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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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로 대한민국은 뜨겁게 달구어졌다. 2006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은 의심할 나위 없이 정의였다. 얼마 전 황우석 사건이 보여준 비극은 국가의 이익을 지나치게 우선시하여 냉정한 통찰력을 잃어버린 데서 발생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월드컵과 황우석 사태의 광풍이 지나간 뒤 TV에서는 광개토대왕,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 민족의 영웅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조선의 왕실의 맥이 단절되지 않았다는 허구적 사실을 전제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하였다. 반일 정서로 무장한 가상 정치영화 <한반도>가 개봉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고구려 담론도 날이 갈수록 무성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민족주의'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조선왕조 붕괴와 식민시대, 근대국가 건설, 분단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압도적 가치를 지니는 단어가 되었다. 좌우, 진보. 보수가 따로 없이, 민족은 의심할 바 없는 지상의 가치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갈등과 충돌이 대부분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 국민국가란 이름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하면서 민족주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국내 지식사회에서는 국제사회가 이미 폐기처분한 민족 이념에의 철 지난 집착과 한민족의 우월성만을 내세우는 편협한 민족사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한양대학교의 임지현 교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을 통해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임지현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인종적 민족주의’로 정의하면서, 혈연·지연·언어 등에 집착한 결과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는 폐쇄적이고 퇴행적인 가치로 전락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일부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전락한 것은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며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서구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민족주의가 충분히 유효하다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나친 과잉 민족주의는 현실인식을 방해하며 자민족 우월주의,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데에는 양쪽 모두 공감하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제프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하여 민족은 인종에서 유래하는 것도, 언어로 구분되는 것도, 종교로 결속되는 것도, 그리고 국경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민족이란 언제든지 새로 생겨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는 개념일 뿐임을 그는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민족보다는 인간 자체를 생각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의 저자 탁석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민족이란 의심할 수 없는 가치처럼 보이지만 이도 실상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는『만들어진 전통』의 저자, 에릭 홉스봄이다. 저자는 유럽의 민족국가는 19세기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창조한 ‘상상의 공동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종족적 민족주의의 독으로 가득 찬 유독성 쓰레기더미가 됐고, 그 독은 대중의 의식 깊숙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이 쓰레기 더미를 치우는 일이 역사가의 당면과제라고 제시한다. 그는 민족의 일체성을 드러내는 증거로 여겨지는 전통이 사실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유럽에서 전통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19세기말~20세기 초로서 이 시기는 유럽의 각국들이 민족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에릭 홉스봄은 민족의 전통을 만들어 내는 존재로서 역사학자를 꼽는다.


 ‘전통’은 흔히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기 마련이다. 옛날의 선조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전통의 상당수는 극히 최근에 형성된 것이거나 어떤 정치적 목적 아래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진 창작물이라는 것이 에릭 홉스봄의 견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통의 다수는 전통사회의 유산이 아닌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홉스봄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나긴 역사와 문화를 응축한 상징물로 여기는 격자무늬 남성용 치마 ‘킬트’를 내세우지만, 그 킬트의 역사는 최대로 잡아도 300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스코틀랜드인이 아니라 잉글랜드인이라는 사실이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병합되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잉글랜드 랭커셔 출신 제철업자 토머스 로린슨이 연료용 목재를 얻기 위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삼림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을 인부로 고용하면서 일하기 편한 옷으로 만든 것이 킬트였다. 그러니까 이 치마는 벌목 노동자들에게 입히려는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19세기 이후 민족의 원형을 찾는 낭만주의 바람이 불면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의상으로 날조되고, 거기에 방직업자들의 농간이 끼어들어 스코틀랜드의 민족의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을 만들어내는 역사학의 위험성을 핵폭탄을 제조하는 핵물리학이나 마약 원료인 양귀비에 비유한다. "나는 역사학이라는 전문 영역이 핵물리학과는 달리 최소한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학이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홉스봄이 가장 경계하는 역사학은 민족주의에 기대어 역사와 신화를 날조하는 행위였다. 그는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재건하기 위해 지나간 시대를 '좋았던 시절'로 규정하는 '역사회고주의'를 역사학의 독소로 지적한다. 광개토대왕이나 연개소문의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의 대제국으로 돌아가자는 회고적 그리움에 젖게 하는 TV 드라마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비판인 셈이다. 에릭 홉스봄은 우리도 한때 대제국을 건설한 주역이었다는 식의 신화를 날조하는 역사학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들은 역사적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하며 특히 역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일을 비판해야 한다" 또 흡스봄은  "역사가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격정에서 비켜서 있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사실과 허구를 엄격히 구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한다.


홉스봄은 서유럽의 많은 정치적·문화적 전통들이 기껏해야 100~200년 전에 세상에 처음 등장했으며, 특히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30~4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창작된 이유를 정치·사회의 거대한 변화와 연결해 설명한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전통사회가  파괴되고 새롭게 ‘근대사회’를 창출해가는 과정에서 ‘국민통합’의 중요한 장치로서 새로운 전통이 요구되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군주제가 유지된 영국에서는 과거의 신민이 국가의 주체로 등장하자 군주는 이들의 복종과 충성과 협력을 얻어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낡은 유물이 된 군주제를 유지하려면 존립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이런 필요에서 왕궁의 공식 기념행사가 점점 화려해지고 엄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엄숙한 의례를 ‘천 년 전통의 장관과 웅대함’이니 하는 말로 그 유구성을 강조하지만, 그 전통이란 게 고작 100년 남짓 된 최근세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의 왕실 의례는 그저 그랬다는 것이 홉스봄의 지적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관식은 오늘날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대관식은 전혀 예행연습을 거치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예배 순서를 잊어버렸으며, 캔터베리 대주교는 여왕의 손가락에 너무 헐렁한 반지를 끼웠다.” 결국 대관식의 웅대함은 유구한 전통이 아니라 군주제의 존립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한 일본의 정신과 의사가 일본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비판하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애국심이라는 병』이라는 책을 쓴 카야마 리카는 일본 국기를 들고 뛰어다니고 여러 가수들이 일본 국가를 부르는 등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일고 있는 애국심의 유행을 ‘하나의 병’ 으로 규정했다. 일본의 경제가 하행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불안감이 팽배해졌고 사람들은 내부의 불안을 잊기 위해 바깥에 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카야마 리카는 그들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무기력을 잊기 위해 자신을 강한 일본에 투사하려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그는 교과서 왜곡과 평화헌법 수정 움직임 같은 것들도 자신감이 아니라 불안감에서 온다고 진단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대들이 편협한 애국심을 탈피해 평화와 공존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유럽연합(EU)에서는 ‘민족’을 넘어 ‘공존’을 가르친다고 한다. EU 회원국들은 자국 문화를 보호하려는 문화다양성 정책, 유전자조작 미국 농산물 수입 반대, 영어의존 탈피 언어정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자국민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EU는 새로운 가치관과 동질성을 지닌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국제이해교육, 평화교육, 다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이해 교육이란 ‘탈민족주의 교육’이다. 가령,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영웅이요, 넬슨은 영국의 영웅이라는 식의 교육이 아니다. 새 EU 교과서에서 나폴레옹처럼 자국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타국을 침략한 사람들과 같이 힘의 논리를 관철한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대신 유럽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 갈등과 분쟁에서 협상을 이끌어내고 평화를 추구한 인물, 유럽문화를 발전시킨 인물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 지성을 대표했던 에라스무스, 예술을 대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그들이다. 한마디로 국제이해 교육이란 자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는 배타적인 교육이 아니라 공존과 평화의 논리를 가르치는 포용의 교육이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폴란드어나 리투아니아어 강좌를 무료로 개설했다. 외국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조국의 언어를 배우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유도하여 언제라도 본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한다. 타국민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단일민족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을 구성한 결혼 이주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필요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배타의식 또한 재고되어야 한다. 포용심은 한반도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세계전체를 껴안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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