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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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팔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처음 이기호라는 작가를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소설이 이토록 다양한 형식을 소화해낼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랩 형식으로 쓴 「버니」, 성경의 형식을 패러디한 「최순덕 성령 충만기」등. 첫 작품집으로 ‘이기호’란 작가는 내게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기호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이 나왔다.

  첫 작품집에서 받았던 강렬한 느낌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금세 집어 들지는 않았다. 뭐랄까, 왠지 제목이 책을 집는 것을 더 미뤄두게 만드는 것이었다. 끌리지 않았다고 할까? 그러다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전작보다는 별로라고 느꼈다. 파격적인 실험 요소가 줄었기 때문일까,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한 느낌이었다. 일단, 첫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쁜 소설 -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는 신선했다. 독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이기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웠다. 그러나 이야기가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거는 형식을 넘어 최면술에 빠트리는 듯한 이야기 방식은 물론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줄거리는 빈약해 보였다. 마지막 끝맺음은 교묘하게 깔끔해서 좋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이디어에 비해 이야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예전에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05』에서 읽었던 단편이다. 당시에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흙을 먹는다는 설정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환상적인 설정과 주제의식이 잘 결합된 작품이라는 느낌이었다. 「원주통신」은 박경리 작가와 같은 원주에 살았던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소설적 재미는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잠든 밤에」는 꽤 몰입하면서 읽었던 단편이었다. 작가의 첫 작품집에서 매번 등장했던 시봉이 등장한 터라 반가웠고, 자동차에 치이려고 하는 자해공갈단인 두 사람의 모습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묘한 애정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비를 맞으면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오로지 여고생이 모는 차에 치이려고 필사적인 그들의 모습은 애틋하기까지 했다. 과연 부딪힐 수 있을 것인가, 또 어떻게 좌절할 것인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이 소설집의 제목처럼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라는 느낌의 단편이었달까. 꽤 마음에 드는 단편이었다. 그 다음은 「국기게양대 로망스 - 당신이 잠든 밤에 2」이다. 역시 시봉이 등장하는 단편이었다.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와 다른 두 사람의 남자. 어떤 분의 리뷰에서 보니 연극으로 올리면 좋은 글이라는 것을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딱 그렇다. 무대는 한정되어 있고 세 사람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그만큼 소설 본연의 재미는 떨어지지 않나 싶지만, 이미지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세 남자가 어슴프레한 새벽에 국기게양대에 각각 매달려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한 번 상상되고 나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니까.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수인(囚人)」은 역시 환상적인 배경 설정을 가지고 들어가는 작품이다.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인해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흩어진 상황. 주인공은 소설을 쓰느라 그 사실을 모르고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입국 심사를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소설가라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 시멘트로 덮인 교보문고를 곡괭이로 매일 파면서 자신의 책을 찾고자 한다. 이기호 작가의 작가론이랄까, 소설론을 들을 수 있는 단편이었다. 상황 설정도 재미있었고 내용 진행도 잘 읽혔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기도 한 작품이었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배운 주인공이 소설가가 되어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드린다. 할머니에게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긴 듯한 형식 때문에 정겹고 따스한 정서가 흐르는 글이면서 한 편으로는 귀신이 있는 것 같은 무서운 느낌도 들게 하는 글이었다. 잘 읽었지만 제목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소설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마지막 작품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였다. 폭력의 역사랄까. 집단 구타를 당한 십대 소년의 이야기다. 경찰에서 조서를 꾸미다가 글쓰기 교정을 배우는 장면도 재미있다. 작가가 자전적인 소설을 써보자고 결심하고 쓴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암울한 이야기들이라 그런지 큰 감흥은 없었다. 인상에 잘 안 남는 단편이었다고 할까? 이 단편이 이 소설집의 표제인 것처럼 이 단편이 이 소설집의 아쉬움을 대변하는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 가령, 「원주통신」도 작가가 살았던 원주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고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도 할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다. 이렇듯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쓴 부분이 많은데 그것이 전작에서 ‘시봉’의 이야기만 늘어놓던 것과 차별화된 것이리라. 아무래도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고 읽히면서 재미가 반감된 게 아닌가 싶었다. 소설에 잘 몰입되지도 않고 말이다. 그리고 소설가 소설인 단편도 많았는데 이 점 역시 재미를 떨어트린 요소가 아닐까. 「수인」의 설정은 재미있었지만, 소설가 소설로써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다른 글쓰기와 관련된 단편들도 마찬가지로 재미가 부족했다. 통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이렇듯 전작에 비해 나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만 읽지는 못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기호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반드시 찾아 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마 보다 빠르게 읽고 싶어질 것이다.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이번에는 미안하지만 자기 얘기를 했다고, 다음부터는 그렇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장편 연재를 시작했다고 들었으니, 장편이 먼저 나올까? 이기호의 장편이라, 기대감 100%다.

  마지막으로 이기호의 인터뷰 글 중 한 부분을 발췌하겠다.

  이기호는 발음이 어려운 외국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 앞에서는 그의 주인공 ‘시봉’처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귄터 그라스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반복해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는 메타 픽션(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장편소설에 대한 은밀한 결의를 밝히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갈팡질팡하다가 세련되어질 줄 알았다. - 주간한국 :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2> 소설가 이기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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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 서재에서 이 책에 대해 극찬하는 리뷰를 본 적 있기에 살까 하다가 님의 리뷰를 읽게 되었어요.
책읽기는 개인적이라는 느낌을 실감합니다.
좋은 정보가 되었어요.

twinpix 2007-09-16 20:55   좋아요 0 | URL
기대가 커서 실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만큼 첫작품은 저도 극찬을 했거든요. 평을 따로 쓰진 않았지만요. 하지만 이기호 작가는 아무튼 참 좋아해요. 그가 가진 독특한 상상력이나 입담, 재치 등이 말이죠. 그래서 다음 작품도 무조건 기대가 되고요.^^ 부족한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