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네버랜드 클래식 13
케니스 그레이엄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내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책 한 권 사준 적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읽으라면서 왜 책을 사주지 않는 걸까. 나중에야 내가 알게 된 것은 우리 집은 책을 살 여유가 없었고, 그보다 우리 엄마는 독서는 학교에서 해결해주는 것으로 믿으셨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교에서 뭘 배우길래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허구한 날 하셨을까.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동화책만 보면 흥분되곤 한다. 그림책을 보면 더 가슴이 뛴다. 그림과 글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책을 보면 내 어린 날을 그런 책들과 벗하며 지내지 못한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싸하니 시려지곤 한다. 그 때문에 나는 가끔 동화책을 읽는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하고 더 많이 읽는 한 선배가 권해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정말이지 흥분과 입가에 배시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숲 속에 사는 동물 네 마리가 주인공인 책이다.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흥분하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는 두더지 모울, 자신이 사는 와일드우드 마을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영리하고 재치 있는 물쥐 래트, 무슨 일을 하건 싫증을 곧잘 내고 새로운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허풍이 심한 두꺼비 토드, 여럿이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만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주변의 모든 동물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명한 오소리 배저 아저씨. 이야기는 땅 속에서 혼자 살고 있던 두더지 모울이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 땅 위의 무슨 소리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된다. 땅 속에서만 틀어박혀 있다 보게 된 세상은 모울에게 천국과도 같다. 발 닿는 대로 어슬렁거리던 모울은 강물이 불어난 강기슭에 이른다.


모울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강을 본 적이 없었다. 강은 매끄럽고, 구불구불하고, 통통한 동물 같았다. 이 동물은 꼴꼴거리며 무언가를 쫓아가서 콸콸거리면서 붙잡았다가 쏴쏴거리면서 놓아 주었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새 친구들의 뒤를 다시 덮쳤다. 강의 새 친구들은 붙잡혔다가 놓여나기를 되풀이했다. 이 동물은 반짝거리면서 번쩍거리면서 팟팟거리면서 찰찰대면서 윙윙대면서 졸졸거리면서 보글거리면서 몸서리를 쳐댔다.(12)


모울이 세상을 보는 눈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세상을 얼마나 설렁설렁 보아 왔고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은 개성이 저마다 다른 동물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일깨워 준다. 말썽을 잘 일으킨다고 해서, 성격이 무뚝뚝하다고 해서, 단정 짓길 좋아한다고 해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격은 달라도 착한 심성을 가졌기에 네 동물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더욱 친해진다. 그런 사건의 중심에는 늘 두꺼비 토드가 있다. 토드가 벌이는 짓거리는 때때로 배꼽 잡을 정도로 웃긴다. 이런 친구가 주위에 있다면 골치야 좀 썩겠지만 삶이 심심하지는 않겠다 싶더라. 말썽장이 토드를 언제든 보듬어 안는 두 친구와 배저 아저씨의 마음 씀씀이에는 감동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두더지 모울이 정말 좋았다. 모울이 땅 속을 박차고 세상을 나오는 순간부터 느끼는 온갖 벅찬 감정들은 내가 삶의 순간순간마다 느끼는 것들이었고, 모울이 혼자만 살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기쁨과 힘겨움은 나 또한 느끼던 것들이었다. 숱한 경험 속에서 모울은 현명해지기로 한다. 기특도 하지.

모울은 현명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자기 미래가 걸려 있는 즐거운 곳을 지켜야만 했다. 모울은 그곳에서 충분한 모험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삶을 펼쳐야 했다.(106)

이 책은 날 때부터 시력이 약해 앞을 잘 보지 못한 가엾은 아들은 위해 케네스 그레이엄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매일 밤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더지와 물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휴가 동안에는 두꺼비의 모험담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저자의 진한 부성애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도 언젠가 내 딸에게 이런 멋진 동화를 지어내서 읽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력에 나는 때때로 숨을 멈추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곤 했다. 그러나 바람만 클 뿐 현실의 나는 모자란 상상력과 언어의 빈곤에 시달린다. 꺼이~

- 배는 뒤집혔고, 모울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세상에, 물이 얼마나 차갑고, 얼마나 끔찍이도 축축하게 느껴졌는지!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때에 얼마나 귀가 울렸는지! 어푸어푸하고 콜록콜록하면서 물 위로 떠올라서 바라본 햇살은 얼마나 밟고 정다웠는지! 다시 아래로 가라앉을 때에는 얼마나 캄캄한 절망을 느꼈는지!(32)

- 돌아보면 지난 일은 무척 화려하고 다양한 그림이 곁들여진 멋진 책의 한 페이지와도 같았다.(63)

- 냉혹하고 매서운 하늘이 귀를 쫑긋하고 있는 어느 추운 날 오후, 모울은 따뜻한 응접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사방은 잎사귀 하나 없이 황량했다. 모울은 여태까지 자연의 여신이 일 년에 한 번씩 옷을 몽땅 벗고 깊은 잠에 빠지는 그 겨울날처럼 자연의 모습을 이렇게 깊이, 또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신비로운 탐험지였던 잡목 숲, 골짜기, 채석장, 그리고 감춰져 있던 모든 곳들이 이제는 가슴 아프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지니고 있던 비밀을 모두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낡은 속임수로 모울에게 장난을 치고 술수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초라한 몰골을 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 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 모울은 화려한 옷을 벗어던지고 아무 꾸밈없이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 자연을 보는 게 좋았다. 모울은 벌거벗은 뿌리로 다가갔다. 그것들은 섬세하고 강하고 순수했다.(65)

- 솔새 한 마리가 어두운 강둑 가장자리에 몸을 감추고 작고 가는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밤 열 시가 지났건만 하늘은 아직도 주춤거리며 이별을 고하는 낮 빛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찌뿌드드한 오후 열기도 한풀 꺾여서, 짧은 한여름밤의 서늘한 손가락이 닿자마자 흩어지듯이 사라져 버렸다.(161)

- 아름다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나면 누구나 그 꿈을 다시 한 번 기억해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저 아름다웠다는 희미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 몽상가는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