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오상빈 옮김 / 애플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가잔차키스가 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창피하게도 프란체스코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성당 이름으로 또 성인의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생애라든지, 그가 살아온 방식이나 그가 행한 말들, 그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도무지 아는 것이 없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동안 그런 무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나는 이 지구를 살아간 한 성인에 삶에 대해서 피부에 와닿듯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한 성인에 대해서, 또 한 인간에 대해서 세세하고 차분하게 다루고 있다. 소상하게 적힌 일화들이 때론 너무 환상적이어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가 한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은 이 글에 더욱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나는 진리 그 자체보다도 더 진실된 이 전설을 쓰면서 영웅이자 위대한 순교자인 프란체스코를 향한 경외심과 사랑에 압도당했고, 때로는 경탄에 빠지기까지 하였다.”(7쪽)고 고백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위대한 순교자에게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투쟁하고 가난과 결혼한 이 성인의 모습에서 삶과 진리, 신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프란체스코의 전기이면서도 지루하고 딱딱하지 않다. 이것은 예술로 승화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인 기록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임의대로 재구성한 부분이 있는 소설이다. 그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긴 분량에도 꽤 흥미롭게 읽어나가고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성인에 대해서 이렇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형태로 훌륭하게 소화해낸 작가의 능숙한 솜씨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아시시의 도성 안에서 레오 형제와 프란체스코 신부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프란체스코가 단지 위대한 성자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처음 프란체스코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자가 살고 있는 창가 아래에서 노래나 불러대는 한량이었다니! 그러나 그는 레오 형제를 만나서 변하게 되고 20세에 회개하여 모든 재산을 버리고 평생을 청빈하게 살게 된다.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힘은 전형적인 윤리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덕목 안에 도사린 부정, 오만, 악의, 불명예를 완전히 뒤바꿔놓으려는 피땀 어린 투쟁에 있는 것이오. 언젠가는 루시퍼(사탄)야말로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에 서게 될 가장 영광스런 천사가 될 것이오. 미카엘이나, 가브리엘, 라파엘이 아니라 마침내 루시퍼가 그 무시무시한 암흑을 빛으로 바꿔놓으며 제일의 천사가 될 것이오.”(30쪽)

  처음에 프란체스코가 하는 말은 정말 본문 그대로 유려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퍼야 말로 하느님 오른쪽 자리에 서게 될 것이라는 대담하면서도 강렬한 말이 이 책의 흥미를 돋구고 프란체스코라는 성인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죄인에게도 구원의 희망이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루시퍼(사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타락한 천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에게 올라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주님,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빵 뒤에도, 입맞춤 뒤에도,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숨결 뒤에도 숨어 있습니다. 오 주님, 제가 어떻게 당신을 피하여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142쪽)

  프란체스코는 회개한 뒤에도 끊임없이 번민한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도, 기적을 체험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부분이 성인은 인간적으로 보게 했고, 소설의 갈등 요소로 작용하여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계속 읽게 만들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인의 심리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끈임없이 책임과 의무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 중 하나이다. 그것이 또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고 있다면 더욱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고민하고 주저하면서도 결국 신념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어디에나 하나님이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도망가지 않고 숨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이 소설은 이런 감동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도 하느님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그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겐 언제나 절제라는 테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테두리 바깥에 계십니다. 저는 하느님 쪽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주교님.”(155쪽)

  이 소설에서는 가끔씩 머리를 툭치는 경탄스러운 문장이나 구절들이 나온다. 위의 문장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절제라는 테두리가 있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윤리나 의무 등 모든 것에 바깥에 있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문장은 결국 이 소설 전반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문장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코가 행한 많은 일들이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는 기이하고 잘못된 것들이 많다. 즉, 절제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시선이다.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봤을 때, 프란체스코는 분명 하느님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레오 형제도 물론 알고 있다시피 하느님은 언제나 옳아요. 지금까지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작은 문제만, 우리의 작은 영혼에만 신경을 써왔지요. 우리가 걱정하던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구원을 받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결단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도 구제하기 위해 투쟁해야 해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구원하겠어요? 레오 형제, 당신도 똑똑히 들었지요? ‘앞으로 가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라!’고 말이에요.”(228쪽)

  하느님이 언제나 옳다는 부분부터 강렬하게 다가왔다. 말 그대로 하느님은 언제나 옳다. 이 단순한 진리가 이 책에서는 왜 이렇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그건 프란체스코의 생애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비틀리고 잘못된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고통이 따르고 있고 지나치게 가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옳다. 그렇기 때문에 프란체스코의 생애도, 그를 따른 사람들의 생애도 언제나 옳다. 이것이 진리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영혼에 구제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위의 대사처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투쟁을 했다. 거리에서 돌을 맞으며 설교를 했고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수도회를 만들었다. 그의 유지는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여,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당신을 사랑한다면 반월도를 손에 쥔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천국의 문을 제 앞에서 모두 닫아버리십시오. 그리고 제가 지옥이 두려워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영원한 지옥의 불길 속으로 저를 던져버리십시오. 그러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면,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당신의 팔을 벌려 저를 맞아주십시오.”(250쪽)

  이토록 진실된 구애가 있을 수 있을까. 프란체스코의 기도는 내 가슴에 깊이 남았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영생을 바라고서, 지옥이 두려워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 진심으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신앙을 가진 척 위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어린이가 달콤한 사탕을 바라듯이, 무서운 형벌을 피하려는 듯이 무언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실로 유치한 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단순하고 이성적인 생각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진실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무엇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믿는 것이 진실된 믿음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주장을 이렇게 직접적인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 하느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 저는 사탄도 가련히 여겨집니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불행하고 가엾은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한때 하느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당신을 부인하고 당신 곁을 떠나 위로받을 곳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습니다. 자매들이여, 그가 어찌하여 위안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이 그에게 천국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달콤한 추억을 그대로 회상할 수 있는 그가 어떤 식으로 위안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탄을 위해서도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의 한없이 너그러우신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셔서 그가 돌아와 대천사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를 올립시다.

  사랑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여자에게 주어진 위대한 역할입니다. 사탄은 피에 굶주린 추악한 짐승이지만 그의 입에 입맞춤을 해준다면 그는 대천사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489쪽)

  사탄조차도 가련하게 여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불행하고 가엾은 자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지던지. 또한 사탄에게조차도 입맞춤을 해줘야 한다고,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나,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말이 그런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는 참으로 예수처럼 많은 비유를 사용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말들이 쉽게 이해가 갔다. 실천하기는 어려운 말들과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고 무의식 중에 내 안에 깃들어서 체화되는 것들도 많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고행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내 영혼이 씻겨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형제들이여,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나의 축복과 함께 앞으로 나가십시오. 형제들에게 말솜씨가 있다면 말로 설교하십시오. 그렇지만 되도록 형제들의 목숨과 행동으로 설교하십시오. 말보다 고귀한 것은 행동입니다. 그러면 행동보다 높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침묵입니다. 나의 형제여, 하느님께 이르는 모든 계단을 끝까지 오르시길 바랍니다. 말로써 행동으로써 설교하고, 혼자가 될 때는 주님이 계시는 성스러운 침묵 안으로 들어가십시오.”(518쪽)

  말보다 고귀한 것이 행동이라는 말에 절실히 공감이 갔다. 지금 세상에 단순한 말로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말보다 고귀한 것은 행동이다. 목숨과 행동으로 하는 설교를 보고 싶다. 또한 침묵의 중요성, 하느님과 자신이 일대일로 만나 침묵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프란체스코는 바위 위에서 한 뼘 정도의 높이로 허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팔을 십자가처럼 올린 채로 조용하고도 기묘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가 날아가버리면 큰일이라는 생각네 나는 전속력으로 바위에 올라가 그의 옷깃이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조금 전처럼 조용하고 기묘하게 바위 위로 내려와 앉았다.(590~591쪽)

  레오 형제는 천국도 지옥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끔찍한 꿈을 꾸고 깨어난다. 그 뒤에 보게 되는 것은 프란체스코가 공중 부양을 하는 모습이었다. 성인들은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님이 입은 다섯 곳의 성흔이 나타난 것이지만, 나는 그 전에 이 부분에서도 꽤 신기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전에 겪은 신비한 체험들 역시 인상적이었지만, 이 부분은 특히 영상적으로 이미지가 제대로 그려져서 재미있었던 것이다. 레오 형제는 프란체스코가 하늘로 오르는 환상을 증표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언젠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절대로’나 ‘언제나’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이라고. 그 말은 그분만이 하실 수가 있어요……. 자, 이제 가보십시오. 하느님의 얼니 양,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자칫하면 늑대에게 통째로 잡혀먹힐 뻔했으니!”(594쪽)

  ‘절대로’나 ‘언제나’가 하느님의 말이라는 것이 인상깊게 다가왔다. 우리는 수시로 ‘절대로’나 ‘언제나’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만이 허용된 말이고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말이라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간에게 ‘절대로’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나 역시 함부로 ‘절대로’라는 말을 남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처럼 이 소설 전반에는 삶의 태도를 바꿔놓을만한 문장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 성스러운 무지는?”

  “프란체스코 형제, 그것도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새로이 학교를 열었답니다. 어떤 형제는 볼로냐로 가고 어떤 형제는 파리로 가서 벼룩에게 신발을 신길 수 있을 정도의 학문을 쌓고 있지요. 그들은 두꺼운 책들을 사 모으고 교단에 올라가서는 오랜 시간을 강의하죠. 그들은 예수가 심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과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야기가 너무나 장황해서 그들이 하는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하죠. 박식한 사람이 입을 열고 지껄이기 시작하는 날은 예수게써 부활했던 마지막 날이 되는 것이죠.”(599쪽)

  프란체스코의 형제들은 이후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수도원에서 처음에 내세웠던 성스러운 가난, 성스러운 사랑, 성스러운 무지는 모두 죽었다. 모두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었는데 특히 인상깊은 부분은 성스러운 무지였다. 믿음과 이론은 전혀 다른 것이다. 믿음은 순수하게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론 이론으로 믿음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교는 결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과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갖가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말처럼, 지금의 종교는 때로 종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창조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려고 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짓이다. 과학을 부정하고 억지로 성경 내용을 새로운 가설로 끼워맞추려 노력하기보다는 순수하게 믿으려는 노력을 우선시 해야 할 것이 당연하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따라서 억지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 시대에 더욱 성스러운 무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성스러운 가난과 성스러운 사랑 역시 필요하다. 이 책이 소설로 계속 한국에 번역되고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 역시 그러한 필요성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소설인 동시에 훌륭한 신앙서이기도 하다. 위대한 성인의 기록이기도 하며 믿음에 대해 진실되게 가르쳐주는 책이기도 한 것이다.

  “그분은 이곳에서 뼈를 묻으셔야 합니다. 그가 우리 마을의 죄를 씻고 하느님께서 축복을 내리시게 할 것입니다.”(618쪽)

  이후 프란체스코에게 성흔이 나타나고 피를 흘리고 죽어갈 때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기 보다는 그의 육체를 탐낸다. 이 부분에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의 살점과 뼈를 얻어낼 생각만 하다니.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 있을까. 그러면서도 오직 성인만을 원망하며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사에서는 정말 욕지기가 치밀 정도로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어쩌면 인간은 이렇게 악랄하고 탐욕스러울 수 있는지 경악스러웠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성인이 물건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절망을 느끼게 했다.

  주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당신은 신 중의 신이시며 당신만이 기적을 보이십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강하시며, 누구보다 위대하시며, 누구보다 높으십니다.

  당신은 선입니다. 모든 선입니다. 제일 드높은 선입니다.

  당신은 사랑입니다. 지혜와 겸손입니다. 그리고 가장 쓴 인내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움이며, 확신이며, 평화며, 기쁨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정의요, 우리의 모든 보물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방어해주십니다.

  당신은 우리 영혼의 거룩한 위안입니다.(622쪽)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이다. 당신만이 기적을 보인다는 말에도 역시 공감이 갔다. 글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찬사의 글이다. 가슴이 뛸 정도로 멋졌다. 프란체스코는 이 책을 읽고 찾아본 백과사전에서 보면 ‘신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만큼 ‘태양의 찬가’등을 비롯한 뛰어난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 곳곳에서 프란체스코의 대사들은 빛이 났고 그가 남긴 글과 기도문은 하나같이 명문이었다.

  “형제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러자 농부들은 모두 제정신을 잃고 거룩한 아기 예수를 만져보려고 다투듯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푸른 광채가 갑자기 사라지며 구유엔 다시금 어둠이 덮쳐왔다. 그와 함께 프란체스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기를 안고 사라져버렸다.(640쪽)

  프란체스코가 죽어가면서 크리스마스에 예수의 탄생을 다시 재현하는 부분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프란체스코가 기뻐하는 감정이 텍스트 너머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프란체스코가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까지도 놀라우면서 인상적이었다.

  “하느님의 작은 사자여, 그렇게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래요. 인간의 오만은 한도 끝도 없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심장은 하느님이 만드신 거랍니다. 어쩌면 그분은 인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대항해주기를 스스로 원하셨던 거예요!”(662쪽)

  프란체스코가 앞서 말한 우화에 대해서 레오형제에게 묻고, 레오 형제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프란체스코가 한 말이 바로 저것이다. 인간의 심장은 오만하게 하느님에게 계속 울어댄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오만은 정말로 끝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오만하다. 바벨탑을 만들고 신에 도전할 정도로 오만하다. 신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정도로 오만하다. 그러나 그 오만한 심장조차 하느님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 것이다. 당신에게 대항해 주기를 스스로 원했다니. 새로운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심장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대치하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믿을지 안 믿을지 선택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원래부터 믿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믿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생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유를 하게 된 원인이었다.

  “레오 형제, 나는 지금 기뻐요.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몸 안엔 하느님을 증오하는 자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젠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자가 사라졌으니 말이죠.”

  “프란체스코 신부님, 그자가 누굽니까?”

  “육체랍니다.”(671쪽)

  이 부분도 정말 인상적으로 읽었다. 프란체스코는 살아가면서 계속 육체와의 싸움을 벌였다. 육체가 가진 기본적인 욕망들을 무시하며 육체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쾌락을 배제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산 것이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멀리하려고 애쓴 그의 고행은 때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때로는 너무 끔찍해서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에게 육체란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위와 같은 대화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사고 방식이지만 그가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하느님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노력과 신앙심만큼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직자입니다. 언제나 겸손해야 하며 순백해야 하며 여러분과 화평하게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쉽게 화를 내왔습니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십시오!”(688쪽)

  프란체스코가 화를 내는 부분은 이 책 전체에서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며 항상 자기 반성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프란체스코보다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 구절을 읽고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겸손하지 않고 쉽게 화를 내는 성직자들이 세상에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처음에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었습니다. 나는 원래 문둥이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나를 문둥이들 틈에 집어던지시고 그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옷을 벗겨서 상처를 씻어주라고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시에 따르니 세상이 바뀐 것을 깨달았습니다.”(694쪽)

  이 책은 전반적으로 앞서 읽었던 『울림』(시작)에 나온 분들이 떠오르는 장면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울림』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자의 언급이 있었다. 특히 문둥이를 먼저 껴안고 씻어주는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럼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점 역시 유사했고 또한 감동적이었다. 누가 문둥이에게 입을 맞출 수 있을까. 더군다나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던 사람인데.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결코 무언가 때문이 아니고 자기자신 때문도 아닌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이었다. 그의 고행들이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지고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책을 다 덮고 나서는 그런 고행을 스스로 알아서 해나간 프란체스코의 진솔함이 느껴졌다.

  “대체 어떤 것이 사랑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동정심은 두 사람이 있어야 발휘되죠.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동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친절에도 두 사람이 있어야 하죠.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너와 나라는 말은 필요가 없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705~706쪽)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 단순하면서도 또한 글로 읽으면서 역시 뒤통수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주는 문장이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너와 나라는 말이 필요없는 것.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나올리 없고, 동정심 같은 것이 발휘될 여지도 없다. 이 책에는 이렇게 보석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특히 위의 문장은 사랑에 관해서 가장 적절한 정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체스코가 평생을 통해 추구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하느님 속으로 던져버리는 행위였다. 인간의 규칙과 규범을 넘어서서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토록 먹는 것을 절제하고 스스로 고행을 자처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통스럽고 끔찍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는 보기 좋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나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프란체스코는 나중에 육신조차도 걸리적 거려 했을 것이다. 사랑에는 오직 한 사람뿐.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 이 책의 내용을 태반을 잊어버리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만 같다.

  프란체스코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먼저 감히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것이다. 역시 성자라는 말 그대로 그는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거 겪은 기적들 역시 보통 사람이 체험하기 힘든 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텍스트로 읽는 재미가 있었으며 많은 것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줄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너무 물질만능주의에 경도된 것이 아닌가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그가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며 모든 욕심을 버리는 부분에서도 많은 감명을 느꼈다. 성인의 행적은 그 삶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글자로 읽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랐고, 때론 눈시울 적시게 만들만큼 처절한 장면도 많았다. 분량에 상관없이 읽으면서 계속 프란체스코의 행동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경탄을 함께 느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누군가 성경말고 딱 한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한다고 묻는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그만큼 이 책에는 믿음에 대해서 삶으로 유언을 남긴 한 성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때론 지나친 미사여구나 감수성 어린 문장들이 글에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고 오히려 감동을 떨어트리기도 하지만, 프란체스코가 말한 것들과 행동한 것들에서 오는 진실된 감동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은 앞으로도 계속 번역되고 읽혀서 후세 사람들도 꼭 읽어봐야할 필독서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 할 책이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위대한 성인의 삶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일독을 할 만하다.

  위대한 성인을 글로 만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고,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또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조언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두꺼운 분량임에도 흥미롭게 읽어나갔고 남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프란체스코. 이제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다섯 글자를 말하는 순간 그의 전생애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 삶이 너무도 경이롭고 진실되어서 경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책을 읽게 되면 그 삶이 조금은 덜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그때의 나는 성인의 삶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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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you 2016-02-2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또한 공감되는 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되니 더 좋았습니다.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를 통해 성인의 삶에 동화되어 갔네요. 비록 글이지만 성자의 뜨거운 믿음이 전이가 되서 많이 울컥했습니다.좋은 리뷰에 감사드립니다.
 
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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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은 과거 일본에 선교를 하러 떠난 신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그 과정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소설의 현실감이 매우 뛰어나며 독자들이 긴장감을 느끼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처절한 고문 과정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남고, 작가가 전달하는 의문과 종교적 메시지도 가슴 속에 깊이 전달되고 있다. 과연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을 쓰려고 생각하자,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으면서 크게 세가지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느낀 점들을 세 가지 키워드에 맞춰서 적어보겠다.  


  침묵

  이 소설의 제목이자 본문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키워드이다. 앞서 읽었던 『다섯번째 산』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게 언급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을 주시지만 또한 시험과 고난을 내리며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섯번째 산』이나 『프란체스코』에서는 평번한 인간이 아닌 성경 혹은 역사에 남은 유명한 ‘성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천사를 대신 보내어 말을 전하거나 직접 신의 목소리를 계시로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침묵』에서는 일절 그러한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와 근접한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 거세되어 있다. 따라서 독자는 더욱 친근하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고 주인공의 심정을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신화가 아닌 현실을 다루고 있고, 현실 속의 믿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소설이다.

  현재도 일본은 교회가 가장 적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은 또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시절의 일본을 다루고 있다. 그 핍박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혹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수 만명이 몰살되는 가운데 두 명의 신부가 일본에 잡입한다. 이미 자신들이 존경하던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말이다. 그리고 끝내 한 신부는 죽고 남은 신부마저 배교하고 만다. 글로 줄이면 단순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으면서 긴장감이 계속 흘렀고, 슬픔과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으며 마지막에는 많은 고민과 함께 책을 덮어야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더 이상 신화 속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다. 애초에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하는 것은 모순이다. 인간에게 개입한 순간, 자유의지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신의 개입은 인간이 자유의지에 상관없이 억지로 실재하는 기적 때문에 신을 믿게 된다. 만약 신의 개입이 일어난다면 세상에 모든 악과 부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천국과 다를 바 없는 세계가 구현되는 것이다.

  한 번은 길을 가다가, 앞에 가는 두 여성이 자기들은 왜 부자가 아닐까 고민하면서 기도를 더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신이 인간의 모든 기도를 그때그때 들어주는 무보수만능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기적으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이 침묵한다면 믿음을 저버릴 것인가. 무언가를 해주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음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욥기에서 욥이 모든 고난 속에서도 결국 신을 믿고 신의 의지를 따랐듯이.

  하나님의 침묵은 당여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세계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기도로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마지막에 신의 은총을 바랄 수는 있겠지만, 처음부터 신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고 받아내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지 신을 믿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기도는 은총을 먼저 바라는 게 아니라 언제나 매 순간순간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사랑이다. 침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자유의지를 빋고, 고난과 시련, 역경 속에서도 다른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믿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까닭이다. 하나님은 순수한 믿음을 바라고 있다. 침묵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침묵을 사랑으로 느껴야 할 것이다.  

 

  순교

  이 소설을 보면서 계속 생각하게 된 단어는 ‘순교’였다. 이 소설은 순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순교한 시대의 이야기이며, 또한 순교와 배교과 함께 펼쳐지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과연 순교는 옳은 것인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지금 사람들은 평온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만약 상황이 바뀐다면 순교자들과 배교자들로 나뉘게 될 것인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유로 배교자가 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개인의 마음의 약함이 순교와 배교를 가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순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우리에게 순교란 낯선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더 이상 종교 전쟁도 없고 민주주의가 발달한 시대에서 순교는 점점 낯선 단어가 될 뿐만 아니라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서 처음으로 순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순교는 누구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가장 큰 공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만 순교를 택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순교와 자살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순교와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들의 죽음이 모두 순교일까. 때로는 착각이 아닐까. 자살도 있지 않을까. 과거 숀그를 위해 순교한 성직자들 중에 순교자들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을 받기 힘들어서, 삶의 미련이 없어서 순교라고 오인하며 자살을 택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순교를 각오하고 위험한 곳에 해외 선교를 나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각오한 순교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련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개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만큼 순교는 쉽게 결정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신중한 태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순교를 각오한 선교보다는 오히려 자국 내 선교에 집중하면서 외국과는 관계를 전진시켜나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느리더라도 점진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물자를 주고받으면서 서서히 해나가는 방법이 자살자나 순교자를 늘리지 않고, 헛된 희생 없이 평화롭게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순교라는 이름아래 희생하는 모습들이 안타까웠다. 고귀한 죽음이라고 표현되는 순교지만 이 소설에서는 굉장히 현실적인 모습들을 그림으로써 그 처절하고 잔혹한 과정이 머릿속에 상상되었다. 안타깝고 슬픈 일들이었다. 하나님은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계시다. 나는 지금 당장 암흑 속에 강제로 빛을 비추기보다 서서히 빛을 비추는 방법이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믿음

  이 소설에서는 또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먼저 주인공이 배교하는 과정에서 페레이라 신부의 설득 때문이었다. 일본인이 믿고 있는 신이 자신들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부분. 그렇다면 과연 그 신앙은 옳은 것일까. 아니면 잘못된 것일까. 이 소설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얼굴’로 믿음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성화 속 얼굴이 다르다고 깨닫는다. 믿음의 형태나 모습, 관습은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은 결국 같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태양신과 연관되어 믿는다면, 지금의 기독교 역시 로마시대의 태양신 신앙과 결합되면서 안식일에서 예수가 부활한 주일로 변경되었으니까. 성경을 그대로 따른다면 지금도 유대교처럼 안식을 지켜야하겠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가 주일을 지키고 있다. 성경을 기록된 대로 온전히 따르는 것은 그만큼 쉽지가 않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편의대로 변한 부분들, 각 나라마다 다른 다양한 기독교 색채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두 다른 형태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지언정,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같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결국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 때문에 믿음의 형질이 바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에 있지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문화 상대주의에 속하는 부분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선교사가 오지 부족에 선교를 하러가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들이 이상하게도 유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부족의 문화가 남의 뒷통수를 치고 배신하는 자를 영웅으로 숭배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문화에 따라 믿음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고 많은 다양한 현상들이 발생하겠지만 그런 것들은 각각의 문화를 파악하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차근차근 개선해 나가면 된다. 좌절할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은 아직 일본에 남은 유일한 신부이며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따르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침묵을 하셨더라도 그동안 자기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났다.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곳은 해변가였다. 자기가 걸어온 생애가 해변가에 발자국으로 찍혀 있었다. 평소에는 예수님의 발자국이 그 옆에 찍혀 있었지만 유독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는 발자국이 한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께 왜 가장 힘들었을 때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었냐고 물으니 주께서 답하기를 내가 너를 업고 갔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주는 가장 힘들 때 우리를 업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가슴 속에 깊이 남고 위안이 되었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면서 감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침묵의 본질을 깨달은 듯했다. 말없이 묵묵히 우리를 지탱해부고 있는 그분의 모습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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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산
파울로 코엘로 지음, 황보석 옮김 / 예문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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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에 출간된 파울로 코엘류의 『다섯 번째 산』은 그의 대표작인 『연금술사』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신비주의에 더 기대고 있는 『연금술사』와 달리 조금 더 기독교적인 소설이며 『연금술사』 이후에 출간되어 문장이나 구성 등에서 훨씬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의 주제 중 하나는 살아가면서 피해갈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적혀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는 수많은 소설에서 그동안 많이 다루어졌던 이야기이다. 이 책은 특히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또 비극을 너머서는 일에 대해서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적혀 있다. 특히 이 책이 초반부터 흥미를 끄는 것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 중 하나인 엘리야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기록된 유일하게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인물이다. 또한 예수가 감람산에 오를 때 모세와 함께 제자들에게 목격되기도 한 인물이다. 그만큼 성경에서 많은 비중을 가지고 있는 ‘엘리야’를 소재로 했다는 사실부터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전작 『연금술사』와 마찬가지로 밀도가 높지 않고 파울로 코엘류 특유의 부드러운 문체로 인해 뛰어난 흡인력을 자랑한다. 이야기의 몰입이 쉬우며 간혹 등장하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환기의 효과를 주고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하는 요소이다.

  이 책은 기원전 870년대 초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성경에 나오는 구절인 열왕기상 18장 8~24절에 이서 영감을 받아 작가가 쓴 엘리야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며 오히려 성경에서 알 수 없었던 엘리야에 대해서 더 이해하게 되고 운명에 맞서는 것과 순응하는 것에 대한 주제의식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야기가 상당히 잘 짜여져 있고 종교적인 소재뿐만 아니라, 전쟁과 알파벳이 교묘하게 구성되어 있고 악바르를 재건하는 이야기들이 긴장감있게 펼쳐진다. 특히 초반부터 긴박한 상황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엘리야는 페니키아의 공주로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 이세벨에 의해 쫓기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독자는 처음부터 엘리야가 죽을 위기를 보면서 순식간에 이야기에 빨려드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째서 시련과 비극이 나타나고, 그런 잔인한 운명에 순응하고 따라야 하는지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선지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엘리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이 무척 새로웠으며 이 책을 아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크게 만족감을 느꼈는데, 성경에 많이 나온 부분은 삭제하고 그 사이에 작가가 생각해낸 부분을 잘 채워넣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운명에 몸을 맡기지 말고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최선을 다해 살고 이겨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고난과 비극은 피할 방법이 없다. 어느 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고가 날지 알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전능하기 때문에 선악의 구분없이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서 계획하고 모든 일을 실행한다는 것. 따라서 인간에게는 때로는 하나님을 믿고 말고에 따라 그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욥기나 엘리야나 수많은 선지자들이 고행을 겪었던 것처럼(예수처럼) 피할 수 없는 일, 즉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지만 그 모든 것에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기 때문에 감내하고 이겨내며 오직 믿음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운명에 순응하고 하나님과 싸우면서 나약한 의지와 싸우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무슨 일이 있든 멈추지 말고 주저하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는 것. 성장하는 것. 발전하는 것. 성취하는 것. 이 소설에서는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소설적 재미에도 충실하여 초반의 긴박감은 물론이고 물 흐르는 듯이 간결한 문체로 인해 이야기가 재미있게 다가오고, 과부와 사랑도 매우 로맨틱하다. 소년을 살려내는 기적은 경이롭고 전쟁이 벌어지는 부분은 비극적인 운명을 잘 은유로 나타내고 있다. 몇몇 부분은 계속 반복적인 강조로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짧고 강렬하며 오히려 끝에는 아쉬움 느낌마저 준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성경에 잘 적혀 있으므로 상세하게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 안에서 미래를 잠시 예지하는 부분은 현대 전쟁을 연상케 하면서 소설적 재미가 더 극대화된 부분이기도 했다.

  『연금술사』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책 역시 1998년에 출간된 이후로 현재까지 재간이 안 되는게 의아할 정도로 꽤 재미있게 읽었다. 구성도 잘 짜여져 있고 캐릭터도 살아있으며 글도 잘 쓰인 작품이었다. 지금 나온다면 파울로 코엘류의 명성도 많이 쌓인 상태이므로 좋은 평가를 받고 많이 팔릴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적인 운명과 시련 그리고 고난에 대해서 믿음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 이 책은 그런 비극과 인간의 관계를 잘 형상화한 수작이며 기독교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을 만한 훌륭한 기독교 문학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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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
조현 지음 / 시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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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 울림  

  이 책은 이 땅에 예수라고 불릴 사람들의 행적을 차분하고 상세하게 적고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예수들을 보면서 감동하고 역사와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유지될 수 있었는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이 땅에 예수들이 살아갔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교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국 기독교 100년에 이렇게 울림을 주는 사람들은 인상적이었다. 또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익히 아는 이름들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리 학교 건물에도 이름이 붙어 있는 조만식, 한경직 같은 분들이나 보통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문익환 같은 분도 자주 언급되어서 반가웠다. 또 이 수업을 가르치시는 고진하 교수님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 읽게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한 인물들은 정말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유언을 남기신 분들이었다. 이 분들의 삶을 이렇게 책으로나마 간접적으로 접하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맘몬 숭배와 교권주의, 배타주의로 악명 높은 현재 한국 교회가 어떻게 잘못되었고 또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할지 이 책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이 책을 선물해서 읽게 하고 싶었다. 신앙의 유일성 속에서도 초기 기독교 선구자들은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영성적 깊이를 지니면서 동시에 신앙과 민족과 이웃이 화해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이 책은 그런 모습을 세세하게 담고 있다. 읽으면서 과거에는 이렇게 멋진 분들과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하면 한 편으로는 안타깝고 아쉬웠다. 도시를 돌아다닐 때마다 웬만한 백화점보다 더 큰 교회 건물들을 보면 이 책에 등장한 분들이 보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 소개된 분은 동화 작가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님이었다. 나는 단지 좋은 동화 작가라고만 알고 있던 분이 이런 삶을 사셨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강렬한 충격이었고 놀람의 연속이었다. 평생 십자가를 짊어진 삶을 산 분. 이 분의 말씀 중에서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말한 부분이 너무나 공감이 갔다. 정말로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 또,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 정말 맑고 순수하신 분이었다. 유언장조차도 유머가 있으면서 진솔한 느낌이 배어나왔다. 
  

 『울림』(조현, 시작, 2008년 12월)은 저자가 “내 친구이던 ‘그런 사람’ 채희동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한국 기독교 100년에 왜 또 울림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겠는가라는 생각이 《한겨레신문》에 ‘숨은 영성가를 찾아서’란 기획연재를 하게 했다.”(12쪽)고 밝히고 있다. 5~7부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그러한 의도에 부합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앞서 1~4부에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널리 알려진 이들이 주로 나왔다면, 5~7부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주로 다루고 있어서 더욱 인상적으로 읽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수많은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면서도 경건한 신앙심과 예수를 닮은 생을 살아가면서 자기보다 타인을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은 많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기 때문에 위인들처럼 막연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이 피부에 와 닿았다. 내가 닿을 수 없는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살다간 이웃들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발자취가 진정으로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역사에 남은 위대한 사람들보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선지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기독교가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지만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많은 문제점들이 이들의 삶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들의 삶은 진정 예수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책장 사이마다 깃들어 있었다.  

  책의 후기에서 저자는 “구한말의 선각자들이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는 기독교 자체보다 그 시대와 사회, 기존 종교의 실상에서 찾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외세에게 나라를 잃지 않았고, 전쟁의 참화에 빠지지 않아 안정되었고, 기존 종교들이 제 구실을 감당했다면 기독교 그리도 빨리 이 땅에 착근하기는 어려웠으리라.”(311)고 말한다. 그러는 한 편 선각자들은 국민의식을 바로 세워줄 새로운 정신과 사상으로 기독교를 선택했다. 또한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지역부터 개신교가 널리 퍼졌고, 기독교와 상당히 가까운 교리의 틀을 갖춘 동학이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이미 한차례 전국을 휩쓴 덕분에 기독교가 보다 더 쉽게 스며들 수 있었다. 

  “나라를 잃고 이런 고난을 받는 근본 원인이 일제나 외부에 있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313쪽)는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의 말은 간디보다 10년 먼저 민족을 깨워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 방법 중 하나로 기독교를 내세웠다.

  한국 기독교는 이제 물신주의와 성공주의에서 벗어나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화해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영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제 교회가 불열과 갈등의 늪에서 벗어나 모두를 하나로 묶는 구심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 간의 반목과 갈등이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현대에 한국의 기독교는 회통과 화해의 문명으로서 세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을 위해 죽어간 선구자들. 그들이 보인 예수님의 사랑이 한국 기독교의 희망이다.

  이 책의 선각자들이 전하는 ‘울림’이 희망의 밀알이 되어 우리 가슴에 심어지길 바란다.(316쪽) 

  316쪽 마지막 세 문단이 이 책의 의미와 가치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선각자들의 모습은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서 신학적이 찬반이나 논리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책은 신학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선각자들의 삶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느껴야 할 것은 예수를 닮은 이들의 삶과 행적이다. 실천으로 기독교 문화를 새롭게 하고 개혁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용과 배려가 가득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간 우리 조상들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읽을 만한 책이다.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사와 인물들을 보고 알 수 있는 기회이며, 또한 삶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스물 네 명의 선각자들의 삶을 읽으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하고 때론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하면서 인상 깊게 읽었다. 평소에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분들을 마치 눈앞에 보듯이 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고, 뜻 깊은 독서였다. 어떤 책은 때론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책은 읽는 사람마다 삶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아직도 가슴에서 울림이 멎지 않고 있다. 이 울림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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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소설 중 훔치고 싶은 매력적인 책 10권을 제 나름대로 선정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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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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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군가에게 '사막'을 선물했고 난 아직 사막을 보지 않았다. 언제고 읽으리라는 죄책감만을 갖고 있을 뿐.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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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따스한 글들이 때론 마음에 위안이 된다. '몰락'이라는 단어조차도 따스하게 읽히는 이 책을 언제고 읽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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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나왔다는 커트 보네거트의 이 책 역시 읽고 싶다.
유령이 쓴 책
데이비드 미첼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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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12월 1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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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생적으로 환상에 매혹되었고, 이런 환상소설은 끌릴 수밖에 없다. 제목부터 이 책은 범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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