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폭력에 대한 섬세한 통찰

폭력의 세기/한나 아렌트/이후/1999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했다. 역사란 봄에서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 자유는 귀족들만의 향유 대상이었지만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어 간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에 한몫을 했다. 과거에는 노예가 등불을 붙였지만 지금은 전기 스위치가 인간이 감당해야 할 점화의 수고를 덜어주고, 과거에는 가마꾼이 감당해야 했던 노고를 지금은 자동차가 대신한다. 그러나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고, 인간의 이성이 인간에게 무한한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낙관주의에는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성이 인간의 자유를 무한히 확대해주리라고 믿었던 근대의 신념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20세기의 역사는 오히려 곧 ‘폭력과 야만의 확대과정’이었다. 제국주의는 폭력을 앞세워 팽창주의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사회주의는 폭력을 혁명의 유효한 도구로 보았다. 인간의 폭력성이 야기한 가장 불행한 사태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유태인 대량살상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미국과 소련의 군비확장, 베트남 전쟁과 프랑스의 68혁명, 흑인의 민권운동 등 20세기는 그야말로 폭력의 아수라장이었다.


『폭력의 세기』는 전쟁과 폭력을 피해 고국을 떠나 망명자로 살아야 했던 세계적 여성정치학자의 한나 아렌트의 폭력에 관한 지적 성찰물이다. 저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1933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파리로 옮겼다가 파리마저 독일군에 함락되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시카코 대학의 정치학자로 자리 잡았다.


저자의 인생 이력이 말해주듯 저자는 20세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저자는 과학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며, 20세기가 ‘이성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일반화시킨 시대였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저자의 폭력에 대한 섬세한 성찰의 소산이었다.


국가가 폭력 수단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베버(M. Weber)가 말하듯, 흔히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폭력은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되어 왔으며, 더 나아가 폭력은 권력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라고 말한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의 견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를 통해 폭력과 권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폭력'은 강제적인 힘을 이용하여 타인을 제압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지만, '권력'은 사람들의 공동행동과 상호적 동의와 지지 속에서 형성된 힘이라는 점에서 분명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권력이 극대화되어 국민이 국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폭력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지만, 권력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여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할 때에는 폭력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로부터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독재자들이 폭력에 의존하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음을 우리의 현대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극대화되면 언제라도 권력을 파괴할 수 있지만, 권력은 폭력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권력과 폭력은 더 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권력과 폭력은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폭력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하지만, 권력은 그 자체로 정치 공동체 속에서의 공동행동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폭력은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으며, 사후에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인데, 만약 본래 의도했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다면,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한나 아렌트 식의 논리대로라면 흉기로 시민을 위협하는 흉악범을 물리력으로 제압하는 행위에서의 폭력은 즉각적인 목적성을 갖기에 정당화될 수 있지만 ‘정의로운 사회구현’이란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삼청교육대’는 즉각적인 목적성을 가질 수 없기에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권력이 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반면,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이도 가능하다. 한나 아렌트가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오늘날 가공할 만한 성능을 가진 첨단무기들은 도구적 효율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 극단의 힘을 이용하면 누구든 절대강자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 것이지,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는 ‘의사소통 과정’ 속에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야만의 권력이지 이성의 권력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제휴와 연대’ 속에서 나온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권력은 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응한다. 권력은 결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에 속하는 것이며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경우에 실제적으로는 그가 일정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도록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지시한다. 권력을 생성시켰던 집단이 사라지는 순간에 그의 권력도 소멸한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발언은 권력은 강제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토론에 의해 결집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발적인 토론에 의해 의견을 결집해내는 과정이 곧 시민들의 정치 참여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권력에 대한 분석은 시민들의 참여정치에 관한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핵발전소 건립 문제나 새만금호 개발, 동강댐 건설 등 그 자체를 두고 선악을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강제력, 즉 폭력을 동반해서 밀어붙이기식이 되어서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으며. 시민들의 의사소통 과정 속에서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적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던가. 여기에서 인간은 쉽게 폭력과 야합한다. 절차와 과정이야 어쨌든 신속하게 결과만을 얻겠다는 속도위주의 사고방식과, 수단이야 어찌했든 그 결과가 다수를 이롭게 하면 그만이라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결국 우리 시대에 숱한 폭력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