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 - 가슴속에 묻어둔 성철 스님의 골방이야기
원정 지음 / 맑은소리 / 1997년 5월
평점 :
절판


          성철, 롤랑바르트, 프로레슬링

 토요일 오후에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AFKN에서 하는 WWF가 그것. 'RAW IS WAR'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레슬링 게임을 두고 어떤 이는 아메리카문화의 천박성의 극치를 보여준다고도 했던가. 아닌게 아니라 식자층(識者層)에서는 이 흥미진진한 프로 레슬링게임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눈치여서 대중문화에 상당히 우호적인 독서계급들도 이 프로레슬링에 대해서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는 데에 인색하다. 목사나 교사 같은 계도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프로레슬링에 대해선 곱지 않는 눈길을 주기는 마찬가지. 허긴 교직에 있는 나로서도 내놓고 학생들에게 프로레슬링의 관람을 권하는 열혈팬은 못 된다. 단지 특별한 스케쥴이 없는 토요일 오후를 무료하지 않게 넘기는 데엔 WWF가 손색이 없다는 정도.

 토요일 오후에 WWF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는 눈을 흘긴다. 다 큰 어른이 뭐 그런 걸 보느냐, 게다가 당신은 책께나 읽는 국어교사, 식자계층이 아닌가,하는 다그침이 그 흘겨보는 눈길에 섞여 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물어뜯고 비여하게 남성의 은밀한 곳까지를 강타하는 내용은 매우 비교육적이라는 것. 그러나 그런 험구가 프로레슬링을 즐기는 나의 재미를 배가시켰으면 시켰지 반감시키지는 못한다. 이럴 때 아내는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래프리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레프리는 무력해야 제 격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내의험담이 증폭시켜주는 재미에 아랑곳없이 ‘나 정말 이런 거 즐겨도 되는 거야’하는 일말의 석연치 않는 감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도 사실. 이런 석연치 않음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먼저 성철스님이었다.

 이제는 환속하여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원정(圓淨)은 한때 성철스님을 오랫동안 곁에서 모셨던 상좌 스님. 그가 쓴 <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맑은 소리 刊)를 보면 성철 스님은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를 아주 즐겨 보셨다는 것. 게다가 경허스님의 제자였던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청담 스님 또한 프로레슬링의 팬이었단다.그 두 분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은 내 프로레슬링 관람이 그렇게 험구의 대상이 될 것까진 없음을 증언해줄 가능성이 있는 대목.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내로라 하는 큰스님인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 두 사람이 한번은 어느 신도 집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묵었다는 것. 그런데 두 분 스님이 그곳에서 레슬링 경기를 정신없이 보다가 “우리도 레슬링 한번 하자.” 하며 서로 목을 끌어안고 뒹굴기 시작했단다.쿵쿵거리는 소리에 놀란 안주인이 달려와서 그 광경에 망연자실 하고 있을 때, 성철스님 변명하는 목소리로 왈 “우리 지금 레슬링하고 있는 거야.” 했다던가. 그 후 두 스님은 만날 때마다 그 레슬링 얘기를 하셨다고 한다. 심지어 차 안에서 ‘이 놈의 영감, 레슬링 한번 하자.’고 서로의 멱살을 잡곤 했다는 것. 어느날인가는 자꾸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청담 스님을 떼어 놓을 요량으로 성철 스님께서 “향곡이도 내가 이긴다구” 했단다. 향곡은 몸집이 남달리 크고 힘이 셌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경허와 만공이 한 조가 되고 성철과 청담이 한 조가 되어 벌이는 태그매치를 한번 연상해본다. 링은 조계종 앞마당! 그런 광경을 엿보시려고 감았던 눈을 뜨는 부처님!)그 후 청담스님이 입적하자, 그가 입관될 때 꼭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의 노장! 어서 일어나 우리 레슬링 한번 해야지!”
 
 늘 행동의 조심스러움과 묵중함으로 수도승들의 사표가 되어야 할 큰스님들이 이 무슨 해괴망칙한 난행이란 말인가,라는 내 볼멘 소리는 따지고 보면 은근한 구애의 표현이다. 어떻든 성철과 청담의 일화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대체 그들은 프로레슬링의 어디에 끌렸던 것일까. 이런 의구심을 지우지 않고 있을 때 롤랑바르트가 그 특유의 깔깔한 문체로 나에게 왔다. 롤랑바르트의 『현대의 신화』그 첫장의 제목은 바로 <프로레슬링을 하는 세계>. 다소 장황하지만 롤랑바르트의 몇 구절을 인용하자.

 프로레슬링이 천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스포츠가 아니라 구경거리이다. 그러므로 레슬링에서 재현하는 고통을 구경하는 것은 아르놀프나 앙드로마크(라신느 비극의 주인공들)의 괴로움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한 것이 아니다. . . . . 이 스포츠를 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이 조작된 스포츠라는 것에 대해 분개한다. . . . 관중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열정의 이미지이지 열정 자체가 아니라. 프로레슬링에서나 연극에서나 진실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 프로레슬링은 비극적 가면을 온갖 과장으로 확대해서 인간의 고통을 보여준다. . . . 실제로는 잔인하지만 은밀한 어떤 몸짓은 프로레슬링의 불문율을 위반하는 것이며, 미친 짓이나 불필요한 몸짓처럼 그 어떤 사회학적 효과도 갖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고통은 확대되고 확고하게 가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 뿐 아니라, 특히 그가 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 . . 프로레슬러들은 관중에게 정의라는 개념의 한계 자체를, 즉 규칙에서 조금 벗어나기만 하면 구속이 없는 세계의 문이 열리는 대치의 이러한 극한지대를 제의함으로써, 관중의 분노하는 힘을 아주 잘 부추길 줄 안다.


  롤랑바르트의 특유의 문체와 사유에 힘입어 프롤레슬링은 일약 기호학의 해체 대상이 된다. 아뭏든 이런 대목들과 만나면서 나는 그래, 그러면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프로레슬링이 그렇게 호락호락 얕잡아 볼 만한 츄잉껌은 아니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중학교땐 김일 선수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명찰에서 가운데 글자인 <보>를 반창고로 가릴 정도이기도 했던 나는 이 프로레슬링이 학생들의 폭력성을 부추긴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몹시 거슬린다. 오히려 프로레슬링은 어떤 마녀사냥보다 훨씬 도덕적이다. 뿐인가 프로레슬링은 반칙을 하는 자는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는 교육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레슬링은 결국 짜고 하는 놀이라는 놀이의 본질을 아주 다이내믹한 동작으로 웅변해주고 있다는 사실. 물론 프로레슬링은 감상자의 기대를 역전시키는 극적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보게 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그 유치성을 역설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WWF를 유심히 들여다 보면 선과 악은 태극처럼 한몸으로 뒤엉켜 있다. 그렇게 뒤엉키도록 만든 것이 바로 놀이의 본질이 아니던가. 넌 맨날 착한 나라 사람 노릇이고, 난 맨날 나쁜 나라 사람 노릇이라면 놀이는 금방 흥미를 반감시키지 않던가. 적어도 프로레슬링은 도덕에 충실하기보다 놀이에 충실하다. 더 정확히는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도덕은 놀이에 종속되어 있다.

  모든 예술은 뭔가 가미한 것이요, 조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술은 사기다. 아무리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에 감동한다고 해도 그 감동은 꾸며진 것들에 바쳐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예술의 그 꾸밈에 대해 항변하지 않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인 것, 만약 그 꾸밈이 싫으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만이다. 레슬링도 꾸며지고 조작되어졌다는 점에서 예술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코피가 나고 이마가 깨져도 프로레슬링 선수는 결코 죽지 않는다. 프로레슬러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로 죽은 것이다. 그는 반드시 부활한다. 부활하지 않으면 놀 수가 없으니까. 그는 자꾸 살아나는 것이다.
  죽고 죽이는 것은 오히려 권투다. 권투엔 인정 사정이 없다. 짜고 했다간 팬들 우롱하냐는 둥 환불소동 난리가 난다.어떤 심리학자에 따르면 권투 선수는 살의를 가지고 게임에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떤 얼빠진 권투 선수가 다시 일어날 정도로 내갈기겠는가. 적어도 권투 선수가 내갈길 때의 심리는 이렇다. 일어나지 마라. 열을 셀 동안, 아니 그 이상을 세어도 일어나지 마라. 그러나 프로레슬링에서 우악스럽게 주먹으로 내갈겼는데 상대방이 마치 죽은 듯 쓰러져 있다면 프로레슬러는 그럴 거다. 야, 이젠 일어날 때가 되었어. 이젠 니가 날 공격할 때야. 빨리 날 로프 쪽으로 집어 던지라고. 그럴 때 스러져 있는 레슬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야, 암만 프로레슬링이 조작이라고 해도 너 좀 아까 너무 심하게 친 거 아니야.

 자 프로레슬링에서의 캔바스사정이 이렇게 동화적인데도 어린이들에게 이 즐거운 흥미거리를 금지할 것인가. 한국의 아이들은 실제와 놀이를 분간 못할 정도로 둔감한 것인가. 성철이나 청담은 숙맥불변의 땡초들이라서 프로레슬링을 즐겼던 것일까. 오늘, 청담과 성철이 살아서 프로레슬링 무용론과 프로레슬링 망국론을 제기했다면 어떤 수행자가 그들에게 드롭킥을 내지를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