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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베오울프 - 고대 영웅 서사시의 현대적 변신!
『베오울프』는 고대 영문학의 최고봉이자 유럽 속어로 씌어진 최초의 영웅서사시다. 게르만 족의 민족 영웅 베오울프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문학 작품이다. 6세기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10세기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사본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작품으로 그 상상력과 거대한 스케일로 후일 여러 판타지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내가 이 서사시의 이름을 알고 있는 까닭은 당연, 『반지의 제왕』 때문이었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베오울프』가 원전인 고대 서사시가 아닌, 닐 게이먼과 케이틀린 R.키이넌의 소설로 이번에 출간되었다. 바로 영화 개봉과 맞물려서 말이다. 즉, 이 소설은 이번에 개봉한 로버트 저멕키스가 감독한 영화의 소설화인 셈. 그러나 보통 영화가 완성된 뒤 시나리오와 영화를 참고하여 쓰이는 소설들과는 달리 닐 게이먼이 영화 시나리오와 소설 작업에 동시에 참여했다고 한다.(소설은 주로 케이틀린 R.키어넌이 쓰고 닐 게이먼은 영화 각색에 주로 참여했다고 한다.)
고대 서사시 『베오울프』가 톨킨에게 끼친 영향은?
고전 『베오울프』는 톨킨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1930년대 당시 평론가들은 『베오울프』를 문학으로 여기지 않고 역사적인 문헌으로 여겼으나 톨킨은 이에 반박했다. 톨킨은 『베오울프』에 대한 최초의 문학적 접근을 시도한 학자였다.
사실 <베오울프>에는 두 가지 전통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앵글로 색슨 문화라 할 수도 있는 전설적인 영웅을 그리는 게르만 전통이며, 다른 하나는 나중에 앵글로 색슨 문화에 유입된 기독교 전통이다. 괴물은 앵글로 섹슨적 전설의 일부인 동시에, 기독교인의 눈으로 본 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렌델과 그 어미는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자로 기록된 카인의 후예라 할 수 있다. 두 괴물은 사탄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용은 "악의와 탐욕과 파괴(영웅의 삶에서 사악한 면)가 인격화된 모습이며,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 행운의 무차별적인 잔혹성(모든 삶의 사악한 면)이 인격화된 모습이기도 하다"(<괴물들과 평론가들>, 알렌 앤 언윈, 1983, p.17)
달리 말하면, <베오울프>는 <실마릴리온>과 <반지의 제왕>의 핵심 주제를 탐구한 문학 작품이다. 1930년대에 <베오울프>가 문학 평론가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든 간에 톨킨에게는 그것이 그의 세계관, 즉 그가 1914년부터 1973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끊임없이 쓰고자 했던 세상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이었다. 요컨대 <베오울프>에 대한 그의 평론을 통해서 우리는 톨킨의 창의적인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 『30분에 읽는 톨킨』, 앤드류 블레이크, 랜덤하우스코리아, 94-95쪽
톨킨은 『베오울프』를 연구하며 논문을 작성하기도 한다. 톨킨은 작품 전문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광적인 팬이었다고 하며, 직접 번역을 하기도 했다. 또한, 베오울프와 그렌델의 관계를 모티브로 하여 『반지의 제왕』의 절대 악과 맞서는 인물 관계를 설정하는 등 『베오울프』의 여러 요소를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톨킨은 『베오울프』를 "암흑의 힘과 싸워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깊이 있게 묘사한 걸작."이라고 평하였다.
고전 『베오울프』를 새롭게 해석한 닐 게이먼과 케이틀린 R.키어넌의 장편 소설 『베오울프』
이렇듯 후대 판타지 소설에 큰 영향을 끼친 고전 『베오울프』는 고대 영웅 서사시이기 때문에 단순한 구조로 쓰여 있다. 괴물 그렌델이 쳐들어와 엉망이 된 왕국에 영웅 베오울프가 나타나 그렌델의 팔을 뽑아버리며 죽인다. 밤새 잠든 사이 그의 어미가 복수를 하자, 소굴을 찾아가 역시 복수를 한다. 50년 뒤 용이 나타나고 늙은 베오울프는 위글라프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용을 죽이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죽어가면서 그는 위글라프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용감하며 도덕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면이 보이는 영웅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서사시이다.
이 시는 운율·문체·주제 면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게르만족의 서사시 전통에 속한다. 베오울프가 괴물의 팔을 잡아뜯는 것이라든지 늪 속으로 내려가는 것 등 많은 사건들이 민담에 나오는 낯익은 소재들이다.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윤리적 가치는 분명히 족장과 부족에게 충성하고 적에게 복수하라는 게르만족의 계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정신이 배어 있어서 아이슬란드의 사가(saga)나 〈에다 Edda〉에 실린 노래들에서 보이는 것 같은 잔혹한 숙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베오울프 자신도 다른 게르만족 영웅이나 〈일리아스〉의 영웅들보다 더 이타적(利他的)으로 보인다. 그가 치른 3번의 싸움이 동료 인간과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불러일으키는 싸움이 아니라 전인류와 문명 자체의 적인 사악한 괴물을 상대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시가 그리스도교적 우화이며, 베오울프는 악과 어둠에 맞서 싸우는 선과 빛의 투사라고 보았다. 그의 희생적인 죽음은 비극이라기보다 선한 영웅에게 걸맞는 최후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오울프〉가 낙관적인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영국의 비평가 J. R. R. 톨킨은 이 시가 주는 전체적인 인상이 서사시라기보다는 서정적인 애가(哀歌)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덴마크를 무대로 한 비교적 행복한 앞부분조차도 당대의 청중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었을 불길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렌델이 죽은 뒤 흐로트가르 왕은 앞날에 대해 낙관적으로 말하지만, 독자는 앞으로 그의 가문이 멸망하고 헤오로트가 불타버리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후반부에서 사건 전개는 느리고 음울하며, 베오울프가 젊었을 때의 장면들이 그의 마지막 전투와 대비되어 침울하게 다시 그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운명(wyrd)이 그에게도 다가오자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 엠파스 백과사전 中
위에 백과사전의 내용을 읽어보면 원전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대충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와서 새롭게 재해석한 장편소설 『베오울프』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체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구성들이 곳곳에 엿보이는 작품이다. 닐 게이먼과 케이틀린 R. 키어넌이 멋지게 고전을 비틀었기 때문에 또 다른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선 관계가 복잡해졌다. 원전에서는 단순히 악과 맞서는 영웅의 대립 구도였지만, 소설에서는 달라졌다. 선악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넘어선 것이다. 이 점이 이 소설을 더욱 풍부한 해석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또한 고전 『베오울프』는 그리스도교적 우화로 해석된다면,(톨킨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닐 게이먼의 『베오울프』는 기독교와 고대 종교의 대립으로 그렸다. 1부에서는 기독교가 막 태동하는 암시를 주었고 2부에서는 이미 기독교가 많이 전파된 상황을 그린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고대 종교의 신봉자였던 베오울프의 고뇌를 그리면서 기독교를 믿는 왕비와의 대립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몇 가지 변화로 인해 갈등 관계가 늘어나고 이야기 거리가 풍성해졌다. 그리고 영우 베오울프의 면모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서사시에서 소설로 변하면서 인간 베오울프를 그린다는 점 역시 주목할 점이다.
베오울프는 뒤돌아서서 모피옷을 여미며 하늘과 맞닿아 있는 광대한 회녹색 바다를 바라보았다. 혹한의 바람이 피부 구석구석을 물어뜯었지만 도리어 청결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해변에서의 일들과 자신의 언행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이 행했던 잔인한 일들 때문인지 그는 청결해지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오딘과 그의 형제들을 떠나, 살해된 로마인의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 없는 아버지를 섬기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들이 택한 선택과 결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자유롭고 순결하고 깨끗해질 수 있다는 약속에 끌렸겠지.’ ― 『베오울프』, 닐 게이먼 · 케이틀린 R. 키어넌, 아고라, 256-267쪽
소설의 재미는 이뿐만이 아니다.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문장력은 뛰어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야기 자체가 어둡고 지루하고 예상되는 것들이어서 사실 전체적인 흡인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문장들이 워낙 세련되고 깨끗하게 적혀 있어서 계속 읽게 되는 것이다. 정말 화려한 표현들, 뛰어난 입담, 예리한 묘사, 재치 있는 대사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글을 읽는 재미 때문에라도 책을 끝까지 읽게 된다. 한 마디로 텍스트를 읽는 재미가 살아있다.
마지막으로, 보기 전에 읽어라!
번역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어서 읽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오탈자나 이상한 점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터넷에서 다른 분들도 지적한 사항인데 주석이 책 뒤편에 있지 않고 각주로 달렸다면 더 보기 편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책 마지막 페이지에 용어 해설로 모아져 있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일일이 뒤페이지를 펼치면서 찾아 읽기는 너무 불편하다. 대부분 북유럽 신화를 모르는 상황에서 책을 자연스럽게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괄호로 처리하거나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보기 좋았을 것이다. 이 점은 약간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출판사가 이번 영화 때문에 이 소설을 번역한 것이라 한정적으로 끝난다면 모르겠지만, 혹시 앞으로도 장르 소설들을 번역해 나갈 것이라면 다른 출판사처럼 브랜드를 하나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반지의 제왕』을 재미있게 읽은 톨킨의 팬이라면 톨킨에게 큰 영향을 미친 원전 『베오울프』가 닐 게이먼과 케이틀린 R.키어넌에 의해서 어떻게 현대적 판타지로 변신했는지 한 번 감상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 외에도 외국 판타지를 읽기 즐겨하는 독자라면 필히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번에 영화로만 접한 독자가 있다면 같이 나온 소설을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평을 보니, 영화를 보고 실망해서 소설을 찾은 사람도 보이는 만큼, 좀더 다양한 내용과 묘사, 내면을 그린 것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상적인 묘사들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덮고 있던 모피를 걷어내며 그는 또 한 번 울부짖었다. 어머니가 거기 있다면 그 짐승 같은 절규 속에 얼버무려지고 헝클어진 말들을 알아들을 것이다. 어머니는 슬픔과 절망의 소리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똑같은 정도로 안도하는 아들의 마음속 소리도 들을 것이다. 그가 곧 시끄러운 바보들의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쥐어짜고 산산조각 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의 입속에서 달콤한 맛을 낼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일을 마치고 나면 밤은 다시 조용해질 것이고 오래된 숲과 늪지대, 해안에서 들려오는 편안한 소리들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에, 동굴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는 물소리와 어머니의 못 속에 사는 하얀 뱀장어들이 첨벙거리는 소리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에 안도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베오울프』, 닐 게이먼 · 케이틀린 R. 키어넌, 아고라, 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