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브드
만다 구니토시 감독, 모리구치 요우코 외 출연 / 대경DVD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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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를 늘리기 위해 뼈를 늘리는 수술이 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 수술의 고통을 참으면 숏다리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시술을 하는 병원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고통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작은 키로 살겠다는 사람이 점점 는다면 어떨까. 나는 내 얼굴이 부끄럽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의 얼굴로서 살겠다, 라는 사람들이 는다면 성형외과는 물론이지만 패션산업 관계자들도 울상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시라. 타인의 삶을 따라가겠다는 대중들의 가열찬 의지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몸짱ㆍ얼짱 사업’은 바야흐로 극점을 향해 달라고 있음을.

마케터들은 끊임없이 소비자들을 향해 부르짖는다. 당신의 현재에 만족하지 마라. 한층 업그레이드 된 당신을 위해 이 옷을 입어라, 이 신을 신어라, 이 화장품을 발라라, 그런데 이런 마케터들의 권고에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영화 <언러브드>의 여주인공 카게야마 미츠코(모리구치 요코)가 그녀다. 이 참하게 생긴 여자는 성장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큰집, 더 나은 드레스와 신발, 명품 가방, 근사한 칵테일파티, 해외여행,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다. 굶기를 하나, 직장이 없나(그녀는 시청공무원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 산다. 정년도 보장되어 있다.), 이 정도면 되었어. 안분지족하는 은둔자의 삶이 따로 없다. 서른이 넘어서도 독신생활을 계속하는 그녀는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한 지 오래다.

영화는 왜 이 여자가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제국주의적인 성장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서일까, 아니면 반인간적이고 반생태적인 거대기술과 생산시스템에 환멸을 느끼고『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대안철학을 가지고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생태주의적 동기에서일까. 그녀가 ‘작은 삶’을 선택한 동기에 대한 언급은 영화 어디에도 없다.

만다 구니토시 감독은 "강하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 이런 태도는 경쟁만이 궁극의 인간 활동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옳다. 풀잎은 눈치 보지 않고 풀잎으로 살고, 대나무는 눈치 보지 않고 대나무로 산다. 강하게 산다는 것이 목에 힘주고 사는 삶이 아니라는 거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일 뿐이라는 배짱으로 사는 삶이 곧 강한 삶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제외한 자연계의 모든 존재들은 주어진 분수대로의 삶을 산다. 성형을 하는 강아지들도 없고, 다이어트를 하는 하마들도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바로 그것이 강한 삶이라는 거다.  나는 당신들처럼 한 치의 키라도 더 늘이기 위해,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안달하지 않겠다. 오히려 세상과 거꾸로 된 삶을 살아보겠다. 이 여자, 겉모습만 보고 호락호락하게 봐선 큰 코 다친다. 미츠코의 각오는 이렇게 단호하다. 이 단호한 결의 앞에 몸이 단 남자가 있다. 유능한 벤처 사업가인 가츠노(나카무라 토오루)다.

배우 나카무라 토오루가 누군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 장동건과 함께 강인하고 럭셔리한 외모를 보여주었던 그가 아닌가. 나카무라 토오루가 분한 가츠노의 얼굴 어디에도 허술한 소박함은 없다. 한마디로 꽉 짜여진 용모다. 쏘아보는 듯한 그의 강렬한 눈빛은 성공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미츠코에게 다가간다. 나에게는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능력이 있어. 자, 나의 구매력을 봐. 기껏 몇 푼에 급급해 않는다구.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봐. 나는 너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능력이 있다구. 성장주의와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똘똘 무장한 이 자본주의의 전사(戰士) 앞에서 그러나 미츠코의 몸과 마음은 냉담하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분명 반자본주의적이다. 이런 그녀에게 가츠노는 절규한다. 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너의 몸이 나를 향해 열릴 수 있는 거지. 더구나 너는 내게 이미 몸을 허락하지 않았어?.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구. 그런 네가 왜 나를 거부하는 거지?

여자는 답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거라지만 나는 내 방식의 삶을 버리고 당신의 삶으로 투항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삶으로도 충분해요. 당신의 삶을 비난하지 않겠어요. 내 삶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요. 미츠코의 이런 발언에 ‘얼씨구나’ 추임새를 넣어주는 책이 있다. 웨인 W. 다이어가 지은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그것. 심리학자인 그녀는 ‘최선을 다하라’ 라는 말이 사람들을 성취로 몰아붙이고 완벽주의적 가치를 강요하는 가장 파괴적인 말이라고 지적한다. 다이어는 삶의 신조를 ‘최선을 다하자’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열심히 해보자. 하고 싶은 것은 그냥 하자’로 바꿔 보라고 권한다. 미츠코가 그런 여자다. 정사가 끝나고, 자고 가라는 가츠노의 요구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간단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해요” 가츠노가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미츠코는 ‘작은 삶’을 위해 성실을 다하는 삶을 산다.

미츠코와는 달리 ‘작은 삶’이 부끄러운 남자가 있다. 시모카와(마츠오카 ??스케)가 바로 그다. 그는『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번듯한 대학졸업장 하나 없이 달랑 공고 졸업장 하나로 살려고 하니, 삶이 버겁다, 구매력도 없다, 실력도 없다, 외모도 그럭저럭이다, 뭐하나 변변한 게 없다. 아, 20대 80의 사회여, IMF시대 한국사회 속 대중의 자화상과 시모카와의 삶의 모습은 묘하게 겹친다. 그러나 변두리 인생 청산하고 이 바닥에서 한 번 확 뜨고 싶은 그에게는 <초록물고기>에서의 막동이만큼의 깡다구도 없고, 주먹도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누가 봐도 분에 겨운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미모의 미츠코가 그를 선택한 것이다. 필자는 이 선택이 만다 구니토시 감독의 대중에 대한 구애라고 생각한다. 잘난 20프로를 쫓아가기 위해 가랑이 찢어지지 말고, 우리 같이 우리의 삶을 살자구. 고급 레스토랑에서 랍스터를 먹고 해외여행 경비 팍팍 써대지 못해도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배곯지 않는 삶이 우리에게 있잖아. 그러나 이 여유는 중산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여유다. 적어도 그녀는 시청 공무원이 아닌가. 덜컥 병이라도 나면 어쩌지, 가진 것 없이 노후를 맞게 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서는 시모카와에게는 여유가 없다. 안정된 직장이 없는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장(戰場)이다.

나는 너의 여유를 사랑할 수 없어. 나도 성공하고 싶어, 대박나고 싶어, 타워팰리스에 살고 싶어. 그의 욕망은 정확히 대중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솔직히 이런 대박의 환상에 젖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시모카와의 욕망은 성공의 신화를 거부하는 미츠코를 배척한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 차버리는 것이다. 너도 너의 삶을 살고 싶다면, 나도 나의 삶을 살 거라는 당당한 자기 선언인 셈이다. 그러나 모리구치 요코의 미모를 눈여겨보라. 소박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니트가 잘 어울리는 용모에 따스한 마음씨,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시코카와는 다시 그녀를 선택한다. 과연 시모카와는 그녀의 미모를 선택한 것일까, 그녀의 삶을 선택한 것일까. 알 수 없다. 다만 후자를 선택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경쟁으로 가랑이가 찢어지느니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을 둘러보니 나를 지지해줄 응원자가 많지 않다. 텅 빈 극장 안에서 당돌하게 이 소박한 영화가 대박나기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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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SE 골든 라벨 한정판 (2disc)
필립 카우프만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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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의 아파트에 테레사가 처음 찾아 왔을 때, 이 촌스런 여자의 배에서는 돌연 꾸르륵 소리가 난다. 로맨틱한 순간에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더구나 상대는 명색이 엘리트 의사 아닌가. 변두리에서 여급 생활을 하던 테레사는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다. 로맨스의 법칙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비어져 나오는 소리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다.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는 사랑도 몸에서 터져 나오는 구호를 막을 수 없다. 쿤데라는 꾸르륵 소리가 나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만다.’ 사랑의 환상이 깨질지 몰라 불안에 떠는 테레사를 바람둥이 토마스는 가볍게 안아준다. 바람둥이라고 자처하는 토마스도 따지고 보면 ‘프로 바람둥이’는 못 된다. 바람둥이의 무기가 무엇인가. 비정함이다. 한 군데 미련을 둘 만큼 자비심이나 동정심이 많지 않아, 라고 말할 때 이 둥지에서 저 둥지로 거처를 옮겨가는 바람둥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토마스는 테레사에게 연민을 가진다. 괜찮아. 불안해 할 것 없어. 그의 동정심이 그를 테레사에게 주저앉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 한 <프라하의 봄>에서는 이 장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고성능 음향장치를 쓴다 해도 배 속에서 나는 소리를 잡아내기란 어렵다. 설령 잡아낸다 할지라도 영화적 분위기는 깨진다. 엽기적 상황을 연출해가면서 리얼리티를 살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감독은 궁여지책으로 테레사로 하여금 재채기를 하게 한다. 원작이 살짝 비틀리는 순간이다. 감기에 걸리셨군요, 자, 의사인 제가 진찰을 해볼까요. 자, 웃옷을 벗어봐요. 영화는 각색을 통해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작업’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소설은 포옹의 순간, 육체에서 비어져 나오는 소리를 분석하는 데 무려 두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 장광설을 지루하게 읽어내느니 영화 한편 때리는 것이 낫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다. 어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서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름대로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다.

테레사와 토마스가 바에서 만나는 순간을 상기해보라. 책을 읽고 있는 토마스에게 역시 책을 읽고 있던 여급인 테레사가 다가간다.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은 책이다. 소설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말한다. ‘테레사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토마스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적 도피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에게 책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 도구였다. 영화에서 책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소설에서는 비루한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양탄자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친절한 내레이션이 없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 역시 ‘모든 독서는 출애급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이곳’에 만족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떤 결핍, 어떤 허기를 메우려는 충동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눈을 돌리게 한다. 테레사는 끊임없이 책으로 눈을 돌린다. 책은 ‘토마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키냐르는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이곳이 충분하다면 왜 다른 세상과의 접속을 꿈꾸겠는가. 비루한 삶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테레사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토마스를 만났다. 그녀에게 토마스는 출애급의 모세였다. 그러나 테레사가 유일신으로 섬기는 남자는 테레사만을 섬기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테레사를 무겁게 한다. 그녀는 결코 사랑 앞에서 사비나처럼 쿨할 수 없다.

사비나는 화가다. 그녀는 풍족하지는 못해도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독립이 가능하다. 그러나 테레사는 다르다. 늘 불안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남자, 사랑과 섹스를 별개로 아는 남자 앞에서 그녀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테레사는 토마스를 움켜쥐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탐욕과도 다르고 소유욕과도 다르다. 비루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역정이 움켜쥔 지푸라기를 속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모질다.

영화에서, 토마스와 혼곤한 정사를 치른 날 새벽, 그의 손을 꼬옥 잡고 잠에 들어 있는 테레사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는 토마스는 그녀의 손에 슬그머니 책 한 권을 쥐어준다. 세심한 관람객이라면 책의 제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다. 원작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당신이 붙들고 있는 나는 믿을만한 언덕이 못돼. 진정으로 당신이 기댈 언덕은 바로 책이라고. 나를 쥐지 말고 책을 쥐어. 그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와 소설의 전개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테라사의 손에 쥐어주는 각색이 센스 있다.

소설에서는 토마스가 왜 여러 여자를 섭렵하는지를 긴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한다. 육체적 사랑이란 똑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상상하지 못하는 몇 퍼센트의 부분이 남게 마련이라는 것이 토마스의 주장이다. 자아의 유일성은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는 것,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백만 분의 일의 상이한 점과 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의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 토마스는 바로 그 백만 분의 일을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백만 분의 일의 상이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오로지 섹스에서뿐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둥이 토마스에 대한 쿤데라의 변호다. 유일무이한 한 인간의 구체성을 찾아다니는 이 바람둥이의 적은 누구인가. 바로 전체주의다. 인간의 개별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폭력은 혁명의 유효한 수단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개별성을 무시하고서는 어떤 섹스도 없다. 섹스는 그 개별성에 대한 탐닉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의 상대는 언제나 구체적인 개별자다. 그만의 독특한 체취와 느낌 없이 어떻게 섹스를 상상할 수 있는가. 쾌락이란 그 독특함에 대한 탐닉이다. 그 독특함을 수집하러 다니는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뉘앙스를 허락하지 않는 혁명은 달갑지 않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자신의 죄악을 모른다. 설령 자신의 죄악이 알려지더라도 그들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는다. 대충 얼렁뚱땅 넘어간다. 그러나 토마스는 바람둥이기는 하지만 속물은 아니다. “반성과 참회를 모르는 혁명과는 타협할 수 없어.”라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바고도 의사이고 토마스도 의사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지바고가 따스하다면 토마스는 날카롭고 차다. 지바고와 토마스가 똑같이 매력적이지만 토마스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선과 악이 토마스를 껴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공동의 선(善)을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일체의 일탈을 반혁명적으로 엄단하는, 유머감각을 잃은 혁명, 이념적 무거움만을 좇아서 일체의 유희정신을 반동으로 몰아가는 혁명에 토마스는 몸으로 항거한다. 바람둥이, 그것은 토마스의 스타일리시한 반항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을 ‘원’이라는 기호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기하학적 정신에 섬세의 정신은 저항한다. 섬세의 정신이 저항을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개별자들의 구체성이다. 니체는 ‘추상은 구체에 대한 폭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개별자의 취향과 컬러를 무시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이고 폭력적이다. 개별자들의 주검 위에 얻어진 어떤 혁명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토마스는 몸으로 말한다. 수많은 여자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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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유통 기한 - [할인행사]
도리스 되리 감독,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외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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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유통기한>에 등장하는 여자, ‘이다(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를 보라. 배낭 하나 달랑 들고 해외여행을 떠나지를 않나, 여행지에서 처음 만나,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어 보지 못한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하지를 않나. 자신의 비즈니스에 지쳐 퇴근한 저녁에 왜 이렇게 집구석이 지저분하냐고 득달같이 남편에게 화를 내지를 않나, 이다는 분명 ‘나쁜 여자’다. 이 대목에서 발칵 할 페미니스트들이 한두 분이 아닐 것이다. 고정하시라.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의 저자 우테 에어하르트가 정의하는 ‘나쁜 여자’론에 의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에어하르트는 말한다. “남녀평등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방해받는다. 하나는 권리를 조금도 나누려 하지 않는 남성들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여성들 때문이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도 꾸욱 참고, 들어도 못들은 척 시집살이를 감내하라는 충고다. 결국 느느니 한숨이요, 생기느니 화병이다. 그러나 ‘이다’에게 화병은 없다. 쌓이면 풀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그녀에게 있다. 말할 것은 말하라. 자신의 의견을 막힘 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있다. 하고 싶으면 해라. 이거다 싶으면 자신을 헌신할 배짱도 있다. 편견을 뛰어넘어라.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성적 고정관념으로부터도 그녀는 자유롭다. 확실히 이 여자는 ‘나쁜 여자’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에서 우테 에어하르트는 바로 이런 여자가 성공한다고 역설한다. 누가 하는 요구이든지 간에 그것이 무리하다 싶으면 No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언제나 당당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 술 더 떠 ‘여자들이여, 나쁜 여자가 되라’고 선동한다. “착한 여자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고 에어하르트는 말한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여자, 영화 속의 이다가 바로 이런 여자다.

그러나 정작 성공이란 무엇인가? 12평짜리 단칸방에서 54평짜리 고급아파트로의 공간적 이동이 성공인가? 월수 100만원에서 연봉 10억으로의 물량 확대가 성공인가? 평사원에서 CEO로의 수직적 에스컬레이팅이 성공인가? 매출 규모 10억 원에서 1000억 원으로의 대박 행진이 성공인가? 로또복권 당첨으로 호화잔치판을 벌이는 것이 성공인가? 그런 성공이라면 나는 관심 없소, 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이다가 선택한 남자 ‘오토(크리스티안 울멘)’가 바로 그다. 번듯한 정장 하나 없다. 머리는 부스스하다. 턱수염은 까칠하다. 그의 외모는 웅변한다. “나는 성공에는 관심이 없어. 나는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 나의 자리는 그늘이야. 여기에서도 행복해. 더 바라지 않아.” 그는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친구 ‘레오(시몬 베호벤)’와는 딴판이다. 레오는 영락없이 비즈니스 스타일이다. 야심도 있고 열정도 있다. 오토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친구다. 하긴 둘의 사이가 죽고 못 사는 우정으로 묶인 것도 아니다. 그 둘에게 유일하게 같은 코드가 있다면 물고기일 뿐이다.

“문명은 팽창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팽창은 호전성을 가지고 있어 경제, 군사 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전쟁들이 전쟁 제조기가 되어 정부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정부를 앞세워 군사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경쟁하는 군국주의는 끝내 스스로 멸망하고 만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문명은 사회의 자살행위이다.”라고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은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오토의 내면에 그런 대안철학들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Let It Be”. 그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좋을 뿐이다. 성장을 위한 야심 찬 계획으로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다. 반성장의 이념으로 골치 아프고 싶지도 않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것이다.

오토가 어렸을 때 부모는 툭하면 싸움질이었다. 오토는 제 방으로 달려가 귀를 막았다. 귀를 막는 행위는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행위다. 외부로부터의 단절은 곧 자신 안의 칩거를 의미한다. 자신 안의 칩거, 그것은 성장을 거절하겠다는 의미다. 툭하면 고함소리를 질러대는 어른들의 세상, 그 소음의 세상으로부터, 불화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단호하게 소음으로부터 귀를 막고 자신 안에 갇힌다. 소음 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 소박하나마 오토의 행복론이다. 소음을 유발하느니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애를 키우고 살림을 한다. 그가 맛보고자 하는 것은 작은 행복이지 성취의 쾌감이 아니다. 천하를 얻고도 나를 잃는다면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천하를 얻지 못했지만 행복하다. 그러나 문제는 성장주의자 아내다. 오토는 이다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불화도 유전이 되는 것인지. 부모의 불화가 오토에게서 재현된다.

성장주의자 이다에겐 오토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생명력이란 곧 팽창의 힘이 아닌가. 당신의 태도는 패배주의자의 그것이다. 삶이란 성장이고 확장이다.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간다. 이런 그녀에게는 더글러스 러미스의『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든가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와 같은 책들이 읽힐 리가 없다. 『무소유』를 설파하는 명상서적들도 눈에 들어 올 리 없다.

성장주의자 저편에 생태주의자가 있다. 그들은 말한다. 성장의 이데올로기, 팽창주의적 열망이 지구를 망친다는 사실을 몰라. 인간의 손길이 없이도 천년 억년 순환을 거듭하는 저 대자연의 질서를 보라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기획이 없이도, 비즈니스에 대한 열망이 없이도, 저절로 생멸을 거듭하는 대자연이 있지 않느냐고. 확장과 성장과 패권의 욕망이 전쟁을 일으키고 공생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냐고. 그 남성적 욕망을 반성하는 곳에 대안의 길이 있다고.

스코트 니어링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문명은 팽창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팽창의 본성은 명백히 남성적 본성이다. 가부장제는 그 남성적 본성의 산물이었다. 제국주의 또한 팽창과 성장의 욕망이 키워낸 산물이었다. 성장의 그늘은 늘 여성이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초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우리만 그늘에 있어야 하는가. 우리도 햇볕 속에 있고 싶다. 우리에게도 ‘팽창할 수 있는 권리, 성공의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 능력에서 처지지 않는데도 현실 속의 관습과 제도가 여성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한 것은 제도의 개혁이었다.

영화 속의 현실은 북유럽이다. 그곳에서는 어느 정도 제도의 개혁이 성공했다. 성적인 불평등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하는 의구심을 해결해야 할 차례다. 팽창과 확장의 권리를 남성으로부터 이양 받아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진정으로 여성주의냐는 질문에 대해 에코페미니즘은 No라고 말한다. 여성이 빼앗긴 것은 공격적인 남성적인 권력이 아니라는 것, 여성들이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것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다.

영화 속에서 이다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여성성’이 아니다. 그녀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일 뿐이다. 그것은 확장적이고 폐쇄적이다. 영화를 보라. 그녀는 아무런 상의 없이 집안의 페인트 색깔을 결정한다. 제대로 상의도 하지 않고 결혼을 제의한다. 비즈니스에 있어 확장은 기본이다. 행복은 확장에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제국주의적 행복론인 셈이다. 그녀의 확장과 패권의 꿈이 깨지자 그녀는 돌연 반성한다. “성장만이 능사는 아니야. 행복은 그게 아니었어.”라고. 하지만 그녀의 반성은 얕다. 그러나 이다의 한계가 연출자 도리스 되리의 한계는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유머다. 한계를 슬쩍 비틀어 웃어버릴 수 있는 여유.

심각한 메시지를 심각하지 않게 띄우는 도리스 되리의 연출이 산뜻하다. 물고기들은 부레의 부력으로 물에 뜬다지만 무거운 메시지를 가볍게 공중으로 띄울 수 있는 공중부양술의 비밀은 <파니핑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파워를 보여준 도리스 되리의 내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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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1disc)
짐 자무쉬 감독, 빌 머레이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발렌타인 30년에서 소주나 막걸리까지. 술에는 분명한 계급이 있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셔도 어떤 사람들은 시장통 순대국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갈데 없는 ‘망쪼인생’들은 서울역사 왼쪽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킨다. 취생몽사, 싼 술에 취해도 취하기는 마찬가지.

커피에도 계급은 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 원두를 사용한 제품도 있지만 동네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싸구려 가루커피도 있다. 누구는 스타벅스에서 우아하게 사오 천 원 하는 명품 커피를 마시지만 누구는 이삼 백 원 하는 자판기 커피에 만족해야 한다. 그것도 운이 나쁘면 아무리 두드려도 동전만 삼키고 맹물만 나오기 일쑤다. 그러나 그 어떤 기호품보다 커피는 평등한 음식인 셈이다. 마시는 장소와 모양새만 다를 뿐이지 검은 즙액을 홀짝이면서 잠깐의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담배도 그렇다. 조금 고급스럽다고 해봐야 오십 보 백 보. 폐부 깊숙하게 빨아 들여 코로 내뿜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담배 연기를 들이키고 한 숨을 길게 내뱉으면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사람들, 그들은 속상하면 한 대 피우고, 불안해도 한 대 피우고, 이야기가 꼬여 분위기가 마땅치 않을 때도 한 대 피운다. 커피 한 잔도 안 되는 가격으로 이만한 진정 효과를 주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담배야말로 아주 저렴한 진정제인 셈이다. 구순기 때 젖을 빨며 식욕과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해 욕구불만인 사람이 성장 후에 담배를 입으로 빨며 무의식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심층심리학적 분석을 내놓는 심리학자들도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먹물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과거로 돌아가 다시 엄마에게 젖가슴을 요구할까. 멀리까지 갈 것 없이 담배 하나를 입에 물면 된다.

어쨌든 커피와 담배는 저렴한 기호품이다. 카페인과 니코틴의 해악을 들먹이면서 웰빙을 위해서 담배를 끊고 녹차를 마시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보다 업그레이드된 삶과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금연을 주장한다. 어떤 회사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결단력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까지 취급하기까지 한다. 담배를 물고 있는 자들이 인사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짐 자무쉬는 이런 작태들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력에 의해서 금연을 하면 몰라도 체제가 강요한다고 해서 끊을 수 없다는 고집, 그런 게 언더그라운드의 삐딱이 정신이지 않은가. 짐 자무쉬는 담배와 커피에 관한 한 남이야 지게를 지고 제사를 지내든 말든 상관 말라는 투다. 나는 내 식으로 살다가 가겠다는 투다. 역시 뉴욕 인디펜던트 무비의 기수다운 배짱이다. 그런 배짱으로 만든 영화가 <커피와 담배>다.

짐 자무쉬는 웰빙주의자들의 충고가 무색하게 <커피와 담배>의 전편에 걸쳐 커피와 담배를 전면 배치해 놓았다. “자, 보아라. 얼마나 많은 삶이 커피와 담배를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가?”라고 외치는 듯하다. 모두 11개의 단편 속에 커피와 담배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당신의 사연 하나를 슬쩍 끼워 넣어도 영화의 맛이 크게 손상되지 않을 만큼 영화가 보여주는 삶은 오밀조밀하고 밋밋하다. 휘황찬란한 로맨스도 없고 액션도 없다. 고만고만한 우리네 일상을 영화는 이야기할 뿐이다. 게다가 화면은 시종일관 흑백이다. 때문인지 배경은 구질구질해 보이고(물론 예외적으로 호텔라운지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인물들은 싸구려스럽다. 그래서 친근하고, 또 그래서 안쓰럽다.

그의 데뷔작 <천국보다 낯선>에서 영화 속 에디는 말한다. “어딜 가도 왜 이렇게 다 똑같은 거지.” 뉴욕이건, 클리블랜드건, 플로리다건 그들에게는 다 똑같다. 뉴욕의 낡은 아파트건 플로리다의 바람 부는 바닷가이건 황량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커피와 담배> 속의 무대가 커피잔이 하나 달랑 놓인 테이블인 것도, 어딜 가도 다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짐 자무쉬의 황량한 현실인식이 반영된 탓은 아닐까. 이 황량한 세계 위에 현란하게 세팅을 하고 화려한 액션이나 로맨스를 보여주며 영화적 판타지를 보여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짐 자무쉬는 그 밋밋하기 짝이 없는 배경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조로운 흑백 화면 그리고 다시 매번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성공신화를 거부하고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짐 자무쉬의 현실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장치들이 아닐까. 그러나 어디든 똑같이 황량하다고 말하면 삶이 너무도 쓸쓸하니까 슬쩍 농담도 끼워놓으면서 삶을 한번 살짝 눙쳐보는 것은 아닐까. <커피와 담배> 속의 유머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이런 변두리의 삶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라고 말하는 짐 자무쉬의 위안처럼 들린다. 커피의 색깔과 같은 짐 자무쉬의 블랙 유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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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땅은 누구의 것인 e시대의 절대사상 24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외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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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지사유제의 문제점을 평생 동안 고민했던 헨리조지의 토지


  지난 반세기 동안 서울의 땅값은 무려 4만 배나 폭등했다고 한다. 또 대한민국의 토지가격의 총액은 프랑스를 여덟 번 사고도 남는다고 한다. 게다가 대한민국 땅부자 상위 1%가 전체 개인 소유 토지의 57%를 갖고 있다고 한다. 토지소유 편중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부동산 투기로 집값의 상승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주목해야 할 학자가 있다.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의 저자,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가 바로 그다.


  그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영세한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규교육을 거의 못 받은 채 14세에 선원생활을 시작하여 인쇄공, 광부, 관청직원, 기자 등 다양한 일자리를 전전하였지만 열렬한 독서가로 수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그의 저서 가운데 기념비적인 저작물이 바로 1879년에 펴낸 『진보와 빈곤』이다. 당시 성경을 제외하고는 논픽션 중 가장 많이 보급된 책이었고, 그의 장례식에는 10만이 넘는 인파가 조문을 했다니 당시의 그의 명성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익 앞에서는 귀족과 천민이 따로 없었다. 미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해 서부 지역의 땅을 사들였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일리노이주 수백만 평의 땅에 투기를 벌였다. 3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까지 땅장사를 했다.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부자 부모를 만나 좋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로 엄청난 부자가 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쓰게 된 직접적 이유였다.


  이 책이 집필이 시작된 1877년의 미국은 불황의 시기였다. 동부에서는 대규모의 파업이 일어났다. 6개주에서는 무장한 군대가 경계태세를 갖추었고, 볼티모어와 시카고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캘리포니아에서는 200명 이상의 사상까지 발생했다. 캘리포니아의 가뭄은 불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당시 번영하는 뉴욕에서 극도의 사치와 빈곤이 공존하는 것에 충격을 느꼈다. 왜 사회는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지, 그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은 이가 바로 조지 헨리다.


  그는 경제 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는 토지소유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노동을 통해서 창출된 가치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 창출된 가치가 토지소유자에게 독점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존의 세제를 모두 없애고 토지사용의 대가인 지대를 모두 세금으로 징수하는 토지단일세(land only tax)를 도입할 것”을 그는 제안했다. 다시 말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주들의 불로소득을 몽땅 세금으로 환수하자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농부가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하며,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에 세금을 부과하는 기존의 조세체제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이러한 토지 단일세에 의해 토지의 투기가 사라지면 지대가 하락하고, 그 하락분만큼 임금이 상승하고, 나아가 환수된 지대가 사회전반에 재분배되면 그만큼 빈곤도 축소된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가 발전함에 다라 지대수입이 증가하므로 국가의 재정이 호전되고, 생산활동에 부과되던 다른 조세가 감면되므로 경제적 효율성이 획기적으로 증대된다고 보았다.


  조지 헨리의 토지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영국과 아일랜드의 토지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중국의 쑨원(孫文)에게도 영향을 끼쳐, 쑨원은 헨리 조지의 토지사상을 삼민주의의 하나인 민생주의의 중요 내용으로 삼았다. 러시아의 톨스토이도 그의 토지사상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초에 등장한 토지공개념, 즉 세제 강화를 통한 투기 이익의 국민 공유를 주장하는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방향도 크게 보면 헨리 조지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헨리 조지가 주장하는 내용이 대한민국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교환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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