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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침묵』은 과거 일본에 선교를 하러 떠난 신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그 과정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소설의 현실감이 매우 뛰어나며 독자들이 긴장감을 느끼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처절한 고문 과정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남고, 작가가 전달하는 의문과 종교적 메시지도 가슴 속에 깊이 전달되고 있다. 과연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을 쓰려고 생각하자,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으면서 크게 세가지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느낀 점들을 세 가지 키워드에 맞춰서 적어보겠다.
침묵
이 소설의 제목이자 본문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키워드이다. 앞서 읽었던 『다섯번째 산』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게 언급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을 주시지만 또한 시험과 고난을 내리며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섯번째 산』이나 『프란체스코』에서는 평번한 인간이 아닌 성경 혹은 역사에 남은 유명한 ‘성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천사를 대신 보내어 말을 전하거나 직접 신의 목소리를 계시로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침묵』에서는 일절 그러한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와 근접한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 거세되어 있다. 따라서 독자는 더욱 친근하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고 주인공의 심정을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신화가 아닌 현실을 다루고 있고, 현실 속의 믿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소설이다.
현재도 일본은 교회가 가장 적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은 또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시절의 일본을 다루고 있다. 그 핍박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혹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수 만명이 몰살되는 가운데 두 명의 신부가 일본에 잡입한다. 이미 자신들이 존경하던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말이다. 그리고 끝내 한 신부는 죽고 남은 신부마저 배교하고 만다. 글로 줄이면 단순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으면서 긴장감이 계속 흘렀고, 슬픔과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으며 마지막에는 많은 고민과 함께 책을 덮어야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더 이상 신화 속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다. 애초에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하는 것은 모순이다. 인간에게 개입한 순간, 자유의지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신의 개입은 인간이 자유의지에 상관없이 억지로 실재하는 기적 때문에 신을 믿게 된다. 만약 신의 개입이 일어난다면 세상에 모든 악과 부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천국과 다를 바 없는 세계가 구현되는 것이다.
한 번은 길을 가다가, 앞에 가는 두 여성이 자기들은 왜 부자가 아닐까 고민하면서 기도를 더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신이 인간의 모든 기도를 그때그때 들어주는 무보수만능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기적으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이 침묵한다면 믿음을 저버릴 것인가. 무언가를 해주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음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욥기에서 욥이 모든 고난 속에서도 결국 신을 믿고 신의 의지를 따랐듯이.
하나님의 침묵은 당여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세계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기도로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마지막에 신의 은총을 바랄 수는 있겠지만, 처음부터 신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고 받아내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지 신을 믿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기도는 은총을 먼저 바라는 게 아니라 언제나 매 순간순간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사랑이다. 침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자유의지를 빋고, 고난과 시련, 역경 속에서도 다른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믿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까닭이다. 하나님은 순수한 믿음을 바라고 있다. 침묵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침묵을 사랑으로 느껴야 할 것이다.
순교
이 소설을 보면서 계속 생각하게 된 단어는 ‘순교’였다. 이 소설은 순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순교한 시대의 이야기이며, 또한 순교와 배교과 함께 펼쳐지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과연 순교는 옳은 것인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지금 사람들은 평온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만약 상황이 바뀐다면 순교자들과 배교자들로 나뉘게 될 것인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유로 배교자가 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개인의 마음의 약함이 순교와 배교를 가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순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우리에게 순교란 낯선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더 이상 종교 전쟁도 없고 민주주의가 발달한 시대에서 순교는 점점 낯선 단어가 될 뿐만 아니라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서 처음으로 순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순교는 누구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가장 큰 공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만 순교를 택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순교와 자살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순교와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들의 죽음이 모두 순교일까. 때로는 착각이 아닐까. 자살도 있지 않을까. 과거 숀그를 위해 순교한 성직자들 중에 순교자들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을 받기 힘들어서, 삶의 미련이 없어서 순교라고 오인하며 자살을 택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순교를 각오하고 위험한 곳에 해외 선교를 나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각오한 순교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련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개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만큼 순교는 쉽게 결정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신중한 태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순교를 각오한 선교보다는 오히려 자국 내 선교에 집중하면서 외국과는 관계를 전진시켜나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느리더라도 점진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물자를 주고받으면서 서서히 해나가는 방법이 자살자나 순교자를 늘리지 않고, 헛된 희생 없이 평화롭게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순교라는 이름아래 희생하는 모습들이 안타까웠다. 고귀한 죽음이라고 표현되는 순교지만 이 소설에서는 굉장히 현실적인 모습들을 그림으로써 그 처절하고 잔혹한 과정이 머릿속에 상상되었다. 안타깝고 슬픈 일들이었다. 하나님은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계시다. 나는 지금 당장 암흑 속에 강제로 빛을 비추기보다 서서히 빛을 비추는 방법이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믿음
이 소설에서는 또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먼저 주인공이 배교하는 과정에서 페레이라 신부의 설득 때문이었다. 일본인이 믿고 있는 신이 자신들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부분. 그렇다면 과연 그 신앙은 옳은 것일까. 아니면 잘못된 것일까. 이 소설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얼굴’로 믿음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성화 속 얼굴이 다르다고 깨닫는다. 믿음의 형태나 모습, 관습은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은 결국 같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태양신과 연관되어 믿는다면, 지금의 기독교 역시 로마시대의 태양신 신앙과 결합되면서 안식일에서 예수가 부활한 주일로 변경되었으니까. 성경을 그대로 따른다면 지금도 유대교처럼 안식을 지켜야하겠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가 주일을 지키고 있다. 성경을 기록된 대로 온전히 따르는 것은 그만큼 쉽지가 않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편의대로 변한 부분들, 각 나라마다 다른 다양한 기독교 색채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두 다른 형태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지언정,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같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결국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 때문에 믿음의 형질이 바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에 있지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문화 상대주의에 속하는 부분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선교사가 오지 부족에 선교를 하러가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들이 이상하게도 유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부족의 문화가 남의 뒷통수를 치고 배신하는 자를 영웅으로 숭배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문화에 따라 믿음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고 많은 다양한 현상들이 발생하겠지만 그런 것들은 각각의 문화를 파악하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차근차근 개선해 나가면 된다. 좌절할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은 아직 일본에 남은 유일한 신부이며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따르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침묵을 하셨더라도 그동안 자기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났다.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곳은 해변가였다. 자기가 걸어온 생애가 해변가에 발자국으로 찍혀 있었다. 평소에는 예수님의 발자국이 그 옆에 찍혀 있었지만 유독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는 발자국이 한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께 왜 가장 힘들었을 때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었냐고 물으니 주께서 답하기를 내가 너를 업고 갔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주는 가장 힘들 때 우리를 업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가슴 속에 깊이 남고 위안이 되었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면서 감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침묵의 본질을 깨달은 듯했다. 말없이 묵묵히 우리를 지탱해부고 있는 그분의 모습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