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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달콤한 나의 도시
어려운 한국 문학 시장에서 『달콤한 나의 도시』는 상당한 판매량을 보이며 선전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알라딘에서 주최한 ‘힘내라! 한국문학’ 이벤트를 통해 이 책을 받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은 전체적인 느낌은 딱 상상한 대로였다. 오은수라는 서울에 사는 삼십대 미혼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 명의 친구들이 등장하고 연애, 결혼, 직업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이다. 이야기를 덜 풀어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더 깊게 들어가지도 않았다. 딱 작가가 할 수 있는 부분만 그려냈다고 할까? 그래서 아쉬운 면도 많았지만,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두고 누구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라고도 한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대중문학으로 보였다. 정연한 문체로 쓰인 대중문학이랄까. 신문연재를 묶은 소설이라 그런지 사건 전개가 빠르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녹아 있다. 그 대신 그 에피소드마다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
삼십대 여성들 중에는 공감을 하는 대목도 있을 테고, 허황되거나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부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서평들을 살펴보니 평가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렸다. 나는 일단 남자고 나이도 이십대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공감 가는 부분을 찾기 보다는 그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읽었다.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평하고 있다. 내 생각엔 드라마보단 영화로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
인생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관계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사랑에 몸을 던지나 보다. 순간의 충만함, 꽉 찬 것 같은 시간을 위하여. 그러나 사랑의 끝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소모하지 않는 삶을 위해 사랑을 택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나 사랑이 깨지고 나면 삶이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탕진되었음을 말이다. 이번 사랑에서는, 부디 나에게 그런 허망한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정이현, 139-140쪽
속도감 있는 문체와 의미심장한 문장들 요즘 독자들 입맛에 맞는 소설이다. 한 번 잡으면 쉽게 끝까지 읽어 내릴 수 있는 책이다. 어떤 글을 써야 독자들이 좋아할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작가라고 할까? 작가의 첫 단편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여자가 주인공인 단편이 많았고 또 결혼이라는 소재를 다룬 단편도 있었다. 그때 읽었던 결혼의 모습은 참으로 현실적이어서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래, 결혼이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만만치 않은 행사지, 라고. 이 『달콤한 나의 도시』는 그것의 확대 버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캐릭터들을 통해 다양한 유형들을 전해준다. 연하남, 친구, 그리고 번듯한 남편감 등의 다양한 남자들도 등장한다. 친구들도 유형별이다. 결혼에 실패한 친구, 늦게나마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좇는 친구 등등. 이런 유형을 전부 늘어놓다보니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면도 있지만 감칠맛 나는 문장들과 빠른 전개로 인해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김영수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연재 때 시간이 촉박해서 그렇게 된 건지 태만해서 그렇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좀 더 정교하게 구성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작품의 중심적 메시지도 김영수와 오은수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더욱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특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정이현, 53쪽
이게 정이현 작가의 첫 장편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충분히 재미있게 읽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다음에 나올 정이현의 두 번째 장편이 기대된다. 첫 장편하고는 느낌이 확실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정이현, 440쪽
아직 이십대인 나에게 삼십대를 상상하기란 힘들다. 막연하게 직업을 가지고 있고 가정을 이루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다. 이 책에서도, 또 김연수의 산문집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이십대 때는 삼십대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때까지 살아있으리란 것도 믿지 못한다고 말이다. 과연, 삼십대의 나에겐 이 도시는 달콤한 나의 도시로 있을 수 있을까.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이루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어제와 오늘이 별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 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 나가겠다. ―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정이현,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