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군중
하워드 라인골드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첨단통신기술의 발달로 등장하는 영리한 군중

참여군중/하워드 라인골드/황금가지/2003




등잔의 기름을 살 수없었던 가난한 선비들이 흰 눈과 반딧불이의 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탁월한 대중연설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대도 갔다. 바야흐로 말과 글을 대체하는 영상의 시대, 비쥬얼의 시대다. 강력한 멀티미디어와 이미지 툴(tool)에 힘입어 인터넷에는 각종 현란한 이미지가 난무한다. 압도적인 이미지의 공간에서 문자 텍스트는 무력하다. 요즘 수십만 회를 상회하는 조회수를 올리는 것은 단연 UCC(사용자 손수제작물: User Created Contents)다. 인터넷상에서는 이태백의 시나 소동파의 문장도 명성만큼의 조회수를 올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웹의 시대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시대요, 재미가 곧 명성인 시대다.


어떤 UCC 게시물은 단 하루 만에 10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학교폭력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공개되었다는 이 영상물의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동영상 공개로 피해자는 더 큰 충격에 빠졌고 가해학생들은 신상이 공개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과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취재의 대상인 취재원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는 콘텐츠 생산이 아쉬운 대목이다.


UCC의 조작가능성 또한 문제다. 얼마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충격적인 성폭행 동영상도 고교생들의 자작극으로 판명되었고, 한 가난한 대학생 커플의 지하철 안에서의 결혼식도 연극 전공 대학생들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조작가능성에도 불구하고 UCC의 긍정적 가능성을 점치게 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소속 버지니아주 조지 앨런 상원의원의 경우, 공화당의 텃밭이라고 알려진 버지니아주에서 유세 중에 민주당 지지자인 인도계 청년을 향해 "원숭이"라고 말하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오르게 됨으로써 네티즌들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그는 선거에 떨어졌다. UCC가 기존언론이 해내지 못했던 감시기능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이는 대안언론으로서의 UCC의 긍정적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7년 말에 치러지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이 직접 만든 UCC가 여론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디지털 민주주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최근 UCC의 선거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대략적인 입장을 밝혔다.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10대 미성년자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UCC를 제작하거나 게시할 수 없다, 19세 이상의 네티즌도 법정 선거운동 기간인 23일 동안만 관련 동영상을 올릴 수 있다, 특정 후보에 대한 허위 사실이나 비방을 동영상이 담고 있으면 안 된다, 네티즌이 자신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특정 후보 사이트로 갈 수 있는 링크, 배너 등을 달아놓는 것도 선거운동 기간에만 허용된다는 등의 지침이 그것이다.


‘영리한 군중’으로 직역할 수 있는 'Smart Mobs'라는 원제를 가진 하워드 라인골드의 『참여군중』은 네트워크 기술로 무장한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휘둘리고 정치권력에 의해 조종되는 수동적 대상에서 벗어나 역사와 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 능동적 주체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영리한 군중’들은 휴대전화나 PDA(개인 휴대단말기) 인터넷 등 첨단기기로 무장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군중을 일컫는다.


라디오나 TV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 하에서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라디오나 TV, 신문과 잡지와 같은 과거의 매체 환경 속에서 대중들은 기업이나 권력이 흘려주는 메시지를 접수하는 단순한 수신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과 휴대폰이 등장하자 사정은 달라진다. 대중들은 사회전반의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영리한 대중,Smart Mobs’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첨단기기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출시된 제품의 문제점을 들어 집단소송을 걸기도 하고, 특정한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비판하기도 하며,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100만명 이상의 마닐라 시민들이 문자 메시지를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여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1999년 11월 미국의 시애틀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 회의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한 것도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이른바 ‘엄지족’들이었다. 일본과의 독도문제 등 중요 국가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관련 홈페이지를 무차별로 공격하여 서버를 다운시킨 이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새로운 유형의 군중, 하나의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식화된 군중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라인골드는 영리한 군중은 언제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임의로 다른 사람을 처벌하는 군중(Lynch mob)이나 폭민은 끊임없이 사람을 처벌하는 잔학성을 양산다.협력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기술들의 결합은 동시에 전세계적인 감시 경제를 가능하게 하고 이타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피에 굶주린 사람들에게도 힘을 실어준다.“라고 말한다. 특정인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악성 댓글이 사회문제가 되고, 취재원에 대한 프라이버시와 인권에 둔감한 우리사회의 인터넷문화에 대한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라인골드는 책을 통해 네트워크 시대의 진정한 ‘참여군중’이 되는 법을 일러준다. 먼저, 오프라인 모임을 자주 가져라. 서로 모르면 상호 비방이 심해지며 현실 세계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할 에너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라. 신중하지 않은 여론은 악용되기 때문이다. 신중함은 지도자들만의 덕목이 아니라 국민들 모두의 덕목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안에 대해 토론하려 할 때는 관련 근거를 제시하고 인신공격을 피하라. 생산적인 토론을 잠식하는 감정적이고, 무지하고, 구호가 난무하는 온라인상의 전투와 구분하는 것은 예의와 이상과 증거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인터넷의 자율성을 보호하고, 혁신의 공유지를 사유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라.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2006년 최고의 블로그로 미국의  ‘선라이트재단’을 선정했다. 이 블로그는 미국 의회에 대한 심층 모니터로 유명한 사이트다. 이 사이트에서는 온라인 자원봉사자들과 변호사들의 유기적 협력관계를 통해 고품질의 심층정보를 전달한다. 자극적인 흥미만이 능사는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이트들을 기반으로 해서 군중들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관형어를 벗어버리고 ‘영리한’이라는 관형어를 달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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