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는 근 2주일을 잡고 있다. 이제 한 챕터 정도 남았는데, 지하철에서만 읽다보니 영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은 끝내야겠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느끼는 건, 김구 선생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아들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쓴 1부가 그렇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이기 어렵다.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김구 선생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언뜻언뜻 선생의 자기애가 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슬그머니 미소짓는다. 위대한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는 즐거움이랄까. 

며칠 전부터 잠들기 바로 전에 <발견, 하늘에서 본 지구 366>을 몇 페이지씩 본다. 먼저 오른쪽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게 무얼까 어느 곳일까 잠시 생각한 후 왼쪽의 내용을 보는 식인데, 볼 때마다 놀란다. 지구상에 이렇게 다양한 자연 환경, 건축물, 문화 유산이 있었던가. 그 중에는 이미 다른 책에서 읽은 것도 있건만, 글로 묘사해 놓은 것을 읽는 것과 사진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반증이라고 생각된다. 뭐 별로 애국자도 아니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게 좀 우습기도 하다. 

사고 싶은 신간이 또 몇 권 나와서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있다. 그동안 구입한 책들 하나도 읽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는 중인데, 어떡할까. 보지도 않으면서 사기만 하는 거, 이것도 일종의 낭비벽이다. 언제가는 읽겠지 하고 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그냥 쳐박혀 있는 책들도 있다. 에휴...

이번 주말에는 놀러 나가지 말고 침대 위에서 책이랑 굴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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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TV에서 사람의 피부를 확대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피부를 확대해 보면 보이는 거라고는 털과 모공에 쩍쩍 갈라진 듯 보이는 표피뿐이고, 심지어 섬모충인지 뭔지 하는 벌레까지 기생하고 있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을, 굳이 커다랗게 확대해놓고는, 봐라 이게 진실이다, 라고 말하는 악취미. 딱 홍상수식 영화다. 그의 영화는 보는 사람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친구는 그가 잘난 척 해서 기분 나쁘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잘난 척 한다기 보다 지독히도 잔인하다고 느낀다. '니들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근데 봐, 니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게 저런 거야. 저 모습이 아름답니?' 홍상수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생활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영화를, 나는 내내 인상을 쓰고 봐야만 했다. 그가 들이대는 현실이 너무나 선명해서,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던 거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전작들과 비교해 보여주는 내용 자체는 다르지 않다. 욕망을 좇으면서 그럴싸하게 포장하려 하고, 뻔히 보이는 잔머리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암투까지. 그런데 어쩐지 난 킬킬거리며 영화를 봤다. 경쾌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현미경을 바짝 들이대며 사실을 확인할 것을 종용하는 게 아니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웃기지 웃기잖아, 하는 것 같다. 잔인함이 덜해 졌다고나 할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뀐건지, 내가 나이를 먹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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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vin Townsend Band

01 Depth charge

02 Storm

03 Random analysis

04 Deadhead

05 Suicide

06 Traveller

07 Away

08 Sunday afternoon

09 Slow me down

10 I really love Korea

 

Devin의 명성 때문에 기대를 갖고 듣기 시작한 앨범. 그렇지만 처음 며칠 간 별 느낌도 없었고, 무엇을 듣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폭포수 한 가운데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맞듯 그의 음악을 느끼기 시작했다.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기타와 드럼에 귀를 기울이고, 곡의 분위기에 취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 마치 그 동안 그의 음악이 발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이면서 조금씩 내 몸을 물들이고 있었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음악에 완전히 젖은 후에야 온 몸으로 듣게 된 것 같다.

 

Devin Townsend는 모든 곡을 만들고 기타 연주까지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능력은 보컬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변화무쌍한 그의 음색은 심지어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때론 부드럽게 속삭이고 때론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별 다섯 개를 줄 수 있다.

 

음반에 실린 9곡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강력한 기타 사운드를 바탕으로 시원하게 내지르는 보컬이 멋진 Death Charge,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직접 파고들려는 듯 절규하는 Random Analysis,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하게 만드는 Deadhead와 Suicide외에 Traveller는 경쾌한 팝같고, Sunday Afternoon은 비오는 일요일 오후처럼 나른하다. 그런데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의 흐름이 상당히 유연하다.    

 

반복해서 들을 때마다 계속 새로운 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느낌이 난다.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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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사기' 혹은 '도둑질'에 관한 장르 영화가 몇 편 나왔던 걸로 기억하지만, 극장에서 본 건 하나도 없다. (비디오나 케이블 TV에서 본 것도 거의 없다.) 이러한 영화의 기본은 '관객의 뒤통수 치기'인데, 그걸 성공적으로 해낸 영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영화의 평은 '뻔하다', '범인이 보인다', '엉성하다' 등이었다. <유주얼 서스펙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션스 일레븐> 정도는 되어야 볼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리얼 사기극을 표방하는 <범죄의 재구성>을 볼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일단 시사회의 반응은 좋았다는데, 과연 2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친구가, 배우들의 면면을 봐서라도 보자고 잡아끌지 않았으면, 아마 비디오로도 보지 않았을 거다.

결과? 재밌다. 시나리오 쓰는데 공을 들였다더니, 과연 탄탄하다. 잘 짜여진 구성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느슨하지 않게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독특한 설정이나 치밀한 전략 같은 것으로 관객들과 두뇌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너무 티나지 않게, 요모조모 보여주고 설명하면서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기꾼들에게서 직접 배웠다는 전문용어조차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사용되고, 그래서 유머러스하다. 어쨌거나 한국 영화에서 익숙치않은 장르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평할 수 있다. (특성 상 영화 내용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멋진 배우들인 것 같다. <지구를 지켜라>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백윤식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나이들고 망가진 사기꾼을 그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장화, 홍련> 이후 연기에 물이 올랐다는 염정아 역시 꽤나 멋지다. 영화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약간 옆으로 비껴있긴 하지만, 요염하면서 어리숙한 삼류 사기꾼을 보는 것도 즐겁다. 박신양의 1인 2역은, 썩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박신양을 보면서 생각하는 건데, 배우에게는 중요한 덕목이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물론 연기력이요, 둘째는 시나리오를 읽는 눈이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혹은 충무로에 나오는 여러 시나리오 중 자신에게 맞는 걸 골라내고, 그 배역을 통해 커리어를 넓혀가는 능력이 배우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거다. 한석규 같은 배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한석규라는 배우는 과대 포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썩 훌륭한 배우라기 보다는, 적절한 시나리오를 골라 적절하게 스텝을 밟은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매니저이자 시나리오를 고르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작은 형에게 모든 공을 돌릴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신양의 행보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좀 더 연기력이 요구되는 좋은 작품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편지>에 이어 계속 시시한 멜로 영화에만 출연하다보니 그의 이미지는 그냥 평범하고 부드러운 남자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선택한 게 <달마야 놀자>라니.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번 <범죄의 재구성>은 그에게 다른 영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가 좀 더 나은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은 예전에 이 배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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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미개의 행성>, 프랑스, 르네 랄루 감독

페이퍼 애니메이션이라는 이 작품은, 일반 셀이나 CG 애니메이션과는 색감이 다르다. 3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한 장 한 장 손으로 그려냈다는데, 과연 그 회화성이 돋보인다. 이윰 행성의 주인인 푸른 거인족 트라그와 각종 생물들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은 회화적 감각으로 형상화되어 신비롭게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초반부터 내내 흘러나오는 몽환적 음악은 이 작품 전체에 대단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기존에 보지 못한, 창조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트라그 족은 폐허가 된 테라(지구)에서 옴 족(인간)을 발견하고 이윰으로 데려와 애완용으로 기른다. 아마도 지구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문명이 파괴된 듯 하다. 트라그에게 옴은 개나 고양이 정도의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옴을 키우지만 애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에 불과하고, 애완용이 아닌 야생의 옴은 바퀴벌레나 황소 개구리처럼 그들의 환경을 더럽히는 존재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옴이 테라에서 상당한 문명을 이루었을 거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의견은 무시당한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는 야생 옴을 막기 위해 때때로 옴 소탕 작전이 벌어진다. 살충제, 끈끈이, 진공청소기 등 온갖 도구가 등장하고, 공포에 질린 채 이리저리 쫓기던 옴들은 무자비하게 몰살당한다.

애완용 옴 중 하나가 트라그의 아이들이 학습을 하는 헤드폰을 훔쳐 달아난다. 야생 옴들은 헤드폰을 통해 트라그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트라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주선을 만들어 이윰 행성의 위성으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트라그가 번식을 하는 ‘육체’였다. 옴의 우주선은 무방비 상태인 트라그의 육체를 공격하고, 그로써 트라그와 옴 간의 평화 협정이 맺어진다. 새로운 위성을 만들어 띄우고, 모든 옴은 그곳으로 이주해 서로를 공격하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체코 침공에 대한 비유라는 해석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딱히 체코 침공 뿐만 아니라, 역사상 인류가 저질러온 수많은 잔학 행위에 대한 비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흑인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아시아에서도 식민 정책으로 일관했다. 유태인을 몰살시키려 한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민족 혹은 국가가, 인접한 타 민족이나 국가를 억압하는 것으로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해결 방법은 ‘힘’이다. 그것도, 상대방을 실질적으로 파괴하고 위협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위험한 존재로 인정할 때라야 동등한 관계가 성립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사실 그렇게 틀린 주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제의 식민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 선진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요인 암살 등의 테러도 서슴지 않았고, 우리는 그것을 애국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은 어디서나 성립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북한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과 동등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응당 보복해야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더 큰 공격을 해야 한다. 결국 힘과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평화란 없을 테니까 말이다.

… 그런데, 이런 생각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올슨 스콧 카드의 <엔더 위긴 시리즈>에 ‘바렐스’와 ‘라멘’이라는 구분이 나온다. ‘라멘’은 인간과 다른 종이지만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존재로, 비록 생김새가 틀리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지능과 의식을 지닌 종을 의미한다. ‘바렐스’는 의사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이며 동물이 여기에 포함된다. <엔더 위긴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류는 우주를 개척해나가면서 새로운 종족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라멘인지 바렐스인지를 판단하려고 애쓴다. 라멘이라면, 그들이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힘 혹은 문명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계없이,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을 처음 봤을 때, 카드가 타인종 혹은 타민족과의 만남에서 인류가 보여 온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길은 인간이라면 여하한의 조건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카드의 믿음이 지나치게 순진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인류가 걸어가야 할 길은, 르네 랄루의 주장 보다는 올슨 스콧 카드의 믿음이라고 나 역시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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