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오지랖이 넓은 아줌마가 있었다. 부녀방범위원회위원장, 청소년지도위원, 마을금고이사, 시장환경개선위원 등 그 아주머니의 명함은 이런저런 직함으로 빼곡했다. 육중한 덩치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누가 봐도 여장부였다. 남편은 꽤 큰 규모의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자에 비해 덩치도 작고 성격도 꽤 섬약했다. 여자는 그리 예쁘다고 할 수도 없는 외모에다가 고분고분하고 조신한 성격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더구나 집안 살림보다는 밖으로만 나대는 성격이라 어지간한 남자들이라면 짜증도 낼 법한데 이 섬약한 남자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오히려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아내에게 던지는 눈길에는 누가 보아도 극진한 아내사랑이 묻어 있었다. 저 남자, 밤에 사내구실은 하는 거야, 라고 동네 남정네들이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두 부부는 아무런 불협화음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눈치였다.
영화 <콘스탄틴 가드너>의 테사(레이첼 와이스)와 저스틴(랄프 파인즈) 부부를 보았을 때, 예의 그 부부가 떠올랐다. 저스틴은 도발적인 성격의 인권운동가다. 게다가 그녀의 자태를 보라. <미이라>에서 남성적인 터프한 액션을 보여주었던 그녀가 아닌가. 기네스 펠트로와 같은 연약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으로 저스틴을 만났을 때부터 테사는 공격적인 질문으로 저스틴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녀를 보는 저스틴의 눈은 빛난다. 필이 통하고 달콤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강인한 여자와 섬약한 남자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남자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다.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는 대책 없는 식물성이다. 피식자 앞에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이미지와는 한참 멀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초식성이다. 혈관 속에 초록의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이 차가운 매력의 사나이의 직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교관이다. 외교부란 곳이 어떤 곳인가? 차가운 이성과 매너는 형식적인 외교문서에서나 통용될 뿐, 실제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외교의 공간이 아닌가. 저스틴과 같은 식물성의 인간이 동물적 파워가 지배하는 외교의 공간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도발적인 성격의 테사를 사랑하게 된다. 테사는 저스틴에게 아프리카행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녀의 결혼은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정략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는 도발적이고 다소 공격적이기까지 한 그녀에게는 적격의 장소다.
야생의 땅, 아프리카에서도 저스틴은 정원을 가꾼다. 엄격하게 말해서 정원은 자연이 아니다. 정원은 끊임없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가지를 쳐내고, 잡초를 솎아내고, 해충을 잡고, 정원사는 끊임없이 정원을 손질한다.(이쯤에서 영화 제목이 왜 ‘Constant Gardener’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야성적인 성격의 테사는 인공 자연인 정원이 마땅치가 않다. 그녀가 꿈꾸는 곳은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아프리카의 대륙이다.
<시티 오브 갓>에서 70년대 브라질 빈민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미성년 갱단의 문제를 현란하게 담아냈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상은 <콘스탄트 가드너>에서도 여전히 눈부시다. 그러나 그 눈부심은 초원과 정글의 현란함이 아니다. 극악한 아프리카의 현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상 속에서 미학적 색채를 짙게 드리운다. 회화를 포함한 고통의 재현물이 과거에는 도덕적 내지 교훈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혁명이 일어난 후 고통의 재현물은 미적 욕망의 대상으로 변모됐으며, 그 결과 고통은 하나의 소비 대상 내지 스펙터클로 전락하게 됐다는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의 지적이 떠오르긴 하지만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미적으로만 재현하지 않는다. 기름이 떠 있는 폐수 속에서 먹이를 쪼아대는 닭, 철길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빈민가의 풍광, 투르카나호의 철새 떼의 장면 등 그의 영상은 케냐의 빈민가를 미학적으로 재구성해놓으면서도 현실의 참담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프리카의 고통스런 현실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을 겉으로 표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멜로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이 영화의 축은 분명히 테사와 저스틴의 사랑에 있다.
테사는 남편 뒷바라지만을 하는 현모양처가 아니다. 활동적인 그녀는 앰네스티의 일원으로서 에이즈가 만연한 아프리카에 제공되는 약품 뒤에 숨겨진 모종의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테사는 저스틴의 동료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인간 모르모트로 사용해 약물실험을 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부정을 정부에 알리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죽임을 당한다. 테사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저스틴은 자신이 더 이상 ‘성실한 정원사’로 남을 수 없음을 자각한다.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고, 가지를 쳐내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북돋울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작은의사[小醫]’는 사람을 구하지만 ‘큰의사[大醫]’는 세상을 구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저스틴은 세상의 정원사로 탈바꿈한다. 테사가 사라짐으로써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저스틴은 소극적이고 식물적인 삶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저스틴으로 분한 랄프 파인즈가 러셀 크로우나 실베스타 스텔론이 될 수는 없는 법.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저스틴의 행동은 랄프 파인즈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구축한 이미지의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뭇 여성들의 모성적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랄프 파인즈의 표정이 아니고서야 대체 그 어떤 누가, 상처받은 남자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을까. 군살이 없는 육체, 오똑한 콧날과 서늘한 눈매를 가진 이 배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은 그의 저서 『그림자』에서 “우세한 의식의 태도나 기능은 그 반대극의 무의식의 태도나 기능에 의해 보상된다. 내향형의 사람이 지나치게 내향적 태도에 집착하면 무의식에는 의식에서 배제된 외향적 경향이 억압되어 의식과는 상반된 경향을 띠게 되고 그러한 의식의 일방성이 지속되고 외향적 경향의 억압이 계속되어 활동하지 못하면 무의식의 외향적 경향은 미분화된 열등한 상태에 있게 된다”라며,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감추진 열등한 인격인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으면 인간의 전체적인 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저스틴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열등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여성상, 즉 당당한 남성적 이미지를 가진 여성상이었다. 저스틴은 테사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반대로 테사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열등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남성상, 즉 섬세하고 섬약한 이미지를 가진 남성상이었다. 테사는 저스틴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테사의 그림자가 저스틴이었고, 저스틴의 그림자가 테사였던 셈이다. 부족한 여성성을 테사는 저스틴에게서 수혈 받았고, 저스틴은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을 테사에게서 수혈 받았다. (서두에서 말한 오지랖 넓은 아줌마 부부의 예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서로는 서로에게서 그림자였던 셈이다. 둘의 사랑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테사의 죽음을 계기로 저스틴은 정글의 세계, 남성의 세계, 힘의 세계로 뛰어든다. 진정한 외교의 세계로 뛰어든 셈이다. 그의 무의식 속의 그림자, 그의 열등한 인격인 남성성을 스스로 구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영화는 본질적으로 액션스릴러가 아니고, 랄프 파인즈는 복수를 꿈꾸는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우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잉그리시 페이션트>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콘스탄트 가드너>라는 영화의 매력이고, 랄프 파인즈의 매력이다. 모든 영화가 웅변일 수는 없다. 랄프 파인즈의 한숨에 가슴을 저며 보는 것은 어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