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6 #시라는별 55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미야자키 하야오풍의 질문 
- 김선우 

낡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지. 늙어보기 전의 일이지. 팔십 년쯤 살아보니 알겠어. 늙을수록 이 장소가 좋아지더라고. 여기는 절벽. 한해 한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라네.

열개의 손가락으로 움켜잡은 당신이라는 절벽, ˝뛸까, 우리?˝ 말하곤 하지. 꽃이 지는 느낌으로 아니, 막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느낌으로 나는 대답하곤 해. ˝걸어요, 우리.˝ 하루를 느리게 살아낸 뒤 쓰다듬어줄 수 있는 이 장소가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한해 한해 한걸음이
갈수록 소중해지는 때라네. 그래, 충만하지.

알지 않나? 어떤 시간과 장소는 아주 낡은 채 불쑥 다가와 아예 드러눕기도 하거든. 무례하지. 하지만 이 장소는 낡지 않아. 늙을 뿐이지. 고통도 허기도 늘 새롭게 당도한다네. 내가 자네 나이 땐 깊게 패는 주름이나 검버섯 같은 게 무척 신기하더라고. 경험해보지 않은 새것들이니까. 아직도 새로 도착하는 낯선 것들이 여전히 있어. 궁금하지, 늘 궁금해. 이 장소가 말이야.

낡지 않고 늙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자네는 얼마나 알고 있나?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워지는 곳,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김선우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을 절반쯤 읽었다. 책을 볼 짬이 나지 않는 9월 첫 주 주말을 보내다 겨우 허락된 두어 시간 평화의 시간을 가졌다.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는 늙어가는 몸을 달리 보는 시각 전환을 안내한다.

˝한 해 한 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 ˝하루를 느리게 살아낸 뒤 쓰다듬어줄 수 있는˝ 장소, ˝낡지 않고 늙을 수 있는 장소˝, ˝낯선 것들이˝ ˝˝늘 새롭게 당도하는˝ 장소,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워지는 곳.˝

늙어가는 몸을 팔십 년쯤 살아본 이 화자처럼 궁금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꽃이 지는 느낌˝이 아닌 ˝막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느낌으로˝ 오늘 하루도 느리지만 어떻게든 살아낸 자신의 몸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토닥이고 대견했다 칭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늙어갈 인생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 . . . . .

하고많은 시들 중 이 시가 오늘 내 몸으로 쑤욱 들어온 것은 늙어가기보다 낡아가는 내 어미의 몸뚱이를 보고 만지고 온 탓이었다. 어미의 몸이 점점 말라간다. 이주일 사이 어미의 몸은 살점들이 녹아내린 듯 살의 거죽만 뼈에 붙어 있으려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내 어미는 풍채가 좋은 여인이었다. 한창 시절엔 저 멀리서 물동이 이고 오는 모습만으로도 광채가 난다고 동네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처자였고, 내가 만난 중년의 어미도 신수 훤하고 건장한 여인이었다. 그랬기에 자그마한 나는 늘 고양의 앞의 생쥐 꼴이었는데(물론 엄마의 기억은 다르다), 이제 어미는 작아지고 작아져 자그마한 내가 어미를 내려다보게 생겼고, 약해지고 약해져 내가 힘껏 부축해야 버티고 선다.

양쪽에서 거들어도 자꾸만 주저앉으려 하는 어미를 보면서 늙어가는 몸은 중력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하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녹아내린 자리에 가느다란 나무 조각만이 남는 하드. 그리 단단했던 살덩이가 어떻게 저리 흐물흐물해질 수 있을까.

내 어미는 팔순을 기점으로 그렇게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던 생의 의지를 조금씩 놓기 시작했다. 이 시의 화자는 ˝팔십 년쯤 살아보니˝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가 좋아지더라고˝ 말하지만, 내 어미는 그 나이 이후로는 이전까지 곧잘 내뱉곤 하던 ˝내가 5년만 젊었어도˝ 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고 당신 몸을 돌보지 않았다. 나는 많은 자식이 그러하듯 안일했고 소홀했다.

‘피골이 상접한‘이라는 몸을 책 속의 활자가 아닌 실물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날과 젊은 날엔 징글징글하게 미워했던 어미였지만, 어쨌든 내 어미여서, 어쨌든 저 몸뚱이로 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했던 어미여서, 말라서 더욱 아픈 앙상한 다리를
˝열개의 손가락으로 움켜잡는˝ 어미의 앙상한 두 손이 자꾸만 어른거려 시를 읽다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불거졌다.

늙고 병들어가는 어미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비도 내리지 않은 맑은 가을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 탄성을 질렀고, 딸은 핸드폰을 챙기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나는 저런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놓고 엄마와 행복에 젖어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혼자 목이 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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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06 06: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한 해 한 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 표현 너무 좋네요. 행복님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군요.. 글을 읽으며 저도 덩달아 목이 메입니다. 잘 견뎌내시길 빕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33   좋아요 4 | URL
괭님. 고마워요. 올것이 오려는 건가? 이런 맘이 들고 있지만 힘들지는 않아요. 다만 이 나이에도 고아 되는 건 두려운 거 있죠.^^;;;

막시무스 2021-09-06 07:3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격을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마음이 너무 무겁네요!ㅠ 어머니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손 많이 잡아드리세요! 행복한 한주되시구요!ㅎ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35   좋아요 3 | URL
손 많이 잡아드리고 싶은데. 집에 모시지를 못해서. ㅠㅠ 막시무스님도 비슷하신거예요? 그럼 같이 손 잡아 드려요.

얄라알라 2021-09-06 08:2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확 들어와 사진 먼저 보고, 글을 나중에 읽었는데 풍경을 같이 보는 따님과 어머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저 역시 목구멍이 뜨끈해집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37   좋아요 3 | URL
풍경이 넘 예뻐서 더 저릿했던가봐요. 같이 뜨끈해주셔 고마워요 북사랑님^^

페넬로페 2021-09-06 08:4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한 해 한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
라는 문장이 왜이리 먹먹하고 씁쓸한지요~~행복한책읽기님의 어머님과 함께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건강하고 편안하연 좋겠습니다.
하늘 속 무지개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것이 일회적이지 않고 늘 행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48   좋아요 2 | URL
그죠. 저 시구, 정직한 말이어서 씁쓸하죠. 늙어가는 건 순리라, 그저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는 할머니 엄마를 볼 수 있는 것도 복이라 여긴답니다. 이만큼 나이 든 모습으로 제 곁에 있어 주셔 감사해요. 저에겐 엄마가 그 어떤 책보다 귀한 숨쉬는 책이셨거든요^^

2021-09-06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7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09-06 09:1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이네요 ㅜㅜ 잘 보살펴 드리길 바랍니다. 시처럼 거꾸로 생각해보면 낡아가는게 어저면 새로워지는 거라고 할 수 있을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43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우린 늙음을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요. 물론 어렵겠지만^^;;

2021-09-0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7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6 12:2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이잉~ 마지막에 울컥..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2:00   좋아요 3 | URL
죄송해요. 플친들 울리려던 게 아닌데^^;;

초딩 2021-09-06 23: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이 모두 너무 몽환적이고 예뻐요!

초딩 2021-09-06 23:5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ㅜㅜ 어머니랑 오래 살다가 어머니가 내려가 계신데
너무 보고 샆은데 오랜만에 보면 도 늙으셨을까봐 슬프고 그래요.
코로나 때문에 왕래가 요즘 뜸해서 .. 그래도 보고 싶고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2:06   좋아요 3 | URL
초딩님 어머님과 오래 함께 사셨군요. 저도 엄마랑 삼십해 넘게 살다 독립했더랬어요. 코로나로 저도 요양원 계신 엄니를 자주 못뵜어요.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ㅡㅡ 보고 싶으실 때 달려가세요. 저는 늙어가는 부모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작은 복 중 하나라 생각해요. 우리의 거울이잖아요.^^

희선 2021-09-08 0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 마음 아팠겠습니다 그 길에 해무리를 만나셨군요 그게 조금 마음을 낫게 해주었기를 바랍니다 좋은 걸 함께 보는 것도 기쁜 일이죠 어머님하고 못한 거 따님하고는 많이 하세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