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시리즈 60 나남신서 1157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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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어떤 상황에서 가장 활발하게 유통되는가

노예의 길/하이에크/나남/2006



최근 정부와 야당은 한 목소리로 민생의 안정을 위해 아파트를 반값에 분양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함으로써 ‘긁어 부스럼’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참여 정부가 집권 전반기 동안 집값 잡기에 전력투구했지만 사실상 실패로 끝난 것도 그 원인이 역설적이게도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다. 정부의 시장개입과 지나친 긴축정책이 부동산가격의 안정화에 악영향을 준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10.29대책이 그랬고, 2,17대책이 그랬다는 것이다. 부동산 문제의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사례를 그 근거로 든다. 가령 우리나라의 현재 부동산 대책은 시장 위주가 아니라 일본의 부동산버블이 붕괴되던 당시 일본정부의 직접 개입정책과 유사한데, 일본은 부동산 거품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1980년대 말 토지관련 융자총량규제 실시, 토지기본법 세제개혁, 공정할인율 인상 등 급격한 시장개입과 긴축적인 정책을 펼친 결과  금융권 부실채권이 확대되고 기업 자산가치가 하락, 장기불황에 빠지게 됐다고 지적한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개입에 철저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낸 학자는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의 저자, 하이에크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체주의가 득세한 시대였다.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정당들이 집권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에 열광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랐고, 하이에크가 활동했던 영국에서는 히틀러 체제를 모방해야 한다는 견해들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만연되기 시작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나치즘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의 뿌리가 사회주의임을 간파했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부의 평등한 분배를 통해 경제적 자유를 달성한다는 계획은 사실상 강력한 독재 권력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와 사상을 강하게 억압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했던 하이에크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할 것을 주장한다. 경제의 기반이나 테두리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각종 법이나 제도들을 시행하는 데  정부의 역할이 국한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이 그의 소신이었다.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하기보다는 경제의 일반 개별 주체들이 지켜야 할 경제 제도와 규칙, 시스템을 만들고, 이 시스템이 공정하게 잘 작동하고 있는지, 심판관의 역할만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부가 그 이상으로 시장에 개입하면 오히려 인위적인 독점을 낳을 것이라고 보며, 정부의 간섭을 정당화하는 케인즈적인 재정정책의 무용성을 주장한다. 정부의 경제 정책들이 경제를 더욱 불완전하게 만들고 개인의 합리적인 경제 활동에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전체주의가 내세우는 ‘계획경제’가 개인의 자유를 앗아가고 모든 권력을 소수의 계획자들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이에크는 누가 어떤 재화를 좋아하는지, 생산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생산가능성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가 어떤 생산기술과 재주,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관한 지식은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며 어떤 절대 권력도 모든 지식을 가질 만큼 전지전능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는 지식은 각 개인들에 소유되는 것, 즉 사회의 각처에 흩어져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이에크는 이를 지식의 분산(division of knowledge)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지식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개인들은 이러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고 본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경쟁의 문제’를 누가 얼마나 좋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문제 상황에 접근하느냐 하는 ‘지식과 정보의 문제’로 본다.


하이에크는 정보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정책당국이 일반 개인보다도 더 정확히 수집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과학적 정보’이다. 둘째는 특정한 개인이 정책당국에 비하여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정보이다. 하이에크는 경제 전체의 균형은 예상치 못한 사소한 상황 변화에 대한 부단한 적응의 결과이기 때문에 후자에 속하는 정보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정보들이 특정기관이나 특정인에게 집중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경제주체에게 널리 분산된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분산되어 있는 지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자본주의는 개인 간의 경쟁에 의해 지식을 이용하는 체계이고, 사회주의는 중앙정부의 계획에 의해 지식을 이용하는 체계다. 개인 간의 경쟁에 의해 지식이 이용되는 체계는 가격기능에 근거하는 분권화된 시장경제체제를 의미하며, 중앙정부의 계획에 의해 지식이 이용되는 체계는 중앙집권화된 계획경제체제를 의미한다.


하이에크는 분권화된 시장경제체제의 장점은 분산된 지식이 모두 활동의 대상이 되지만, 중앙집권화된 계획경제체제에서는 의사결정이 계획입안자의 지식에만 의존하므로, 분산된 지식이 모두 활용되지 못한다고 한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정보의 전달은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시장에 참여한 거래자 중에서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거래자는 자신의 계획대로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게 된다. 따라서 소유하고 있는 정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거래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게 될 것이므로, 개별적 경제 주체들은 더 많은 정보를 가지려고 경쟁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정보가 가장 큰 이익을 안겨 줄지는 경쟁의 과정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다. 이때 경제 주체들이 시장에 참여하여, 한 회사의 주식을 샀을 경우, 그 주식의 판매로 인한 실제적 이익이 기대한 이익보다 적을 수가 있다. 이 경우 경제 주체들은 몇 차례의 실제이익과 기대이익과의 차이를 경험하면서 경쟁의 과정에서 더 좋은 정보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에크는 경쟁을 '발견적 방법으로서의 경쟁'이라고 칭하고 있다. 하이에크는 경쟁이 완전해질수록 정보의 전달속도는 빨라지며 경쟁을 저해하는 요인이 있을 때에는 정보전달의 속도도 그만큼 늦어진다고 본다.


어떤 사업에 뛰어들 경우, 초기에 시설투자비용이 너무 높다든지 과점이나 독점으로 인해 사업 시작에 어려움이 있을 경우를 일러 ‘진입장벽’이라 하는데, 하이에크는 진입장벽이나 자연독점은 정보속도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특정한 사업에 대한 충분한 ‘노하우’ 즉 지식이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할 경우, 이는 그 사업에 뛰어 들려고 하는 사업가에게는 큰 벽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중앙당국의 계획에 의해 경제가 집행될 경우, 정보의 속도는 어떤 양상을 보일까.


중앙당국의 계획이라는 것은 모든 정보를 완전히 갖춘 집단에 의해 경제적 계산이 행해짐을 의미한다. 하이에크는 이런 계획은 실행불가능하며 사회적 왜곡을 심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한다.


 경제적 문제는 다양한 목표를 위하여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는 선택과정이다. 그러나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중앙당국은 자원을 다양한 목표를 위해 배분해야 한다. 여기서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현대와 같은 거대 사회의 복잡한 조건하에서 중앙당국이 경쟁자본주의의 결과에 비견하거나 근접하는 합리적인 수준의 정확도와 성공도를 성취할 수 있는가”라고.


계획의 수립에는 자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의 지식이 필요한가이다. 적어도 경쟁체제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수준까지의 지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이에 대하여 통계적 기술의 난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수준의 지식을 현실적으로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선 계획담당자가 계획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수준, 자본, 상품 등에 대한 모든 상세한 정보를 소유해야 하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또한 소비자 재화의 생산에 있어서는 소비자의 기호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하는데 소비자의 기호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의 실패는 정보로서의 지식의 본질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설령 통계적 난점이 극복되어 자료수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치지 않는다. 얼마만큼 생산해야 적정량의 생산량일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따른다. 생산량은 끊임없이 변수에 의해서 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중앙정부가 존재 가능한 수많은 변수를 수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또 경영상의 문제도 따른다. 모든 자원과 생산수단이 공유되어 있는 사회에 있어서도 이러한 자원과 생산수단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용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용의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또 누구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과연 여기에 따르는 엄청난 정보를 중앙정부가 수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하이에크의 답은 ‘아니오’다.


다음으로 비용 계산의 문제를 보면, 하이에크에 있어서의 비용의 개념은 생산요소에 지불된 보수의 총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생산요소를 다른 생산에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비용과의 비교에서 구해지는 기회비용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쟁시장에 있어서 동일산업내의 개인 기업들은 다른 기업의 비용과 자신의 비용을 비교함으로써 이러한 비용의 산출이 가능하다. 이렇게 산출된 비용이 경쟁시장에서 생산물의 가격으로 나타난다. 한편 한 상품이 오직 한 기업에 의해서만 생산되는 독점산업의 경우에는 이러한 비용은 현재의 수익과 미래의 수익에 기초해서 추산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수익은 시장에서 가격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미래의 수익을 명백히 추계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한 것은 예상가격일 뿐이다. 중앙계획당국의 비용계산은 독점 사업의 경우와 유사하다. 독점기업은 시장에서 비용과 독점이윤을 포함하는 가격을 설정한다. 가격설정자라는 점에서 중앙계획당국은 독점기업과 같다. 여기에서 계획담당자의 과제는 한계비용과 일치하도록 가격을 설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획담당자의 비용 산출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하이에크는 이 모든 지식을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시장 경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것이 당시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안 학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영국 사회는 물론 서방 세계에 지배적인 생각은 자본주의는 정부의 대규모적 통제를 통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1944년 『노예의 길』을 통해 당당히 “사회주의는 붕괴하고야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는 경제적 자유는 물론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마저도 파괴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에 아직은 불완전하다. 공정한 시장의 룰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현실에서 정부의 간섭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람들의 주장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절박성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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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권력의 얼굴
제러미 블랙 지음, 박광식 옮김 / 심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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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과연 객관적일까

지도, 권력의 얼굴/제러미 블랙/심산/2006



바다는 거대한 출렁임일 뿐이었고 산은 하늘로 솟은 거대한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인간들은 이 세계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면서 질서를 부여했다. 이름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미부여였으며, 이는 곧 문명화된 세계의 질서였다, 세계에 붙여진 이름은 곧 지도상의 공간으로 나타났다. 인간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질서화하였다. 자신은 중심이고 타인은 변방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는 공간을 균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했다. 어떤 곳은 신성하고 거룩한 곳으로 인식되었지만 또 어떤 곳은 야만스럽고 불결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공간을 위계화하는 인식의 결과는 그대로 지도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 구매자들과 사용자들은 지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도상(圖象)쯤으로 이해한다. 수학과 투시법, 측량 기술 등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지도 제작 기술이 발전했다는 점에서 지도 제작 과정이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 권력의 얼굴』의 저자, 제러미 블랙은 지도는 태생적으로 정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고대로부터 지도제작과 제국주의적 정복 및 통치 사이에, 즉 세계 지도라고 알려진 것들과 세계적 패권을 주장하는 세력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러미 블록은 더 나아가 제도는 ‘권력의 얼굴’이라고 단언한다. 권력관계를 보기 위해서는 지도를 보라는 말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지도 제작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7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인들은 마르티니크(Marttinique)와 과들루프(Guadeloupe)의 지도를 제작했는데, 그 들은 이 지도에 설탕과 커피, 면화 플랜테이션 체제를 기록했으며, 한편으로는 미래에 영국과 갈등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정보들을 기재해두었다. 이런 지도에는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유주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식민주의자들과 피식민주의자들의 권력관계가 고스란히 지도에 반영된 셈이다. 더 이상 지도는 객관성과 진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를 보면 지도가 권력의 얼굴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많은 주요 흑인거주지들, 특히 흑인 분리거주지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에서는 무시되거나 최소화돼 있다. 이것은 흑인 거주지역들, 특히 불법 점유지들이 지도화하기가 어려웠던 사정을 반영하고 있지만,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인구조사 자료의 정확도가 인종집단에 따라 달랐던 것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들이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백인들에게만 주의가 집중됐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지도에서는 특히 농촌 지역의 소규모 백인 도시들이 실제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게 표시됐다. 남아프리카고화국의 지도는, 지도가 객관적이라는 우리의 통념에 보기 좋게 한방 먹인다. 지도제작자들은 객관적인 눈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보고 무엇을 덜 중요하게 보아야 할지를 결정한 것은 그들의 눈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였다. 역사상에 나타난 수많은 지도는 지도의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


지도화와 관련된 논쟁은 투영법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현대인쇄술의 특성상 세계를 지도로 표시할 때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직사각형이다. 그런데 이 직사각형 지도들은 지구의 원형을 살려내지 못한다. 위선과 경선은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보이게 되고, 지구는 모서리가 직각이고 분명한 테두리가 있다는 잘못된 시각적 특성을 갖게 된다. 둥근 구(球)를 평면에 펼치다 보니 투영법에는 왜곡이 따를 수밖에 없다. 지도의 투영법에는 정확한 형태 따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많은 투영법들이 다른 용도를 위해 고안되어 왔다. 16세기 멀리 떨어진 식민지와의 교역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엄청난 거리를 항해해야만 했던 시절 메르카토르는 세계를 원통형으로 묘사한 투영법을 만들었다. 이른바 ‘메르카토르 투영법’이 그것이다. 이 투영법에서는 경선들이 양 극점에 모이지 않고 평행 상태를 유지했다. 양 극점은 적도와 같으 원주를 갖도록 확장됐으며, 이에 따라 적도 근처의 육지에 비해 양 극점 가까이에 있는 대륙들(예를 들면 유럽대륙)이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됐다. 대신 메르카토르의 투영법을 사용하면, 곡선으로 이루어진 지구의 실제 표면과 달리 각도가 변하지 않아 지도상의 모든 부분에서 방위가 정확하게 유지됐다. 이에 따라 방위가 변하지 않는 직선들을 지도의 평면 위에 표시할 수 있었는데, 항해를 위해서는 이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지역에 따라 축적이 바뀔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크기가 왜곡되고 말았다. 이 메르카토르의 투영법을 따를 경우 양극의 지점들이 무한대로 확대돼 결국 지도에 표시할 수 업었다. 그러나 이 불안전한 지도는 유럽의 통치자들이나 상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중위도 지역, 그러니까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 동쪽으로는 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탐험과 정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하는 데 관심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기독교 지도가 예수살렘을 중앙에 배치했던 반면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만들어진 지도는 유렵을 중앙에 배치했다. 또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제작된 지도는 극지방이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에 유럽 대륙의 크기가 실제보다 크게 보였다. 결국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제작된 지도에는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서구우월주의가 그 배면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1898년에 고안된 반데르 그린텐(Van der Grinten) 투영법에서는 온대 위도 지역을 과장해 표현하는 메르카토르 투영법의 방식이 계속된 결과 그린란드, 알래스카, 캐나다, 소련이 실제보다 크게 표시되었다. 이 투영법은 1992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지리학협회에서 사용했고, 그 영향력도 대단했다. 이 투영법에서는 소련이 마치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위협하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그려졌다. 결국 이 투영법은 미소의 냉전 시대에 맞는 지도 이미지였던 셈이다. 지도라는 객관성의 이면에 이데올로기를 숨기는 솜씨가 실로 교묘하다.


1967년 페터스가 고안해낸 지도는 열대지방을 엄청나게 키워놓았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길이가 극단적으로 과장됐다. 그러나 열대지역을 강조한 이 지도는 제3세계에 대한 관심과 일치했고, 국제구호단체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제3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던 교황청이나 기독교 단체들로부터도 열띤 지지를 받았다. 또 페터스의 세계지도는 『남북관계 : 생존을 위한 계획』이란 책에서 호평을 받으며 책의 표지에 실리기도 한다. 지도학 자체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고 서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세계질서를 필요로 했던 시대의 요구에 페터스의 지도가 정확하게 부응한 셈이다. 세계의 형상이 지도에 객관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정치적 관심이 지도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하겠다.


유럽이 세계지도의 가운데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유럽 국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국주의적 영향력이 반영돼 있다. 지도에서 유럽이 중앙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유럽중심적 사고는 1884년 표준시와 경도 결정의 기준이 되는 경도 0도를 영국 그리니치를 지나는 경선으로 선택한 국제회의를 통해 강화된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는 유럽 내부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19세기에는 여러 명의 조도학자들이 0도 경선이 워싱턴이나 미국의 도시들을 통과하도록 한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동양에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고 한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이런 지도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변방의 나라들은 미개하다는 세계관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지도 제작에 있어서 자명한 객관성을 갖는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주관성이야말로 지도제작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지도와 지도 제작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도제작에 있어서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도의 의미를 사회․정치적 상황 속으로 다시 가져다 놓는 일이며, 그를 통해 지도의 이면의 권력관계를 살피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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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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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섬세한 통찰

폭력의 세기/한나 아렌트/이후/1999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했다. 역사란 봄에서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 자유는 귀족들만의 향유 대상이었지만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어 간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에 한몫을 했다. 과거에는 노예가 등불을 붙였지만 지금은 전기 스위치가 인간이 감당해야 할 점화의 수고를 덜어주고, 과거에는 가마꾼이 감당해야 했던 노고를 지금은 자동차가 대신한다. 그러나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고, 인간의 이성이 인간에게 무한한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낙관주의에는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성이 인간의 자유를 무한히 확대해주리라고 믿었던 근대의 신념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20세기의 역사는 오히려 곧 ‘폭력과 야만의 확대과정’이었다. 제국주의는 폭력을 앞세워 팽창주의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사회주의는 폭력을 혁명의 유효한 도구로 보았다. 인간의 폭력성이 야기한 가장 불행한 사태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유태인 대량살상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미국과 소련의 군비확장, 베트남 전쟁과 프랑스의 68혁명, 흑인의 민권운동 등 20세기는 그야말로 폭력의 아수라장이었다.


『폭력의 세기』는 전쟁과 폭력을 피해 고국을 떠나 망명자로 살아야 했던 세계적 여성정치학자의 한나 아렌트의 폭력에 관한 지적 성찰물이다. 저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1933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파리로 옮겼다가 파리마저 독일군에 함락되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시카코 대학의 정치학자로 자리 잡았다.


저자의 인생 이력이 말해주듯 저자는 20세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저자는 과학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며, 20세기가 ‘이성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일반화시킨 시대였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저자의 폭력에 대한 섬세한 성찰의 소산이었다.


국가가 폭력 수단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베버(M. Weber)가 말하듯, 흔히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폭력은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되어 왔으며, 더 나아가 폭력은 권력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라고 말한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의 견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를 통해 폭력과 권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폭력'은 강제적인 힘을 이용하여 타인을 제압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지만, '권력'은 사람들의 공동행동과 상호적 동의와 지지 속에서 형성된 힘이라는 점에서 분명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권력이 극대화되어 국민이 국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폭력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지만, 권력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여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할 때에는 폭력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로부터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독재자들이 폭력에 의존하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음을 우리의 현대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극대화되면 언제라도 권력을 파괴할 수 있지만, 권력은 폭력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권력과 폭력은 더 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권력과 폭력은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폭력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하지만, 권력은 그 자체로 정치 공동체 속에서의 공동행동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폭력은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으며, 사후에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인데, 만약 본래 의도했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다면,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한나 아렌트 식의 논리대로라면 흉기로 시민을 위협하는 흉악범을 물리력으로 제압하는 행위에서의 폭력은 즉각적인 목적성을 갖기에 정당화될 수 있지만 ‘정의로운 사회구현’이란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삼청교육대’는 즉각적인 목적성을 가질 수 없기에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권력이 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반면,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이도 가능하다. 한나 아렌트가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오늘날 가공할 만한 성능을 가진 첨단무기들은 도구적 효율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 극단의 힘을 이용하면 누구든 절대강자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 것이지,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는 ‘의사소통 과정’ 속에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야만의 권력이지 이성의 권력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제휴와 연대’ 속에서 나온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권력은 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응한다. 권력은 결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에 속하는 것이며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경우에 실제적으로는 그가 일정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도록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지시한다. 권력을 생성시켰던 집단이 사라지는 순간에 그의 권력도 소멸한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발언은 권력은 강제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토론에 의해 결집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발적인 토론에 의해 의견을 결집해내는 과정이 곧 시민들의 정치 참여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권력에 대한 분석은 시민들의 참여정치에 관한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핵발전소 건립 문제나 새만금호 개발, 동강댐 건설 등 그 자체를 두고 선악을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강제력, 즉 폭력을 동반해서 밀어붙이기식이 되어서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으며. 시민들의 의사소통 과정 속에서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적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던가. 여기에서 인간은 쉽게 폭력과 야합한다. 절차와 과정이야 어쨌든 신속하게 결과만을 얻겠다는 속도위주의 사고방식과, 수단이야 어찌했든 그 결과가 다수를 이롭게 하면 그만이라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결국 우리 시대에 숱한 폭력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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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 상상력이다. 아이들은 뭉게구름에서 호랑이와 토끼의 형상을 읽는다. 존재하는 구름에서 존재하지 않는 호랑이와 토끼를 만들어내는 것이 상상력이다. 일상은 존재하는 것의 영역이다. 그러나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상상력의 영역이다.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조셉 캠벨은 신화는 인간의 꿈이 구현된 것으로 본다. 단군신화에서의 웅녀의 곰으로부터의 인간으로의 변모 또한 삶의 질적인 변환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이 구현된 결과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의 결합, 심청전에서 심봉사의 개안(開眼), 모두 현실에서는 달성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달성되기 힘들다 해서 인간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도저히 물리적인 힘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이 곧 환상이다.
 
조셈 캠벨은 말한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대학의 캠퍼스 하면 일종의 철저하게 열린 사회였지요. 그래서 내면적 삶이, 우리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 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중략) 우리는 바로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조셉 캠벨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일들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삶에 눈을 돌려야 하며, 신화는 내면적 삶의 지표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일상적인 것에 매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성적을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을 얻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지위에 오를까를 고민한다. 이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 조셉 캠벨의 충고다.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하면 성적을 올릴까 하는 고민은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고 묻는 것은 성장의 본질을 묻는 지극히 내면적인 물음이다. 신화는 그 내면적인 물음에 지침을 준다.
 
성경은 예수의 신화를 기록한 책이고, 불경은 석가모니의 신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사, 곰이 변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라. 신화는 일상의 논리로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사이비 진술’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처녀의 몸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육체의 삶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태어남을 상징한다는 것이 조셉 캠벨의 설명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라고 조셉 캠벨을 덧붙인다.
 
조셉 캠벨은 신화가 고통의 의미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살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곰이 웅녀가 되기까지의 시련,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시련,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까지의 시련....한 인간이 고통과 대면하여 그것을 어떻게 초극하는가를 웅장하게 보여준다.
 
『축제와 문명』의 저자 장 뒤비뇨는 말한다.
 
축제 때는 용인되었던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되며, 쾌락 속에서 혼미스러우면서도 즐겁게 신과 인간, 신과 나 사이의 짝지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축제 때는 용인되었던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된다는 구절을 학교 축제의 예를 들어 주목해보자. 학교 축제에서 선생님들을 풍자하는 연극을 연출했다고 하자. 그 연극에서 선생님이 학생역할을 맡고 학생이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고 하면 연극의 상연장은 완전히 웃음바다가 될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연극을 통해 풍자와 해학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바로 이것이 뒤비뇨가 말하는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파괴는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축제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은 다시금 활력을 얻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축제의 비일상성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반성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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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2-28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등을 겪고 있는 책이었는데 님의 리뷰 덕분에 확실하게 다음번 구독할 책으로 정합니다. 그나저나 넘 오랜만이셔요

감각의 박물학 2006-03-01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뜸했죠 저는 요즘 과학책읽기에 빠져있습니다....<본성과 양육>, <빈서판> 이런 책들에요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과학과 기술은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이미지 탓에 과학 기사 역시 객관적이며 정확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과학 기사는 객관성과 논리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의 저자 이충웅의 주장이다. 그는 뉴스와 방송이 다루고 있는 과학 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을 의심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가 출간된 시점은 2005년 6월 24일이었고, 이 시기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로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구어지던 때였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의심하는 자는 네티즌들에 의해 매국노로 규정되었던 시기였던 만큼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자 했던 저자의 태도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대학에서 과학사회학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저자는 언론이 과학뉴스를 다룰 때 경제성만을 강조해 희망을 부풀리거나 황우석 교수에서처럼 영웅 만들기에 주력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작 중요한 과학의 모습과 중요 과정 전달은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광우병 안 걸리는 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광우병의 원인이 되는 프리온의 실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은 문제 제기 한 번 없이 광우병이 걸리지 않는 소를 가능하게 했다고 황 교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언론의 기능은 감시와 견제에 있지만 언론은 제 본연의 임무를 져버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덧붙인다.

배아줄기세포 연구 지지자들의 주장은 현대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과학,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과학의 이미지와 쉽게 결합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으로부터, 지지자들을 확산시키는 데 이미 성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국가주의적 응원이 덧붙는다. 한국인에게 지난 백 년의 역사는, 스스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고야 말았다. 외국에서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일이야말로 지고한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가 대한민국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며 불치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환상은 대중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언론이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들은 언론이 내보내는 과학 기사를 통하여 과학에 대한 의견을 구성한다.  ‘광우병 안 걸리는 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도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세계 축산 시장 장악과 함께 광우병 정복이라는 생명공학의 쾌거”를 말했지만, 황우석 교수의 연구 방법대로 만들어진 소의 “인체 및 환경 안정성 검증’의 문제를 차분하게 말하는 신문은 없었다.

그는 언론이 미래의 신기술이라고 호들갑스럽게 보도하는 나노기술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던진다.

특히 의학분야에서 나노기술이 가장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흔한 전망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노구조물 속에 담긴 약물이 암세포만 골라 공격할 것이라는 얘기, 적혈구에 붙어서 나노 로봇이 치료를 행하는 장면 등은 온갖 매체를 통해 제시되었다. 질병의 공간에 투입된 나노 구조물이나 로봇이 나쁜 세포를 공격하고 난 다음에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거나, 그것들을 수거하는 과정에서의 예기치 않은 문제에 대한 다소 막연한 우려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전망이 기초하고 있는 질병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이 가지는 문제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004년 한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린다.

세제 없이 저절로 세탁되는 옷감이 개발돼 옷 세탁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오게 될 것 같다. 홍콩과기대학 연구진은 면 소재에 나노 크기 입자의 미세한 산화티타늄 입자를 입히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 산화티타늄은 옷감에 묻는 오염물질을 햇빛과 반응해 분해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옷감에 입힌 나노 입자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서 세제 없이 저절로 세탁되는 옷감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태도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왜 언론은 과학기사를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가 지닌 가치와 그 쓰임새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구성과를 홍보해야 연구에 대한 투자가 나설 것이라는 판단도 여기에 일조한다. 연구비에 대한 압박 때문에 연구자들은 연구대상의 유용성과 경제성을 홍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의 보도태도와 맞물려 꿈과 희망을 주는 뉴스로 만들어지며,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여러 가지 이득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황우석 교수라는 지적이다.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난자를 법적인 문제없이 얻을 수 있는 국내 환경에 힘입은 것이지만, 난자 기증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외국의 시각에 대해 우리의 분위기는 납득할 수 없다고 필자는 말한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세태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저자의 비판은 계속된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논리가 가톨릭 교회만 있지 않고 각 분야에 다양하지만 엄청난 치료효과나 엄청난 경제적 효과라는 찬사에 가려졌으며, 윤리적 논란은 차치하고 치료 효과조차 미지의 가능성 수준임에도 이에 대해 냉정하게 묻는 작업에는 소홀했다. 과학이 범세계적 성격을 띠었다면, 우리의 특정 과학에 대한 연구성과도 범세계적 차원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편협한 가치만 난무한다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의 역사는 전복(顚覆)의 역사였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난공불락의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태도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선의 태도가 아니라 늘 열려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과학 자체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듯, 혹은 반박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 과학은 아니다. 2005년 여름, 대한민국에 과학은 없었다. 황우석에 대한 열광은 차라리 종교였지 과학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필자의 지적을 아프게 새기며 우리 과학이 갈 길을 생각해보자.

황우석 신드롬은 한국 사회가 진실보다는 꿈이 더 필요한 사회임을 가슴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황우석 생가를 복원하고 명소로 꾸민다는 보도에 이르러서, 신드롬을 넘어 신화의 탄생을 목격한다. 차라리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어울릴 듯한 상황이다. 과학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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