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과학과 기술은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이미지 탓에 과학 기사 역시 객관적이며 정확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과학 기사는 객관성과 논리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의 저자 이충웅의 주장이다. 그는 뉴스와 방송이 다루고 있는 과학 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을 의심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가 출간된 시점은 2005년 6월 24일이었고, 이 시기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로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구어지던 때였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의심하는 자는 네티즌들에 의해 매국노로 규정되었던 시기였던 만큼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자 했던 저자의 태도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대학에서 과학사회학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저자는 언론이 과학뉴스를 다룰 때 경제성만을 강조해 희망을 부풀리거나 황우석 교수에서처럼 영웅 만들기에 주력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작 중요한 과학의 모습과 중요 과정 전달은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광우병 안 걸리는 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광우병의 원인이 되는 프리온의 실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은 문제 제기 한 번 없이 광우병이 걸리지 않는 소를 가능하게 했다고 황 교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언론의 기능은 감시와 견제에 있지만 언론은 제 본연의 임무를 져버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덧붙인다.

배아줄기세포 연구 지지자들의 주장은 현대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과학,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과학의 이미지와 쉽게 결합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으로부터, 지지자들을 확산시키는 데 이미 성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국가주의적 응원이 덧붙는다. 한국인에게 지난 백 년의 역사는, 스스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고야 말았다. 외국에서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일이야말로 지고한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가 대한민국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며 불치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환상은 대중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언론이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들은 언론이 내보내는 과학 기사를 통하여 과학에 대한 의견을 구성한다.  ‘광우병 안 걸리는 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도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세계 축산 시장 장악과 함께 광우병 정복이라는 생명공학의 쾌거”를 말했지만, 황우석 교수의 연구 방법대로 만들어진 소의 “인체 및 환경 안정성 검증’의 문제를 차분하게 말하는 신문은 없었다.

그는 언론이 미래의 신기술이라고 호들갑스럽게 보도하는 나노기술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던진다.

특히 의학분야에서 나노기술이 가장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흔한 전망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노구조물 속에 담긴 약물이 암세포만 골라 공격할 것이라는 얘기, 적혈구에 붙어서 나노 로봇이 치료를 행하는 장면 등은 온갖 매체를 통해 제시되었다. 질병의 공간에 투입된 나노 구조물이나 로봇이 나쁜 세포를 공격하고 난 다음에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거나, 그것들을 수거하는 과정에서의 예기치 않은 문제에 대한 다소 막연한 우려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전망이 기초하고 있는 질병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이 가지는 문제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004년 한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린다.

세제 없이 저절로 세탁되는 옷감이 개발돼 옷 세탁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오게 될 것 같다. 홍콩과기대학 연구진은 면 소재에 나노 크기 입자의 미세한 산화티타늄 입자를 입히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 산화티타늄은 옷감에 묻는 오염물질을 햇빛과 반응해 분해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옷감에 입힌 나노 입자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서 세제 없이 저절로 세탁되는 옷감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태도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왜 언론은 과학기사를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가 지닌 가치와 그 쓰임새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구성과를 홍보해야 연구에 대한 투자가 나설 것이라는 판단도 여기에 일조한다. 연구비에 대한 압박 때문에 연구자들은 연구대상의 유용성과 경제성을 홍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의 보도태도와 맞물려 꿈과 희망을 주는 뉴스로 만들어지며,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여러 가지 이득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황우석 교수라는 지적이다.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난자를 법적인 문제없이 얻을 수 있는 국내 환경에 힘입은 것이지만, 난자 기증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외국의 시각에 대해 우리의 분위기는 납득할 수 없다고 필자는 말한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세태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저자의 비판은 계속된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논리가 가톨릭 교회만 있지 않고 각 분야에 다양하지만 엄청난 치료효과나 엄청난 경제적 효과라는 찬사에 가려졌으며, 윤리적 논란은 차치하고 치료 효과조차 미지의 가능성 수준임에도 이에 대해 냉정하게 묻는 작업에는 소홀했다. 과학이 범세계적 성격을 띠었다면, 우리의 특정 과학에 대한 연구성과도 범세계적 차원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편협한 가치만 난무한다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의 역사는 전복(顚覆)의 역사였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난공불락의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태도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선의 태도가 아니라 늘 열려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과학 자체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듯, 혹은 반박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 과학은 아니다. 2005년 여름, 대한민국에 과학은 없었다. 황우석에 대한 열광은 차라리 종교였지 과학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필자의 지적을 아프게 새기며 우리 과학이 갈 길을 생각해보자.

황우석 신드롬은 한국 사회가 진실보다는 꿈이 더 필요한 사회임을 가슴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황우석 생가를 복원하고 명소로 꾸민다는 보도에 이르러서, 신드롬을 넘어 신화의 탄생을 목격한다. 차라리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어울릴 듯한 상황이다. 과학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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