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냐가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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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에 대한 인류의 꿈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어떤 이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았다는 고대 사회를 이상사회로 생각하고, 다른 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기술 발전에 힘입은 또 다른 형태의 낙원을 꿈꾼다. 어찌되었건 유토피아에 대한 인류의 믿음과 시도는 태고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런한 결과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에까지 이르러있다.

사실 유토피아란 모호한 개념이다.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는가? 내가 느끼는 행복과 당신이 느끼는 행복은 다를 수 있다.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는 나와 당신의 생각과 가치 기준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인류 전체의 생각을 어떻게 하나로 통일시킬 것인가?

<문두무구>인 코리바는 '키리냐가'에서 키쿠유를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했다고 믿는다. 물론 초기에 그곳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에게 그곳은 '완벽한' 유토피아임에 틀림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에 모두가 만족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태어난 후손들에게 '유토피아'의 의미는 다르다. 아이들이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주민들이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히는 사회가 완벽한 유토피아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코리바는 모든 것이 '균형'의 문제라고 대답한다. 즉 인간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 자연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유토피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인간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문자, 기계, 학문 등 현재까지 인류를 진보시켜 왔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들을.

따라서 코리바는 외부 세계로부터 키리냐가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한다. 오직 키리냐가를 낙원으로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행복을 추구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 생각과 의지를 가진 존재다. 스스로 비교하고 선택하기를 원한다. 비교하기 위한 정보와 선택권 자체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는 낙원에서의 삶도 불합리하고 권태로우며 완전히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 이제 키리냐가는 더 이상 모두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곳은 개개인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통제'하려고 하는 코리바 개인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자신의 유토피아를 지키려는 理想에 사로잡혀,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한 채 '응가이'와 '문두무구'만을 믿으라고 외치는 코리바의 모습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익히 보아온 Big Brother들과 닮아 있다. 「유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은 <생각을 하오>?」라는 주민의 질문은 이 '유토피아'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다」라고 대답한 순간, 코리바는 '자신의' 유토피아에 복구할 수 없는 균열을 만들고 만 것이다. 이제 키리냐가는 코리바에게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되었고, 다른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가진 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건설한 유토피아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집착만을 간직한 채 키리냐가를 떠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키리냐가>를 통해 유토피아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코리바가 선택한 유토피아가 과연 옳은 것인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토피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또한 모든 구성원의 자발적 동의에 이해 비로서 성립되는 유토피아가 과연 진정한 유토피아인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의 의견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삶이 어떤지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강제적으로라도 동의를 끌어낸다면 그 사회는 곧바로 디스토피아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우리는 '유토피아'라는 인류의 꿈이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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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탐험가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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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탐험가들> 이라는 제목에 비해 좀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우선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역사라고 하는 과거, 혹은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라는 것이다. 이 진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읽을 때'이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라는 칭호를 듣는다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탁월함은 인물의 정확한 묘사나 시대상의 철저한 고증 등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무엇보다 독자를 놀라게 하는 점은 바로 그가 주인공이 되는 인물이나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바라보는 그 자신의 독특한 시각과 세계관이다.

대부분의 전기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에 대한 사실적이고 정밀한 묘사는 사실 현재의 우리들에게 그닥 감명이나 어떤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무색무취한 서술, 무관점의 관점 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묘사에 관심이 있다면 차라리 백과 사전을 보는 편이 낫다.

반면 글을 쓰는 사람의 명확한 세계관은 다른 작가의 그것과, 혹은 나의 그것과 비교되면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할 수 있게 해 준다. 츠바이크는 다른 어떤 전기 작가에 비교해 보아도 이런 점에 있어서 가장 탁월하다.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 정도가 그에 비견될 수 있을까.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라는, 역사속의 거대한 흐름에 천착하고, 츠바이크는 여러 시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인물들에 천착한다는 사실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둘이 대상을 바라보고 글로 표현해 내는 방식은 동일하다.

<정신의 탐험가들>에서 츠바이크는 현대 심리학의 발전에 공헌한 세 인물, 프란츠 안톤 메스머, 메리 베이커 에디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혁명성'이야말로 그의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평가한다. 즉, 이성의 시대라는 19세기에, 본능적이고 그래서 위험한 무의식과 충동의 문제를 건드려 세상을 놀라게 한 것, 어떠한 비난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믿는 바를 끝까지 밀고 나간 그의 불굴의 의지, 그리고 그로 인해 한층 넓어지고 깊어진 심리학의 발전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을 정도의 확고함으로 자리잡았지만 이 책이 씌여진 것이 1920년대, 프로이트의 생존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츠바이크의 작업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다. 게다가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와 맞물려 정신 세계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자신의 시각과 필력으로 우리 앞에 지나간 시대와 인물의 의미를 펼쳐놓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한 조각을 찾아낼 수 있다. 이처럼 글을 읽으면서 역사를 되새길 수 있고, 그것으로 현재의 내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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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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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실화라는 것, 그것도 가까운 일본의 유명 연예인이 그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고도 하지만, 사실 난 이 글에서 그리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물론 어린 학생들을 동등하게 대해주면서 그들이 제대로 된 생각과 삶에의 의지를 가지게끔 해주려는 교장 선생님의 노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60여년 전에 이웃나라에서 있었던, 극히 일회적인 사건을 가지고 이제, 2000년의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동받았다고 말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건, 그만큼 우리의 교육 현장과 삶의 모습이 팍팍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누구나가 알고 있는, 혹은 주장하는 올바른 교육이란 지금도 과연 토토의 전철학교에서와 같은 모습일 수 있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학생들을 이해하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자상이라고?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정도다. 하지만 그걸 실천하는, 아니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교육자가 있을까?

현재 혹은 미래에서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글은 우리의 삶의 질을 바꿔주기 보다는 한숨이 나오게 만들 뿐이라는 나의 생각 역시, 어쩌면 현재의 빈곤한 내 삶 때문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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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를 처음 읽은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뉴욕 삼부작>이 처음이었던 건 확실하다. 갖고 있는 책은 96년 5월 발행된 초판 1쇄, 그렇다면 아마 96년이나 97년일 것이다. 어쨌거나 거의 7~8년 전 일이다. 그 때 당시 <뉴욕 삼부작>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역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폴 오스터가 상당히 지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다는 것과, 그 이후로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주저없이 꼽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리바이어던> <미스터 버티고>부터 최근의 <환상의 책>까지, 그의 대부분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와 폴 오스터에 관해 얘기하다 문득, <뉴욕 삼부작>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책을 읽으면 자세한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처럼 까마득히 잊을 수 있는지.

어제 <뉴욕 삼부작>을 다시 꺼내어 첫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를 읽었다. 첫 페이지를 읽자 벌써 예전에 읽은 내용이 새록새록 머리 속을 떠돌기 시작한다. 아, 그래, 갇혀 있던 아이, 탐정 노릇을 하는 작가, 바벨탑 이야기. 

폴 오스터는 한 작품 속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여러가지 변주를 들려준다는 걸 <유리의 도시>를 보면서 다시금 확인한다. 피터 스틸맨이 쓴 논문 속에 등장하는 헨리 다크,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가 얘기하는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그 글을 쓰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까지.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한데, 이들 이야기속에서 그 증거는 다른 사람이 이미 써놓은 글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혹은 허구인지, 소설 속에서도, 그걸 내가 읽고 있는 현재에서도, 경계가 모호하다. 게다가 각각의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들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그 의미를 확장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 사람, 보통 영리한게 아닐 뿐더러, 굉장한 사색가일 듯하다.

사실 폴 오스터는, 글 뿐만 아니라 얼굴도 마음에 든다. 책에 실린 그의 사진을 한참 동안씩 들여다보곤 했었다. 깊은 눈매와 시원스런 콧날, 단단해보이는 이마. 무척이나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이 사람은, 실제로 사는 모습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거의 유일한 작가다.

오늘은 <유령들>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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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새로 키우기 시작한 강아지 두마리. 왼쪽 녀석이 밤톨이, 오른쪽은 쥐똥이.

사실 강아지를 비롯해서 동물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몇마리의 강아지를 키워왔지만 지금 키우고있는 패키니즈를 빼면, 가끔 집에 가서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금이나마 강아지를 예뻐하기 시작한건 이 패키니즈 '탱이'가 처음인데, 이 녀석이 워낙에 살갑게 굴기 때문이다. 어찌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무조건 달려들어 안기는 통에 내치지도 못하고 그저 받아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위 두 녀석들. 이 놈들도 사람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다. 동생집에 가면 이 놈들이 꼭 내 다리 위에 올라와 자리를 잡거나 손에 턱을 올려놓고 잠을 청한다. 너무 작아서 밀쳐 내면 다칠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얘네 왜 이래, 하면서 그냥 있는 수 밖에.

그러고보면, 소위 애완견이라고 하는 녀석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들이 할 일이 뭔지를 아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어디까지 해도 괜찮은지 본능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가끔 이 놈들이 사실은 굉장히 영악한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어쨌거나 예쁘기는 하다. 가끔 이 녀석들을 보러 동생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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