 최고의 감동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너무 완벽한 것에는 마음이 깃들 여지가 없다. 우린 완벽한 것의 품 속에서 휴식의 숨을 고르는 것은 아니다.
  22.
  바티칸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를 4년에 걸쳐 천정에 매달리게 하는 고역을 치르게 하였다. 그를 4년 동안 천정에 매달리게  했던 힘을 그의 장인적 예술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종교, 거기에서 인간은 인간을 초탈하는 힘을 얻기도 한다. 백 번을 양보해 아무리 종교가 최면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계기를 고양된 의지와 각성에 의해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떤 약물보다 위대하다.
               23.
  니스의 샤갈 미술관에서 샤갈의 푸른 색과 만난다. ‘샤갈불루’라는 색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샤갈불루’라고 그 푸른 색을 명명했다. 러시아의 유태인 마을 비테브스크에서 태어나 가난하고도 음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샤갈, 그의 푸른 색은 러시아의 한랭한 공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푸른 색은 일방적인 차가움의 기호가 아니다. 샤갈의 파랑은 동화 속의 파랑이다. 동화 속의 호랑이 이빨은 아무리 과장을 해놓아도 무섭지가 않듯 샤갈불루는 겉으로 아무리 차가운 척해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엔 하늘을 나는 망아지,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 곡마를 하는 소녀와 붉고 푸른 꽃들이 만개해 있으니까 말이다. 샤갈에게 있어서 성경을 경전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시집으로서 읽은 듯하다.
               24.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 <첫 영성체>는 1896년 작품이다. 피카소가 1881년 生이니 이 작품은 그가 열여섯살 되던 해에 그린 작품이다. 놀라울 뿐이다. 형태파괴적인 피카소의 그림만을 보아오던 이에게 <첫 영성체>에서 보이는 그의 천재적 시지각과 조형 능력은  가히 충격적일 것이다. 형태를 파괴하는 자에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겠다. 형태를 축조할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피카소는 전자에 속하고 고호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고호의 데셍은 얼마나 형편없는가. 고호 스스로 자신의 미술적 역량을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호가 위대한 점은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귀를 자르고 붕대를 감은 말년의 고호는 어떤 기존의 형식에도 자신을 내줄 수가 없었다. 그의 예술은 그의 조형 능력이 완성한 것이 아니고 그의 격정이 완성했다.
               25.
 스페인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나라다. 스페인의 태양은 그 어느곳보다 강렬하지만 스페인의 역사는 그 어느 유럽국가보다 어둡다. 이를 간파하고 있은 이주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페인의 태양은 그 어느 곳보다도 밝지만 그만큼 스페인의 그림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어둡다” 후앙 미로가 태양의 밝음 쪽에 서있다면 고야는 그 반대의 역사의 어둠 편에 서있다.(나폴레옹 군대의 학살 장면을 그린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을 보라) 노랗고 붉은 원색으로 그려진 후앙 미로의 초현실주의는 의외로 절규를 간직하고 있다.  <공간 속의 불꽃과 벌거벗은 여인>은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절규가 끔찍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잘 계산된 조형적 질서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통을 고통으로서 보여주지 않고 미적인 형식 속에 왜곡시켜 드러내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하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픔을 아픔으로 드러내지 않고 왜 눈물이나 신음으로 드러내느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현상을 어떤 본질의 드러남으로만 읽는 것은 플라톤 이래 인류가 키워온 못된 버릇 중의 하나다. 예술가는 자기만의 방법론을 사랑하고 거기에 실존의 모든 무게를 얹는다. 그들은 고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형식을 생각한다.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통의 형식마저도 감내해야 한다는 데에 예술가의 이중의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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