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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사회 생활을 시작한 후 남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다음의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첫째, 남자들은 상사의 권위를 지나치게 존중한다.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경우, 혹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에 여자들은 보다 쉽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위치에 있는 남자는 일단 '네'라고 답한 후 다른 식의 해결 방법을 모색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개별적인 면담이나 술자리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타협점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처음엔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 탓이라고 생각했으나, 경험이 쌓일수록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렇게 돌아가느냐고.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은, 상사에게 그 자리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과 그 방법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일에 관해 토론을 하는 것이 어째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의 해답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둘째, 많은 남자들이 결혼을 '부양가족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최근까지도 그런 경향이 높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결혼한 여자가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한 가족이 생활을 영위하는 문제는 오로지 남자에게만 지워진 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을 통해 경제적 능력을 가진 여자들이 많아졌고, 그런 여자들은 자신을 먹여 살려 달라고 남자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고, 생활의 문제는 가족이 함께 나누는 책임이다. (물론 일하기 싫어하는 여자도 있고 여자에게 일은 여전히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편으로는 남자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애인을 가진 젊은 남자들조차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때로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남자로 사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인 듯 하다. 남자는 항상 모든 걸 책임져야 하고, 강해야 하고, 여자보다 권위에서 덜 자유로우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힘겨운 짐을 덜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여전히 남자들이 그 짐을 혼자 떠맡으려 한다는 데에 있다.
<남자의 탄생>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한민국 남자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보여준다. 자신의 역할에는 자상함보다는 권위가 요구된다고 믿고, 가족의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수직적 신분 질서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동굴 속 황제가 되는 어린 아들. 가족 내의 이런 관계는 고스란히 사회로 확대되어 선생님, 선배, 직장 상사는 또 다른 아버지로서의 신분 질서를 형성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를 논하기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탐구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듯 보이는 저자의 가족의 모습은 그러나,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 전체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자잘하게 늘어놓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그에 덧붙여진 저자의 해석은 공감할 부분이 크다. 저자의 어린 시절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미 여러모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생활 태도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 박힌 문화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자의 제안은 ‘아버지를 살해하라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버리라)’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지 않긴 하지만 이 제안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 권위와 질서를 버리고, 함께 생활을 나누고자 한다면 (가족과 혹은 여자들과),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도 좀 더 살기 편한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여자들이 남자를 이해하는 데에, 남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데에, 또한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며,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