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어제 비오는 걸 보다 이 시가 생각나서 다시 읽고는,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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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읽지 않은 책더미는 단 한권도 줄지 않고, 몇십만원 내고 등록한 영어 공부도 하지 않고, CD는 늘상 같은 것만 의미없이 돌아가고, 심지어 영화를 보거나 알라딘을 방문하는 것조차 귀찮아지는 때. 그렇게 한달이다.

게임에 열중하고 보지도 않는 TV앞에 앉아 흘려보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한달이 되었다.

이쯤되면 다시 심기일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몸이 따라주는 건 생각과는 또 다르다. 해결 방법은 뭘까.

일단 책과 CD를 주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스시의 마법사> 1~3권    작년 여름부터 사려고 마음먹고 있던 건데, 이번에 3권이 나왔다길래 한꺼번에 주문. 어슐러 르 귄의 글솜씨와 상상력을 믿기에, 다시 책을 잡게 만드는 데는 적격일 듯.

<타인의 고통>    전에 서점에 갔다가 보고 찜해 놓았던 책.

<백범일지>    최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배가, 독후감 세 편을 제출해야 한다면서 독후감 써달라고 부탁한 책. 뭐 일단 대충 거절하긴 했지만 아직 읽지 않았기에 기회다 싶다.

내일은 영화라도 보고, 바깥 바람도 좀 쐬어야 겠다. 그동안 집안에만 쳐박혀 있었더니, 온몸에서 곰팡내가 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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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노통의 장점은 확실히 뛰어난 유머 감각에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 자체를 어떻게 끌고 가는가 하는 것보다는 인물들의 생각과 말 속에서 더욱 큰 재미를 느끼게 된다.

폼페이의 멸망이, 미래의 누군가가 폼페이를 보존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라고 생각하는 작가 아멜리 노통. 그녀는 이 비밀을 알아챈 대가로 26세기로 납치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감시자이자 폼페이를 멸망시킨 장본인과의 대화. 시간 여행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폼페이가 멸망한 것이 79년인가 2579년인가 하는 논쟁들이 나오지만 사실 그것들에 대해 이해하든 못하든 크게 상관은 없다. 이 책의 진짜 재미는, 노통과 감시자가 쏟아놓는 여러 가지 독설에 있으니까 말이다.

독재자가 지배하고, 지능과 미모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남북 문제의 심각성을 없애기 위해 ‘남쪽’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버린 사회, 그것이 미래의 모습이다. 미래의 인간 셀시우스는 이 모든 것들이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것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노통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딱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계급은 존재하고, 남북 문제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위쪽의 인간들은 아래쪽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노통이 남쪽에 대한 연민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해 셀시우스는 그것이 위선일 뿐임을 드러낸다.

노통과 셀시우스가 서로를 조롱하는 대화는, 실은 노통 자신을 포함한, 북쪽 세계에 대한 비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조차, 굉장히 재치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웃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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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 21세기 게릴라의 전설
베르트랑 데 라 그랑쥬 지음, 박정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이 달 초, 어느 뉴스 프로그램의 해외 리포터가 멕시코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봉기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리포터는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기는 했으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커녕 멕시코 혁명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듯 했다. 앵커와 리포터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으로 인해 멕시코의 치안 상황이 매우 불안하다는 말로 꼭지를 마감했다.

전화니 방송이니 인터넷이니, 문명의 이기는 날로 발전하여 지금은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리포터는 멕시코가 긴장 국면에 놓여있는 듯 말했으나, 실제로 그런 기미를 다른 곳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치아파스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난지도 벌써 10년이지만, 그간 무력 충돌이 일어난 것은 1994년 1월 1일의 첫 전투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멕시코 정부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으로 인해 골치를 앓는 것은 사실일 테지만 현재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뉴스에서 얘기한 이상, 사람들은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덜 하긴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막강한 권력이다. 사파티스타의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누구보다 잘 활용한 게릴라이다. 신문, 잡지, 인터넷 등 언론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전세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책, <21세기 게릴라의 전설, 마르코스>의 저자들은 부사령관이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언론이 잘못된 정보로 진상을 호도하고 있다고 여긴다. 저자들이 밝히는 집필 동기는 명확하다. 부사령관에 의해 통제되고 왜곡되는 정보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실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달하는 정보는 과연 진실이고 올바른가? 동일한 정보조차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다른 사실을 전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이 사파티스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저자들은,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 중 상당 부분을 마르코스 개인을 비난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분석이나 건설적인 비판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탄생과 무장 봉기, 그리고 그 후의 이러저러한 사건들은 중구난방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기자 출신인 저자들이, 언론을 지나치게 잘 활용한 부사령관을 개인적으로 힐난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면, 괜한 억측일까?

사족 한 가지, 내용 자체가 뒤죽박죽에 혼란스러운 건 그렇다 치자. 번역도 별로 매끄럽지 못한 데다가 교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오자와 잘못된 문장을 만나는 건 진짜로 짜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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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사회 생활을 시작한 후 남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다음의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첫째, 남자들은 상사의 권위를 지나치게 존중한다.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경우, 혹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에 여자들은 보다 쉽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위치에 있는 남자는 일단 '네'라고 답한 후 다른 식의 해결 방법을 모색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개별적인 면담이나 술자리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타협점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처음엔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 탓이라고 생각했으나, 경험이 쌓일수록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렇게 돌아가느냐고.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은, 상사에게 그 자리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과 그 방법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일에 관해 토론을 하는 것이 어째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의 해답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둘째, 많은 남자들이 결혼을 '부양가족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최근까지도 그런 경향이 높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결혼한 여자가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한 가족이 생활을 영위하는 문제는 오로지 남자에게만 지워진 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을 통해 경제적 능력을 가진 여자들이 많아졌고, 그런 여자들은 자신을 먹여 살려 달라고 남자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고, 생활의 문제는 가족이 함께 나누는 책임이다. (물론 일하기 싫어하는 여자도 있고 여자에게 일은 여전히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편으로는 남자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애인을 가진 젊은 남자들조차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때로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남자로 사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인 듯 하다. 남자는 항상 모든 걸 책임져야 하고, 강해야 하고, 여자보다 권위에서 덜 자유로우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힘겨운 짐을 덜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여전히 남자들이 그 짐을 혼자 떠맡으려 한다는 데에 있다.

<남자의 탄생>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한민국 남자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보여준다. 자신의 역할에는 자상함보다는 권위가 요구된다고 믿고, 가족의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수직적 신분 질서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동굴 속 황제가 되는 어린 아들. 가족 내의 이런 관계는 고스란히 사회로 확대되어 선생님, 선배, 직장 상사는 또 다른 아버지로서의 신분 질서를 형성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를 논하기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탐구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듯 보이는 저자의 가족의 모습은 그러나,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 전체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자잘하게 늘어놓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그에 덧붙여진 저자의 해석은 공감할 부분이 크다. 저자의 어린 시절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미 여러모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생활 태도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 박힌 문화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자의 제안은 ‘아버지를 살해하라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버리라)’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지 않긴 하지만 이 제안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 권위와 질서를 버리고, 함께 생활을 나누고자 한다면 (가족과 혹은 여자들과),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도 좀 더 살기 편한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여자들이 남자를 이해하는 데에, 남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데에, 또한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며,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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