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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어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열대어] [Green Peas] [돌풍] 등 세편이 실려있는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집.
[돌풍]의 주인공 닛타는 자기가 꼬시고 있는 유부녀에게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약속에 늦게 되었을 때, 이제 돌아갔겠지 싶은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상대를 보게 되면, 아무리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 말을 한 그가, 여자에게 다음 주에 만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는 약속한 날이 몇 주나 지나서야 그 약속을 기억해내면서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잊어버린다. 그런데, 과연 여자쪽은 어떨까. 유부녀가 멀리 떨어진 도쿄까지 닛타를 만나러 온다는 건,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닛타에게서 ‘기다림’의 의미를 들어버린 그녀가,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그를 기다릴 수 있을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한마디 말로 여자에게서 일말의 기대조차 앗아가 버린 닛타의 철저한 무신경과 잔인함이 섬뜩하다.
이런 모습은 [열대어]에서도, [그린 피스]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느닷없이 애인에게 콩 한 캔을 다 던져버리는 [그린 피스]의 주인공, 동거 중인 애인 앞에서 중학생 여자아이에게 손을 뻗치는 [열대어]의 다이스케. 그러나 그들은 딱히 악한도 아니고,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만한 사람들도 아니다. 사랑하고 실수하고 토라지고 용서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이런 평범한 사람이,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드러내는 원인 모를 잔인함이나 극도의 무신경은, 바라보는 이에게는 경악이고 공포다. 그러나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그러한 행위들조차 일상의 일부이다. 이들은 그저 생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 생활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정작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는 남들은 내 행동에서 의미를 따질 수도 있고 이면을 볼 수도 있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이렇듯 당사자들은 파악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누구나 잔인한 일면이 있다고, 누구의 삶에나 공포스러운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일상의 일부이기에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지나가는 말투로 이런 얘기를 던질 수 있는 작가는, 흔히들 말하는 ‘쿨’한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통찰력, 쉽게 풀어나가는 이야기 솜씨는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