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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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이레(2004)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다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책을 다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러 간 것은 매혹적이고도 신비에 가득 찬 한나라는 인물을 케이트 윈슬릿이 어떻게 연기해내는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서였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사실 실망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전작 〈빌리 엘리어트〉와 〈The Hours〉를 보고 이미 감탄한 바 있는 감독이었기에 큰 실망을 주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영화는 원작을 거의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를 본 소감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감동 코드를 무척 잘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콧날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주는 면에서 나는 영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한나가 미하엘(영화에서는 마이클로 나온다)과 자전거 여행을 떠난 어느 마을의 교회에서 문맹의 한나가 뜻도 모르는 성가를 들으면서 감동에 겨워 우는 장면(이건 원작에 없다), 한나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8년이 지난 후 성년이 된 미하엘이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 녹음하는 장면, 그가 보내 준 녹음테이프를 듣던 한나가 어느 날 감옥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 미하엘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단어를 통으로 외우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받은 대목은 한나가 미하엘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그의 아버지의 서가를 둘러보던 장면이었다.

그녀는 마치 책을 한 권 고르려는 듯 사방의 벽면을 빼곡히 채운 서가들 위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더니 한 서가로 다가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가슴 높이로 들고 천천히 책들의 등을 문지르면서 걸어갔다. 다음 서가로 넘어가서도 역시 손가락으로 책등을 문지르며 걸어갔다. 그녀는 온 방 안을 그렇게 걸어 다녔다. 이윽고 창문가에 멈추어 서더니 캄캄한 어둠 속을, 유리창에 비친 서가의 모습과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69)

문맹의 한나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박힌 무수한 책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신비로움, 근사함, 부러움, 답답함??? 나는 그녀가 그 서가에서 황홀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비록 글은 읽을 줄 모르지만 누구보다 강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기에, 그 많은 책들을 보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행복해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단순히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나이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물론 ‘사랑’에 초점을 더 두고 있지만, 소설은 사랑과 고통, 수치와 분노, 죄책감과 이해 등 인간의 여럿 약점을 다루고 있는 철학적인 글이다. 그것을 원작자는 나치라는 시대사를 끌어들여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으로도 연결시킨다. “한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 (183),”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 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170)

그러므로 한나에 대한 이해는 결국 내 앞 세대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전후 세대는 나치의 만행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전쟁 세대가 내 부모이거나 친척이기에 수치심과 연대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저자는 한 세대나 벌어진 남녀 간의 도발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두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리를 놓고 양쪽 강가를 모두 관찰하고 그리고 양쪽에 다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 . 도피는 과거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각인시켜주고 또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결연한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193)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우리도 우리의 못난 역사를 드러내고 반성하고 냉철하게 비판하고 바로잡는 날이 와야 한다고. 죄 지은 자들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한나는 읽는 법을 배운 후로는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위에서 요구 받은 그대로 오직 자신이 맡은 책임만을 다한 것이 죄가 되느냐고 묻던 그녀는 수도원 같은 감옥에서 자신의 죄를 알아간다. 물론 그녀의 자살은 그 죄의식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자살은 여자 교도소장의 말처럼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의한 쪽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녀의 자살이 전혀 슬프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자신이 보던 책들(자신과 미하엘을 그토록 오래 세월 이어준)을 올려놓고서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담담한 얼굴로 자살을 택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아름다웠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나는 <타이타닉>보다 <주드>(토마스 하디 원작)라는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자질을 보고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한나라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뒷얘기에 따르면, 책의 원작자도 감독도 케이트 윈슬렛을 한나 역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바빠서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그녀의 거절로 두 번째 거론된 인물이 니콜 키드만이었다고. 그녀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케이트를 다시 설득하게 되었단다. 니콜 키드만도 훌륭한 배우이긴 하지만, 그녀는 한나를 연기하기에 너무 아름답다. 특히 몸매가. 나는 덜 착한 몸매를 가진 케이트가 한나 역의 적임자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정말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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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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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돌베개(2007)

서경식의 최근작 『고통의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를 읽고 전에 사두었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을 내쳐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어판을 펴내며에서 밝히고 있듯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들의 초상집이다.” 원래는 아사히신문사에서 1995년 1월 20일부터 같은 해 11월 5일까지 간행된 『20세기 천 명의 인물』전 10권 가운데 실린 글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저자는 집필 대상자를 일관된 주제 아래 골라냈다고 말한다. 저자가 고른 20세기의 대표적 인물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극한의 시대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사형, 전사, 암살, 객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선명한 죽음을 통해 시대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한 인물들의 “묘비명”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고작 여섯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묘비명이지만, 저자의 글은 그 어떤 긴 평전보다 크고 강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한다.
사실 저자가 고른 20세기의 대표적 인물들 중 내가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너무도 귀에 선 인물들의 이름을 대하면서 이 책을 옮긴 역자도 부끄럽고 민망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모르는 것,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49인은 폭압, 폭력,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밀쳐둔 채 저항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 전선에 뛰어든 인물들이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무수한 죽음들 중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일본의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이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인 남편 박열과 함께 대역죄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죄수 지소에서 스스로 엮은 노끈을 독방 쇠창살에 걸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 겨우 스물 셋의 나이였다. “미래의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지금의 나를 죽이는 것은, 단언컨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어서 끝까지 나로 시종일관하겠습니다.”(186)
이 책에서 자살을 선택한 인물들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저자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 자살에 대해 언급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다, 정신적인 독립성이야말로 개인의 독립성의 바탕이다.”(161쪽) 다시 말해 어떤 권력이나 종교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판단으로 선택한 삶과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것이며, 그럴 때 선택한 죽음은 자유의 또 다른 일면임을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현실 도피가 아닌 저항의 몸짓이라는 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순일곱의 나이에 아파트 현관 난간에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져 죽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그 자산이 말한 “인간적인 행위”였다.

아우슈비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환을 기약하기 힘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바다는 어두컴컴하고, 항해는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고, 레비는 결국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레비의 자살은 인류 자체의 자살 과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124)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사라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더불어 각 인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엑기스만을 뽑아서 일목요연하게 감동적으로 정리해낸 저자의 글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펴내며>에서 저자는 이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1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47편이라는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은 무척 가혹한 작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무렵은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썼던 것 같다. 그 가혹한 작업이 현재의 나라는 ‘글쟁이’의 지식과 사고의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교사들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가르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배움과 생각의 위력을 읽을 수 있었다. “부지런히”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저자는 각 인물들을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조사하여 사실이라는 주춧돌 위에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훈훈한 집을 완성했다. 겉에서 보면 작은 집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높고 넓은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큰 집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아는 사람들은 더 가깝고 깊게 알게 되었고, 모르는 사람들과는 통성명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책꽂이 한 켠에 이 책을 잘 보이게 꽂아 놓고 세상에 대한 냉소와 무력감이 슬금슬금 기어올라치면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을 옮긴 이목 선생의 후기도 근사했다.

저자는 세계의 근현대사에 자신의 족적을 또렷이 아로새긴 49명의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우리의 ‘편향된 인식’과 ‘망각’을 질책한다. 그들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기억이란 단순히 개인들의 경험을 보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다시 그들과 함께 기억을 공유하면서 사회적 기억=사회적 관계망을 확장해가야 한다고. 그리하여 암담한 현실에 저항하고 어두운 기억에서 밝은 미래를,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 기억이 정치적·문화적 산물이라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이런 기억의 속성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기억들 간의 싸움’이 매일 치열하게 반복된다. 과거의 역사를 애써 외면, 왜곡, 망각하려는 자들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안간힘을 다하는 자들의 싸움, 이 책에 실린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자산이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돌베개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접해본 책들 중 이 책만큼 편집에 정성이 들어간 책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각 인물과 관련된 보충 자료를 일일이 조사해 정리를 해준(이것 역시 지루하지 않게 엑기스만) 덕에 시대 상황과 인물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책 속의 책들을 왕창 선물 받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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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0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선물 왕창 받을 거라구요!! 서경식님 책 읽었었는데-제목은 까먹;;;;-이것도 기대되네요!!

syo 2021-04-04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력이 장난 아니시네요. 12년 전이라니.... 저는 그때 빌빌거리면서 학교다니고 과외하고 연애하고....
 
엄마 마중 - 유년동화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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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또또 들여다보게 되는 가슴 찡한 그림책이다. 이태준이라는 이름 석 자만 보고 알라딘에서 고른 중고 서적인데, 뜻밖의 감동과 김동성이라는 그린이를 함께 얻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 그린이의 해석과 감성에 찬탄이 절로 나왔다. 추운 날, 귀를 덮은 모자를 쓰고 두툼한 옷을 입은 아기의 모습에서 내 딸의 영상이 자꾸 겹쳐졌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렸나 보다.

추워서 코가 새빨간 아가가 아장아장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낑’하고 안전 지대에 올라섰습니다. 
 

이내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차장은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이 차장도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전차가 또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구나.” 하고 이번 차장은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갔습니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져 가만히 서 있습니다.

 글이 이렇게 끝나서 너무 슬펐다. 뭔가 잘못된 거야, 동화책이 이렇게 슬퍼도 되는 거야, 왜 엄마를 못 만난 거야, 라고 구시렁대며 책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보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지막 장에 이르니 아하, 그럼 그렇지, 하는 탄성이 나오게 하는 그림이 숨어 있었다. 그린이의 그 센스라니. 이 그림책은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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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네버랜드 클래식 13
케니스 그레이엄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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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내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책 한 권 사준 적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읽으라면서 왜 책을 사주지 않는 걸까. 나중에야 내가 알게 된 것은 우리 집은 책을 살 여유가 없었고, 그보다 우리 엄마는 독서는 학교에서 해결해주는 것으로 믿으셨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교에서 뭘 배우길래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허구한 날 하셨을까.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동화책만 보면 흥분되곤 한다. 그림책을 보면 더 가슴이 뛴다. 그림과 글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책을 보면 내 어린 날을 그런 책들과 벗하며 지내지 못한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싸하니 시려지곤 한다. 그 때문에 나는 가끔 동화책을 읽는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하고 더 많이 읽는 한 선배가 권해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정말이지 흥분과 입가에 배시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숲 속에 사는 동물 네 마리가 주인공인 책이다.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흥분하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는 두더지 모울, 자신이 사는 와일드우드 마을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영리하고 재치 있는 물쥐 래트, 무슨 일을 하건 싫증을 곧잘 내고 새로운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허풍이 심한 두꺼비 토드, 여럿이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만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주변의 모든 동물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명한 오소리 배저 아저씨. 이야기는 땅 속에서 혼자 살고 있던 두더지 모울이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 땅 위의 무슨 소리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된다. 땅 속에서만 틀어박혀 있다 보게 된 세상은 모울에게 천국과도 같다. 발 닿는 대로 어슬렁거리던 모울은 강물이 불어난 강기슭에 이른다.


모울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강을 본 적이 없었다. 강은 매끄럽고, 구불구불하고, 통통한 동물 같았다. 이 동물은 꼴꼴거리며 무언가를 쫓아가서 콸콸거리면서 붙잡았다가 쏴쏴거리면서 놓아 주었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새 친구들의 뒤를 다시 덮쳤다. 강의 새 친구들은 붙잡혔다가 놓여나기를 되풀이했다. 이 동물은 반짝거리면서 번쩍거리면서 팟팟거리면서 찰찰대면서 윙윙대면서 졸졸거리면서 보글거리면서 몸서리를 쳐댔다.(12)


모울이 세상을 보는 눈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세상을 얼마나 설렁설렁 보아 왔고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은 개성이 저마다 다른 동물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일깨워 준다. 말썽을 잘 일으킨다고 해서, 성격이 무뚝뚝하다고 해서, 단정 짓길 좋아한다고 해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격은 달라도 착한 심성을 가졌기에 네 동물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더욱 친해진다. 그런 사건의 중심에는 늘 두꺼비 토드가 있다. 토드가 벌이는 짓거리는 때때로 배꼽 잡을 정도로 웃긴다. 이런 친구가 주위에 있다면 골치야 좀 썩겠지만 삶이 심심하지는 않겠다 싶더라. 말썽장이 토드를 언제든 보듬어 안는 두 친구와 배저 아저씨의 마음 씀씀이에는 감동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두더지 모울이 정말 좋았다. 모울이 땅 속을 박차고 세상을 나오는 순간부터 느끼는 온갖 벅찬 감정들은 내가 삶의 순간순간마다 느끼는 것들이었고, 모울이 혼자만 살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기쁨과 힘겨움은 나 또한 느끼던 것들이었다. 숱한 경험 속에서 모울은 현명해지기로 한다. 기특도 하지.

모울은 현명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자기 미래가 걸려 있는 즐거운 곳을 지켜야만 했다. 모울은 그곳에서 충분한 모험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삶을 펼쳐야 했다.(106)

이 책은 날 때부터 시력이 약해 앞을 잘 보지 못한 가엾은 아들은 위해 케네스 그레이엄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매일 밤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더지와 물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휴가 동안에는 두꺼비의 모험담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저자의 진한 부성애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도 언젠가 내 딸에게 이런 멋진 동화를 지어내서 읽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력에 나는 때때로 숨을 멈추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곤 했다. 그러나 바람만 클 뿐 현실의 나는 모자란 상상력과 언어의 빈곤에 시달린다. 꺼이~

- 배는 뒤집혔고, 모울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세상에, 물이 얼마나 차갑고, 얼마나 끔찍이도 축축하게 느껴졌는지!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때에 얼마나 귀가 울렸는지! 어푸어푸하고 콜록콜록하면서 물 위로 떠올라서 바라본 햇살은 얼마나 밟고 정다웠는지! 다시 아래로 가라앉을 때에는 얼마나 캄캄한 절망을 느꼈는지!(32)

- 돌아보면 지난 일은 무척 화려하고 다양한 그림이 곁들여진 멋진 책의 한 페이지와도 같았다.(63)

- 냉혹하고 매서운 하늘이 귀를 쫑긋하고 있는 어느 추운 날 오후, 모울은 따뜻한 응접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사방은 잎사귀 하나 없이 황량했다. 모울은 여태까지 자연의 여신이 일 년에 한 번씩 옷을 몽땅 벗고 깊은 잠에 빠지는 그 겨울날처럼 자연의 모습을 이렇게 깊이, 또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신비로운 탐험지였던 잡목 숲, 골짜기, 채석장, 그리고 감춰져 있던 모든 곳들이 이제는 가슴 아프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지니고 있던 비밀을 모두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낡은 속임수로 모울에게 장난을 치고 술수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초라한 몰골을 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 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 모울은 화려한 옷을 벗어던지고 아무 꾸밈없이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 자연을 보는 게 좋았다. 모울은 벌거벗은 뿌리로 다가갔다. 그것들은 섬세하고 강하고 순수했다.(65)

- 솔새 한 마리가 어두운 강둑 가장자리에 몸을 감추고 작고 가는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밤 열 시가 지났건만 하늘은 아직도 주춤거리며 이별을 고하는 낮 빛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찌뿌드드한 오후 열기도 한풀 꺾여서, 짧은 한여름밤의 서늘한 손가락이 닿자마자 흩어지듯이 사라져 버렸다.(161)

- 아름다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나면 누구나 그 꿈을 다시 한 번 기억해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저 아름다웠다는 희미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 몽상가는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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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독 흰 고독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라인홀트 매스너는 산악인인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 급 14좌 완등,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등반가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나는 산을 오르고부터, 이른바 산행기를 쓰면서부터 이 사람의 이름을 심심찮게 들었다. 산을 오르기 전까지 나는 산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14좌 완등자 중 한 명인 엄홍길의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을 시작으로 나는 몇 권의 산악서들을 읽었다. 라인홀트 매스너의 책은 산을 좋아하지 않아도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는 거칠고 한 성격 할 것 같은(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외모와 달리 날실과 씨실을 정성스레 교차해 멋들어진 옷을 짜는 듯하다. 게다가 그 날실과 씨실 사이에는 우리가 살면서 해볼 만한 수많은 단상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아주 촘촘하고 섬세하다. 이 사람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산악문학상(우리나라에도 이런 게 있던가?)을 세 번이나 수상한 이력이 괜한 공치사가 아님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검은 고독 흰 고독》은 《벌거벗은 산》이후 내가 두 번째로 읽은 라인홀트 매스너의 책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책 모두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한 기록들이다. 《벌거벗은 산》은 동생과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 도중 눈사태로 동생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비극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 놓은 책이다. 《검은 고독 흰 고독》은 그로부터 8년 후 라인홀트 매스너가 디아미르 벽을 경유하여 낭가파르바트를 완전 단독 등반을 해내고서 쓴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8,000미터 급의 눈 덮인 산을 혼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오른 최고봉은 고작 1,915미터의 지리산이었다. 한여름에 오른 지리산에는 만년설 따윈 없었고 들이쉴 산소도 충분했다. 그런 산을 오르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산소도 희박하고 눈과 얼음과 험준한 바위로 점철된 8,000미터 급의 산을 혼자 오를 생각을 하고 실제로 올랐다니, 나는 그 사람의 그 힘이 궁금했다. 

- 사람들은 낭가파르바트를 ‘운명의 산’이라고 부른다. 나는 낭가파르바트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제야 알았다. 낭가파르바트는 내가 오를 최초의 8,000미터 봉이라는 것을. 인간 대 산, 즉 한 인간과 8,000미터 봉이 서로 조우하는 것이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고 싶다. 나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등반에서 내 영혼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간 능력의 한계까지 오르기로 마음먹었다.(40)
- 나는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고 싶다.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은 등반가들이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커다란 숙명 같은 것이다. 나는 그저 산을 오르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산을 오르려는 것이다. 모든 기술을 배제하고 파트너도 없이 산을 오르려고 생각할수록 나는 환상 속에서 나만의 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궁극적인 고독의 끝까지 가서 그 고독을 넘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61)

라인홀트 매스너는 그 고독을 가뿐히 넘어섰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와 함께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산을 오르다 보면 처음에는 무겁기만 하던 두 다리가 어느 순간 가벼워지는 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산을 오르는 건지, 산을 나를 끌어당기는 건지 모를 정도로 두 발이 공중에서 약간 떠서 나는 듯이 움직인다. 그때는 피로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낭가파르바트를 오르던 라인홀트 매스너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대산악인과의 일치감에 한껏 우쭐하여 희희낙락거렸다. 

- 쾌적한 피로감. 갑자기 몸이 둥둥 뜨면서 헤엄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피곤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어져 그런 것일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다리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두 다리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91)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한 이런 등반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죽음이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든 죽는다. 라인홀트 매스너 같은 사람은 그곳이 산일뿐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되,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서 산을 오르는 그의 모습은 자살과는 거리가 멀었다. “짐은 가볍게, 걸음은 빠르게, 가벼움과 신속함”으로 그는 안전 산행을 도모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만인에게 펼쳐 보였다. 극한의 높은 곳에 선 자의 고백을 이 낮은 곳에서 듣는 동안 나는 내내 즐거웠다. 

-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165)
- 극한 상황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아니다. 극한 상황은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줄 뿐이다. 그것은 평소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어떤 의식의 상태를 일깨워 주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한다.(241)
-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이렇게 혼자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자를 사용하지 않고 발과 눈으로 거리를 재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야말로 내가 살 곳이라 여겨진다. 이곳은 나를 구속하는 것도 없고 고통스러운 과거도 없다. 어딜 가든 내 집이다. 반대로 어디에도 내 집이 없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 . 그 무엇이 나를 어떠한 선 너머로 끌고 나간 것이 분명하다. 내 힘이, 고독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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