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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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김애란
그 날, 마분지에 둘둘 말은 칼을 품고 산동네를 오르던 어머니의 가슴은, 흡사 연애편지를 안고 달리는 처녀처럼 마구 두근거렸더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손안에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
― 김애란,「칼자국」, 세계의 문학 124호, 109면
김애란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때론 형광 바지를 입고 달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TV 속 심해어의 모습으로 비쳐 보이는 아버지라는 키워드다. 김애란은 「달려라, 아비」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 외에도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 실린 단편들 중에 아버지가 등장하는 소설은 꽤 많다.(「달려라, 아비」, 「스카이 콩콩」,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사랑의 인사」,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등등 '아버지'라는 키워드는 각각의 소설에서 중요하게 등장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문학에서 아버지라는 소재는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고, 최근 문예중앙 여름호에서도 특집을 아비들의 변천사로 다뤘다. 여기서 손정수는 「오이디푸스 극장」이라는 글에서 한국 소설의 계보도를 그려주고 있는데, "'달려라, 아비'라는 낯선 명령형의 명제가 2000년대의 새로운 오이디푸스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page 42)고 말한다.
이렇듯 김애란은 2000년대 소설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으로, 또 이전 세대와 다른 새로운 세대의 오이디푸스 구조를 상징하는 작가이다. 그런 김애란이 이번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한 소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 김애란,「칼자국」, 세계의 문학 124호, 103면
김애란이 말하는 어머니는 어떤 모습일까? 호기심이 들었다. 읽어나가자 역시 김애란의 글이라 술술 읽혔다. 소설의 첫 도입부부터 화자는 어머니에 대해서 담담하게 서술해나간다. 어머니와 어머니가 가진 칼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몸 속에 무수히 새겨진 칼자국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회고조의 이야기는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지만 곳곳에 보이는 유머랄까, 정다움이랄까, 그런 것들 때문에 웃음을 머금고 읽을 수 있었다.
"엄마 된장찌개 어떻게 끓이는 거야?"
어머니는 진지하게 답해줬다.
"응 된장 넣고 그냥 끓이면 돼."
"……."
나는 '그렇게 중요한 정보 알려 줘서 진짜 고맙다'는 식으로 건방지게 대꾸했다.
"김치찌개는 김치 넣고 끓이고, 미역국은 미역 넣고 끓이고?"
어머니는 깔깔대며 그제야 상세한 조리법을 알려 줬다. 나는 물어본 걸 또 물어보고 응석을 부렸다. 어머니는 내게 질문받는 걸 좋아했다. 나는 마늘을 다지고, 두부를 자르고, 김치를 썰며 이따금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마트에서 사 준 칼을 쥐고서였다.
― 김애란,「칼자국」, 세계의 문학 124호, 120면
어쩌면 이야기로 따지면 이 「칼자국」은 별 이야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평범한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김애란이 그린 어머니의 모습은 생생했고, 정겨우며 아름다웠다. 깔끔하게 쓰여진 글, 따뜻한 이야기. 분량이 짧다거나 긴 느낌이 없었다. 그저 읽으면서 페이지가 줄어든다는 느낌이 왠지 아쉬웠다.
갑자기 이 마이페이퍼에 이 단편 이야기를 쓴 것은, 김애란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그렸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워낙 재미있게 읽고 감동 받아서, 쓰고 싶었을 뿐이다. 김애란은 이미 많은 평가를 받고 있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다. 그리고 난 이 글을 읽고 확신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더 발전했다고. 『달려라, 아비』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단편은 그 곳에 실렸던 단편들보다 내 마음을 더 움직였다고.
"아, 재밌다."
김애란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주위의 평에 눌리지 않고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왠지 점점 즐거워진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