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뉴패키지 박스세트 : 디지팩 (4disc) - 초록물고기 + 박하사탕 +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 심혜진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영화 <초록물고기>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한적한 강가로 모처럼 소풍길에 나선 가족들. 화기애애 서너 배의 술잔이 오가는가 했더니 어렵게 살고 있는 현실의 넋두리가 개입되면서 순식간에 가족의 화목한 야유회 자리는 난장판으로 변한다. 서로 부둥켜안고 싸우는 형들과 뜯어말리는 식구들, 그 광경에 울어버리는 둘째 형과 그를 다독거리는 어머니. 욕설과 구토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을 보다 못한 막내 동생 순옥은 “정말 너무들 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오늘 같은 날”이라고 말하며 울부짖는다.

소풍이란 게 뭔가.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지긋지긋한 생활고로부터, 과중한 업무로부터, 자질구레한 가사노동으로부터 훌쩍 벗어나는 행위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간단히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 현실이 녹록치가 않다. 막동이네 가족이 바로 그런 경우다. 파출부 엄마, 세 형제 중 첫째는 장애인, 둘째는 술주정뱅이, 셋째인 막동이는 조직폭력배다. 외동딸은 다방종업원. 소위 ‘잘 나가는’ 집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그악스럽다 해서 그들이 불행의 굴레에 옥죄어 있으라는 법은 없다. 하루쯤은 유쾌하게 신선한 공기를 쐴 수도 있는 법이다. 세상의 근심을 잊고 신선한 바깥 공기와 풍경 속에서 모처럼 활짝 웃는 표정을 사진에 담을 수도 있다. 그 사진 속에 담긴 하루가 바로 우리네 추억의 소중한 일부가 아니던가. 훗날 삶이 곤핍해졌을 때 그 추억의 시간을 음미하며 우리는 재생의 힘을 얻기도 한다.

초목이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5월은 추억의 시간을 만들어내기에 적격인 시간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기념해야 할 날들도 많다. 그러나 ‘풍년거지가 더 서럽다’라는 속담처럼 ‘막동이네’ 가족과 같은 집에서는 오히려 5월이 더 쓸쓸하다. 누가 가정이 제2의 천국이라고 했는지 <SOS 긴급출동>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정처럼 무서운 지옥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모를 학대하는 가장, 아이에게 모진 매를 가하는 부모... 이 프로그램 속의 가정은 유미리의 소설 『골드러시』, 『가족스케치』, 『풀하우스』에서처럼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악몽을 생산해내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행복의 풀 한 포기도 자랄 성싶지 않다.

영화 <패밀리맨>에서 월스트리트의 성공한 투자전문가 잭 캠벨(니콜라스 케이지)은 펜트 하우스에 살며, 페라리 550M을 타고, 최고급 양복을 입는 등 소위 ‘잘나가는’ 남자다. 그는 복권을 바꾸러 왔다가 강도 취급을 받는 캐쉬(돈 치들)를 도와준다. 캐쉬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잭은 “원하는 게 없다”고 답한다. 다음날 아침 잭은 13년 전에 헤어진 연인 케이트의 남편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아이 둘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타이어 외판원이라는 초라한 직업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할리우드처럼 도덕적인 곳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행복은 출세나 야망의 실현에 있지 않다는 다소 진부하고 교과서적인 주제를 말한다. 잭은 보잘것없는 직장과 가정의 구속을 못 견뎌 하지만 곧 가정에서의 일상의 소소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우쳐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잭과 같은 가장들만 있는 곳이 현실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가부장주의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다 보면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한국의 아버지들만큼 권위적이고 전제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보라. “때때로 저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쫙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아버지의 우람한 체구를 떠올려 보면 그런 지역은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또한 별로 위안을 줄 만한 곳이 못 되지요.” 신랄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책이 전하는 카프카의 아버지는 덩치만큼이나 고압적인 아버지였던 것 같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 카프카에게 그의 아버지는 몇 차례 호된 위협을 퍼붓다가 급기야 아들을 복도로 끌고나가 속옷 바람으로 서있게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카프카의 절망이었다.

카프카의 세계는 세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자신이 노예상태로 사는 세계,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일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사는 세계,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가 그것이다. 노예상태로 살아가는 카프카는 늘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등한 자격을 얻게 되는 일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번의 약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하지 못한다. 탈출의 꿈은 늘 절망으로 끝난다. 그 절망의 끝에서 그는 그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책은 말한다. “저는 글을 쓰고 또한 그와 연관된 일을 하면서 소박하나마 독립과 탈출을 위한 시도를 했고 너무나 하찮은 수준이지만 약간의 성공도 거두었지요. 하지만 그 시도가 더 큰 성공을 거둘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점에서 저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저의 의무입니다. 아니 그 일을 지키고, 제가 막아낼 수 있는 어떤 위험도, 나아가 그런 위험의 기미조차 그 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제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카프카에게 아버지가 감옥이었다면 그의 글쓰기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셈이다.

억압의 기억을 예술로도 승화시키지만 대부분의 경우 억압의 기억은 파국을 야기한다. 유미리의 소설 『골드러시』에서는 한 소년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다. ‘카즈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나이는 열네 살. 그에게 가족은 불안의 근원지다. 파칭코 가게를 경영하면서 탈세를 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아버지. 엄마는 그녀의 첫아들 히데키가 ‘윌리엄스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자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종교에 빠져든다. 그녀는 철저하게 물질을 배격하는 정신의 삶을 선택한다.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육체적ㆍ정신적으로는 소년에 불과한 형, 원조교제에 빠져 있는 누나 미호,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네집보다 한 수 위의 콩가루 집안이다. 아버지 히데모토는 떳떳하게 말한다. “경찰 신세만 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네가 필요하다면 아빠는 패션모델 뺨치는 미인도 언제든 붙여줄 수 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를 찌른다. 왜 자식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치냐는 소년의 항변에 그녀의 어머니 미키는 차갑게 대꾸한다.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

소년의 불행은 본받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었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있었다. 소년이 주머니 안에서 꺼내든 사진 한 장이 바로 그 순간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그것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상실된 낙원의 기호이다. 소년의 추억은 오직 누렇게 변색된 사진 속에만 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러나 어른다운 어른,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없는 한 가정은 없다. 한 인간의 목표는 거창하게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成人)이 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이 없는 가정, 어른이 없는 사회 속에서 미성년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번째 계절 - 할인행사
스콧 맥게히 외 감독, 리차드 기어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형제는 타인에 비해 부모로부터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보고 듣는 것, 심지어는 먹는 음식과 숨 쉬는 공기와 기억마저도 같이 공유하니, 이렇게 비슷한 성장환경에서 자라난 형제들은 성격마저도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먹혀 들지 않는다. 외모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형제들의 성격은 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겨날까.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의 저자 양혜경은 형제들이 동일한 생활공간 안에서 같은 사건을 받아들이더라도 각각의 발달단계와 인지적ㆍ사회적 특성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경험하고 다른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부모가 이혼을 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아이는 부모의 이혼이 자신의 잘못인 양 생각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기도 한다. 반면 사춘기에 놓인 아이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학교에서 거칠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때 성인들은 어린아이의 침울한 반응은 이혼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큰아이의 돌출행동에는 더 주목하고 반응하기 쉽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이사를 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누나는 일곱 살, 남동생은 세 살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세 살인 남동생에게 있어서는 가족이 전부다. 그런 경우 가족과 분리되지 않는 이사는 그에게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누나의 경우는 다르다. 누나의 경우 그 시기가 소녀끼리 뭉치며 타인에게는 배타적인 시기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나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데 문제가 일어났다. 게다가 배타적인 소녀들의 태도에 적절하지 않은 반응을 해서 좋지 않은 별명까지 얻었고, 그 탓에 행복하지 않는 몇 년을 보내게 된다. 이런 경우 이사의 경험은 누나에게는 성격을 변화시키는 큰 사건이 되지만 남동생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여러 번 반복되면 될수록 유전적 영향은 감소하고 환경의 영향은 커진다는 것이 양혜경의 설명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제는 실은 완벽하게 다른 내면의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형제는 갈등의 관계다.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보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갓난 동생에게 부모의 관심이 쏠려있는 경우 유아와 같은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것은 결국 갓난아기에게 쏠린 부모의 관심을 자신으로 되돌리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전통심리학의 설명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승인 내지 애정을 받으려고 경쟁한다. 이 경쟁에서 패배와 승리의 결과가 불규칙적이라면 문제가 없다. 형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않거나 동생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어느 한쪽에 일방적이라면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 늘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쪽은 최고가 아니면 최악이다 라는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켜서라도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  

영화 <다섯 번째 계절>에 등장하는 나우먼 가족은 존경 받는 중상류층이며 누구보다도 종교적이며 끈끈한 가족관계로 이어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없다. 종교학 교수로서 카발라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울(리처드 기어)은 평소 문자 속에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믿던 중 딸에게서 비범한 재능을 발견한다. 딸은 철자법 대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사울은 영리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들 애론을 편애했지만 어린 딸 엘리자가 철자법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거듭하자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엘리자는 단어의 의미와 어원만 듣고 모르는 철자를 떠올리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사울은 그 재능이 단어의 핵심에 다가가 신과 직접 대화하는 카발라 수행방법을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흥분한다. 그러나 그 사이 그의 아내 미리엄(줄리엣 비노쉬)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아버지에게 소외된 애론은 힌두교에 빠져들면서 가족은 서서히 붕괴된다.

영화에서 엘리자는 다소 자폐적인 성향을 보인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사변적이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에는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아직 이른 나이다. 그러나 애론은 다르다.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인에 가깝다. 아버지의 호통을 맞받아 칠 수 있을 정도로 힘도 있고 배짱도 있는 나이다. “제발 내버려 두세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을 완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앳된 얼굴을 보라. 키와 몸무게는 아버지와 버금갈지 몰라도 아직은 아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어린아이다.

과거에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듬뿍 주던 아버지가 이제는 철자법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딸에게 온통 관심을 쏟는다. 아버지의 관심을 돌리는 애론의 방법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믿는 유일신 신앙을 부인하고 다신교인 힌두교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의 아버지’를 믿지 않고 ‘여럿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한 명의 아버지로부터 따돌림을 받더라도 또 다른 아버지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안전한 길인가. 애론은 그 안전한 길을 택한다. 더구나 그 길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배신하는 길이며 자신의 독자성을 선포하는 길이다.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독립,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내들이 꿈꾸는 길이 아니던가. 유일신 신앙 체계 속에서 살아온 아버지는 ‘또 다른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태교도인 사울은 성령의 빛을 감당하지 못해 세상이 깨어졌으며 그 깨어진 조각을 다시 붙이는 것이 신을 섬기는 인간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깨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의 아내 미리엄은 빈집을 돌아다니며 반짝이는 작은 물건을 훔치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던 애론은 힌두교 집회의 열기에 휩싸인다. 그러나 사울은 오직 딸의 영적인 재능에만 집착한다. 타자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가장 위험한 테러리즘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숱한 테러리즘의 역사를 통해 목격하지 않았던가. 영혼을 치유한다는 종교가 오히려 영혼을 분열시키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영리한 소녀 엘리자는 제 가족의 분열이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가족의 태도에 있음을 간파한다. 엘리자는 과감하게 형이상학을 포기한다. 나비가 알려주는 알파벳을 말하기만 하면 철자법 대회에서 우승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는 과감하게 승리를 포기한다. 영화는 결코 초월의 우월적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적 형이상학보다 위대한 것은 현실의 행복이라는 것, 신의 은총보다 거룩한 것은 살과 살의 포옹이라는 것, 그 포옹의 따스함 속에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영화는 긴 우회를 통해서 현실을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 빈치 코드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론 하워드 감독, 톰 행크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10권짜리 장편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영화화한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원작이 보여준 구수한 사투리의 말맛도 없고, 영화는 책처럼 해방 전후사에 대한 치열한 역사 인식을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임권택의 잘못만으로 미루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과 시대정황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애당초 영상은 문자에 미치지 못한다. 내레이터가 등장해 이러쿵저러쿵 인물의 내면심리를 서술하고 묘사하는 소설에 비해, 인물의 표정이나 배경을 통해 인물과 인물간의 갈등의 깊이나 복잡한 인간의 심리적 굴곡을 드러내기는 역부족이다. 미니시리즈나 연작물을 통해서는 어느 정도 원작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기본적으로 내레이터가 등장할 수 없는 장르다. 시시콜콜 인간의 심리와 정황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영화의 태생적 한계다.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사건이 전개가 느리고 관념적 서술이 많은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하나의 문장의 길이가 한 페이지가 넘고, 관념적 서술이 몇 페이지에 걸쳐 지속되는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유리> 또한 재미있게 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박상륭의 소설에 재미를 들린 사람들은 그 소설이 가지는 도저한 관념성과 언어의 감칠맛에 빠진 이들이다. 이들이 영상의 언어에 같은 만족을 느끼기는 힘들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펼쳐보라.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는 스피디한 사건의 전개보다는 시시콜콜 설명적이고 지적인 내레이션이 독서의 재미를 더해주는 책이다. 뭔가 근사한 지식을 주입받고 있단 느낌, 바로 이 느낌이 댄 브라운이 우리에게 주는 인식의 즐거움이다. 이런 설명적 내레이션을 영상의 언어로 전환하는 데서 론 하워드 감독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을 법하다. 특히 랭던이 크립텍스의 암호를 풀기 위해 고도의 사유를 전개하는 대목을 읽어보라. 그 과정을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백과사전식의 방대한 양의 지식을 가진 사람의 두뇌에서 전개되는 고밀도의 사유와 관념을 영상으로 번역해내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다. 많은 평자들이 론 하워드의 <다빈치코드>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밋밋하게 영상으로 옮겨 놓았으며,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원작의 주장마저 훼손했다고 혹평을 했다. 혹평은 나름대로 정당하지만 론 하워드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원작에서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후손을 뒀고, 성배(聖杯)란 마리아를 뜻한다는 주장을 예시하기 위해 펼쳐졌던 방대한 예술작품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그 많은 작품들을 영화에서 보여주었더라면 영화는 오히려 EBS에서 방영해야 할 교양물이 되지 않았을까.

소피와 할아버지인 시온수도회 수장 자크 소니에르가 빚는 갈등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성교. 이를 상징하는 비밀 제의에 대한 의미는 단 두 컷으로 처리되었다. 이 비밀 제의는 <다빈치 코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코드다. 성교는 단순히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히에로스 가모스’라는 의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성교를 통해 신을 경험하는 행위였다. 댄 브라운은 이 의식이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도 등장한다고 말해준다. 신과 접촉하기 위해 인간이 성을 이용하는 것은 초기 교회의 권력 바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의 아내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기독교 역사의 비밀창고로 숨겨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장영란의 『신화 속의 여성, 여성 속의 신화』의 한 부분을 상기시킨다. 장영란은 그리스 신화의 ‘헤라’의 경우 본래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지 모신(땅의 어미신)이었으나, 가부장 문화를 지닌 그리스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를 제우스와 결혼시킴으로써 지극히 보조적이고 주변적인 캐릭터로 전락시켰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과거에 중심적인 존재였던 여신이 주변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기독교에서는 아예 여신을 배제했고, 그 배제의 과정에서 성(性)마저도 타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수도회의 비밀의식 중 성교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영화에서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갈등의 기원으로만 단순하게 묘사했다. 연출가의 입장에서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화적 언급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론 하워드는 대충 지나쳤다. 안이한 연출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니에르가 소피의 친할아버지였던 원작과는 달리, 극중 소니에르는 소피와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이 예수의 후손을 보호하기 위한 시온 수도회의 수장으로만 설정됐다. 그러니 봉인된 크립텍스의 암호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상세히 묘사됐던 할아버지와 손녀의 애틋한 관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라 왕족이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 후손이 살아있다, 고위 성직자들은 그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월트 디즈니의 경우 성배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한 사람이었다는 등, 영화 <다빈치 코드>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분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가 걱정하듯 영화가 주는 충격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흔들 수 있을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인지부조화 이론’ 챕터를 읽다 보면 보수적 기독교 단체들의 걱정이 한낱 기우임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초반 미국의 한 사이비종교 교주가 중대발표를 한다. 자신은 수호신들로부터 신탁을 받았는데, 조만간 큰 홍수가 날 것이고 진짜 신도들만 홍수 전날 자정에 비행접시로 구출될 것이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 종교의 열성 신도들은 직장을 정리하고 퇴직금을 이 종교단체에 기탁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 애썼다. 마침내 지정된 구원의 날 자정, 모두들 모여서 비행접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행접시도 오지 않았고, 홍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교주가 나타나서 다시 중대발표를 한다. “여러분들의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결국 전 세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실한 교도들의 믿음에 감동한 수호신들이 홍수로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을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 발표에 신도들이 반발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모인 사람들은 놀랍게도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대체 왜 사람들은 이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였을까. 미네소타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레온 페스팅거 교수는 이 상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 ‘인지부조화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사이비종교의 신도들은 이미 직장도 관뒀고, 저축했던 돈도 다 써버렸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도 땅땅 쳐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다 가짜였다.” 고 하자면 아주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차라리 거짓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삶을 누리느냐,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안정을 택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다빈치 코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말하는 내용이 진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여전히 기존에 지녀왔던 믿음을 고수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반길 만한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우연의 법칙, 세상을 움직이는 열린 가능성의 힘』의 저자, 슈테판 클라인은 뇌의 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신경세포의 작용으로 뇌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에서 일관된 틀을 인식하려는 강한 본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뇌는 상황에 맞는 것만 보려는 ‘선택적 인지’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명확한 근거가 없어도 어떤 이론을 믿고,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뇌는 상황에 맞는 것, 기존의 믿음 체계에 부합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는 보수적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스릴러가 주는 긴박함이 없다. 원작이 주는 인식의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원작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크립텍스의 모습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크립텍스의 실제적 질량감을 맛보려거든 영화를 보는 편이 낫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 쪽에 앉은 인물이 여자라는 사실,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듯한 색 배치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또한 두 사람이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V자 모양의 공간이 생기는데, 이 V자는 성배와 잔, 여자의 자궁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을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강력한 영상의 언어로 보는 이를 설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스탄트 가드너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네에 오지랖이 넓은 아줌마가 있었다. 부녀방범위원회위원장, 청소년지도위원, 마을금고이사, 시장환경개선위원 등 그 아주머니의 명함은 이런저런 직함으로 빼곡했다. 육중한 덩치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누가 봐도 여장부였다. 남편은 꽤 큰 규모의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자에 비해 덩치도 작고 성격도 꽤 섬약했다. 여자는 그리 예쁘다고 할 수도 없는 외모에다가 고분고분하고 조신한 성격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더구나 집안 살림보다는 밖으로만 나대는 성격이라 어지간한 남자들이라면 짜증도 낼 법한데 이 섬약한 남자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오히려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아내에게 던지는 눈길에는 누가 보아도 극진한 아내사랑이 묻어 있었다. 저 남자, 밤에 사내구실은 하는 거야, 라고 동네 남정네들이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두 부부는 아무런 불협화음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눈치였다.

영화 <콘스탄틴 가드너>의 테사(레이첼 와이스)와 저스틴(랄프 파인즈) 부부를 보았을 때, 예의 그 부부가 떠올랐다. 저스틴은 도발적인 성격의 인권운동가다. 게다가 그녀의 자태를 보라. <미이라>에서 남성적인 터프한 액션을 보여주었던 그녀가 아닌가. 기네스 펠트로와 같은 연약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으로 저스틴을 만났을 때부터 테사는 공격적인 질문으로 저스틴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녀를 보는 저스틴의 눈은 빛난다. 필이 통하고 달콤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강인한 여자와 섬약한 남자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남자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다.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는 대책 없는 식물성이다. 피식자 앞에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이미지와는 한참 멀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초식성이다. 혈관 속에 초록의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이 차가운 매력의 사나이의 직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교관이다. 외교부란 곳이 어떤 곳인가? 차가운 이성과 매너는 형식적인 외교문서에서나 통용될 뿐, 실제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외교의 공간이 아닌가. 저스틴과 같은 식물성의 인간이 동물적 파워가 지배하는 외교의 공간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도발적인 성격의 테사를 사랑하게 된다. 테사는 저스틴에게 아프리카행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녀의 결혼은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정략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는 도발적이고 다소 공격적이기까지 한 그녀에게는 적격의 장소다.

야생의 땅, 아프리카에서도 저스틴은 정원을 가꾼다. 엄격하게 말해서 정원은 자연이 아니다. 정원은 끊임없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가지를 쳐내고, 잡초를 솎아내고, 해충을 잡고, 정원사는 끊임없이 정원을 손질한다.(이쯤에서 영화 제목이 왜 ‘Constant Gardener’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야성적인 성격의 테사는 인공 자연인 정원이 마땅치가 않다. 그녀가 꿈꾸는 곳은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아프리카의 대륙이다.

<시티 오브 갓>에서 70년대 브라질 빈민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미성년 갱단의 문제를 현란하게 담아냈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상은 <콘스탄트 가드너>에서도 여전히 눈부시다. 그러나 그 눈부심은 초원과 정글의 현란함이 아니다. 극악한 아프리카의 현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상 속에서 미학적 색채를 짙게 드리운다. 회화를 포함한 고통의 재현물이 과거에는 도덕적 내지 교훈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혁명이 일어난 후 고통의 재현물은 미적 욕망의 대상으로 변모됐으며, 그 결과 고통은 하나의 소비 대상 내지 스펙터클로 전락하게 됐다는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의 지적이 떠오르긴 하지만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미적으로만 재현하지 않는다. 기름이 떠 있는 폐수 속에서 먹이를 쪼아대는 닭, 철길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빈민가의 풍광, 투르카나호의 철새 떼의 장면 등 그의 영상은 케냐의 빈민가를 미학적으로 재구성해놓으면서도 현실의 참담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프리카의 고통스런 현실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을 겉으로 표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멜로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이 영화의 축은 분명히 테사와 저스틴의 사랑에 있다.

테사는 남편 뒷바라지만을 하는 현모양처가 아니다. 활동적인 그녀는 앰네스티의 일원으로서 에이즈가 만연한 아프리카에 제공되는 약품 뒤에 숨겨진 모종의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테사는 저스틴의 동료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인간 모르모트로 사용해 약물실험을 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부정을 정부에 알리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죽임을 당한다. 테사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저스틴은 자신이 더 이상 ‘성실한 정원사’로 남을 수 없음을 자각한다.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고, 가지를 쳐내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북돋울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작은의사[小醫]’는 사람을 구하지만 ‘큰의사[大醫]’는 세상을 구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저스틴은 세상의 정원사로 탈바꿈한다. 테사가 사라짐으로써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저스틴은 소극적이고 식물적인 삶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저스틴으로 분한 랄프 파인즈가 러셀 크로우나 실베스타 스텔론이 될 수는 없는 법.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저스틴의 행동은 랄프 파인즈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구축한 이미지의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뭇 여성들의 모성적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랄프 파인즈의 표정이 아니고서야 대체 그 어떤 누가, 상처받은 남자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을까. 군살이 없는 육체, 오똑한 콧날과 서늘한 눈매를 가진 이 배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은 그의 저서 『그림자』에서 “우세한 의식의 태도나 기능은 그 반대극의 무의식의 태도나 기능에 의해 보상된다. 내향형의 사람이 지나치게 내향적 태도에 집착하면 무의식에는 의식에서 배제된 외향적 경향이 억압되어 의식과는 상반된 경향을 띠게 되고 그러한 의식의 일방성이 지속되고 외향적 경향의 억압이 계속되어 활동하지 못하면 무의식의 외향적 경향은 미분화된 열등한 상태에 있게 된다”라며,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감추진 열등한 인격인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으면 인간의 전체적인 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저스틴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열등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여성상, 즉 당당한 남성적 이미지를 가진 여성상이었다. 저스틴은 테사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반대로 테사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열등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남성상, 즉 섬세하고 섬약한 이미지를 가진 남성상이었다. 테사는 저스틴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테사의 그림자가 저스틴이었고, 저스틴의 그림자가 테사였던 셈이다. 부족한 여성성을 테사는 저스틴에게서 수혈 받았고, 저스틴은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을 테사에게서 수혈 받았다. (서두에서 말한 오지랖 넓은 아줌마 부부의 예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서로는 서로에게서 그림자였던 셈이다. 둘의 사랑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테사의 죽음을 계기로 저스틴은 정글의 세계, 남성의 세계, 힘의 세계로 뛰어든다. 진정한 외교의 세계로 뛰어든 셈이다. 그의 무의식 속의 그림자, 그의 열등한 인격인 남성성을 스스로 구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영화는 본질적으로 액션스릴러가 아니고, 랄프 파인즈는 복수를 꿈꾸는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우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잉그리시 페이션트>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콘스탄트 가드너>라는 영화의 매력이고, 랄프 파인즈의 매력이다. 모든 영화가 웅변일 수는 없다. 랄프 파인즈의 한숨에 가슴을 저며 보는 것은 어떤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세이돈 SE (2disc) - [할인행사]
볼프강 피터슨 감독, 커트 러셀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이익은 최대로 늘리고 손해는 최소로 줄이는 것이 이른바 ‘경제적 동물’들의 행동강령이다.  이 극단의 동물들은 타인의 손해를 최대로 늘리고 이익은 최소로 줄이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바람직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냉혹한 자본주의적 현실이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만은 예외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내 가족은 살리겠다는 숭고한 ‘가족주의’를 보라. 새조차 자신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처에 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경계음을 낸다. 영화 <포세이돈>에서 로버트(커트 러셀)는 그의 딸 제니퍼(에미 로섬)를 살리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유전자는 생명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이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체는 그것을 위해 이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미 로버트의 유전자는 그의 딸, 제니퍼에게 전해졌으므로 로버트가 죽든 말든 유전자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딸을 위한 그의 희생도 사실은 유전자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리처드 도킨스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입장으로 인간을 볼 때, 인간은 하찮은 전달자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입네, 이성적 존재입네 떠들어 대지만 결국 유전자의 ‘탈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 속의 프로 도박사 존 딜런(조쉬 루카스)의 행위는 『이기적 유전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도박이 뭔가. 돈이 되면 배팅을 하고 돈이 안 되면 패를 거둬들이는 것이 도박의 상식이다. 자신의 이익은 최대로 늘리고 타인의 이익은 최소화하는 것이 경제적 동물의 합리적 행위가 아닌가. 그런데 이 한심한(?) 도박사의 배팅은 어찌된 것인지 거꾸로 간다. 돈이 안 되는 배팅을 수시로 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피 한 점 섞지 않은 사람,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인을 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존 딜런의 행위는 아무래도 수상쩍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에 빠진 아이를 살리는 것도 그 아이의 엄마의 환심을 사기 위한 플레이보이의 전략적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이론이 『이타적 유전자』의 "반복호혜성"이라는 가설이다. 매트 리들리는 이 책에서 친족관계가 아니더라도 반복해서 서로 혜택을 베풀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례로 흡혈박쥐의 경우, 피를 넉넉히 섭취한 박쥐가 피를 게워내서 굶주린 박쥐에게 피를 공급해주는데, 어떤 박쥐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 그에게 도움을 주는 박쥐는 그가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박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 딜런이 가녀린 여인과 그녀의 아들에게서 과거에 도움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미시간 대학의 대니얼 크루거 박사 등 연구진은 휴먼 네이처지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서 현대의 남성은 옛날처럼 완력을 과시할 필요가 없어진 대신,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물질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느라 기력을 쏟아 수명이 단축된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숫양들이 서로 머리를 들이 받으며 싸우고 수컷 새들이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등,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행동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면서 막 성년기에 이른 13살 무렵 침팬지들의 사망률이 갑자기 높아지는 현상을 예로 들었다. 개체에게는 손해가 되더라도 결국 유전자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고 보면,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엔 남성이 매력적인 여성의 마음을 끌기 위해 다른 원시시대처럼 몽둥이를 들고 경쟁자들과 몸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지만 성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자체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크루거 박사는 "몽둥이 싸움에서 이기는 과거의 능력은 지금은 멋진 SUV 자동차를 살 수 있는 능력으로 대체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력도 없고, 믿는 것은 몸뚱이밖에 없는 영화 속의 존 딜런 같은 경우는 어찌해야 이런 경쟁에서 매력적인 암컷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기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박의 패를 던지지만, 때로는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건달. 이런 건달 앞에서 여자들의 마음은 속수무책이다. 선수도 프로 선수다. 재앙영화는 이런 프로 선수, 달리 말해 영웅을 만들어낸다. 쪼잔하게 돈이나 가족에 얽히지 않는 영웅. <특전 U보트>와 <퍼펙트 스톰>으로 위험을 제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볼프강페터슨은 이 영웅에게 끝없는 고행을 강요한다. 이 영웅에게는 카리스마도 없고, 근육질의 남성미도 없다. 그러나 배팅 실력만큼은 내로라하는 영웅에 뒤지지 않는다. 날건달 하나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위험 속으로 뛰어들 때, 이런 대책 없는 사내 하나를 보는 여성들은 환호한다. 그런 영웅을 보는 것만으로 영화의 본전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족 하나! 포세이돈이 누군가? 바다의 신이요, 물의 신이다. 볼프강 페터슨이 북대서양에 띄운 유람선의 이름이 ‘포세이돈’이다. 신 앞에서 겸양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