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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1 - 이주헌의 행복한 그림 읽기 ㅣ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으로만 떠나는 유럽 미술 체험
1.
이 글은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 미술 체험」을 오로지 내 식으로 읽은 체험의 기록이다. 어떤 곳에서는 옛애인의 무덤에서처럼 오래도록 발길을 멈추고 어떤 곳에서는 무심한 구름처럼 지나쳐 간다.
2.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 미술 체험」은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넘기에 비유할 만하다. 아내와 함께 한 살 짜리와 세 살 짜리의 두 아이를 데리고 유럽을 종단하고 횡단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게 마음에 달려있다지 않은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종아리의 피곤쯤은 접어둘 수 있다.
3.
좀 부럽기도 하다. 마음이 몸을 불러내도 몸이 마음을 따라갈 수 없다. 가까운 서해라도 한 번 짬을 내서 다녀온다는 것이 맘만으로 그칠 때가 많다. 현실이 이럴진대 50일간의 外遊는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만 같다. 떠날 수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통한 대리 체험뿐, 달리 방법이 없다. 진품 앞에서 깊은 숨을 들이키며 명작의 정기(精氣)를 흠뻑 숨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4.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는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있다. 연인 햄릿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함으로써 미쳐버린 오필리아. 그녀가 물 위에 누운 채 이승을 하직하려 하고 있다. 죽음이 이렇듯 화사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대리석처럼 투명한 오필리아의 살빛을 죽음이 앗아가려 하는 순간이다. 죽음의 문지방 앞에 당도한 몸의 눈부심, 에로티시즘과 죽음이 아름답게 결함되는 순간이다.
5.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에는 막 사랑의 행위를 끝낸 전쟁의 신 마르스가 죽음 같은 깊은 잠에 곯아 떨어져 있고, 비너스는 약간 홍조를 띈 생기 있는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사랑을 끝낸 두 남녀의 이 대조적인 모습을 보라. 장난꾸러기 사티로스들이 마르스의 귓가에 조개나팔을 불어도 마르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 사티로스는 마르스의 축 쳐진 손에 작은 막대를 받쳐 세운다. 미동이라도 하면 그 막대는 쓰러질 것이 분명하다.
이 그림은 내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둔다. 격렬한 사랑은 곧 죽음이다. 바타이유는 그것을 ‘죽음으로 파고드는 에로티시즘’이라고 명명했던가. 쾌락의 절정에서 한 개체는 시들어 가고, 이 세계에 대한 엔트리가 새로운 개체에 주어진다. 그 엔트리를 얻은 기쁨이 비너스의 얼굴에 비치는 홍조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랑과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사티로스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해서 화폭에 해학이 넘친다. 무거움과 어두움에 물을 탈 수 있는 대가의 균형 감각이 놀랍다. 이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즐거운 그림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는 오늘날까지 깨어나고 있지 않다. 그의 잠을 보려면 런던까지 날아가야 한다.
6.
이주헌은 콩쿠르 형제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날을, 그 피로를, 그 스피드를, 그 신선한 공기를, 그 따뜻한 태양을, 땅 위에 날아와 박히는 그 태양의 광선을 즐겼다. 아름다운 날씨와 눈부신 빛의 광대한 강 위에서 살아있음의 거의 동물적인 즐거움에 취해 버렸다.> 그런 환경적 풍토 속에서 인상파가 탄생했으리라. 인상파 화가들의 가벼움 속에는 막 가속이 붙은 자본주의에 대한 열광과 도취가 은연중에 스며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상파 화가들은 이젤을 들고 집 밖으로 나온다. 약동하는 세계의 표정을 그들은 ‘쾌도난마의 붓길’로 그려낸다. 그들이 그린 것은 자연일까? 아니면 이성과 과학으로 상징되는 근대성에 대한 헌화(獻花)였을까. 어쨌거나 인상파의 햇빛은 그들의 화폭 속으로 양산을 들고 피크닉을 가고 싶다는 충동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주헌의 이런 언어를 빌리고 싶게 한다. “ 산다는 게 뭔가? 이 눈부신 햇볕 속에, 저 일렁이는 물결 속에 우리는 왜 온갖 세속의 잡사만을 늘어 놓아야 하는가? 자연은 저렇게 찬란하기만 한데■”
7.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의 드가의 <욕조>, 그곳의 누드엔 형이상학적 깊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드가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는 그런 시대에 살았을 뿐이다. 몸은 어떤 유현한 깊이의 상징도 아니고 초월적 높이의 표지도 아니다. 그저 몸은 몸으로 있다. 파스텔톤의 육체는 아득하다. 무엇엔가 뿌옇게 가려져 있다. 그 운무와 같은 것은 시원(始原)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격절감의 표현이었을까.
8.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의 앵그르의 <샘>, 그곳에서의 여체는 너무도 냉담하고 차분하다. 그녀는 정확히 말해 현실의 여인이 아니다. 흠도 티도 없는 여인, 이상화된 육체는 지금 있는 현실을 격렬하게 부정한다. 그녀는 다가설 수 없는 여인이다. 앵그르는 왜 그런 여인을 그렸을까. 미술사가들이 설명할 일이겠다. 나는 앵그르의 속내를 유추해보며 이 그림 앞에 오래 서있다. 너무 멀리 있는 것들은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먼 거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9.
쿠르베는 말한다. “나는 천사는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주의의 엄숙한 자기 선언이다. 그러나 화가가 아니라면 누가 천사를 그릴 것인가.
10.
로댕의 조각들은 끝마무리가 안 되어 있다. 디테일[細部]에 충실할 수 없는 그의 역량 부족이라고 세인들은 말하기도 했지만 <청동시대>를 보라. 그의 기교는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주눅 들지 않을 만하다. 대체 로댕은 왜 끝[마무리]을 얼버무렸을까. 이주헌은 “창조의 결과만큼 창조의 과정과 그 과정 중에 빚어지는 표정도 중시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인체와 덩어리의 경계가 대부분 모호하고 또 인체들도 기왕의 아카데믹한 작품들과 달리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지 않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모를 일이다. 로댕은 모든 것을 제 손에서 끝내는 오만한 창조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듬어진 것과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병치시킴으로써 자연이 얼마나 거칠고 폭력적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그럼으로 순화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함으로써 자연을 순화시키는(엄격히 말해 그것은 순화가 아니라 정복이지만) 테크놀로지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내가 감당할 범위를 넘어 너무 멀리 가고 있다.)
11.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는 삶의 아비규환을 냉정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자의 오만이 있다. 사르나팔은 적의 침공을 앞두고 자신의 왕비와 미희들, 말 등을 부하를 시켜 학살시킨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사르나팔은 이 광경을 냉정하게 지켜본다. 그는 미동도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차갑게 응시한다. 이 차가운 응시를 좋게 봐줄 것인가,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응시로 봐줄 것인가. 사르나팔을 사르나팔로만 볼 때, 그 응시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자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지만, 사르나팔을 사르나팔로 보지 않을 때, 가령 그것을 작가의 시선으로 읽을 때, 그것은 오염된 세계를 응시하는 관조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바라봄의 각(角)을 선택할 것인가는 보는 자의 몫이다. 하나의 각(角)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수한 각을 버린다는 것이지만 하나의 각이 무수한 각을 포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각(無角)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야 무엇을 바라겠는가. 온몸이 깨달음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날카로운 첫키스.
12.
암스테르담은 약(drug)을 하기가 쉽다고 한다. (이런 정보는 책읽기에서 얻는 부수입이다) 그래, 하고 눈이 번쩍 뜨인다. 그러나 약이 나를 이 세상 밖으로 튕겨버리지 않을까 해서 나는 약에 손 대기를 겁내고 있다. 이곳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정이 결국은 먼곳을 꿈꾸게 하는지도 모른다. 김현이 말했듯이 이곳에서 끝까지 살면서 별별 못볼꼴들을 다보고 싶다. 내 팔이 오그라지고 허리가 굽고 눈이 흐려지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하게 볼 것이다.
13.
암스테르담의 반고호 미술관으로 가자. 이주헌이 지적하듯 반 고호 미술관은 반 고호의 분위기를 배반하다. 독일 바우하우스풍의 세련됨은 차라리 마티스나 피카소의 분위기에 더 어울려 보인다. 그것은 너무 모던하다. 고호의 그림은 어떤가. 고호의 회화엔 형식에 내용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그의 정신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아니 그의 내적 에너지는 너무도 강해 곧잘 형식의 외피를 찢고 나온다.
이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는 네덜란드의 풍광이 그렇듯 선천적으로 어둡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세례를 받은 1888년 作 <꽃이 핀 배나무>는 생동하는 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감자를 먹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얼마나 어두운 스케치인가. 어둠과 밝음이 묘하게 공존하는 이 북유럽의 사내에게서 빛과 어둠의 질료들은 그의 말기에 이르러 광기의 격렬한 형상을 얻어낸다. 아랍인이라도 쏘아죽여야 할 것 같은南佛 오베르의 강렬한 태양과 고호의 광기가 만나서 이루어낸 세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나 <해바라기>는 그 강렬한 노란색과 더불어 나태한 정신에 일침을 가한다. 깨어나라. 삶은 연소(燃燒)이다. 강렬한 정신들은 제 삶의 절정에서 뛰어내린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으로 몸을 던지는 女子.
14.
이주헌이 말한다. “때론 무언가를 조금만 음미하는 것이 욕심껏 위장을 채우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 확실히 그는 한국인이다. 적게 보는 것이 깊게 보는 것이다. 깊게 보는 것이 그윽하게 보는 것이다. 영화 ‘피아노’의 한 장면을 기억하자. 허비키틀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홀리헌터의 구멍난 스타킹에 손가락을 댄다. 그 아득한 구멍 사이로 비치는 속살. 허비키틀의 욕망은 그 구멍 넘어의 육체를 본다. 보이지 않는 육체, 조금 보이는 속살. 일부를 보는 것은 전부를 보는 것보다 황홀하다. 한국인들은 그런 엿보기의 즐거움을 체질적으로 아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엿보기에는 숨기면서 드러내는 이중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엿보기가 반드시 비난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솔직함을 전략적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제 욕망을 백주 대낮 빨래줄에 팬티 내걸 듯 전시하는 그 뻔뻔스러움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15.
브뤼셀 왕립 미술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욕조 속엔 피살된 자코뱅의 혁병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소설가 김영하의 드라이한 문체가 생각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압축할 줄 모르는 자는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16.
베를린 미술관, 렘브란트의 <수산나의 목욕>은 이주헌이 말하듯 절개를 찬양하면서 다소간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이율배반’을 보여준다. 사실 모든 도덕주의를 뒤집어 쓴 포르노물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도덕주의를 말하는 포르노물이 비열하다고 해서 도덕주의가 없는 포르노물이 솔직해서 좋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렘브란트의 회화를 속류의 음란물과 동류에 놓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램브란트와 속류 음란물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렘브란트는 자신의 욕망을 그리되 형식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욕망의 배출을 지연시키고 있지만, 속류의 포르노물은 헐거운 형식 속에서 쉽게 욕망을 뱉어낸다. 욕망을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렘브란트가 훨씬 문화적이다. 이를 두고 고급문화 콤플렉스 운운하는 논리는 문화를 고급과 저급으로 무쪽 가르듯 가르는 흑백논리와 많이 닮아 있다. 욕망의 무한 발산이 옳은 것도 아니고 그것의 일방적인 금제도 옳은 것은 아니리라. 형식으로써 욕망을 절제하고, 절제함으로써 욕망을 증폭시키는 그런 모순과 역설의 공간을 텍스트라 이름해보자.
17.
베를린 미술관, 티에폴로의 <성아가사의 순교>는 아릿하다. 아가사의 창백한 아름다움은 이상한 마력으로 나를 화폭 속으로 이끈다. 무너진 고건축물의 계단에서 앞가슴을 가리운 아가사, 그녀는 로마 통치자의 구애를 거절하고 숱한 고문과 시련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죽어간다. 죽어가는 그녀는 마치 하늘에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 이것이 당신의 사랑입니까.”라고 말하는 듯한 허무한 표정, 만약 그 죽음 앞에서의 표정이 신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그림의 감동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18.
빈 미술관에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클림트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화려한 관능으로 충만하다. 미술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이런 관능은 예술이 끊임없는 리비도와의 투쟁의 산물임을 암시해준다.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예술은 그 싸움에서 쉽게 리비도가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애인은 어렵게 얻을수록 그 아름다움이 간절하다.
19.
바젤 미술관의 홀바인의 작품들은 이주헌의 책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예수의 시체를 오직 해부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는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은 오브제 자체가 충격적이다. 그 예수에게선 일체의 형이상학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육체는 어떤 부활도 꿈꿀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 보인다. 바로 그 찌그러진 육체에 의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니, 바로 거기에 인간 예수의 위대함이 역설적으로 있는 것은 아닐까.
홀바인의 <화가의 부인과 두 아이>에서 작가는 냉혹하리만큼 냉정하다. 자신의 두 아이와 부인을 아무런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아련하다. 치열한 자기 응시. 가족을 고생시킨 가장으로서의 회한의 감정을 철저하게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낸 그 냉정한 리얼리즘에서 그의 휴머니즘을 읽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주헌의 첨언이 홀바인의 휴머니즘을 잘 보여준다. <휴머니스트 하면 흔히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인정을 많이 베푸는 사람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홀바인을 보노라면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단순한 로맨티시즘을 넘어 무엇보다 자신부터 철저히 객관화해 볼 수 있는, 냉정하고도 냉철한 현실인식을 갖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20.
우피치 미술관, 보티첼리의 <봄>은 그리스의 꽃의 여신 클로리스와 이탈리아의 꽃의 여신 플로라와 미의 여신 비너스를 보여준다. 그녀들은 살이 내비치지 않는 불투명한 의상을 입고 있다. 그러나 이주헌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는 시선은 세 명의 여신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알맞게 가리고 있다. 그녀들이 걸친 의상은 그녀들의 속살을 은근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 은근함이 이 작품을 천박함에서 구해준다. 이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왼편을 응시하고 있고 그들의 응시가 물길을 트고 있는 곳에는 마르스( 그가 마르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가 있다 그는 그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있다. 뒤돌아선 미소년의 수줍은 얼굴에서 나는 보티첼리의 수줍음을 본다. 이 미소년의 수줍음이야말로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욕망의 한갓 제물로 삼지 않게 해준다.
21.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은 그 완벽함으로 해서 보는 이의 氣를 질리게 한다. 어쩌면 모든 근육들이 살아 있는 피와 맥박의 리듬을 그토록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까. 헬레니즘 시대의 <라오콘>은 사실주의적 정신이 이룩한 최고의 결정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최고의 작품이 항상 최고의 감동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너무 완벽한 것에는 마음이 깃들 여지가 없다. 우린 완벽한 것의 품 속에서 휴식의 숨을 고르는 것은 아니다.
22.
바티칸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를 4년에 걸쳐 천정에 매달리게 하는 고역을 치르게 하였다. 그를 4년 동안 천정에 매달리게 했던 힘을 그의 장인적 예술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종교, 거기에서 인간은 인간을 초탈하는 힘을 얻기도 한다. 백 번을 양보해 아무리 종교가 최면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계기를 고양된 의지와 각성에 의해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떤 약물보다 위대하다.
23.
니스의 샤갈 미술관에서 샤갈의 푸른 색과 만난다. ‘샤갈불루’라는 색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샤갈불루’라고 그 푸른 색을 명명했다. 러시아의 유태인 마을 비테브스크에서 태어나 가난하고도 음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샤갈, 그의 푸른 색은 러시아의 한랭한 공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푸른 색은 일방적인 차가움의 기호가 아니다. 샤갈의 파랑은 동화 속의 파랑이다. 동화 속의 호랑이 이빨은 아무리 과장을 해놓아도 무섭지가 않듯 샤갈불루는 겉으로 아무리 차가운 척해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엔 하늘을 나는 망아지,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 곡마를 하는 소녀와 붉고 푸른 꽃들이 만개해 있으니까 말이다. 샤갈에게 있어서 성경을 경전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시집으로서 읽은 듯하다.
24.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 <첫 영성체>는 1896년 작품이다. 피카소가 1881년 生이니 이 작품은 그가 열여섯살 되던 해에 그린 작품이다. 놀라울 뿐이다. 형태파괴적인 피카소의 그림만을 보아오던 이에게 <첫 영성체>에서 보이는 그의 천재적 시지각과 조형 능력은 가히 충격적일 것이다. 형태를 파괴하는 자에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겠다. 형태를 축조할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피카소는 전자에 속하고 고호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고호의 데셍은 얼마나 형편없는가. 고호 스스로 자신의 미술적 역량을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호가 위대한 점은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귀를 자르고 붕대를 감은 말년의 고호는 어떤 기존의 형식에도 자신을 내줄 수가 없었다. 그의 예술은 그의 조형 능력이 완성한 것이 아니고 그의 격정이 완성했다.
25.
스페인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나라다. 스페인의 태양은 그 어느곳보다 강렬하지만 스페인의 역사는 그 어느 유럽국가보다 어둡다. 이를 간파하고 있은 이주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페인의 태양은 그 어느 곳보다도 밝지만 그만큼 스페인의 그림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어둡다” 후앙 미로가 태양의 밝음 쪽에 서있다면 고야는 그 반대의 역사의 어둠 편에 서있다.(나폴레옹 군대의 학살 장면을 그린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을 보라) 노랗고 붉은 원색으로 그려진 후앙 미로의 초현실주의는 의외로 절규를 간직하고 있다. <공간 속의 불꽃과 벌거벗은 여인>은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절규가 끔찍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잘 계산된 조형적 질서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통을 고통으로서 보여주지 않고 미적인 형식 속에 왜곡시켜 드러내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하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픔을 아픔으로 드러내지 않고 왜 눈물이나 신음으로 드러내느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현상을 어떤 본질의 드러남으로만 읽는 것은 플라톤 이래 인류가 키워온 못된 버릇 중의 하나다. 예술가는 자기만의 방법론을 사랑하고 거기에 실존의 모든 무게를 얹는다. 그들은 고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형식을 생각한다.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통의 형식마저도 감내해야 한다는 데에 예술가의 이중의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