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2 #시라는별 48
생각하지 않은 죄
ㅡ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 프리모 레비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불어오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으로 몰아친다.
인간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땅은 그에게 꽃과 열매를 선사한다.
인간은 고된 노동과 기쁨 속에 살아가고
희망과 공포 속에서도 고귀한 자손들을 남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저승사자인 그대가 나타났고
짐승처럼 우리들은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버렸다.
우리가 만난다면 그대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신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겠는가?
그럼 어느 신에게 말인가?
또 기꺼이 무덤에라도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미완성의 작품을 아쉬워하는 예술가들처럼
아직 살아있는 1300만의 생명에 대해 통탄이라도 할 텐가?
오~ 죽음의 화신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결코 한 순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장수하기를 바란다.
단지 500만 년 동안만 불면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스실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매일 밤 그대를 방문해 강한 위로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쓴 시들을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장시 <한라산>의 저자 이산하가 편역한 시집이다. 이 시집은 얼마 전 율별엠제이님의 읽은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안 것이 적잖이 아쉽다. 나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몇 년 전 읽다 내려놓았다. 그가 겪은 참혹한 현실을 대면하기 힘들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책이 잘 읽히지 않아 책장을
덮어버린 걸로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레비는 이렇게 시로 내게 다시 왔다.
총3부로 구성되었고 5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여러 시에 저자 자신이나 편역자의 주석이 곁들여져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나는 저자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이산하 시인이 프리모 레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 해설을 먼저 읽었다. 여느 평론가들이 쓴 시평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피가 뜨거운 24살의 한 이탈리아 청년˝이 겪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담을 영화처럼 그려내며 읽는 이의 가슴을 때리고 적신다. 좋은 해설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는 느낌이다.
<생각하지 않은 죄>에 대해 이산하 시인이 쓴 주석으로 내 감상을 대신한다. 프리모 레비의 글처럼 편역자의 주석도 절제되어 있고 담담하다.
*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총책임자였다가 종전 후 1급 국제전범으로 수배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15년 간의 끈질긴 추적으로 1960년에 체포된 그는 예루살렘 나치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처형되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 . .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판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이날, 프리모 레비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려다 끝내 가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 시를 썼다.
날마다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서 스물네 살 청년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기 위한 한 방책으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읽은 책들은 주로 고전이었고, 책을 읽은 후에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하루의 삶을 되새기고 존재의 의미를 물었다고 한다. 그 참담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 꼿꼿이 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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