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전우용 - 역사인식과 과거사 문제
역사인식과 과거사 문제
전우용(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체험의 기혹과 반성의 한계
1985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야만적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를 산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1986년 서울대 출신 여성노동자 권인숙이 부천경찰서에서 문귀동이라는 형사에게 차마 밝힐 수 없는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도 모두 아는 일이다. 이 두 사건은 이미 집단적 기억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이제 결정적 ‘증거’는 없다. 가해자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피해자의 진술 외에 문서상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작성되지 않았다. ‘문서화된 자료’만으로 유일한 증거로 받아들일 경우, 이 사건은 ‘가공된 사건’이거나 기껏해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자행한 이런 유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사건에 관련도니 양측의 엇갈린 ‘주장’을 듣는 것만으로는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고문사실을 부정하는 여러 명의 가해자와 고문피해를 호소하는 단 한 명의 피해자 사이에서 수량적 형평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사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상황’에까지 눈을 돌려야 한다. 상황은 집단적 체험과 기억은 다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1970․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일상에서 수시로 국가보안법과 마주쳐야 했다. ‘박정희는 김일성보다 나쁘다’는 말이 ‘김일성을 고무찬양했다’는 죄로 둔갑하는 지독한 역설의 세계 속에서 살았고, 누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 시대를 김근태․권인숙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를 접하지 않고도 쉽게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자와 ‘쥐도 새고 모르게 죽을 수’있는 자의 체험과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도 권인숙을 ‘성조차 혁명의 도구로 삼은 좌경용공분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좌경용공세력’이나 그로 의심되는 자에게는 고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상당히 많다. 문제는 어떤 상황인식 위에서 ― 어느 편에 서서 ― 사건을 바라보느냐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완전히 중립적인 영역에서 사실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솔직히 고백하라’밖에 없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이 사실관계를 누락 없이 고백한다고 해도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적 차원의 반성만을 증빙자료로 삼는다면 사실관계가 완전히 왜곡될 수 있다.
나는 아직껏 공개적으로 반성하거나 사과한 고문경찰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설령 이들이 반성한다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 반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사실관계 전체를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정보부 직원이나 경찰간부에게 직접 고문을 지시했을 리는 없다. 경찰청장이나 치안본부장이 고문하라는 공문을 보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고문경찰들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기껏 “고문은 했지만, 상부의 지시는 없었다”는 내용뿐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그런 일을 ‘직적’, ‘구체적으로’, ‘문서를 통해’ 지시하겠는가. 고문경찰들에게도 고문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하게 할 것인가 적당히 할 것인가를 선택할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수록 고문경찰을 포상하고 고문하지 않는 경찰을 징계한 ‘권력’의 책임은 은폐되고, 책임의 한계는 그들 내부에 국한된다. 국가권력은 ‘경찰을 제대로 권리하지 못한’ 간접적인 책임만 지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관련자들의 ‘성찰적 고백’도 사실관계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 군부나 조선총독부가 ‘종군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증거자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의욕적인 연구자들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명백하고도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만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위안부 모집방법이라든가 모집대상이라든가 하는 문제에까지 시시콜콜 개입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다만 ‘위안부’ 모집과정에서 자행된 취업사기와 강제연행, 개인적 보복 등을 모른 체 해주면 되었다. ‘위안부’를 모집한 자들이나 ‘위안소’를 찾은 병사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내용도 거기에 국한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인들 사이에서 도덕성 회복의 열풍이 불어 ‘성찰적 고백’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해도 일본군이나 조선총독부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명백한 ‘증거’는 아마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또 물어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처한 ‘총체적 상황’에 대한 집단적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집단적 체험의 기억은 ‘민족’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가상의 기억’이 결코 아니다. 학대와 차별, 학살과 수탈이 ‘민족’을 경계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형성된 집단적 기억이다. 그 민복의 ‘경계 밖’에 있었던 자들 ― 일본인과 이른바 ‘민복반역자들’ ― 은 결코 공유할 수 없었던 기억이다. 군사독재체제의 수혜자들 역시 피해자인 대다수 민중의 집단적 기억을 공유할 수 없다. 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을 범죄라고 생각할 뿐, 국가보안법 자체가 반인간적 법률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한다. 신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중립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터이다. 해석자 역시 ‘상황’ 속에서 살며 판단하는 인간인 이상 어느 한 쪽의 상황인식을 ‘부정’하는 순간, 그는 다른 한쪽의 상황인식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계량의 매력과 함정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자들이 입버릇처럼 뱉어내는 말은 “국가보안법이 보통사람들이 사는 데 불편을 주는 게 뭐냐”는 것이다. 국민이 절감하는 문제인 ‘경제난’은 외면하면서 과거사 규명이니 국가보안법 폐지니 하는 일에 매달리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얘기도 한다. 사실 수치만으로 따져보면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친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직접’ 피해를 본 사람은 전국민의 1%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수치를 확대하는 순간, 국가보안법은 한국사회에 아주 ‘미미한’ 영향만을 준 법이 된다.
근대과학에서 ‘숫자’는 대단히 매력적인 도구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측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근대과학자들은 크기와 무게, 속도와 빈도, 화폐가치나 생산량으로 측정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수집과 분류, 재배열과 수학적 종합의 과정을 거쳐 ‘평균적’ 수치와 ‘표준적’ 수치로 전환된다. 숫자는 이제 ‘표준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됨으로써 모든 가치판단에 선행하는 ‘객관성’의 체현체가 된다. 이 객관성은 ‘표준적이고 평균적이며 보편적인’ 사건과 사물, 사람들 속에서 ‘일반적 진리’로 통용된다. 그러나 숫자는 ‘현상’을 그럭저럭 기술할 수는 있지만, ‘본질’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산술적인 평균’ 역시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지속되며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근래 식민지시대사 연구에서도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이 연구들의 결론은 대개 유사하다. 식민지 시기에도 ‘보통’ 사람들은 신문물에 열광하고 연애와 사교에 열중했으며 경제적 성취에 몰두했을 뿐, 민족해방운동이니 민족문제니 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같은 결론은 다시 식민지시기의 ‘민족문제’를 상대화하는 자세를 낳고, 더 나아가 “민족주의라는 색안경을 쓰고 역사를 본 결과 민족문제가 실제보다 과도하게 인식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식민지시기를 산 98%의 조선인 ― 보통의 조선인 ― 들은 1%도 안되는 ‘민족운동가’나 1%도 안 되는 ‘친일파’들이 사는 공간과는 다른 어떤 지대에서 그들 특수한 부류와는 다른 생각, 다른 생활을 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런 분석방법을 취하면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가 보통사람들의 평균적 요구가 되고 ‘조선독립만세’는 극소수 사람들의 특이한 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한 100여 명의 증언은 기껏 ‘특수한 사례’에 관한, 그것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기록이 되어버리고, 나머지 ‘위안부’ 수만 명의 ‘무언(無言)’은 오히려 ‘위안부 조달이 대체로 큰 문제없이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수량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 표준적인 것과 일탈적인 것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숫자가 그 경계를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엇ㅂ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텍스트들이 ‘평균적으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출현했고,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출판금지 처분건수, 필화사건의 횟수, 검열에 걸려 삭제된 자행의 수따위만 가지고 본다면 텍스트 생산에 가해진 제역은 ‘무시해도 좋은’ 수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푸코가 말했듯이, ‘인위적인 경계짓기’는 모든 산술적 표준화에 선행한다. 감옥과 수용소는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을 가두어둠으로써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과 합법’의 표준적 규율을 강제한다. 더구나 식민지 감옥의 심리적․문화적 크기는 문화적 연속성 위에서 만들어진 서구 사회의 감옥보다 훨씬 컸다. 조선인들이 ‘민족주의’의 색안경을 쓰고 일본인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일본인들이 ‘민족차별주의’의 색안경을 쓰고 조선인들을 쳐다보았다. 멸시와 차별은 일반적이었고 전면적이었다. 일본인들이 설정해놓은 ‘표준’에 의해 대다수 조선인은 잠재적 범죄자요 ‘비정상적인’ 열등인이 되어버렸다. 그로써 ‘표준적’ 조선인과 ‘평균적’ 조선인 사이의 거리도 더 멀어졌다. 조선인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설정해 놓은 표준에 근접해가야 했다. 일제하 조선인들은 그 표준에 가까이 있는 텍스트만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권력은 한두 차례의 단호하고 혹독한 처벌만으로도 대부분의 저항적 언어 ― 이 언어가 조선인들의 진정한 ‘평균적’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었겠지만 ― 를 잠재울 수 있었다. 노래 <황성옛터>를 지은 왕평과 전수린이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치도곤을 당하고 난 뒤로는 그와 비슷한 노래는 물론 그에 훨씬 못 미치는 노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검열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검열과 처벌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는 ‘자기검열’ 기제가 중요한 것이다. 그 기제가 작동함에 의해 식민지 상황에서 생산된 텍스트는 ‘위험한 경계선’ 곁이 아니라 그 한참 바깥에서 평균화되었다. 동시에 민족, 독립, 해방, 혁명, 자주, 평등 등 수많은 언어들이 사람들의 의식 저편으로 숨어들어갔다. 중국인 비단장수 ‘왕서방’은 마음껏 조롱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 지주 ‘나카무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식민지 시기에 금기의 영역은 너무 넓었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은 너무 좁았다. 그럴진대 자신의 요구와 희망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말해서 안되었던 사람들에게 ‘보통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만든 텍스트들을 수집학도 분석하여 ‘보통사람의 생각’을 그려내고서는 마치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양 흥분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들은 민족에 대해, 독립에 대해 말하기 싫었거나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말할 수 없음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내뱉을 수 있었던 저항의 언어는 풍자와 비아냥의 선을 넘을 수 없었고,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저항의 행위는 ‘공공성(公共性)’― 이 역시 일본인들이 정한 표준 위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무시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일제하에서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공중도덕을 안 지킨 것은 그 이율배반적 표준에 대한 뿌리깊은 저항심리가 오히려 평균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하 ‘합법공간’이 더 넓었다면, ‘감옥’의 심리적․문화적 크기가 더 작았다면, 그 시대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의 이미지는 다른 준거에서 구축되었을 것이다. 조선태형령이 없었다면, 치안유지법이 없었다면, 살인적 고문이 없었다면 평균치를 추출할 모집단의 크기는 훨씬 커졌을 테니까.
우리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해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보안법은 접근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영역이었고, ‘보통사람들’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말이나 행동은 물론 저촉될 ‘우려가 있는’ 말이나 행동도 해서는 안되는 세계로 내몰렸고, 그 안에 고립되었다. 인민이나 동무는 물론 노동자, 민주주의, 평화통일, 독점자본 같은 단어가 한꺼번에 또는 번갈아 금기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국가보안법은 그렇게 ‘좁은 세계 안에 갇힌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아무런 불편도 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듯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순간부터 ‘보통사람의 공간’은 서서히 확대될 것이고, ‘보통사람’의 표준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국가보안법폐지를 결사반대하는 자들이 정녕 두려워하는 것은 이로 인해 이번에는 그들 자신이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고립된 세계’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이다.
민족주의의 색안경과 간도문제
근래 많은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과잉’ 현상을 비판하고 있고, 다수의 일반대중 역시 세계화의 화두를 마치 종교처럼 끌어안고 있다. 나는 오늘날 한국인의 민족의식이 ‘과잉상태’에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거니와, 설령 그같은 주장을 펼지라도 그 공격의 화살이 애꿎은 ‘위안부 할머니’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향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분명히 다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를 단지 일본제국주의자의 범죄행위로만 인식해서는 안된다는 말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를 젠더나 관슴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 성노예를 납치, 감금, 학대, 유기하는 전과정에서 일관된 민족차별주의적 기분을 적용했을 진대, 민족적 관점을 빼고서야 어떻게 이 사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이 겪은 참혹한 고통을 ‘조선인 여성’이기에 겪은 일로 기억하고 있는 한, 민족적 관점을 버리고 이 사건을 이해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지적 오만이 자행하는 최악의 횡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이 편협하다고 주장하던, 그래서 식민지시기를 ‘청산’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부조리하다고 목청을 높이던 지식인들이 정작 자신들에게 기꺼이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수구 언론들의 ‘간도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기묘한 현실이다. 수구 언론들은 마치 우리가 간도를 영유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식민지시기에 우리 민족이 입은 정신적 ․ 물질적 피해는 ‘가공의 산물’인 양 취급한다. 그러나 과연 어느 쪽이 가공된 것인가. 간도가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우리 영토라는 주장은 그것을 뒷받침할 충분하고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최근 수구언론들은 시시때때로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와 관련해 ‘새로’ 공개된 지도만 해도 여러 장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텍스트는 그것이 생산된 상황과 관련해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의 편린을 보여준다. 사진이나 지도, 숫자처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수구 언론들은 이들 텍스트가 생산된 상황은 거리낌없이 외면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들이 제시한 지도들에는 토문강과 두만강이 별개의 강으로 그려져 있긴 하지만, 간도의 영역이 명확히 표시한 바는 거의 없다. 지도에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 표시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백두산 정계 직후 조선정부에서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이 청과 외교문제로 비화될까 우려했던 일이다. 정계비를 세울 당시에는 청이나 조선이나 토문강이 두만강의 지류라고 착각했다. 정계비에서 토문강 상류까지 토축을 쌓은 사람들조차 애초에는 그 토축이 두만강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산 정계비만을 근거로 국경에 긋자고 우길 양이면 왜 영역조차 불확실한 간도만 우리 땅이라고 하는가. 토문강은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송화강은 다시 흑룡강에 합류한다. 아예 흑룡강 동쪽 전체와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해야 맞다.
통감부 시기에 일제가 만든 지도 중에는 간도의 영역을 제멋대로 그려넣은 지도도 있다. 그러나 그 무렵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는 모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들의’ 지도를 증거자료로 삼아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려면, 먼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인정해야 맞지 않는가.
그들은 또 ‘간도 협약’을 무효로 하고 이 지도를 ‘근거’로 하여 우리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이다.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에 무효선언을 했기에 무효이며, 1962년 조중변계조약이 간도협약 무효화를 기초로 체결되었기에 무효이다. 을사조약이 무효이기에 조선의 외교문제와 관련된 통감부의 모든 정치적․행정적․군사적․외교적 조처 역시 무효이다. 당연히 통감부나 일본군부가 대륙침략의 의도를 품고 만든 이 ‘지도’ 역시 무효이다. 어떻게 같은 자료를 두고 독도부분은 무효이고 간도부분만 유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조선후기 이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있었지만, 간도가 우리 땅이었던 적은 없다. 숙종대 백두산 정계비 아래에서 토문강 상류까지 토축을 쌓았던 장본인 허량(許樑)조차 “물줄기를 따라가보니 야인(野人)의 땅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당연히 간도에 조선과 대한제국정부의 군현이 설치된 적도 없다. 북․중 국경조약이 무효이고 간도협약이 무효라고 해서 바로 간도가 ‘우리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선은 간도협약 당시의 국경선이 아니다. 수구 언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이 한국전 참전의 대가로 중국에 영토를 떼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 영토를 더 얻었다. 1880년대 조선정부가 주장했던 경계선이 오늘날의 북․중 국경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구 언론들이 간도문제를 수시로 꺼내드는 것은 우리 영토를 ‘되찾는 일’이 과거사 문제로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든 간에 실재하지도 않았던 간도 영유권을 내세우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인식태도의 문제는 논쟁의 영역 안에 머물 수 있고, 또 머물러야 한다. 사실에 관한 수많은 기록과 기억들 중에서 어떤 것을 승인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 자체에 대한 임의적 왜곡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해석자의 권리는 사실관계 안에 국한된다.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순간, 역사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어지러운 ‘주장’들의 집합체가 되어버린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범죄이다.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를 비난하고 싶다면, 바로 이런 유의 ‘민족주의’를 비난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민족주의의 극복과 과거사 규명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질타하고 간도협약을 무효로 하여 간도를 우리 땅으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선동하는 수구언론들이, 과거사 진상 규명 문제에 대해서는 ‘정략적’이니,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이니,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의 소산이니 하면서 그냥 묻어두자고 한다. 천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 옛날 일은 ‘민족정체성’에 관련된 일이니 확실히 밝히자고 별반 설득력도 없는 자료들을 긁어모아서는 백 년 전에 간도가 우리 땅이었으니 원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서 증언하고 있는 반세기도 안 된 과거의 일은 그냥 덮어두자고 하는가.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에는 격려와 박수를 보내던 자들이 왜 일제하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이나 국가권력의 인권탄압행위 진상 규명에는 손사래를 치는가. 도대체 어떤 태도가 정략적이고 반역사적인가.
물론 역사란 누적되는 것이지 청산되는 것이 아니다. 청산할 수 있는 것은 과거사 자체가 아니다. 과거를 청산하자고 하는 것은 과거 역사를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갈등관계가 더 이상 현실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 그대로 민족주의는 세계사적 시야에서 볼 때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것이 어디 민족주의뿐인가. 지역주의도 가부장제도 모두 시대착오적이다. 이 모든 것이 그냥 덮어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들인가. 가해자들이 과거의 특권을 세습적으로 유지한 채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고서는 이미 지난 일이니 더 거론하지 말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없어질 것들인가.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지속되고 재생산되는 한 피해자들의 자기방어적 태도와 세계관 역시 재생산되게 마련이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피해자들이 피해의 체험을 통해 형성한 세계관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그들을 피해자로 만든 사회적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자들을 먼저 비판해야 한다. 자신의 부당한 특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진실에 접근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들을 공격해야 한다.
과거사 진상규명은 과거의 지배자들과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입과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채 제 입맛에 맞게 꾸며놓은 기록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피해자들이 강압과 위협에 눌려 오랜 세월 가슴 깊이 묻어두고 피울음을 울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말들을 비로소 뱉어낼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가해자들에게 진정한 반성의 기회를 주고 스스로 가해와 피해의 관계에서 비껴나 있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다, 과거사 진상 규명은 또한 과거에 대한 기억과 기록에 공평한 발언 기회를 주는 일이다. 백번 양보해서 역사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일방적 기록만 가지고는 정대로 제대로 된 기억을 만들 수 없다.
과거사 규명과 국가보안법 폐지는 또한 ‘보통사람’의 인식 지평을 넓혀주는 일이다. 제국주의자들과 독재권력이 편한 대로 그어놓은 금기의 영역을 줄이고, 보통 사람들의 공간을 늘리는 일이다. 그것은 집 한 평 넓히는 데는 기를 쓰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데는 무관심한 이 시대 ‘보통 사람’들의 불구성을 교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세계의 ‘보편적 표준’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 일이다. 그것은 결코 ‘민족주의적 편견’이나 ‘민중주의적 편향’애서 제기되는 요구가 아니다. 금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선이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민족과 일본민족 사이에, 군사독재시기에는 민중과 독재권력 사이에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이, 민중이 그 선 바깥에서 불구적 삶을 살아야 했던 상황 전반에 대한 집단적 체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집단적 체험에 기반하여 형성된 ‘민족적 태도’는 과거 사실 관계를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부분까지 볼 수 있도록 해주지만, 우리의 집단적 체험과 무관하게 조작된 ‘민족주의적 태도’는 과거 사실관계를 왜곡해버린다. 우리의 민족적 체험은 제국주의로부터 학대와 박해, 멸시를 받는 약소 민족으로서 겪은 체험이었고, 그런 만큼 반침략주의, 반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평등주의의 가치와 결합된 것이었다. 침략적 민족주의, 팽창적 민족주의, 억압적 민족주의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민족주의였으며, 그 일본제국주의에 기생한 파렴치한 반민족행위자들의 ‘민족주의’였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 집권을 위해 만들어냈던 일민주의니 한국적 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은 모두 그것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지금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식민지시기 우리의 민족적 체험을 상대화하는 일이 아니라, 황국신민의 총후보국을 외쳤던 과거의 족쇄에 묶인 채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들여 ‘팽창적 민족주의’를 선동하고 있는 수구 언론들의 역사인식 태도를 공박하는 일이다.
<출처 : 역사비평, 2004년 겨울호(통권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