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의 아파트에 테레사가 처음 찾아 왔을 때, 이 촌스런 여자의 배에서는 돌연 꾸르륵 소리가 난다. 로맨틱한 순간에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더구나 상대는 명색이 엘리트 의사 아닌가. 변두리에서 여급 생활을 하던 테레사는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다. 로맨스의 법칙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비어져 나오는 소리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다.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는 사랑도 몸에서 터져 나오는 구호를 막을 수 없다. 쿤데라는 꾸르륵 소리가 나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만다.’ 사랑의 환상이 깨질지 몰라 불안에 떠는 테레사를 바람둥이 토마스는 가볍게 안아준다. 바람둥이라고 자처하는 토마스도 따지고 보면 ‘프로 바람둥이’는 못 된다. 바람둥이의 무기가 무엇인가. 비정함이다. 한 군데 미련을 둘 만큼 자비심이나 동정심이 많지 않아, 라고 말할 때 이 둥지에서 저 둥지로 거처를 옮겨가는 바람둥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토마스는 테레사에게 연민을 가진다. 괜찮아. 불안해 할 것 없어. 그의 동정심이 그를 테레사에게 주저앉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 한 <프라하의 봄>에서는 이 장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고성능 음향장치를 쓴다 해도 배 속에서 나는 소리를 잡아내기란 어렵다. 설령 잡아낸다 할지라도 영화적 분위기는 깨진다. 엽기적 상황을 연출해가면서 리얼리티를 살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감독은 궁여지책으로 테레사로 하여금 재채기를 하게 한다. 원작이 살짝 비틀리는 순간이다. 감기에 걸리셨군요, 자, 의사인 제가 진찰을 해볼까요. 자, 웃옷을 벗어봐요. 영화는 각색을 통해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작업’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소설은 포옹의 순간, 육체에서 비어져 나오는 소리를 분석하는 데 무려 두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 장광설을 지루하게 읽어내느니 영화 한편 때리는 것이 낫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다. 어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서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름대로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다.
테레사와 토마스가 바에서 만나는 순간을 상기해보라. 책을 읽고 있는 토마스에게 역시 책을 읽고 있던 여급인 테레사가 다가간다.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은 책이다. 소설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말한다. ‘테레사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토마스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적 도피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에게 책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 도구였다. 영화에서 책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소설에서는 비루한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양탄자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친절한 내레이션이 없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 역시 ‘모든 독서는 출애급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이곳’에 만족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떤 결핍, 어떤 허기를 메우려는 충동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눈을 돌리게 한다. 테레사는 끊임없이 책으로 눈을 돌린다. 책은 ‘토마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키냐르는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이곳이 충분하다면 왜 다른 세상과의 접속을 꿈꾸겠는가. 비루한 삶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테레사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토마스를 만났다. 그녀에게 토마스는 출애급의 모세였다. 그러나 테레사가 유일신으로 섬기는 남자는 테레사만을 섬기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테레사를 무겁게 한다. 그녀는 결코 사랑 앞에서 사비나처럼 쿨할 수 없다.
사비나는 화가다. 그녀는 풍족하지는 못해도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독립이 가능하다. 그러나 테레사는 다르다. 늘 불안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남자, 사랑과 섹스를 별개로 아는 남자 앞에서 그녀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테레사는 토마스를 움켜쥐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탐욕과도 다르고 소유욕과도 다르다. 비루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역정이 움켜쥔 지푸라기를 속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모질다.
영화에서, 토마스와 혼곤한 정사를 치른 날 새벽, 그의 손을 꼬옥 잡고 잠에 들어 있는 테레사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는 토마스는 그녀의 손에 슬그머니 책 한 권을 쥐어준다. 세심한 관람객이라면 책의 제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다. 원작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당신이 붙들고 있는 나는 믿을만한 언덕이 못돼. 진정으로 당신이 기댈 언덕은 바로 책이라고. 나를 쥐지 말고 책을 쥐어. 그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와 소설의 전개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테라사의 손에 쥐어주는 각색이 센스 있다.
소설에서는 토마스가 왜 여러 여자를 섭렵하는지를 긴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한다. 육체적 사랑이란 똑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상상하지 못하는 몇 퍼센트의 부분이 남게 마련이라는 것이 토마스의 주장이다. 자아의 유일성은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는 것,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백만 분의 일의 상이한 점과 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의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 토마스는 바로 그 백만 분의 일을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백만 분의 일의 상이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오로지 섹스에서뿐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둥이 토마스에 대한 쿤데라의 변호다. 유일무이한 한 인간의 구체성을 찾아다니는 이 바람둥이의 적은 누구인가. 바로 전체주의다. 인간의 개별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폭력은 혁명의 유효한 수단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개별성을 무시하고서는 어떤 섹스도 없다. 섹스는 그 개별성에 대한 탐닉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의 상대는 언제나 구체적인 개별자다. 그만의 독특한 체취와 느낌 없이 어떻게 섹스를 상상할 수 있는가. 쾌락이란 그 독특함에 대한 탐닉이다. 그 독특함을 수집하러 다니는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뉘앙스를 허락하지 않는 혁명은 달갑지 않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자신의 죄악을 모른다. 설령 자신의 죄악이 알려지더라도 그들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는다. 대충 얼렁뚱땅 넘어간다. 그러나 토마스는 바람둥이기는 하지만 속물은 아니다. “반성과 참회를 모르는 혁명과는 타협할 수 없어.”라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바고도 의사이고 토마스도 의사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지바고가 따스하다면 토마스는 날카롭고 차다. 지바고와 토마스가 똑같이 매력적이지만 토마스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선과 악이 토마스를 껴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공동의 선(善)을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일체의 일탈을 반혁명적으로 엄단하는, 유머감각을 잃은 혁명, 이념적 무거움만을 좇아서 일체의 유희정신을 반동으로 몰아가는 혁명에 토마스는 몸으로 항거한다. 바람둥이, 그것은 토마스의 스타일리시한 반항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을 ‘원’이라는 기호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기하학적 정신에 섬세의 정신은 저항한다. 섬세의 정신이 저항을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개별자들의 구체성이다. 니체는 ‘추상은 구체에 대한 폭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개별자의 취향과 컬러를 무시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이고 폭력적이다. 개별자들의 주검 위에 얻어진 어떤 혁명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토마스는 몸으로 말한다. 수많은 여자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통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