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
데이비드 와인버거 지음, 신현승 옮김 / 명진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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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불완전성을 옹호한다

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데이비드 와인버거/명진출판/2003


  할리우드 애니매이션 <개미Z>의 주인공, 일개미 Z-4195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발라 공주와 바깥세계로 통하는 수렁에 빠져 곤충의 천국, 인섹토피아를 찾아 나선다. 그가 처음으로 당도한 곳은 샌드위치와 콜라와 나이키의 땅. 그러나 그곳은 벌레들의 천국이 아니다. 샌드위치를 싸고 있는 비닐랩은 오염과 불순함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인간들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 비닐랩이 개미들을 배척한다. 번쩍거리는 광택의 세계는 상품과 소비의 왕국이었는지는 몰라도 벌레들의 천국은 아니었다. 종국에 개미 Z가 찾은 인섹토피아는 의외로 쓰레기장이었다. 먹다 버린 사과의 숭숭 뚫린 구멍 사이에서 벌레들은 춤을 춘다. 온갖 너저분한 것 속에서 벌레들은 해방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곳엔 획일적인 도덕률을 강제하는 어떠한 권력도 없다. 불순한 공간이 오히려 자유를 구가하는 해방의 공간일 수 있다는 역설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속의 쓰레기장은 가히 인터넷을 연상시킨다. 음란물이 범람하고, 익명성을 이용한 사이버 테러와 악플이 넘쳐나고, 스팸메일이 무차별적으로 보내진다. 각종 범죄 사이트도 횡행하고. 게시판에는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런 인터넷의 불완전성이야말로 인터넷의 가능성이라고 『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의 저자이자 미국 미디어 비평가인 데이비드 와인버거는 말한다.

  와인버거는 단적으로 반문한다. “인터넷에는 오직 하나만을 주장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인터넷을 방문하고 싶어 하겠는가?” 거미줄처럼 얽힌 네트워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중앙집권적 권력기구가 인터넷에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이 중앙집권적으로 관리되고 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인터넷이 성장하고 혁신할 수 있는 토대다. 악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했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조직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글을 함부로 쓰겠는가. 인터넷 실명제는 통제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극단론은 차치하고라도 실명제로 인해 인터넷의 다양성과 활력은 현저하게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인터넷은 완벽함과 품위와 격식을 이상으로 숭배하는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의 공간이라는 것이 와인버거의 주장이다. 그는 인터넷이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현실세계의 삶을 짓누르는 완고한 전문가주의에 대한 도피처를 제공한다.”라고 말하며 인터넷의 불완전성을 옹호한다. 칸트니 공자니, 어려운 이론들을 들먹이면 군중들은 겁을 먹지 않는가. 저자는 정부나 기업에서 말하는 방식, 즉 권위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는 고상하고 정확한 표현들이 따지고 보면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대화를 죽이는 언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은 현재의 무분별한 인터넷 문화에 대한 강력한 옹호의 책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와인버거는 인터넷이 다양성과 자유가 최고로 발현된 세상, 관리자도, 억압도, 금기도 없는 기쁨의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악플의 문제점을 성찰해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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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 - 투발루에서 알래스카까지 지구온난화의 최전선을 가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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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의 현장을 발로 뛰고 가슴으로 쓰다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마크 라이너스/돌베개/2006



‘경제성장은 선(善)’이라는 것이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더글러스 러미스는 성장이 만인의 상식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그는『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를 통해 파국을 향해 치닫는 현재의 성장주의적 태도를 ‘타이타닉 현실주의’라 이름 붙인다.


생태학자들은 현재 수준의 생산과 소비방식을 고수한다면 언젠가 지구는 타이타닉처럼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선진공업국들이 자원 소비를 90% 감소시키지 않으면 지구 같은 행성이 다섯 개는 필요하다며 발전의 엔진을 멈출 것을 환경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지구온난화가 거대한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는 기사와, 화석 에너지의 고갈을 걱정하며 대안에너지 사용을 촉구하는 기사와 지구촌의 곳곳에서 기상이변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뉴스와도 자주 접한다. 2007년 2월 10일자의 신문에는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한 지구 온난화 여파와 해수면 온도에 이상이 생기는 엘니뇨 현상 때문에 116년 만에 가장 따뜻한 겨울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비유하건대 타이타닉호의 선내에서는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있는 터라, 선내의 승객들은 방송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진한다는 것만이 타이타닉호의 본질인 이상, 빙산에 충돌할 것이라는 예언에도 아랑곳없이 타이타닉호는 성장을 위해 앞으로 줄기차게 나아간다. 경제성장에만 관심이 있는 현실주의 경제학자들과 기업의 CEO들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한다. “속력을 떨어뜨려선 안 된다.”라는 것, 즉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의 행동 강령이기 때문이다.


여기 타이타닉호의 선내 경고방송을 아주 심각하게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의 저자, 마크 라이너스가 바로 그다. 그는 국제환경단체인 '원월드넷(Oneworld.net)' 일원으로 5년 동안 일하면서 중앙아메리카의 허리케인 미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뭄과 기아, 모잠비크의 대홍수, 베네수엘라의 살인적 진흙사태 등을 취재했다. 그는 이 모든 재해의 원인이 지구온난화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확고한 물증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물증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3년 동안 그는 세계의 곳곳을 누비며 '지구온난화의 현장'을 취재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가라앉고 있는 남태평양의 산호섬 국가 투발루, 황사로 인해 양과 염소를 먹일 풀마저 사라진 황무지 네이멍구(내몽골) 자치구의 농민들,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집과 도로가 지면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알래스카, 허리케인으로 쑥대밭이 된 미국, 빙하가 녹아버리는 바람에 식수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페루의 빈민들에서 저자는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 중인 지구 온난화의 재난을 똑똑하게 목격한다. 책은 바로 그가 눈으로 본 재해의 현장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다. 머리로 쓴 책이 아니라 발로 뛰고 가슴으로 쓴 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마크 라이너스의 메시지는 과학자들의 경고의 메시지보다 강력하게 들린다.


타이타닉의 선내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그 방송의 내용이 추상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마크 라이너스의 책을 영상화한 영상물을 선내에 방송했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땠을까. 재앙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박진감 있게 보여주는 마크 라이너스의 영상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을까.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바다로부터 10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해수면 상승이 투발루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 영향은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해안지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세계 해안선 모래사장의 70퍼센트 이상이 뒤로 물러나면서 좁아지고 있으며, 짠물의 유입은 멀리 중국의 양쯔강이나 호주의 메리강의 지대 낮은 삼각주에서도 기록되고 있다.”는 그의 메시지를 과연 대중들이 태연하게 외면할 수 있을까. 지구 온실효과로 일단 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지구표면의 반사력이 감소하여 태양열이 더 잘 흡수되어 온난화가 더 빨리 진행되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경고의 메시지는 또 어떤가.(저자는 고위도 지방의 이런 악순환을 양성피드백 positive feedback이라 이름 붙인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영구동토층이 녹으면 “숲, 주택, 도로 및 기타 인프라의 피해가 가속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잠잠히 얼어붙어 있던 습지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나 메탄 같은 온실가스의 방출이 어마어마해질 것이다.”라는 경고의 메시지는 또 어떤가.


고대의 간쑤성 지역은 풍부한 물과 비옥한 땅으로 중앙정부의 관심을 끌었던 곳. 그러던 곳이 지금은 전지역의 94퍼센트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주변 사막의 모래언덕이 매년 10미터의 속도로 침입해오고 있다. 마크 라이너스는 지구온난화의 또 다른 측면이 간쑤성의 강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간쑤성 서쪽에 있는 치렌 산맥은 핵심적인 오아시스 강들의 원천인데, 이 일대의 강들이 일 년 내내 흐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 산맥의 빙하들이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 빙하들이 빠르게 사라짐으로 해서 이 일대의 강들의 4분의 3이 전면적으로 흐름을 멈추었고, 절반은 지난 150년 동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강이 사라지고 그곳이 사막지대로 변하면서 모래폭풍이 일면 사람들은 삶의 근거지를 잃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삶의 모태를 이루던 문화는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 처지에 놓이게 된다. ‘환경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결국, 그 모든 재앙이 하늘이 만든 천재(天災)인지, 사람이 만든 인재(人災)인지를 따져 묻지도 못한 채 도시 언저리에서 막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과연 모든 지구인들이 ‘환경난민’에 처할 운명과 맞닥뜨리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마크 라이너스는 알래스카 사람들은 자연이 파괴되고 북극곰과 같은 오랜 친구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가슴 아파하지만 석유를 얻기 위해 북극야생동물보호구역을 개발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알래스카인이다.” 알래스카인들이 성장이냐 생존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인류 또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크 라이너스의 경고인 셈이다. 물을 끓이기 위해 스위치를 켜고, 자동차 운전을 하고, 더위를 피해 에어컨을 켤 때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떠올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알래스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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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군중
하워드 라인골드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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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통신기술의 발달로 등장하는 영리한 군중

참여군중/하워드 라인골드/황금가지/2003




등잔의 기름을 살 수없었던 가난한 선비들이 흰 눈과 반딧불이의 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탁월한 대중연설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대도 갔다. 바야흐로 말과 글을 대체하는 영상의 시대, 비쥬얼의 시대다. 강력한 멀티미디어와 이미지 툴(tool)에 힘입어 인터넷에는 각종 현란한 이미지가 난무한다. 압도적인 이미지의 공간에서 문자 텍스트는 무력하다. 요즘 수십만 회를 상회하는 조회수를 올리는 것은 단연 UCC(사용자 손수제작물: User Created Contents)다. 인터넷상에서는 이태백의 시나 소동파의 문장도 명성만큼의 조회수를 올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웹의 시대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시대요, 재미가 곧 명성인 시대다.


어떤 UCC 게시물은 단 하루 만에 10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학교폭력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공개되었다는 이 영상물의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동영상 공개로 피해자는 더 큰 충격에 빠졌고 가해학생들은 신상이 공개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과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취재의 대상인 취재원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는 콘텐츠 생산이 아쉬운 대목이다.


UCC의 조작가능성 또한 문제다. 얼마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충격적인 성폭행 동영상도 고교생들의 자작극으로 판명되었고, 한 가난한 대학생 커플의 지하철 안에서의 결혼식도 연극 전공 대학생들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조작가능성에도 불구하고 UCC의 긍정적 가능성을 점치게 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소속 버지니아주 조지 앨런 상원의원의 경우, 공화당의 텃밭이라고 알려진 버지니아주에서 유세 중에 민주당 지지자인 인도계 청년을 향해 "원숭이"라고 말하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오르게 됨으로써 네티즌들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그는 선거에 떨어졌다. UCC가 기존언론이 해내지 못했던 감시기능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이는 대안언론으로서의 UCC의 긍정적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7년 말에 치러지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이 직접 만든 UCC가 여론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디지털 민주주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최근 UCC의 선거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대략적인 입장을 밝혔다.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10대 미성년자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UCC를 제작하거나 게시할 수 없다, 19세 이상의 네티즌도 법정 선거운동 기간인 23일 동안만 관련 동영상을 올릴 수 있다, 특정 후보에 대한 허위 사실이나 비방을 동영상이 담고 있으면 안 된다, 네티즌이 자신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특정 후보 사이트로 갈 수 있는 링크, 배너 등을 달아놓는 것도 선거운동 기간에만 허용된다는 등의 지침이 그것이다.


‘영리한 군중’으로 직역할 수 있는 'Smart Mobs'라는 원제를 가진 하워드 라인골드의 『참여군중』은 네트워크 기술로 무장한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휘둘리고 정치권력에 의해 조종되는 수동적 대상에서 벗어나 역사와 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 능동적 주체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영리한 군중’들은 휴대전화나 PDA(개인 휴대단말기) 인터넷 등 첨단기기로 무장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군중을 일컫는다.


라디오나 TV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 하에서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라디오나 TV, 신문과 잡지와 같은 과거의 매체 환경 속에서 대중들은 기업이나 권력이 흘려주는 메시지를 접수하는 단순한 수신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과 휴대폰이 등장하자 사정은 달라진다. 대중들은 사회전반의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영리한 대중,Smart Mobs’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첨단기기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출시된 제품의 문제점을 들어 집단소송을 걸기도 하고, 특정한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비판하기도 하며,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100만명 이상의 마닐라 시민들이 문자 메시지를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여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1999년 11월 미국의 시애틀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 회의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한 것도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이른바 ‘엄지족’들이었다. 일본과의 독도문제 등 중요 국가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관련 홈페이지를 무차별로 공격하여 서버를 다운시킨 이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새로운 유형의 군중, 하나의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식화된 군중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라인골드는 영리한 군중은 언제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임의로 다른 사람을 처벌하는 군중(Lynch mob)이나 폭민은 끊임없이 사람을 처벌하는 잔학성을 양산다.협력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기술들의 결합은 동시에 전세계적인 감시 경제를 가능하게 하고 이타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피에 굶주린 사람들에게도 힘을 실어준다.“라고 말한다. 특정인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악성 댓글이 사회문제가 되고, 취재원에 대한 프라이버시와 인권에 둔감한 우리사회의 인터넷문화에 대한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라인골드는 책을 통해 네트워크 시대의 진정한 ‘참여군중’이 되는 법을 일러준다. 먼저, 오프라인 모임을 자주 가져라. 서로 모르면 상호 비방이 심해지며 현실 세계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할 에너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라. 신중하지 않은 여론은 악용되기 때문이다. 신중함은 지도자들만의 덕목이 아니라 국민들 모두의 덕목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안에 대해 토론하려 할 때는 관련 근거를 제시하고 인신공격을 피하라. 생산적인 토론을 잠식하는 감정적이고, 무지하고, 구호가 난무하는 온라인상의 전투와 구분하는 것은 예의와 이상과 증거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인터넷의 자율성을 보호하고, 혁신의 공유지를 사유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라.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2006년 최고의 블로그로 미국의  ‘선라이트재단’을 선정했다. 이 블로그는 미국 의회에 대한 심층 모니터로 유명한 사이트다. 이 사이트에서는 온라인 자원봉사자들과 변호사들의 유기적 협력관계를 통해 고품질의 심층정보를 전달한다. 자극적인 흥미만이 능사는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이트들을 기반으로 해서 군중들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관형어를 벗어버리고 ‘영리한’이라는 관형어를 달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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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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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몰두하는 선비들의 세계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정민/휴머니스트/2007년




어떤 스프링이 건강한 스프링일까? 답은 간단하다. 스프링에 물리적 압력을 주었을 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능력, 즉 복원력이 뛰어난 스프링이 건강한 스프링이다. 일반적으로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건강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젊고 싱싱한’ 스프링은 원상회복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자주 사용해서 탄성을 잃은 ‘노후한’ 스프링은 눌러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려도 원래의 상태로 이내 돌아간다. 술을 많이 마셔도 하루쯤 끙끙댈 뿐, 고통을 이틀이고 사흘이고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하루 밤을 새고 나면 며칠이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과음을 하면 그 후유증이 며칠을 간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원래상태로의 복구력이 현저하게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건강은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복구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복구력으로서의 건강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건강에 한해서일 뿐이다. 정신적 건강은 원상 복구력만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가령 A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자. 누구나 슬픔에 잠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A가 이내 평상심을 회복하고 아무런 동요 없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답은  NO다. 그는 배은망덕한 호로 자식이란 말을 듣기 십상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애통해야 할 만큼 애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정신적 건강함은 그 인간의 도리를 빼놓고서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아파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마련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이런 헛갈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선학들이 고민을 한 바 있다. 동양에서는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말했다. “즐거워하되 음란함에 빠지지 말고, 슬퍼하되 상심에 빠지지 말라”라는 것이 그것. 쉽게 말하면 오버(over)하지 말고 적당히 해두라는 것. 나아갈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 동양의 고전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충고다.


중용의 미덕을 <<중용>>에서는 ‘시중(時中)’의 개념을 들어 말한다. ‘시중’은 무조건 가운데를 취하는 행동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 왼쪽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것이 시중의 지혜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처신하라는 것이 시중의 진리이기도 하다. 한용운이 일본식으로 개명을 한 후배들의 뺨따귀를 후려쳤지만 정작 한용운이 세상을 떴을 때, 뺨을 맞은 이들이 오히려 ‘이제는 누가 우리의 뺨을 후려쳐주겠느냐.“라며 통곡하지 않았던가. 상황에 따라 호통이 필요할 때는 호통을 치고 뺨따귀를 갈겨야 할 때는  뺨따귀를 갈기고, 칼을 뽑아들어야 할 때는 칼을 뽑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시중의 지혜다. 늘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평균적으로 행동하고,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거주하는 것이 시중의 지혜는 아니다.


시중의 지혜를 체현하기 위해서는 도저한 열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열정으로 뱅샹 고호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예술적 에너지를 자신의 작품에 온통 쏟아 붓는 삶을 살았고, 베토벤은 들리지 않는 귀로 불후의 교향곡을 작곡했는지도 모른다. 예술적 천재를 완성한 것은 그들의 재능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근엄한 도학자들이나 이성주의자들은 열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스토아학파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정념에서 벗어나기를 주문했다. 동양에서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취미에 몰입하면 뜻을 잃어버린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도학자들에게 우주의 궁극을 따지는 철학적 사변은 옳은 것이었지만 난초를 즐기고 기예에 빠지는 것은 그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매니아들처럼 ‘비틀즈’ 구성원들의 생일이나 혈액형 등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파고드는 태도를 고루한 선비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달랐다. 18세기 지식인들이 과거의 선비들과 얼마나 달랐느냐를 살피기 위해서는 정민의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란 책을 펴보는 것이 좋다.


18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미친 듯 몰두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몰입의 상태를 벽(癖)이라 한다. 도벽, 노름벽, 주벽이란 단어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벽(癖)이란 어떤 것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서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또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를 치(癡)라고 한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이란 글에 정민이 소개하고 있는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면서 벽(癖)이나 치(癡)로 평가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다. 책의 저자 정민은  ‘그들은 편집광적인 정리 벽과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이 동지적 결속 아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고 평가한다. 책을 통해 18세기 지식인들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화장실을 가든 나들이를 가든 평생 <옥해(玉海)>란 백과사전을 끼고 살던 이의준은 집에 불이 나자 책을 구하려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또 판서 윤양래는 탈상(脫喪)한 집을 찾아가 상복과 두건을 모아오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석치(石癡)라는 호를 가진 정철조는 보이는 대로 돌을 파서 벼루로 만들었고 ‘책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癡)라는 호를 가진 이덕무는 밀랍으로 매화까지 만드느라 열심이었다. 꽃에 미쳐 수백여 종의 꽃을 세밀하게 그린 김덕형, 기석(奇石)에 탐닉했던 이유신, 앵무새를 관찰한 내용과 관련자료를 모아 ’녹앵무경‘을 낸 이서구, 비둘기의 품종과 교배, 성질 등의 내용을 담은 ’발함경‘을 낸 유득공의 기이한 면모를 책은 보여준다. 이옥이 친필로 쓴 『연경(烟經)』은 담배에 관한 책이다. 장절을 나눠 담배 농사의 단계별 주의 사항을 적었고, 담배의 문화사적 정리까지 시도했다. 가짜 담배 식별법에서 담배에 얽힌 전설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법까지 소개했다. 담배 피울 때 쓰이는 12종의 도구도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독한 편집증이다. 특히 이들은 앵무새와 같은 미물과 관련된 책에도 경(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격물(格物)’이란 사물들을 밑바닥까지 살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 정학유가 양계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편지를 띄운다. “기왕에 닭을 치기로 했다면 닭에 관한 기록으로 ’계경(鷄經)‘을” 지으라고 당부한다. 성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책들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경(經)‘이란 말을 미물에게까지 붙인 데에서 실제를 중시하는 실학자들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18세기에 나타났을까. 저자는 그 원인으로 새로운 문물의 경험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북벌을 주장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청나라 연경에서 느꼈던 문화적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방으로 뻗은 도로, 으리으리한 건축물,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과 산더미와 같은 서책, 서양에서 들어온 과학문물․․․. 더 이상 그들은 미천한 오랑캐가 아니었으며,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양이 질을 결정한다던가. 청나라를 통해 수많은 책들이 들어오고, 한성의 서적 유통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자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은 급격하게 변모했다.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여겼던 주자학이란 학문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 바로 여기에서 ‘실제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전에서 찾을 수 있는 이상적 가치보다는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진실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또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의 시를 짓겠다.“라고 천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저쪽‘보다는 ’이곳‘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책의 저자는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18세기 지식인들의 변화된 세계관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18세기 지식인들의 변화에 대한 열정은 시대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열정이 뜨거울수록 이들을 불온시하는 보수적 지배층의 감시도 커져만 갔다. 정조는 이들의 문체를 불온하다고 하여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정의 칼날을 빼들었다.  그것이 18세기의 한계였고 시대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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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 경제학
피에트라 리볼리 지음, 김명철 옮김 / 다산북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티셔츠의 일생을 추적하여 세계화의 실상을 밝힌다

티셔츠 경제학/ 피에트라 리볼리/다산북스/2005




요즘 한국의 시장에서 팔리는 옷들의 절반쯤은 중국의 현지 공장에서 제조된 것들이다. 한국에서 의류제조업을 하기에는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으로 의류공장을 옮겨가는 사업가들의 변이다. 자본의 국가 간 이동을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 세계화이고 보면, 사업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고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가들에는 세계화가 하나의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세계화가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가 않다.


세계화 시대에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더 낮은 임금과 더 약한 노동조합을 내걸고 ‘바닥을 위한 경쟁(race to the bottom)’-세계무역이 자유화되어 가면서 가령 중국산 물건과 같이 싼 가격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이 환경기준이나 노동기준을 낮추어 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비판적으로 바닥을 향한 경쟁이라고 표현한다.-을 벌인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시위의 현장에는 이 바닥을 위한 경쟁을 중지하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세계화가 자본가들을 살찌우고 노동자들의 삶을 열악하게 만든다는 주장인 셈이다.

1999년 세계화 반대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던 미국 조지타운대학 캠퍼스에서 한 여학생이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티셔츠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베트남 어린이가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만든 것이며, 시간당 18센트를 받는 인도의 소녀가  화장실도 못가고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불결함과 질병에 시달리면서 나이키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 당시 같은 대학의 국제경제학 교수였던 피에트라 리볼리는 이 여학생의 연설을 듣고  "과연 저 여학생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에 빠져든다. 리볼리 교수는 의문을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5년 동안 미국의 텍사스산 목화가 중국산 티셔츠가 되어 다시 미국 땅을 밟기까지,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버려진 티셔츠가 아프리카의 구제옷 시장에서 다시 팔리기까지의 티셔츠의 인생을 추적한다. 『티셔츠 경제학』은 바로 그 집요한 추적의 결과다.


리볼리 교수의 첫 방문지는 텍사스의 넬슨 라인쉬 농장. 그는 그곳에서 목화산업이 노예제, 멕시코 이주노동자, 기계화, 산학협동 등을 거치면서 200년 동안 세계 목화산업을 지배해온 내력을 밝힌다. 그는 <빈곤의 경작 Cultivating Poverty>이라는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미국의 목화 재배농들이 구가하고 있는 경쟁우위는 정부의 보조금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보조금만으로는 미국의 시장 지배력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조금이 그 결정적 요소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고 못박는다. 실제로 단위면적을 기준으로 할 때 목화 재배농들에게 주어지는 정부의 보조금은 옥수수나 콩을 재배하는 농민들의 5~10배에 이른다고 한다. 보조금 지급과 같은 정부의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미국식 자유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정치적 목적 때문에 시장의 질서를 위배하고 있는 셈이다.


리볼리 교수의 다음 여행지는 중국 상하이 공장이다. 그곳에서 목화는 실로 만들어지고. 실은 다시 옷감으로 짜이고, 옷감은 재봉을 거쳐 티셔츠로 탈바꿈한다. 목화가 티셔츠로 다시 탄생되는 과정에는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먼지투성이의 공기와 뇌를 마비시킬 정도의 소음에 시달리며 티셔츠를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이 전제되어 있음을 저자는 구체적 현장을 통해 보여준다.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중립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곳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세계화가 ‘바닥을 향한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반세계화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홍콩, 한국, 대만처럼)바닥을 향한 경쟁에서 밀려난 나라들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제국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면직물 공장 및 노동력 착취 공장을 점화스위치 삼아 도시화, 산업화, 경제적 다각화를 이루어냄은 물론, 농촌여성들에게 경제적․ 사회적 자유를 선사했다.”라고 말한다.


중국산 민짜 티셔츠는 미국에 들어와 염색을 거쳐 완성품이 된다.  미국의 섬유시장은 그동안 자유무역주의의 예외지대였다. 자국의 섬유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섬유 업계의 입김으로 수입을 제한하는 MFA(다자간 섬유협정)법안들이 만들어진다. 리볼리는 2005년부터 폐기된 MFA가 미국의 섬유산업 보호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수십 개의 약소국의 경제적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국의 수입상품을 일정기준에 따라 국가별 또는 수입업자별로 할당하여 일정기간의 수입 수량을 제한하는 수입쿼터제가 MFA의 종료로 인해 철폐되면 중국이 수출을 독점하게 되고 나머지 나라가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또 자유주의 무역으로 값싼 중국산 섬유가 미국으로 흘러들어오면 미국으로서는 최고의 티셔츠를 최저의 가격으로 살 수 있어 실질적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으나, 섬유업에 종사하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해고되는 사태를 맞게 되므로 자유주의 무역이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무역을 기조로 하는 세계화가 빈부의 차이를 극대화시킨다는 주장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인들이 버린 헌 옷은 전세계적으로 100여 개국에 고객을 확보하고 있으며, 미국은 전세계 구제옷 시장의 약 4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에게는 쓰레기 같은 옷들이 탄자니아에서는 훌륭한 옷으로 평가된다. 이 미국의 헌 옷이 아프리카의 섬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용을 위협하지만 이 헌 옷을 수입하는 사람과, 헌 옷을 분류하는 사람, 세탁하는 사람 등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또 저자는 아프리카 섬유산업이 빈사상태에 있는 원인은 보조금이나 무역장벽 같은 부유한 국가의 정책에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더 큰 원인은 부정부패와 불안정한 정치, 낮은 교육수준, 불안정한 재산권, 비효율적인 관련 법률 등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베트남이나 인도의 섬유공장 노동자들이 아닌 값싼 물건의 수입 증가를 두려워하는 정부나 이익집단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티셔츠의 생애가 시장의 경쟁보다는 시장에 대한 정치적 작용 아래 놓이게 되어, 가난한 사람들은 무자비한 시장의 힘 때문이라기보다 정치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고통받는다고 한다. 세계화가 이런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따뜻한 세계화가 되어야 하고  아직 산업화되지 못한 국가에 기회를 주는 ‘인간적인 세계화’가 돼야 한다는 것이 티셔츠의 일생을 추적한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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