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한길로로로 9
마티아스 아르놀트 / 한길사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뭉크의 절규

  빗줄기가 기운 차게 둥근 후박나무 잎사귀를 때리고 있군요. 봄비 치곤 제법 빗줄기가 굵어 모처럼 창 밖의 초록이 흠뻑 젖고 있습니다. 간간히 뿌옇게 김이 서린 창 밖에 눈길을 주면서 ‘뭉크’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음침한 기후의 노르웨이 화가 뭉크를 읽게 된다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한적한 봄날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읽기를 바랍니다. 혹 저 빗줄기들이 뭉크의 어떤 흐느낌으로 들려 자주 독서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말입니다.

  누군가 ‘뭉크를 읽으면 뭉클하다’라고 했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가 아닐 것입니다. 미적인 쾌적함을 느끼기 위해 뭉크의 화폭 앞에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뭉크의 예술은 하나의 거친 항변입니다. 그 항변은 뭉크라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통에 뿌리박고 있기에 단순한 제스쳐로 읽히지 않습니다. 실상 자신의 작품에 고통의 아우라를 드리우기 위해서 고통을 과장하는 얼마나 많은 몸짓을 우리가 보았던 것일까요. 낭만적 허위, 혹은 치기 어린 열정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제스쳐 앞에서 고통은 고통 자체의 실물감을 잃고 장식적 소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지요. 차라리 그런 태도보다야 조금 경박하긴 해도 삶을 상큼하게 받아들이는 가벼움이 솔직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고통스런 자가 보여주는 어떤 여유와 해학이라면 그 이상이 없겠습니다. 가령 이중섭의 ‘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의 엽서 속에 그려진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은 세상을 향해 뿔로 치받는 <황소>의 ‘분노와 환멸’과 짝을 이룰 때 더욱 절실하게 읽혀집니다. 고통의 달인들은 이렇게 모순된 세계를 자기 안에 천연덕스럽게 거느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은 이런 영혼 속에서 단순한 수사학적 차원을 넘어서는 절실성의 계기를 얻습니다. 폐허 속에서 홀연 솟아오르는 동화의 세계! 피로가 불러 오는 황홀의 순간(ephipany)!

  여섯 살때의 어머니의 죽음과 열네 살때의 잇따른 누이의 죽음은 자연인으로서의 뭉크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예술가로서의 뭉크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불운이 그의 예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삶에 대한 공포가 나를 따라 다녔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유년 시절의 상실감은 컸던 모양입니다. 두 여인을 앗아간 삶에 대한 뭉크의 복수는 고작해야 여성 혐오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미혼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였겠죠. 그러나 어찌 뭉크에게도 일찍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으려는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는 기혼 여성인 헤이베르그 부인과의 관계에서 굶주렸던 어머니를 느끼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버림받지 않으려는 영혼은 하나의 거처를 영원히 안주할 거처로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영원히 안락한 곳은 없다’라는 상처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툴라 라르센이란 여자와의 관계는 또 어떠했습니까. 툴라와의 언쟁 끝에 총이 발사되어 뭉크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의 첫마디를 잃게 되지요.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여성의 파멸적인 위력’을 뭉크의 기억에 각인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때의 악몽을 야페 닐센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비열함이 나의 일생을 파괴했고, 나의 몸과 나의 영혼을 더럽히고 나를 나라에서 추방하여 온 세계의 파문자로 만들었네.... .기형이 된 손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상상할 수 있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아프고, 신의 기적이 만든 한쪽 손이 저열한 야만성으로 인해 파괴되다니....그런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네” 영국의 바이올린 주자 에바무도치도 한때 사랑한 여자에 불과하게 된 것은 왜일까요. 여자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선 그가 먼저 그녀들의 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한번 잃어버린 어머니를 더이상 잃어버리지 않게 위해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자기를 핵분열시켜 자기 안에 하나의 여성을 키우는 방법 말입니다. 내 몸 안에 갇혀진 또 하나의 여성, 근사하지 않습니까. 내 몸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이상 나는 그 여성으로부터 버림받을 위험이 없겠지요. 뭉크 속의 여성은 이렇게 말하지요. “ 내게는 내 그림 이외에 다른 자식들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뭉크 속의 여성은 결코 뭉크와 뭉크의 그림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뭉크는 제 몸 안에 하나의 어머니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상처를 주지 않는 어머니, 자신의 자식(그림)을 버리지 않는 어머니인 셈이지요.

  그가 모방하려고 했던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의 고통이었습니다. “문학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심장의 피로써 창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라고 말할 때, 뭉크는 이미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으며 “더 이상 실내 공간, 책 읽는 사람, 뜨개질하는 여인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 숨쉬고 느끼며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뭉크는 네덜란드의 화가 고호를 많이 닮았습니다. <폭풍이 치는 하늘 아래의 들판>에서 보이는 고통 서린 불안감과 불타오르는 확신으로 엇갈리는 모순에 가득 찬 고호의 예술은 이미 인상주의를 넘어 저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내적인 격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우린 또 하나의 인상주의자 뚤르즈 로뜨렉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뭉크가 단순히 정물적 풍경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적인 격정과 고통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단지 인물만이 존재할 뿐이다. 풍경은 부차적인 요소이며 그래야만 한다.순수한 풍경화는 야만인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로뜨렉과 같이 그의 예술을 그의 상처를 다스리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이유에서일지도 모릅니다.

 뭉크를 고호나 로뜨렉과 비교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인상주의자에 머무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상(impression)이란 무엇입니까. 풍경이 주체의 내부(im)에 각인(press)한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풍경이 그들의 우뇌에 남긴 흔적보다는 삶이 그들에게 남긴 흔적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회화는 자연을 기록하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상처를 기록하는 수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사실주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요.

 어떤 작가들의 작품은 나에게 읽히기 훨씬 이전에 읽힐 가능성을 지레 가지고 있는 것일 테지요. 뭉크가, 고호가 그리고 로트렉이 그런 작가일 거라고 당신은 이미 눈치 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런 고통의 단련이 없이도 현기증 나는 천진난만한 선율을 불러오는 장영주라는 어린 바이얼리니스트에게서 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뭉크나 고호나 로뜨렉의 예술에서만 감동이나 매혹을 느껴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고통이 고통답게 드러나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탈색된, 어쩌면 고통이 곁들일 여지가 없는 무구함도 경배되어야할 것은 아닌지요.

 어려서부터 죽음과 친숙했던 늙은 화가 뭉크에게는 죽음은 위협적인 존재일 수 없었습니다.“나는 태어났을 때 벌써 한 번 죽었다.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본래적인 탄생을 나는 아직 눈 앞에 두고 있다..부패한 나의 몸뚱어리에서 꽃들이 자라나고 나는 그 꽃들 속에 존재하겠지”라고 노년의 뭉크는 말하고 있습니다. 1940년 임종의 자리가 될 침대와 벽시계 사에에 거의 눈이 먼 팔순의 노인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게 되지요. <상자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이란 그림 속에 서 있는 여인의 누드는 단순한 오브제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모든 격정이 빠져나간 볼품없는 육체의 늙은이 옆에 서있는 여자의 누드는 무엇이었을까요. 공포 혹은 구원?

추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푸른 빛을 배경으로 관객을 향해 쏟아질 것처럼 두 귀를 막고 튀어나오는 한 해골 같은 사나이. 당신은 <절규>를 기억할 것입니다. 스트린드베리는 이 그림에 대해 “분노로 붉어진 자연, 신과 같아질 수 없으면서도 신이 되고자 망상하는 어리석은 미물들에게 뇌우와 천둥으로 말하기 시작한 자연 앞에서의 경악의 비명”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스트린드베리의 이러한 주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뭉크의 <절규>는 ‘신이 되고자 망상하는 어리석은 미물’들의 비명이 아니라 ‘신의 온순한 자식이 되고자 했던 자’의 비명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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