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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독 흰 고독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라인홀트 매스너는 산악인인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 급 14좌 완등,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등반가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나는 산을 오르고부터, 이른바 산행기를 쓰면서부터 이 사람의 이름을 심심찮게 들었다. 산을 오르기 전까지 나는 산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14좌 완등자 중 한 명인 엄홍길의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을 시작으로 나는 몇 권의 산악서들을 읽었다. 라인홀트 매스너의 책은 산을 좋아하지 않아도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는 거칠고 한 성격 할 것 같은(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외모와 달리 날실과 씨실을 정성스레 교차해 멋들어진 옷을 짜는 듯하다. 게다가 그 날실과 씨실 사이에는 우리가 살면서 해볼 만한 수많은 단상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아주 촘촘하고 섬세하다. 이 사람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산악문학상(우리나라에도 이런 게 있던가?)을 세 번이나 수상한 이력이 괜한 공치사가 아님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검은 고독 흰 고독》은 《벌거벗은 산》이후 내가 두 번째로 읽은 라인홀트 매스너의 책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책 모두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한 기록들이다. 《벌거벗은 산》은 동생과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 도중 눈사태로 동생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비극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 놓은 책이다. 《검은 고독 흰 고독》은 그로부터 8년 후 라인홀트 매스너가 디아미르 벽을 경유하여 낭가파르바트를 완전 단독 등반을 해내고서 쓴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8,000미터 급의 눈 덮인 산을 혼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오른 최고봉은 고작 1,915미터의 지리산이었다. 한여름에 오른 지리산에는 만년설 따윈 없었고 들이쉴 산소도 충분했다. 그런 산을 오르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산소도 희박하고 눈과 얼음과 험준한 바위로 점철된 8,000미터 급의 산을 혼자 오를 생각을 하고 실제로 올랐다니, 나는 그 사람의 그 힘이 궁금했다.
- 사람들은 낭가파르바트를 ‘운명의 산’이라고 부른다. 나는 낭가파르바트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제야 알았다. 낭가파르바트는 내가 오를 최초의 8,000미터 봉이라는 것을. 인간 대 산, 즉 한 인간과 8,000미터 봉이 서로 조우하는 것이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고 싶다. 나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등반에서 내 영혼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간 능력의 한계까지 오르기로 마음먹었다.(40)
- 나는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고 싶다.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은 등반가들이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커다란 숙명 같은 것이다. 나는 그저 산을 오르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산을 오르려는 것이다. 모든 기술을 배제하고 파트너도 없이 산을 오르려고 생각할수록 나는 환상 속에서 나만의 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궁극적인 고독의 끝까지 가서 그 고독을 넘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61)
라인홀트 매스너는 그 고독을 가뿐히 넘어섰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와 함께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산을 오르다 보면 처음에는 무겁기만 하던 두 다리가 어느 순간 가벼워지는 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산을 오르는 건지, 산을 나를 끌어당기는 건지 모를 정도로 두 발이 공중에서 약간 떠서 나는 듯이 움직인다. 그때는 피로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낭가파르바트를 오르던 라인홀트 매스너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대산악인과의 일치감에 한껏 우쭐하여 희희낙락거렸다.
- 쾌적한 피로감. 갑자기 몸이 둥둥 뜨면서 헤엄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피곤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어져 그런 것일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다리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두 다리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91)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한 이런 등반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죽음이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든 죽는다. 라인홀트 매스너 같은 사람은 그곳이 산일뿐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되,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서 산을 오르는 그의 모습은 자살과는 거리가 멀었다. “짐은 가볍게, 걸음은 빠르게, 가벼움과 신속함”으로 그는 안전 산행을 도모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만인에게 펼쳐 보였다. 극한의 높은 곳에 선 자의 고백을 이 낮은 곳에서 듣는 동안 나는 내내 즐거웠다.
-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165)
- 극한 상황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아니다. 극한 상황은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줄 뿐이다. 그것은 평소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어떤 의식의 상태를 일깨워 주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한다.(241)
-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이렇게 혼자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자를 사용하지 않고 발과 눈으로 거리를 재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야말로 내가 살 곳이라 여겨진다. 이곳은 나를 구속하는 것도 없고 고통스러운 과거도 없다. 어딜 가든 내 집이다. 반대로 어디에도 내 집이 없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 . 그 무엇이 나를 어떠한 선 너머로 끌고 나간 것이 분명하다. 내 힘이, 고독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