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이레(2004)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다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책을 다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러 간 것은 매혹적이고도 신비에 가득 찬 한나라는 인물을 케이트 윈슬릿이 어떻게 연기해내는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서였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사실 실망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전작 〈빌리 엘리어트〉와 〈The Hours〉를 보고 이미 감탄한 바 있는 감독이었기에 큰 실망을 주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영화는 원작을 거의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를 본 소감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감동 코드를 무척 잘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콧날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주는 면에서 나는 영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한나가 미하엘(영화에서는 마이클로 나온다)과 자전거 여행을 떠난 어느 마을의 교회에서 문맹의 한나가 뜻도 모르는 성가를 들으면서 감동에 겨워 우는 장면(이건 원작에 없다), 한나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8년이 지난 후 성년이 된 미하엘이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 녹음하는 장면, 그가 보내 준 녹음테이프를 듣던 한나가 어느 날 감옥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 미하엘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단어를 통으로 외우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받은 대목은 한나가 미하엘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그의 아버지의 서가를 둘러보던 장면이었다.

그녀는 마치 책을 한 권 고르려는 듯 사방의 벽면을 빼곡히 채운 서가들 위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더니 한 서가로 다가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가슴 높이로 들고 천천히 책들의 등을 문지르면서 걸어갔다. 다음 서가로 넘어가서도 역시 손가락으로 책등을 문지르며 걸어갔다. 그녀는 온 방 안을 그렇게 걸어 다녔다. 이윽고 창문가에 멈추어 서더니 캄캄한 어둠 속을, 유리창에 비친 서가의 모습과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69)

문맹의 한나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박힌 무수한 책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신비로움, 근사함, 부러움, 답답함??? 나는 그녀가 그 서가에서 황홀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비록 글은 읽을 줄 모르지만 누구보다 강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기에, 그 많은 책들을 보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행복해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단순히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나이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물론 ‘사랑’에 초점을 더 두고 있지만, 소설은 사랑과 고통, 수치와 분노, 죄책감과 이해 등 인간의 여럿 약점을 다루고 있는 철학적인 글이다. 그것을 원작자는 나치라는 시대사를 끌어들여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으로도 연결시킨다. “한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 (183),”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 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170)

그러므로 한나에 대한 이해는 결국 내 앞 세대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전후 세대는 나치의 만행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전쟁 세대가 내 부모이거나 친척이기에 수치심과 연대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저자는 한 세대나 벌어진 남녀 간의 도발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두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리를 놓고 양쪽 강가를 모두 관찰하고 그리고 양쪽에 다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 . 도피는 과거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각인시켜주고 또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결연한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193)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우리도 우리의 못난 역사를 드러내고 반성하고 냉철하게 비판하고 바로잡는 날이 와야 한다고. 죄 지은 자들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한나는 읽는 법을 배운 후로는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위에서 요구 받은 그대로 오직 자신이 맡은 책임만을 다한 것이 죄가 되느냐고 묻던 그녀는 수도원 같은 감옥에서 자신의 죄를 알아간다. 물론 그녀의 자살은 그 죄의식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자살은 여자 교도소장의 말처럼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의한 쪽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녀의 자살이 전혀 슬프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자신이 보던 책들(자신과 미하엘을 그토록 오래 세월 이어준)을 올려놓고서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담담한 얼굴로 자살을 택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아름다웠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나는 <타이타닉>보다 <주드>(토마스 하디 원작)라는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자질을 보고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한나라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뒷얘기에 따르면, 책의 원작자도 감독도 케이트 윈슬렛을 한나 역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바빠서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그녀의 거절로 두 번째 거론된 인물이 니콜 키드만이었다고. 그녀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케이트를 다시 설득하게 되었단다. 니콜 키드만도 훌륭한 배우이긴 하지만, 그녀는 한나를 연기하기에 너무 아름답다. 특히 몸매가. 나는 덜 착한 몸매를 가진 케이트가 한나 역의 적임자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정말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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