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영국에서 세트와 의상 전체를 들여와 화려한 무대를 만든다고 한참 광고할 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봤다. 그 전까지 뮤지컬 관람은 몇 번 없었고, 전부 소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페라의 유령은, 화려했고, 재미있었고, 다소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십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작부터 봐야지 생각했는데, 본 사람들의 평이 거의 좋지 않았다. 오늘 통화한 사람은, 영화 보러 간다고 했더니, 그거 뮤지컬이랑 똑같아서 재미없대요, 라고 초를 치기도 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다가 의외의 재미를 발견하기도 하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제법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 재미는 영화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전에 본 뮤지컬에 기대어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사진의 저 장면, 팬텀이 크리스틴을 자신의 지하 세계로 데려가는 장면을 볼 때, 무대 위에서 배가 움직이고, 촛불이 스르륵 무대 위로 올라와 관객을 놀라게 하던 공연이 떠올라서, 그때의 기억으로 오히려 좋아했다. 확실히 무대 공연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화려하고 섬세한 극장의 모습이며, 극 중의 공연 장면들, 크리스틴 아버지의 묘지 등도 볼만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조엘 슈마허 감독이라고 광고하는게 옳은가 하는 생각이다. 아는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뮤지컬보다 좀 더 화려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차별점을 느끼지 못하겠더라. 게다가 영화 자체로 보자면 팬텀과 크리스틴의 감정에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용서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중간에 좀 지루하기도 하다.

크리스틴 역의 에미 로썸을 칭찬하는 글이 많던데, 내 생각엔 지나치게 여린게 아닌가 싶다. 좀 더 힘있게 표현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친구는 라울이 못생겼다고,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사실 가장 눈에 띈 배우는 카를로타역의 미니 드라이버였다. 첫 장면부터, 어, 미니 드라이버 맞나, 하면서 눈여겨봤는데, 확신을 못하겠더라. (하긴, 미니 드라이버가 나온 영화라고는 굿 윌 헌팅 하나밖에 본 게 없으니.) 새된 목소리에 과장된 표정과 몸짓, 노래할 때의 가늘고 조금은 간드러지다 할 고음이 인상적이다. 완벽한 카를로타라고나 할까. 미니 드라이버가 노래를 잘 하는 배우라는 걸 처음 알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Iron Maiden의 Phantom of the Opera가 듣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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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12-1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니 드라이버 맞아요? 굿윌헌팅에서 다들 경악하던 그 목소리!!(전 좀 무딘편이어서 그닥 경악하진 않았지만 ^^a)

urblue 2004-12-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굿윌헌팅에서 다들 경악했던가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



새벽별님, 그래도 볼 만은 한 것 같습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2-14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영화 리뷰는 왜 이리 다 보고 싶데요? 그런데 요전날 스트레스는 다 풀리셨는지요? ^^

urblue 2004-12-1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이안님, 스트레스는 그 날 다 풀어버렸습니다. 컴에서 소리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더구만요. 글을 별로 재미있게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

바람구두 2004-12-1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니 드라이버... 였군요, 고마워요. 그 배우 이름을 까 먹고 있었는데...

로드무비 2004-12-1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은 꽤 구미가 동하게 쓰셨는데 보러 갈 생각은 안 나네요.

오페라에도 관심이 있으셨구랴.^^

바람구두 2004-12-1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뮤지컬인디...

urblue 2004-12-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바람구두님. ㅋㅋ 뮤지컬인데...

하얀마녀 2004-12-1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카고(영화로 봤습니다)를 괜찮게 봤으니 이것도 괜찮을라나요? ^^

urblue 2004-12-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 저도 시카고 재밌게 봤어요. 차이점이라면, 시카고의 배우들은 워낙 유명인들이잖아요. 특히 캐서린 제타 존스 보면서는 진짜 멋지다 감탄했죠. 여기 배우들은 그런 카리스마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경우엔, 시카고는 뮤지컬을 보지 않았으니 아마도 느낌이 달랐겠지요.

그래도 제법 볼 만 하다니까요. ^^

로드무비 2004-12-1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정신머리하고는......

그런다고...자기들끼리 속닥속닥 기분 나쁘요.

urblue 2004-12-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로드무비님, 삐지시면 안돼요, 흑.
 
 전출처 : 조선인 > 여의도 천막촌을 지키는 사람

여의도 천막촌을 지키는 사람
국가보안법완전폐지 단식농성 41일째 맞은 송현석씨
 
▲ 단식 40일만에 20kg 이상 살이 빠진 송현석씨
ⓒ2004 김희정
'개혁국회'라며 국민의 기대를 한 몸으로 받았던 17대 국회는 결국 파행으로 얼룩진 '퇴보국회'로 정기 회기를 마감했다.

국회가 파행을 일삼는 동안 여의도에는 국가보안법폐지를 비롯한 4대개혁입법관련 농성 천막과 비정규직법안철회, 미군기지 평택이전 반대, 장애인 이동권 보장 등 수많은 농성천막이 들어서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12월 6일부터 3백여 명의 대규모 노상단식농성을 진행하며 무능력과 파행으로 점철된 국회를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일명 '천막촌'으로 불리는 여의도 국회앞 농성장 첫머리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모형감옥이 있다. 0.75평 독방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감옥 안에는 무기한 감옥 단식 농성을 진행하는 한 청년이 있다.

감옥의 주인은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정책위원장은 송현석(34)씨다. 그는 지난 11월 2일부터 무기한 감옥 단식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여름 국가보안법폐지 전국도보행진을 기획하고 전국을 뛰어다니던 그는, 가을에는 서울도보행진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90kg에 육박하던 그는 단식농성 41일째인 12일 20.5kg의 살을 국보폐지 구호에 실어보내서인지 짧은 말을 이어가는데도 힘겨워했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감옥 안에 들어섰을 때 느낀 소음과 진동은 고문 수준이었다. 각종 집회에 동원된 대형 스피커가 농성장 사방을 에워싸 송현석씨는 아침 6시부터 늦은 밤까지 소음과 진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든 집회와 행사의 스피커는 송현석씨의 감옥과 가장 가까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41일째 묵묵히 독서와 신문스크랩, 글쓰기로 소음과 진동을 이겨내고 있는 그를 보며 기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송현석씨를 옆에서 지켜주고 있는 이승호 한청집행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이 되서야 겨우 전기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30일이 훨씬 넘는 기간동안 송현석씨는 온기 한 점 없는 감옥에서 생활하고, 잠을 청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컴컴한 방에서 등산용 랜턴에 의지해 지내며 눈을 혹사시켜왔다고 한다.

"힘들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괜찮습니다"며 미소로 대답하지만 미소 뒤에 힘겨움이 묻어났다.

기자는 감옥을 한참이나 스케치했다. 감옥이 농성장 첫머리에 있다보니 오가는 사람들이 문을 벌컥 열며 짐을 맡기는가 하면 안내소처럼 여기고 뭔가 열심히 묻는 사람, 모형감옥이 신기한지 감옥 안을 한참이나 엿보고 심지어 문까지 열고 자기들끼리 웃음 농을 치는 사람들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농성장에 사람이 많이 늘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번씩 문을 열고 가만히 보기도 하고 안부를 묻지만 그의 처지에서는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그는 완벽히 '트루먼쇼'를 찍고 있었으며 종종 동물원의 원숭이도 됐다, 안내소의 안내원도 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잠자는 시간 외에 등을 바닥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양심과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침마다 차가운 냉수에 몸을 맡기며 건강과 체력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에 작은 관심과 배려가 더해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41일째 단식으로 '고요한 분노'를 쏟아내는 그의 감옥문을 닫았다.

우리에겐 꿈이 있습니다
12월 11일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대회 연설문(송현석)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살을 태우고, 나의 피를 말리며, 단백질 한 올 한 올을 강바람에 실려 보내도 꿈을 향한 나의 투쟁은 멈출 수 없습니다.

나의 꿈은 '더불어 사는 이웃', '더불어 사는 사회', '더불어 사는 민족'입니다.

'더불어 사는 이웃'은 이웃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서로의 삶을 보듬고, 협동하는 인간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향한 꿈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인류의 가치와 아름다운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기초한 협의민주주의적 정치·사회관계, 생산과 분배가 균형을 이룬 사회, 생산자·노동하는 이의 참여와 권리 및 책임과 지혜가 소중한 생산의 민주주의, 소수자가 보호받는 일상의 민주주의, 상식이 통하고 새로운 상상력이 대접받고 보장받는 열린 사회를 향한 꿈입니다.

'더불어 사는 민족'은 남과 북이 하나된 민족 평화통일민족으로서 아시아와 세계의 모든 민족, 모든 국가와 평등·호혜관계를 이루고 서로의 문화와 경제를 교류하는 평등한 국제관계를 향한 꿈입니다.

나의 꿈은 여기 있는 우리에게서 온 꿈이며, 오늘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지향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살과 피를 태우는 우리 모두는 하니이며 미래이자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스승이며 길이자 확신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과 멀리서 지지를 보내주시는 모든 시민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보냅니다.

국가보안법은 나의 꿈, 우리의 미래를 가로막는 상징이자 도구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더불어 사는 이웃을 감시하는 중세적인 원형감옥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파괴하고 정치·경제·사상의 불평등, 인간을 불평등을 강요하는 억압도구이자 보이지 않는 폭력구조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더불어 사는 민족을 갈라놓고 증오를 넘어 전쟁을 몰고오는 극단의 폭력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민족을 유린하고 외세에 굴종하게 하는 빈민족적·식민지 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하나까지 바쳐서라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우리의 꿈, 나의 꿈을 이루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모가 주신 살을 태우며, 노동이 정화시켜준 피를 말리며 형제와 벗의 눈물을 삼키며 깊어가는 겨울만큼 우리는 야위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낡은 역사는 새 역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가치는 억압 속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천이며, 투쟁이며, 승리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며, 미래입니다.
우리는 인간이며, 평화입니다.

승리하는 그날까지 옆사람의 다리에 의지하기보다 내 다리를 옆사람에게 내주며 곧추일어나 달려갑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그날까지 저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며, 여러분의 투쟁이 계속될 것을 확신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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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3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블루의 비명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어디 화풀이 할 데도 없으니 이렇게나마 스트레스 해소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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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2-10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뭔 일이신지 몰라도 맘껏 지르세요...

chika 2004-12-1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너무 크게 비명을 질러서 얼굴이 하~얘졌어요!

뭐예요? 우리 블루님을 비명지르게 하는게!! 제가 혼내줄께요!!

깍두기 2004-12-1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따우님 서재에서 한번 이렇게 빈 페이퍼에 당황한 적 있었지요^^

안 좋은 일은 아니겠죠?

플레져 2004-12-1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아무 내용을 안써도 글이 올라가넹. 블루님~~~ 속 시원해질때까지 질러요, 질러~~~

반딧불,, 2004-12-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질러드릴께요ㅡ.ㅡ

urblue 2004-12-10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고맙습니다.

괜히 스트레스 받아서 소리 한번 질러 봤습니다.



그런데, 플레져님, 아무 내용도 없진 않은걸요. ^^

숨은아이 2004-12-10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 글자로 쓰셨군요. 마우스 누르고 반전시키면 보이는. ㅎㅎ 이제 기분 나아지셨기를...

mira95 2004-12-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나쁜 사람은 안 보이는 건가요? 기분은 나아지셨나요?

2004-12-13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참다못해 선수로 뛴 격

지금까지 나는 내가 장차 미국에 관한 책을 쓰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난 십수년 동안 나는 여러 학술잡지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미국을 연구한 학자들을 필자로 기용하여 미국 관련 특집을 잡아보자고 여러번 제안하였으며, 몇몇 출판사에는 미국 관련 단행본 출간을 해보자고 말한 적도 있다. 일부는 수용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적합한 필자를 찾지 못해 기획이 실패로 돌아간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답답하게 생각하면서 우리 학계나 지식사회의 현실을 한탄하였다. 결국 이런 내가 미국 관련 책을 쓴 것은 운동장에서 코치 보조하면서 선수 기용하는 문제를 상의하다가 적합한 선수를 못 찾아낸 나머지 참다못해 선수로 뛴 격이다. 정말 관중들이 놀라고 비웃을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라크전쟁과 한국전쟁

2003년 1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이라크전쟁과 한국전쟁을 교차시켜 본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의 기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의 개입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면 나 역시 단순하게 이라크전쟁을 비판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나에게전쟁중의 이라크는 곧 50여년 전의 한국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한국전쟁 때의 미국과 이라크를 공격한 오늘의 미국은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있기는 하나 별개의 미국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서 이러한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을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해 매우 답답하고 외로웠다. 인터넷으로 한국신문을 검색하면 답답증이 가중되었다. 이라크 전황을 보도하는 국내 언론사의 어떤 기자, 어떤 칼럼니스트도 한국의 과거나 현재와 현재의 이라크를 연계하지 않았다. 개전 직후 바그다드 박물관이 유린되는 것, 무고한 이라크 민간인이 죽은 것을 보고 내가 참담한 심정에 빠진 것은 분명히 내가 과거 이와 유사한 전쟁을 겪었던 약소국 출신의 외로운 학인(學人)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으니 일기나 편지로 생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그렇게 나를 압박했던 글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책을 좀 읽어보려던 다짐은 그만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난해 3월, 이라크 전쟁이 터진 후 나는 내 홈페이지에 '전쟁과 미국'이라는 제목의 씨리즈로 10회 정도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의 일부는 참여연대 등의 국내 인터넷 싸이트에 올리기도 했고 오마이뉴스, 참여사회 등의 매체가 나의 허락 없이 그 글의 일부를 자신들의 인터넷 싸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시평이 이 책의 밑그림이 된 셈이다. 다른 작가들에게 글을 쓰는 것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탈출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경우는 분명 미국땅에서 살면서 누군가를 상대로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너무 무식하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는 사실 미국에 대해 너무 무식하다. 이 책을 쓰던 중 미국에 관한 외국인들의 연구서를 찾다가 영국의 저명한 학자인 라스키(H. Laski)가 1948년에 쓴 『미국의 민주주의』(The American Democracy)라는 800쪽짜리 방대한 저서의 일부를 읽었는데, 나는 완전히 기가 질리고 말았다. 또끄빌(A.Toc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는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고 나 역시 이전에읽은 적이 있지만 라스키의 책은 처음 접했는데, 그 분석의 치밀함과 철저함은 가히 감탄할 정도였다. 그의 책을 읽고서 이 작업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이 여러번이다. 그러나 수준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라면 제공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아서 다시 펜을 잡았다.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의 정치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은 틀림없지만, 반세기 동안 이렇게 일방적으로 미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서 사실상 미국을 정신적 모국으로 삼아온 우리나라에서 미국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서가 희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부끄러움을 벗어나려는 한 몸부림이다.

작은 나라 한국이 살아갈 방도

이 책은 미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내 머리 속에는 언제나 한미관계 혹은 작은 나라 한국이 살아갈 방도에 대한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이 엄청난 제국의 위세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한국, 한반도가 강대국에 완전히 집어먹히지 않고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문화적 종주국인 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로 관심이 확대되어, 전에 읽었던『광해군』(역사비평사 2000)『열하일기(熱河日記)』등을 다시 읽기도 했다. 그리고 유길준은『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쓰면서 미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윤치호나 이승만은 미국을 어떻게 보았나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반추해보기도 했다.

미국 유일 패권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국의 엘리뜨 집단에는 여전히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과 시장주의 경제학을 배운 그들의 지식에 따르면, 미국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한국이 어긴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제 한국 사정도 옛날과 달라져서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의 치부가 폭로되어 평범한 한국인들도 미국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면서 미국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운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책은 이러한 지적 풍토에 던지는 하나의 작은 돌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미국 유일 패권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던져진 이 화두를 잡고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탐구와 학습, 그리고 토론이 필요하다.[창비 웹매거진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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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조만간 극장에서 퇴출될 듯한 분위기라 땡땡이치고 영화를 보러 갔다. 예상대로 극장 안은 한산했다.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보고 싶었다. 변영주라는 이름과 (사실 그의 전작들은 보지 않았다.) 아일랜드로 새롭게 조명을 받은 김민정, 더 이상 가수 활동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선언한 윤계상이 모여 어떤 조합을 보여줄까 기대 반 호기심 반이었다고나 할까.



 



김민정과 윤계상이라는 배우가 19살 고등학생 역할이라는 것만 알아도, 이 영화가 성장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발레 교습소가 배경이라니,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발레라는 클래식한 소재로 도전, 배움, 그리고 어려움의 극복 내지는 희망을 얘기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또 한참 벗어난다.



수능 시험을 끝내고 앞으로의 길이 막막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강아지조차 무서워하는 주제에 집에서 멀다는 이유만으로 제주대 수의학과를 택한 수진(김민정), 비행기 조종사인 아버지의 강권으로 항공대에 진학하고자 하지만 성적이 한참 모자라는 민재(윤계상), 공부는 뒷전이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동완, 전문 백댄서가 되고 싶은 창섭,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은커녕 당장 생활고에 시달리는 기태 등등. 뿐만 아니다. 발레 교습소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또 있다. 발레를 좋아하는 중국집 종업원, 비디오 가게 아저씨, IMF 때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은 요쿠르트 아줌마, 적은 수강생 때문에 구청에서 구박당하는 발레 선생, 아내를 잃고 아들에게 기대를 걸지만 아들과 어떤 식으로 대화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버지.



감독은 이 영화를 성장영화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는 감독이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 생각인가, 그래서 이 한편에 하고 싶은 모든 얘기를 담으려고 한 건가 의심하게 된다. 진로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 사내 아이들의 우정, 첫사랑, 어른으로 살아가는 고달픔, 약자에게 가혹한 사회, 그 속에 만연한 폭력, 게다가 성적 소수자의 외침까지, 에피소드마다 뭔가 하나씩은 들어가 있다. 당연히 이야기는 이리 저리 튀고, 인물들의 감정은 느닷없이 생뚱맞다. 게다가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조차도 간신히 이어질까 말까 하는 흐름을 흐트려 놓는다. (이런 지경인데도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들은 훌쩍이는 것 같더라만.) 한마디로, 전혀 몰입이 안되는 영화다.



모든 걸 담아내고자 한다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몰랐던 걸까. 과욕이 어째서 나쁜건지를 보여주는 실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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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2-0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영주 감독의 밀애를 보고 한숨만 나왔어요.

아무래도 극영화의 장르에 안착하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듯 해요.

김민정 때문에 고민을 했는데... ㅊㅊ 합니다!

로드무비 2004-12-09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영화보다 <마이 제너레이션>이 보고 싶던데......

<밀애> 보고 많이 실망했거든요.

비디오로 나오면 한번 봐야지.

그나저나 블루님도 보면 꽤 신랄해요.^^

chika 2004-12-09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

urblue 2004-12-0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영주 감독이 다음 영화를 만든다면 보고 싶을까, 안그럴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신랄이라고 하시면..음...

2004-12-09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