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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평점 :
미셀투르니에의 『짧은 글, 긴 침묵』
대가(大家)들의 능청은 눈여겨 볼 만하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하지만 거기엔 간과할 수 없는 예지와 통찰이 있다. 초보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일단 열대숲의 구관조처럼 자신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의 화려한 외양에 흠뻑 만족해 한다. 대부분의 처녀시집(處女詩集)들은 이러한 종류의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젊음은 그 자체로도 보여줄 가치가 있는 것인데도 굳이 치장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심뽀’의 배후엔 인간의, 거의 본능적이랄 수 있는 자기현시욕이 있다.
건물만 해도 그렇다. 졸부들의 거리,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빅토리아풍의 요란한 대리석 장식은 풍경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시각을 한껏 교란한다. 거기엔 침점된 ‘역사’는 없고 오직 ‘공간’만이 존재한다. 솜씨가 무르익지 않은 요리사가 재료와 양념을 혹사하는 법, 호들갑스럽지 않을 만큼의 양념에 살코기들을 적당히 버무림으로써도 어떤 이들은 맛깔스런 풍미를 식탁 위에 연출해낸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그렇고, 조선의 백자가 그렇고, 수필가 윤오영의 <방망이 깎는 노인>이 그렇다. 거기엔 지나친 자의식이 없다. 만드는 자의 주관은 재료와 형상에 조용히 자리를 양보해준다. 자신을 드러내놓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이런 겸손은 사실 쉬운 게 아니다. 자본의 논리는 이런 겸손을 아주 희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본은 일단 화려한 외양과 자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겸손이 얼마나 무능력한 처세술인가는 오늘날의 정치가 잘 웅변해준다. 정치는 일단 ‘말하는 자’의 몫이다. 어떤 대선 후보는 영화, ‘비욘드 랭군’에 감동했다고 하고, 어떤 후보는 <The cure>에 감동했다고 한다. 서태지를 좋아한다는 P.S도 그들은 빠뜨리지 않는다. 실제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 정치는 전략적으로 말해진다. ‘전략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정치의 속성이니 그것을 나무랄 수도 없겠지만 흔쾌히 용납할 만큼 달갑지는 않다.
자신의 주관을 재료와 형상에 양보하는 겸손의 어법은 자신의 질서를 더 큰 질서 아래 포섭시키려는 구도자적 통찰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겸손의 어법은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최소한의 재료로 자신의 품위를 고즈넉하게 말하고 있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그래서 우리에게서 내뱉어진 너무 많은 말을 무참하게 한다. 자발없이 몸을 뒤챘고, 경박하게 떠들어 댔다는 자책감이 스스로를 아주 몹쓸놈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명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그 앞에서 우리의 ‘뿌리없음’을 스스로 실토하게 만드는 것,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하는 것.
그러나 명품이 반드시 인간을 주눅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명품 앞에서 우린 엄숙해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론 후후, 적의(敵意) 없는 미소를 터뜨리기도 한다. 『짧은 글, 긴 침묵』의 작가 미셀투르니에는 엉덩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엉덩이에 대한 예찬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무슨 변덕을 부려서 인간이 가진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드럽고 피동적이고 맹목적일 만큼 푸근하게 믿기 잘하는 모든 것, 매질을 당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만이 본분인 그 모든 것이 와서 숨어 있는 이 둥근 구릉을 남자와 여자에게서 박탈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질 지경이다. 엉덩이는 언제나 수줍게 가려져 있기를 바라는 만큼 매맞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 보들보들한 살은 가장 요란스런 소리를 내면서 뽀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대개 학대하고 싶을 때만 엉덩이를 노출하도록 만든다.
우린 이런 대목에서 후후, 웃으면 된다. 푸짐한 살덩어리, 엉덩이가 이렇게 충성스럽고, 친근한 내 몸의 기관이었던가를 새삼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으로 엉덩이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것이다. 조그마한 영광을 엉덩이에게 돌리는 투르니에의 호들갑스럽지 않은 이런 어법 속에서 질좋은 휴머니즘을 느껴보는 일은 재밌다.
트루니에의 글은 매우 지적인 글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지적인 글이 빠뜨리기 쉬운 시적 감수성, 시적 감수성이 간과하기 쉬운 지적인 탄력성을 이 책은 잘 믹싱(mixing)해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절정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이 불러일으키는 이국취미(exotism)에 아직도 가슴이 설레인다면 지중해는 영원한 피안의 땅이 아니라 마땅히 내가 도착해야 할 세속의 땅이어야 한다. 트루니에는 지중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또한 저것이다>라고. 모든 귀한 것들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심지어 우린 그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든 것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짧은 글, 긴 침묵』의 호화 양장본의 뒷켠을 장식하고 있는 이런 카피가 맘에 들지 않는다.
이 산문집은
집, 도시들, 욱체, 어린이들, 이미지, 풍경, 책, 죽음 등
각기 길이가 다른 8개의 장 속에
짤막한 텍스트들로 묶여 분류되어 있다.
그의 산문은 방만한 수필이 아니다.
그것은 등푸른 생선이다.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는 생선이 아니라
이제 막 아침빛을 받으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다.
왜 미셀투리니에의 산문이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는 생선>이면 안될까. 그런 평가를 고스란히 수락하기에 미셀투르니에의 텍스트는 ‘쌀’. ‘엉덩이’, ‘머리털’,‘집과 도시들과 타잔’ 등 너무도 번다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담고 있다. 차라리 까뮈의 『결혼, 여름』이란 수필집이 ‘막 아침빛을 받으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라면 생선이랄 수 있겠다. 까뮈는 그 책에서 육체를 말하고 있지만 그 육체는 번다한 일상 속의 육체가 아니라 쏟아지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햇볕 속에 서있는 구릿빛의 육체다. 아직 까뮈가 젊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까뮈의 육체는 해학까지 말할 겨를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육체는 다르다. 그의 육체는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속스럽고도 성스럽고 탐미적이면서도 해학적이다. 엉덩이에 대해서 능청스런 해학을 떨던 그가 때론 이렇게 말한다.
상처 입고, 치료 받고, 죽임을 당하고, 수의에 감싸이는 인간의 육체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서 형이상학적 현기증과 피학, 가학적 도취감을 자극하는 거대한 주체다. 이는 잔혹함과 애무, 죽임과 찬양이 교차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변증법이다.
바로 이러한 지(知)와 정(情)을 넘나드는 트루니에의 이중성이 이 책의 독서에 좋은 리듬감을 불러일으킨다. 독서의 시간은 이완과 긴장의 반복 속에서 묘한 에로티즘과 만나게 된다. 어젯밤 내가 인터넷의 일본 포르노 사이트에서 접촉할 수 없었던 고즈넉함이 그 속에 있다. 그의 짧은 글 하나.
인도에서 목격한 광경. 새 한 마리가 종려나무 위에 앉는다. 새가 싼 똥이 나무 둥치 아래 떨어진다. 그 속에 바냔 씨 한 알이 들어 있다. 새똥 덕분에 비옥해진 땅에 씨앗은 싹이 튼다. 바냔 싹이 자라 종려나무를 감는다. 거기에 두번째 싹, 그리고 세번째 싹, 이렇게 여러 개의 싹이 차례로 돋아나 합세하여 종려나무를 감아 올라간다. 마치 여러 개의 점점 더 억세어지는 손가락을 가진 손처럼, 땅에서 솟아난 어린 바냔 나무가 종려나무를 모질게 휘감아 뿌리를 뽑아 올린다. 뿌리뽑힌 종려나무는 바냔나무에 쳐들려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종려나무는 때로는 땅에서 몇 미터씩 쳐들린 채 나뭇가지들의 감옥 속에서 계속하여 생명을 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