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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유통기한>에 등장하는 여자, ‘이다(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를 보라. 배낭 하나 달랑 들고 해외여행을 떠나지를 않나, 여행지에서 처음 만나,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어 보지 못한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하지를 않나. 자신의 비즈니스에 지쳐 퇴근한 저녁에 왜 이렇게 집구석이 지저분하냐고 득달같이 남편에게 화를 내지를 않나, 이다는 분명 ‘나쁜 여자’다. 이 대목에서 발칵 할 페미니스트들이 한두 분이 아닐 것이다. 고정하시라.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의 저자 우테 에어하르트가 정의하는 ‘나쁜 여자’론에 의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에어하르트는 말한다. “남녀평등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방해받는다. 하나는 권리를 조금도 나누려 하지 않는 남성들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여성들 때문이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도 꾸욱 참고, 들어도 못들은 척 시집살이를 감내하라는 충고다. 결국 느느니 한숨이요, 생기느니 화병이다. 그러나 ‘이다’에게 화병은 없다. 쌓이면 풀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그녀에게 있다. 말할 것은 말하라. 자신의 의견을 막힘 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있다. 하고 싶으면 해라. 이거다 싶으면 자신을 헌신할 배짱도 있다. 편견을 뛰어넘어라.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성적 고정관념으로부터도 그녀는 자유롭다. 확실히 이 여자는 ‘나쁜 여자’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에서 우테 에어하르트는 바로 이런 여자가 성공한다고 역설한다. 누가 하는 요구이든지 간에 그것이 무리하다 싶으면 No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언제나 당당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 술 더 떠 ‘여자들이여, 나쁜 여자가 되라’고 선동한다. “착한 여자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고 에어하르트는 말한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여자, 영화 속의 이다가 바로 이런 여자다.
그러나 정작 성공이란 무엇인가? 12평짜리 단칸방에서 54평짜리 고급아파트로의 공간적 이동이 성공인가? 월수 100만원에서 연봉 10억으로의 물량 확대가 성공인가? 평사원에서 CEO로의 수직적 에스컬레이팅이 성공인가? 매출 규모 10억 원에서 1000억 원으로의 대박 행진이 성공인가? 로또복권 당첨으로 호화잔치판을 벌이는 것이 성공인가? 그런 성공이라면 나는 관심 없소, 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이다가 선택한 남자 ‘오토(크리스티안 울멘)’가 바로 그다. 번듯한 정장 하나 없다. 머리는 부스스하다. 턱수염은 까칠하다. 그의 외모는 웅변한다. “나는 성공에는 관심이 없어. 나는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 나의 자리는 그늘이야. 여기에서도 행복해. 더 바라지 않아.” 그는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친구 ‘레오(시몬 베호벤)’와는 딴판이다. 레오는 영락없이 비즈니스 스타일이다. 야심도 있고 열정도 있다. 오토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친구다. 하긴 둘의 사이가 죽고 못 사는 우정으로 묶인 것도 아니다. 그 둘에게 유일하게 같은 코드가 있다면 물고기일 뿐이다.
“문명은 팽창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팽창은 호전성을 가지고 있어 경제, 군사 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전쟁들이 전쟁 제조기가 되어 정부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정부를 앞세워 군사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경쟁하는 군국주의는 끝내 스스로 멸망하고 만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문명은 사회의 자살행위이다.”라고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은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오토의 내면에 그런 대안철학들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Let It Be”. 그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좋을 뿐이다. 성장을 위한 야심 찬 계획으로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다. 반성장의 이념으로 골치 아프고 싶지도 않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것이다.
오토가 어렸을 때 부모는 툭하면 싸움질이었다. 오토는 제 방으로 달려가 귀를 막았다. 귀를 막는 행위는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행위다. 외부로부터의 단절은 곧 자신 안의 칩거를 의미한다. 자신 안의 칩거, 그것은 성장을 거절하겠다는 의미다. 툭하면 고함소리를 질러대는 어른들의 세상, 그 소음의 세상으로부터, 불화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단호하게 소음으로부터 귀를 막고 자신 안에 갇힌다. 소음 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 소박하나마 오토의 행복론이다. 소음을 유발하느니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애를 키우고 살림을 한다. 그가 맛보고자 하는 것은 작은 행복이지 성취의 쾌감이 아니다. 천하를 얻고도 나를 잃는다면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천하를 얻지 못했지만 행복하다. 그러나 문제는 성장주의자 아내다. 오토는 이다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불화도 유전이 되는 것인지. 부모의 불화가 오토에게서 재현된다.
성장주의자 이다에겐 오토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생명력이란 곧 팽창의 힘이 아닌가. 당신의 태도는 패배주의자의 그것이다. 삶이란 성장이고 확장이다.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간다. 이런 그녀에게는 더글러스 러미스의『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든가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와 같은 책들이 읽힐 리가 없다. 『무소유』를 설파하는 명상서적들도 눈에 들어 올 리 없다.
성장주의자 저편에 생태주의자가 있다. 그들은 말한다. 성장의 이데올로기, 팽창주의적 열망이 지구를 망친다는 사실을 몰라. 인간의 손길이 없이도 천년 억년 순환을 거듭하는 저 대자연의 질서를 보라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기획이 없이도, 비즈니스에 대한 열망이 없이도, 저절로 생멸을 거듭하는 대자연이 있지 않느냐고. 확장과 성장과 패권의 욕망이 전쟁을 일으키고 공생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냐고. 그 남성적 욕망을 반성하는 곳에 대안의 길이 있다고.
스코트 니어링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문명은 팽창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팽창의 본성은 명백히 남성적 본성이다. 가부장제는 그 남성적 본성의 산물이었다. 제국주의 또한 팽창과 성장의 욕망이 키워낸 산물이었다. 성장의 그늘은 늘 여성이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초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우리만 그늘에 있어야 하는가. 우리도 햇볕 속에 있고 싶다. 우리에게도 ‘팽창할 수 있는 권리, 성공의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 능력에서 처지지 않는데도 현실 속의 관습과 제도가 여성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한 것은 제도의 개혁이었다.
영화 속의 현실은 북유럽이다. 그곳에서는 어느 정도 제도의 개혁이 성공했다. 성적인 불평등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하는 의구심을 해결해야 할 차례다. 팽창과 확장의 권리를 남성으로부터 이양 받아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진정으로 여성주의냐는 질문에 대해 에코페미니즘은 No라고 말한다. 여성이 빼앗긴 것은 공격적인 남성적인 권력이 아니라는 것, 여성들이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것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다.
영화 속에서 이다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여성성’이 아니다. 그녀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일 뿐이다. 그것은 확장적이고 폐쇄적이다. 영화를 보라. 그녀는 아무런 상의 없이 집안의 페인트 색깔을 결정한다. 제대로 상의도 하지 않고 결혼을 제의한다. 비즈니스에 있어 확장은 기본이다. 행복은 확장에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제국주의적 행복론인 셈이다. 그녀의 확장과 패권의 꿈이 깨지자 그녀는 돌연 반성한다. “성장만이 능사는 아니야. 행복은 그게 아니었어.”라고. 하지만 그녀의 반성은 얕다. 그러나 이다의 한계가 연출자 도리스 되리의 한계는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유머다. 한계를 슬쩍 비틀어 웃어버릴 수 있는 여유.
심각한 메시지를 심각하지 않게 띄우는 도리스 되리의 연출이 산뜻하다. 물고기들은 부레의 부력으로 물에 뜬다지만 무거운 메시지를 가볍게 공중으로 띄울 수 있는 공중부양술의 비밀은 <파니핑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파워를 보여준 도리스 되리의 내공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