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기술과 사회 - 21세기 엔지니어를 위한 기술사회론 입문
이장규.홍성욱 지음 / 지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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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모든 이들의 이익을 공평하게 증진시켜주는가



이장규와 홍성욱이 공동집필한 『공학기술과 사회』는 기술이 어떻게 태어나 변화하며, 인간과 사회와는 기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또 기술의 성공과 실패 요인은 무엇인지, 현대 공학기술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해석과 논의들을 한 자리에 모은 책이다. 


이 책의 2장은 「기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들」이란 글이다. 현대사회에서 기술이 가지는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지금까지 기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개념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설명의 틀이 제공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기술결정론’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다. 『공학기술과 사회』 의 2장은 바로 이 두 개념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해보자. 먼저 기술결정론이다.


기술결정론은 말 그대로 기술이 인간의 사회적 환경을 결정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타자기라는 새로운 사무기술 등장하면서 비서들은 능동적인 지위에서 지시받은 문서를 기계적으로 작성하는 수동적 처지로 전락했다든가, 세탁기와 같은 가사 기술의 발전으로 여성들이 가정에서 해방되었다든가, 피임기술이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줌으로써 여성해방에 일조했다는 주장이 이른바 ‘기술의 결정론’의 입장이다. 기술결정론은 몇 가지로 그 주장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술결정론은 기술이 그 자체의 고유한 발전 논리, 즉 공학적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동일한 경로를 밟는다고 가정한다. 기술결정론에서는 기술 그 자체가 사회와, 더 나아가 인간과도 무관하게 발전한다고 간주하며, 심지어는 기술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기술결정론적인 입장에서는 기술의 발전경로는 단일한 것으로 어떤 특정 기술을 만들어 내는 데 유일하게 가장 좋은 설계 방식이나 생산방식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체계는 이러한 통념에 대해 반박한다. 이 이론체계에서는 어떤 특정의 기술이나 인공물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여러 행위자들- 엔지니어, 자본가, 투자은행, 정부, 소비자 등-의 이해관계나 가치체계가 기술이 특정한 형태로 결정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가령 대단위 아파트를 건설을 두고 공청회를 연다고 했을 때, 시민단체들은 삶의 질을 고려하여 친환경 개발을 주장하고, 건설업체들은 영리성을 주장해서 고층아파트 위주로의 개발을 주장한다고 할 때, 어떤 기술이 채택될 것인가는 그 기술이 가지는 우수성에 있지 않고, 그 기술을 주장하는 집단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이상의 여러 개의 기술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경합을 할 때, 우리는 흔히 더 나은 기술이 선택되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의 이론체계를 지지하는 이론가들은 기술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에 관련된 사회집단들의 정치적․경제적 힘이라고 주장한다.


『공학기술과 사회』에서 자자들은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핀치(Trevor J. Pinch)와 바이커(Wiebe E. Bijker)의 ‘자전거’ 연구가 그것이다. 이 두 과학기술사회학자는 어째서 다이아몬드 형태의 틀과 고무 타이어를 쓰고 두 바퀴의 크기가 비슷한 안전자전거(safety bicycle) 모델이 지금은 보편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이런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답은 대체로 지금 우리가 쓰는 모델이 다른 모델보다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이다. 지금 살아남은 기술이 다른 기술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중들의 상식이다. 그러나 핀치와 바이커는 자전거가 어떻게 오늘의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발전과정을 두고 정밀한 분석을 했다.


자전거의 발전 과정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전거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집단이다. 여기에는 자전거를 만든 기술자, 남성 이용자뿐 아니라 여성 이용자,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 심지어 자전거 반대론자도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자전거 디자인에 대해 그들 나름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들은 56인치짜리 커다란 앞바퀴가 달려서 페달을 밟아 격한 운동을 할 수 있는 모델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앞바퀴가 큰 자전거는 여성 이용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모델을 개발해야 했는데, 당시 여성들은 보통 긴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어떤 식으로 개발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사회집단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집단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일한 기술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다르게 제시한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집단들 사이에는 그 기술이 가진 문제점과 해결책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이 복잡한 협상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하게 되면 안정적인 기술적 인공물의 형태가 선택된다. 사회적 구성론자들은 이 합의의 과정이 사회적 과정임을 강조한다. 자전거 변천 과정에서도 자전거 경주와 같은 사회적 요소가 논쟁의 종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자전거 경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공기 타이어를 장착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빠르다는 것이 경주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자전거 설계에서 중요하지 않던 속도가 자전거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새로이 부각되었는데, 그 결과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안전 자전거 쪽으로 경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기술 디자인을 종결하는 데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여성 자전거 애호가들이었다. 자전거를 격렬한 스포츠로 여기던 남성들은 큰 앞바퀴가 있는 자전거를 선호했지만, 여성들은 치마라는 복장 때문에 앞바퀴가 작고 타이어가 쿠션 기능을 해주는 안전 자전거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은 기술적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집단, 이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자전거라는 인공물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기술이 사회를 결정할 뿐, 사회구조는 기술의 논리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기술결정론자들은 주장한다. 가령, 등자(stirrup)가 봉건제를 낳았고. 인쇄술이 르네상스를 만들었으며, 기계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등자란 말을 타는 사람이 발을 고정시키는 마구의 일종인데, 이 등자가 도입되면서 말을 탄 채로 창이나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 결과 기병이 부상했으며, 이 기병들이 성장을 해서 중세 영주가 되었다는 것이 중세 기술사를 연구한 화이트 주니어의 주장이다. 결국 등자라고 하는 기술이 봉건제를 결정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술결정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등자를 사용했던 프랑크족과 앵글로-색슨족 중 프랑크족만이 8세기 전반에 봉건제를 성립시켰다는 사실을 든다. 다시 말해 한 사회에 새롭게 도입된 기술이 그 사회의 변화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개인 혹은 집단적인 행위자의 선택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와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발전한 기술은 사회의 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기술의 발전이 모든 사회집단에게 보편적인 이익이 된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정보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편리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소위 ‘정보 격차’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정보화 진전될수록 정보 부자'(information rich)와 정보 빈자(information poor)라는 새로운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정보의 불균형은 소득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부동산이나 주식에 관련하여 고급정보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그 정보를 이용하여 더 많은 재산을 증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편익을 증대시켰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기술이 인간에게 장밋빛 미래를 안겨준다는 기술유토피아에 대한 견해도 성찰을 요구한다. 정보화 기술은 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기의 경우, 그것이 원래는 정보의 수집과 관리의 차원에서 도입된 기술일지라도, 그것이 일단 도입되면 기술이 인간성을 변화시켜 애초에 없던 기술의 속성이 부가될 수도 있다. 가령, 감시카메라의 경우도 인간이 그 기술을 결정하여 방범의 도구로 도입하여 사용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 기술이 인간성을 변화시켜 감시카메라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도구로도 악용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기술은 단일한 발전경로를 가지며, 그 이익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간다는 기술결정론의 낙관주의는 결코 인간의 복지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술을 상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의 영향성을 과소평가할 수만도 없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의 기능과 역할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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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
에릭 J. 카셀 지음, 강신익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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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몇 해 전에 방영된 의료 드라마에서는 직장암을 앓고 있는 한 앵커우먼에 관련한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직장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항문을 절개해야 한다는 나이든 의사와, 항문을 절단하는 것은 환자의 사회생활에 사형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이유로 다른 치료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젊은 의사와의 논쟁이 드라마의 핵심이었다. 나이든 의사는 의사의 임무가 생명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값싼 동정심을 버리고 가장 확실한 치료방법으로서 항문을 절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젊은 의사는 의사의 존재 이유가 단지 생명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환자의 복지까지도 책임져야 하고, 환자의 사회적 삶까지도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록 위험이 따르지만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의 주장은 팽팽하게 전개된다.


미국인 의사 에릭 J. 카셀(코넬대 의대 공중보건학 임상교수 겸 뉴욕병원 내과의)의 저서,  『고통 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가 이런 논쟁을 지켜보았다면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답은 젊은 의사다. 물론 카셀의 의견을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카셀은 나름대로의 경청해볼 만한 이유를 제시한다.


카셀은 현대의학이 고통을 너무 물리학적으로만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고통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성, 즉 환자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통증이나 호흡곤란은, 전체유기체로서의 인간을 제압하여 고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신체적 증상이다. 하나의 온전한 유기체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만 온전한 것은 아니다. 의학의 대상인 개개의 환자들은 물체의 속성만을 갖는 인간이 아니다. 고통의 온전함과 개별성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수집한 모든 정보를 통해 그 사람을 이해한다. 고통을 옳게 이해하려면 시간감각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미래 뿐 아니라 지속적인 과거도 고통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내 자신의 일부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아의 개념에 다른 사람이 포함되어야 한다.” 라는 주장은 현대의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위에서 말한 의료 드라마의 논쟁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이든 의사는 환자의 물리적 고통을 없애는 것에 치료의 중심을 두었지만 젊은 의사는 환자의 ‘개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환자의 개별성이란 바로 환자의 ‘시간성’을 말한다. 그녀의 시간성이란, 그녀가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오늘은 어떤 존재이며, 내일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정보 모두를 말한다. 그녀는 과거에도 앵커우먼이었으며, 현재에도 앵커우먼이고, 미래에도 앵커우먼으로 살고 싶어 한다. 바로 그런 시간성이 그녀의 정체성을 구현한다. 바로 그 정체성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육체적 고통은 단순히 통증에 불과하지만 심리적 고통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가령 아이를 낳는 엄마의 경우 통증을 느끼지만 심리적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 목이 쉬었을 때 사람들은 통증을 느끼지만 그것 때문에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수의 경우는 다르다. 가수는 목이 쉬었을 때 육체적 통증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의사가 치료해야 할 것은 물론 1차적으로는 육체적 통증이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고통 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의 저자, 카셀의 주장이다.


앵커우먼의 항문을 절개하는 것은 축구 선수의 다리를 절단하는 것만큼이나 사회적 삶에 치명상을 입히는 행위다. 그것은 통증을 없앤다는 목적 아래 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므로, 어떤 점에서 그들의 미래를 앗아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의사들이 질병 상태와 신체 기능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점차 환자의 미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카셀은 말한다.


카셀은 의사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하여 그 사람을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 사람이 앓고 있는 질병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질병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이 그 병을 앓는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이자 뮤지컬 가수였던 쥴리 앤드류스는 성대 결절로 수술을 받아 원래의 목소리를 잃자 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상대로 의료소송을 벌여 엄청난 위자료를 받아냈다고 한다. 성대 결절은 학교 교사나 가수와 같이 지속적으로 음성을 남용함으로써 목에 염증이 생기는 증상이다. 그 염증은 분명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므로 의사로서는 당연히 통증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수술에 앞서 환자의 삶에 대해 보다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카셀의 주장이다. 환자의 삶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의사의 임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학은 환자의 통증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환자의 삶에는 무관심했다고 카셀은 말한다.


카셀은 현대의학이 질병의 일반론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질병이 특이한 체질을 가진 한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발병 양상에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의사는 환자를 통하지 않고는 질병에 접근할 수 없다. 의사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한다. 더구나 같은 질병이라도 환자의 체질, 유전적 특성, 해부학적 변이에 따라 다른 발병 양상, 경과, 결과를 보일 수도 있다. 과학적 의학은 이러한 개별 변이를 인정하지도, 그것을 해결할 두 있는 방법론을 제시해주지도 못한다.”라는 발언은 의사들이 환자 한 명 한 명의 개별성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카셀의 충고로 읽힌다.


카셀은 어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념과 가치체계는 주로 문화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질병이 한 사라에게 미치는 영향의 성격은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됨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결국 한 인간이 느끼는 고통도 문화적 요인에 좌우될 수 있으므로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속한 문화에 대해 의사의 이해가 필요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또한 환자와 의사의 바람직한 관계에도 주목한다. 의사가 치료의 대상을 질병을 가진 환자로 이해하기보다는  환자를 한 명의 인간으로 이해할 경우에 질병의 경과도 좋아지고, 환자의 순응도도 높아진다고 한다. “병자는 누군가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좋은 의사란 환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의사이며, 이 경우 환자와의 관계는 더욱 확고해진다.”라고 카셀은 말한다. 이 환자와 의사와의 신뢰관계가 얼마나 긍정적인 치료 효과를 주는지 그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어 말한다.


몇 년 전 나의 환자 한 명이 초기 낭소암 제거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런 환자에게는 수술 뒤 얼마 동안 멜팔란이라는 항암제를 투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투여한 멜팔란이 그 환자의 골수를 파괴해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을 만드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처럼 심한 재생불량성 빈혈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이런 경우에는 혈액,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을 수혈하면서 골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환자를 치료한다면서 오히려 그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관계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 환자는 몇 주 동안 수혈 받으면서 병원에 머물렀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솔직히 물었다. 내가 바로 그녀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 장본인인데 어째서 의사를 바꾸지 않고 나에게 계속 자신을 돌보도록 하느냐고. 그 환자는 정색을 하고서는 “당신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거는 아니잖아요”라고 답했다. 나는 환자의 그런 태도가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 환자는 그 뒤 완전히 회복되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병의 증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확실하게 나을 것이다'라고 말을 해주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이 호전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이른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위약효과)’다. 이때 의사나 약사 등 그 병에 대해 권위가 있거나 신뢰성이 높은 사람의 말이라면 더욱 큰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의사가 환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치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의사의 신뢰감은 먼저 의사의 실력에서 온다. 의사의 실력은 의학에 관련한 부단한 지식의 습득의 결과다. 생명과 질병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이 의사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제일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사람과 그 사람의 생명을 보는 따뜻한 인간성이 보태진다면 의사의 환자에 대한 신뢰성은 한결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의술의 아버지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음미하며 어떤 의사가 환자에 대해 깊은 신뢰의 마음을 선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게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나에게 알려준 모든 것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한 때로부터 더 없이 존중하겠노라. 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 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나는 자유의사로서 나의 명예를 걸고 위의 서약을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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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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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로 대한민국은 뜨겁게 달구어졌다. 2006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은 의심할 나위 없이 정의였다. 얼마 전 황우석 사건이 보여준 비극은 국가의 이익을 지나치게 우선시하여 냉정한 통찰력을 잃어버린 데서 발생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월드컵과 황우석 사태의 광풍이 지나간 뒤 TV에서는 광개토대왕,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 민족의 영웅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조선의 왕실의 맥이 단절되지 않았다는 허구적 사실을 전제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하였다. 반일 정서로 무장한 가상 정치영화 <한반도>가 개봉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고구려 담론도 날이 갈수록 무성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민족주의'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조선왕조 붕괴와 식민시대, 근대국가 건설, 분단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압도적 가치를 지니는 단어가 되었다. 좌우, 진보. 보수가 따로 없이, 민족은 의심할 바 없는 지상의 가치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갈등과 충돌이 대부분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 국민국가란 이름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하면서 민족주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국내 지식사회에서는 국제사회가 이미 폐기처분한 민족 이념에의 철 지난 집착과 한민족의 우월성만을 내세우는 편협한 민족사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한양대학교의 임지현 교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을 통해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임지현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인종적 민족주의’로 정의하면서, 혈연·지연·언어 등에 집착한 결과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는 폐쇄적이고 퇴행적인 가치로 전락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일부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전락한 것은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며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서구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민족주의가 충분히 유효하다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나친 과잉 민족주의는 현실인식을 방해하며 자민족 우월주의,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데에는 양쪽 모두 공감하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제프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하여 민족은 인종에서 유래하는 것도, 언어로 구분되는 것도, 종교로 결속되는 것도, 그리고 국경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민족이란 언제든지 새로 생겨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는 개념일 뿐임을 그는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민족보다는 인간 자체를 생각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의 저자 탁석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민족이란 의심할 수 없는 가치처럼 보이지만 이도 실상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는『만들어진 전통』의 저자, 에릭 홉스봄이다. 저자는 유럽의 민족국가는 19세기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창조한 ‘상상의 공동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종족적 민족주의의 독으로 가득 찬 유독성 쓰레기더미가 됐고, 그 독은 대중의 의식 깊숙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이 쓰레기 더미를 치우는 일이 역사가의 당면과제라고 제시한다. 그는 민족의 일체성을 드러내는 증거로 여겨지는 전통이 사실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유럽에서 전통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19세기말~20세기 초로서 이 시기는 유럽의 각국들이 민족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에릭 홉스봄은 민족의 전통을 만들어 내는 존재로서 역사학자를 꼽는다.


 ‘전통’은 흔히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기 마련이다. 옛날의 선조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전통의 상당수는 극히 최근에 형성된 것이거나 어떤 정치적 목적 아래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진 창작물이라는 것이 에릭 홉스봄의 견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통의 다수는 전통사회의 유산이 아닌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홉스봄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나긴 역사와 문화를 응축한 상징물로 여기는 격자무늬 남성용 치마 ‘킬트’를 내세우지만, 그 킬트의 역사는 최대로 잡아도 300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스코틀랜드인이 아니라 잉글랜드인이라는 사실이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병합되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잉글랜드 랭커셔 출신 제철업자 토머스 로린슨이 연료용 목재를 얻기 위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삼림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을 인부로 고용하면서 일하기 편한 옷으로 만든 것이 킬트였다. 그러니까 이 치마는 벌목 노동자들에게 입히려는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19세기 이후 민족의 원형을 찾는 낭만주의 바람이 불면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의상으로 날조되고, 거기에 방직업자들의 농간이 끼어들어 스코틀랜드의 민족의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을 만들어내는 역사학의 위험성을 핵폭탄을 제조하는 핵물리학이나 마약 원료인 양귀비에 비유한다. "나는 역사학이라는 전문 영역이 핵물리학과는 달리 최소한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학이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홉스봄이 가장 경계하는 역사학은 민족주의에 기대어 역사와 신화를 날조하는 행위였다. 그는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재건하기 위해 지나간 시대를 '좋았던 시절'로 규정하는 '역사회고주의'를 역사학의 독소로 지적한다. 광개토대왕이나 연개소문의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의 대제국으로 돌아가자는 회고적 그리움에 젖게 하는 TV 드라마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비판인 셈이다. 에릭 홉스봄은 우리도 한때 대제국을 건설한 주역이었다는 식의 신화를 날조하는 역사학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들은 역사적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하며 특히 역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일을 비판해야 한다" 또 흡스봄은  "역사가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격정에서 비켜서 있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사실과 허구를 엄격히 구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한다.


홉스봄은 서유럽의 많은 정치적·문화적 전통들이 기껏해야 100~200년 전에 세상에 처음 등장했으며, 특히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30~4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창작된 이유를 정치·사회의 거대한 변화와 연결해 설명한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전통사회가  파괴되고 새롭게 ‘근대사회’를 창출해가는 과정에서 ‘국민통합’의 중요한 장치로서 새로운 전통이 요구되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군주제가 유지된 영국에서는 과거의 신민이 국가의 주체로 등장하자 군주는 이들의 복종과 충성과 협력을 얻어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낡은 유물이 된 군주제를 유지하려면 존립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이런 필요에서 왕궁의 공식 기념행사가 점점 화려해지고 엄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엄숙한 의례를 ‘천 년 전통의 장관과 웅대함’이니 하는 말로 그 유구성을 강조하지만, 그 전통이란 게 고작 100년 남짓 된 최근세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의 왕실 의례는 그저 그랬다는 것이 홉스봄의 지적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관식은 오늘날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대관식은 전혀 예행연습을 거치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예배 순서를 잊어버렸으며, 캔터베리 대주교는 여왕의 손가락에 너무 헐렁한 반지를 끼웠다.” 결국 대관식의 웅대함은 유구한 전통이 아니라 군주제의 존립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한 일본의 정신과 의사가 일본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비판하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애국심이라는 병』이라는 책을 쓴 카야마 리카는 일본 국기를 들고 뛰어다니고 여러 가수들이 일본 국가를 부르는 등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일고 있는 애국심의 유행을 ‘하나의 병’ 으로 규정했다. 일본의 경제가 하행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불안감이 팽배해졌고 사람들은 내부의 불안을 잊기 위해 바깥에 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카야마 리카는 그들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무기력을 잊기 위해 자신을 강한 일본에 투사하려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그는 교과서 왜곡과 평화헌법 수정 움직임 같은 것들도 자신감이 아니라 불안감에서 온다고 진단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대들이 편협한 애국심을 탈피해 평화와 공존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유럽연합(EU)에서는 ‘민족’을 넘어 ‘공존’을 가르친다고 한다. EU 회원국들은 자국 문화를 보호하려는 문화다양성 정책, 유전자조작 미국 농산물 수입 반대, 영어의존 탈피 언어정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자국민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EU는 새로운 가치관과 동질성을 지닌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국제이해교육, 평화교육, 다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이해 교육이란 ‘탈민족주의 교육’이다. 가령,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영웅이요, 넬슨은 영국의 영웅이라는 식의 교육이 아니다. 새 EU 교과서에서 나폴레옹처럼 자국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타국을 침략한 사람들과 같이 힘의 논리를 관철한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대신 유럽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 갈등과 분쟁에서 협상을 이끌어내고 평화를 추구한 인물, 유럽문화를 발전시킨 인물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 지성을 대표했던 에라스무스, 예술을 대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그들이다. 한마디로 국제이해 교육이란 자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는 배타적인 교육이 아니라 공존과 평화의 논리를 가르치는 포용의 교육이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폴란드어나 리투아니아어 강좌를 무료로 개설했다. 외국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조국의 언어를 배우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유도하여 언제라도 본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한다. 타국민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단일민족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을 구성한 결혼 이주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필요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배타의식 또한 재고되어야 한다. 포용심은 한반도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세계전체를 껴안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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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온생명
장회익 / 솔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면 인간의 생명은 온전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생명체라 할 수 없다. 곡식을 먹고 숲의 공기를 마신다는 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의존해 있다.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개체적 특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오직 관계 속에서만 인간의 생명은 의미가 있다. 더구나 인간의 생명은 자연현상으로만 환원시켜 이해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현상이므로 인간의 생명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법률, 윤리 등 모든 영역에 관련되는 복잡한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을 외부와 고립된 자족적인 체계라 생각하지 말고 다른 생명체와 연관된 시스템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유기체적 세계관을 대표하고 있는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장회익의 『삶과 온생명』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자.


장회익은 『삶과 온생명』중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생명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대사’, ‘생식’, ‘진화’의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는 데, 이들 모두가 고립된 개체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적용시킬 수 없는 ‘관계적’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즉 생명은 개체적 특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온생명(global life)이라 함은 생명 개념의 핵심 사항을 이러한 '관계'에 놓고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해내는 체계에 대해 부여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장회익은 ‘온생명’은 개별적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와 갖는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로서의 생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온생명이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구상에 나타난 전체 생명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생명체들로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全一的 )실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본다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의 부분적 질서, 즉 국소질서를 장회익은 온생명과 구분하여 ‘개체생명’이라 명명한다. 인간과 여타의 다른 동물과 식물들은 지구라는 온생명을 구성하는 부분적 질서로서의 개체생명인 셈이다. 장회익은 이 개체생명체들이 매우 복잡한 다층적 존재양상을 지닌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컨대 우리가 세포들을 일차적인 개체생명이라 할 때, 이들로 구성되는 유기체들 즉 다람쥐나 전나무와 같은 동식물 생물체들은 한층 높은 이차적 개체생명이 된다. 그리고 다람쥐 나 전나무 등의 개체들이 속한 생물의 종들은 이들보다 또 한층 높은 개체생명의 예가 된다. 사람의 경우 하나하나의 세포로서의 개체생명, 각각의 개인으로서의 개체생명, 그리고 인간이 속하고 있는 생물학적인 종 즉 인류로서의 개체생명 등의 다층적 개체생명의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


온생명이론의 출발점은 생명의 기본단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장회익은 온생명을 ‘기본적인 자유에너지의 근원과 이를 활용할 물리적 여건을 확보한 가운데 이의 흐름을 이용하고 있는 각 단계의 개체들로 구성된 유기적 체계 전체’라고 정의한다. 기본적 자유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이다. 이 태양의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개체들로 구성된 유기적 전체가 곧 지구다. 인간은 지구 안의 다른 생명체, 나아가 지구환경을 떠나 생존할 수 없으며 다른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구 생물계 전체와 태양과의 유기적 관계 전체를 생명의 최소단위로 봐야 하며, 이를 ‘온생명’이라 부르자는 것이다.


인간과 주변의 생명체들로 구성되는 개체생명체들의 생존은 필연적으로 온생명의 생존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신의 생존이 자신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장회익은 온생명에서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개체생명에 대한 '보생명(co-life)'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계의 생명들이 인간에 인간에 대한 보생명인 셈이다. 인간은 이 보생명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 생존해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생명만을 위해 보생명을 돌보지 않는다. 그것이 곧 환경의 위기다. 이 환경의 위기는 곧 보생명의 위기이며 보생명의 위기는 곧바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위기에 직결된다.


장회익은 인간들이 '인간중심적'인 자연관에서 떠나 생명, 인간, 문명을 보다 포괄적인 틀에서 포용하라고 충고한다. 생명과 인간 문명은 온생명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적인 현상들이며, 보다 근원적인 생명체로서의 온생명을 이해하지 않고 개체생명들간의 이익만을 고려할 때 현대문명은 파멸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를 하나의 인체로 간주하면 지구의 온난화는 곧 체온의 상승에 비유된다. 지구라는 온생명의 체액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상의 토양과 물, 대기 등의 성분과 농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또 신체의 신진대사에 이상이 생겨 신체내의 필수 영양소가 소진되고 노폐물이 배설되지 않아 독성물질이 체내에 쌓이듯이, 대체불가능한 자원들이 급격히 고갈되고 처리 곤란한 폐기물들이 쌓여 나가고 있다.  또 세포에 해당하는 생물종은 자꾸 줄어들고 있다. 이런 온생명의 이상 현상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생물종이 이루는 이상번영 현상에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엄청난 속도로 그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암세포와 같이 비정상상적으로 불어나는 인간의 숫자가 지구라는 온생명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장경제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확장된 인간의 욕망은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갈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 증폭되는 인간의 산업활동이란 다름 아닌 온생명의 신체 위에서 신체의 각 부위를 각가지 방식으로 변형시켜 인간만을 위해 유용한 그 무엇을 짜내는 행위이다. 온생명에 대한 인간들의 이 무리한 요구가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이본 배스킨의 저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이란 책은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들이 어떻게 연관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로키산맥에 서식하는 나무제비는 딱따구리가 파놓은 가문비나무의 구멍에 둥지를 틀고 딱따구리는 뚫린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을 핥아먹는다. 그런데 딱따구리가 구멍을 팔 수 있으려면 곰팡이가 슬어 나무가 썩거나 부드러워져야 한다. 또한 말벌, 나비, 휘파람새, 다람쥐 등도 딱따구리 우물에서 수액을 훔쳐먹는 반면 가문비나무를 위해 해충을 잡아먹는다. 가문비나무, 딱따구리, 곰팡이, 말벌, 나비 등이 하나의 그물망을 이루는 셈이다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부분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고 상호 의존, 협력한다. 이들은 그물처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 부분은 모든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자연의 한 부분의 손상은 기계의 한 부품이 손상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세계 전체의 손상을 가져온다. 모든 생명체는 개별적으로 삶을 지탱할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다른 존재의 덕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존재 없이는 어떤 존재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생명은 거대한 연관의 체계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생명공학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거대한 연관체계다. 하나의 생명을 조작한다는 것은 그 거대한 연관체계에 혼돈을 야기하는 것이라는 점을 깊이 있게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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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E. H. 카 지음, 박종국 옮김 / 육문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보는 동북공정의 의미



방대한 메모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간 모든 사실들을 남김없이 기록하기는 역부족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이 역사가의 운명이다. 대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 된다. 즉 가치가 있는 것은 취하고 가치가 없는 것은 버리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치가 있고 무엇이 가치가 없는 것인가? 사람들마다 세계관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다 보니 가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1970년대를 독재의 시절로 인식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 시절을 획기적인 경제개발의 시대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판이하게 달라지고 과거의 사실도 다르게 해석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역사연구가라면 1970년대를 독재의 시대로 해석할 것이고, 경제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생각을 가진 역사연구가라면 1970년대를 경제성장의 시절로 해석할 것이다. 전자의 역사연구가는 열악한 노동자의 삶과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에 관련된 기록들을 제시할 것이고, 후자의 역사연구가는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GNP와 수출액을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역사연구가의 현실인식은 무엇을 연구의 테마로 설정하고 어떤 역사적 자료의 수집할 것이며, 수집된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요체다. 과거의 사실만 가지고 역사를 볼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라는 것이 E.H 카의 주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아는 문제의식을 의미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연구를 한 것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으며, 고려말 몽고의 침입기에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쓴 것도 민족의 설화를 통해서 자주권을 되찾겠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렇게 현재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과거의 사실을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 바로 이것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이는 현재를 망각하고 오직 실증적․ 객관적 엄밀성만을 추구하는 실증주의적 태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른바 ‘동북공정’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연구를 현재의 문제 해결에 유용하게 써보겠다는 것이 동북공정을 기획한 역사연구가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E.H 카가 말하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얼치기 대화다. 진정한 대화는 타인의 견해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전제로 한다.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역사연구가 학문적 엄밀성마저 잃고 그로 인해 이웃국가들과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식민사관에 불과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역사는 과학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를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획기적으로 확장시켜 주었지만 환경파괴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만만치 않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E.H 카가 말하는 ‘과학과 진보’에 대한 전면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진정한 현재는 미래를 껴안는다. 협소한 현재적 가치에만 매몰되어 타자를 배척하는 배제의 논리가 아닌, 타자를 껴안는 평화와 공존의 논리가 진정한 미래의 가치다. 그 타자의 개념에 환경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포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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