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참다못해 선수로 뛴 격

지금까지 나는 내가 장차 미국에 관한 책을 쓰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난 십수년 동안 나는 여러 학술잡지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미국을 연구한 학자들을 필자로 기용하여 미국 관련 특집을 잡아보자고 여러번 제안하였으며, 몇몇 출판사에는 미국 관련 단행본 출간을 해보자고 말한 적도 있다. 일부는 수용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적합한 필자를 찾지 못해 기획이 실패로 돌아간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답답하게 생각하면서 우리 학계나 지식사회의 현실을 한탄하였다. 결국 이런 내가 미국 관련 책을 쓴 것은 운동장에서 코치 보조하면서 선수 기용하는 문제를 상의하다가 적합한 선수를 못 찾아낸 나머지 참다못해 선수로 뛴 격이다. 정말 관중들이 놀라고 비웃을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라크전쟁과 한국전쟁

2003년 1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이라크전쟁과 한국전쟁을 교차시켜 본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의 기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의 개입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면 나 역시 단순하게 이라크전쟁을 비판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나에게전쟁중의 이라크는 곧 50여년 전의 한국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한국전쟁 때의 미국과 이라크를 공격한 오늘의 미국은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있기는 하나 별개의 미국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서 이러한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을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해 매우 답답하고 외로웠다. 인터넷으로 한국신문을 검색하면 답답증이 가중되었다. 이라크 전황을 보도하는 국내 언론사의 어떤 기자, 어떤 칼럼니스트도 한국의 과거나 현재와 현재의 이라크를 연계하지 않았다. 개전 직후 바그다드 박물관이 유린되는 것, 무고한 이라크 민간인이 죽은 것을 보고 내가 참담한 심정에 빠진 것은 분명히 내가 과거 이와 유사한 전쟁을 겪었던 약소국 출신의 외로운 학인(學人)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으니 일기나 편지로 생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그렇게 나를 압박했던 글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책을 좀 읽어보려던 다짐은 그만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난해 3월, 이라크 전쟁이 터진 후 나는 내 홈페이지에 '전쟁과 미국'이라는 제목의 씨리즈로 10회 정도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의 일부는 참여연대 등의 국내 인터넷 싸이트에 올리기도 했고 오마이뉴스, 참여사회 등의 매체가 나의 허락 없이 그 글의 일부를 자신들의 인터넷 싸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시평이 이 책의 밑그림이 된 셈이다. 다른 작가들에게 글을 쓰는 것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탈출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경우는 분명 미국땅에서 살면서 누군가를 상대로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너무 무식하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는 사실 미국에 대해 너무 무식하다. 이 책을 쓰던 중 미국에 관한 외국인들의 연구서를 찾다가 영국의 저명한 학자인 라스키(H. Laski)가 1948년에 쓴 『미국의 민주주의』(The American Democracy)라는 800쪽짜리 방대한 저서의 일부를 읽었는데, 나는 완전히 기가 질리고 말았다. 또끄빌(A.Toc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는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고 나 역시 이전에읽은 적이 있지만 라스키의 책은 처음 접했는데, 그 분석의 치밀함과 철저함은 가히 감탄할 정도였다. 그의 책을 읽고서 이 작업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이 여러번이다. 그러나 수준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라면 제공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아서 다시 펜을 잡았다.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의 정치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은 틀림없지만, 반세기 동안 이렇게 일방적으로 미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서 사실상 미국을 정신적 모국으로 삼아온 우리나라에서 미국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서가 희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부끄러움을 벗어나려는 한 몸부림이다.

작은 나라 한국이 살아갈 방도

이 책은 미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내 머리 속에는 언제나 한미관계 혹은 작은 나라 한국이 살아갈 방도에 대한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이 엄청난 제국의 위세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한국, 한반도가 강대국에 완전히 집어먹히지 않고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문화적 종주국인 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로 관심이 확대되어, 전에 읽었던『광해군』(역사비평사 2000)『열하일기(熱河日記)』등을 다시 읽기도 했다. 그리고 유길준은『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쓰면서 미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윤치호나 이승만은 미국을 어떻게 보았나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반추해보기도 했다.

미국 유일 패권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국의 엘리뜨 집단에는 여전히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과 시장주의 경제학을 배운 그들의 지식에 따르면, 미국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한국이 어긴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제 한국 사정도 옛날과 달라져서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의 치부가 폭로되어 평범한 한국인들도 미국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면서 미국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운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책은 이러한 지적 풍토에 던지는 하나의 작은 돌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미국 유일 패권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던져진 이 화두를 잡고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탐구와 학습, 그리고 토론이 필요하다.[창비 웹매거진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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