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스틱스 -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 카이로스총서 44
데보라 코웬 지음, 권범철 옮김 / 갈무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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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책답게 -_- 번역은 목에 탁탁 걸린다. 내용은 중언부언 반복이 많고, 밀도가 낮다. 사례로 든 것도 너무 적고, 한마디로 세포 없이 뼈대만 있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은 건 저자의 문제의식, 그리고 ‘로지스틱스’를 가운데에 놓고 본 세계 경제질서라는 프레임이 눈에 띄어서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띄어서’라기보다는, 이렇게 한번 봐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웃소싱, 오프쇼어링, 외주화, 글로벌화 등등 지난 수십년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두 이 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틀로 바라보면 많은 걸 포괄하면서 또한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면 “운동화는 여전히 스마트폭탄보다 온라인 주문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산업은 경영학과 전쟁술의 구별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전쟁과 무역은 공급 사슬에 의해 조직되고, 그것의 형태를 취한다.”(12쪽)


전쟁의 민영화, 경제의 글로벌화.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의 결합일 수도 있고, 혹은 같은 것의 두 얼굴일 수도 있다. 이제 ‘보급(로지스틱스)’은 그 자체로 전쟁이 되었고, 생산과 유통은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졌다. 공장은 생산하고 상인들은 유통하고 소비자는 돈 주고 사서 쓰는 게 아니다. 방글라데시에 물건을 만들고 홍콩의 지사에서 유통망을 관리하며 미국 시장의 상점에 내놓는 식의 총체적인 흐름이 이제는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사슬의 고리들을 세계의 어디에 얼마만큼 배분하느냐가 곧 경제가 된 시대다.


유류가 전쟁의 본성을 개조하기 시작했던 것은 1차 세계대전이지만 그럼에도 가축은 여전히 결정적인 영향을 수행했고 사료는 막대한 로지스틱스상의 문제로 남았다. 1차 대전 동안 영국에서 프랑스로 수송된 물자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 것은 탄약이 아니라 말에게 먹일 귀리와 건초였다. 2차 대전에서는 산업전의 로지스틱스가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다. 처칠은 연합 작전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결국 휘발유가 모든 이동을 지배했다.” 이 모든 것에서 결정적인 것은 변화하는 폭력의 기술이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재조직했던 방식이다. 군사 로지스틱스는 산업전의 부상과 더불어 전략과 전술을 이끌게 되었고, 점점 본질을 구현하는 방법이 되었다. (53-54쪽) 


로지스틱스에 대한 기업의 관심은 2차 대전 동안 시작되었다. 2차 대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의 전장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된 사회적·산업적 기술이 결정적이었다. 처음에는 점령지 일본에서의 노동자 훈련을 통해서, 이후에는 한국전쟁 물자 도급을 통해 이 기법을 확산함으로써 미군의 또 다른 혁신인 표준 수송 컨테이너는 무역 지구화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적 혁신이 됐다. 로지스틱스의 금전적·전략적 가치에 대한 기업가의 관심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사이에 급격하게 늘었다. 1965년 4월 6일 피터 드러커는 “물적 유통은 ‘전체 비즈니스 과정’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라고 단언했다. 드러커는 새로 꾸려진 물적유통관리전국협회 강연에서 유통은 “오늘날 비즈니스의 최전선”이라고 주장했다. (55-56쪽)


전후 로지스틱스를 경영 관리의 중심으로 만든 다른 현실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컴퓨터가 핵심이었다. 1950년대의 이윤 감소는 1958년의 경기 후퇴로 이어졌고 미국 대기업이 운영비용 절감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로지스틱스가 문제 해결책으로 간주됐다. (59쪽)


전쟁의 기술이 경제에, 경제의 흐름이 전쟁에 물려들어간다. 민영화된 전쟁의 맨 얼굴을 보여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미 국방부와 미군과 용병들은 ‘로지스틱스’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더 중요한 건 글로벌 경제가 전쟁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경제의 글로벌화 자체가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힘을 빌린 자본 혹은 자본을 위해 일하는 국가에게, 이 ‘흐름’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은 ‘공공의 적’이다. 항만 노동자들의 시위, 파이프라인을 끊는 원주민들의 사보타주, 노조의 파업, 극단세력의 공격과 지역 분쟁, 심지어 종교 갈등과 소말리아 해적까지도. 


미국에서는 1980년 ‘스태거스 철도법’이 제정돼 “극적인 고용 감소와 점진적인 임금 하락 그리고 노조의 협상력 위축”을 낳았다. 철도 부문의 규제가 남아 있었음에도 그랬다. 트럭운송산업은 1978년부터 1996년까지 탈규제 시기 동안 노조 가입률이 46%에서 23%로 떨어졌다. 1980년의 자동차운송법은 차량 소유주가 아닌 운전기사들에 위험을 전가하게끔 조장했고 노조 없는 ‘개인 트럭사업자’가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배들은 편의치적 즉 규제 없는 남의 나라에 선적을 두는 방식으로 규제에서 벗어났다. 해운의 국제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이미 1950년대부터 배 주인들은 전투적인 선원노조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미국 해운 노동자들은 수세에 빠졌다. 물류 노동자들이 무너지는 사이에 미국과 글로벌 자본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장벽들을 무너뜨렸다. 신자유주의는 로지스틱스 시스템을 위한 이데올로기도 했던 것이다. 


흐름을 막는 국가 단위의 조치들은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제거됐다. 위험 요소들을 관리하고 차단하기 위한 모든 조치들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공급 사슬의 관리’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안보다. 지구를 잇는 흐름은 한번 끊기면 파장이 너무 크다. ‘적시 Just-in-time 운송 체계’는 공장 하나의 파업조차, 항만 노동자들의 며칠짜리 방해공작조차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위험한 것들을 걸러내고 ‘예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라면 예방적 공격 혹은 선제 타격 같은 이름이 붙을 것이며, 통상적인 보안관리라면 검문검색과 격리와 노조파괴가 되는 것이다. 가끔씩 이 두 가지는 합쳐져서, 군사작전 수준의 보안관리와 로지스틱스의 탈을 쓴 군사작전(예를 들면 소말리아 해적 퇴치작전)이 되곤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저자는 공급 사슬 보안 SCS이라 부른다. 


공급 사슬 보안의 핵심은 상품 흐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통·통신 인프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무역흐름을 교란할 잠재력이 있는 사건과 세력을 통치하고자 하는 국가적, 초국가적 프로그램들을 통해 형성된다. 공급 사슬 보안은 화산 폭발이나 테러 공격처럼 예측 불가능한 위협으로부터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선제 기법을 동원하며, 교란 이후의 순환을 회복시킬 대비 조치를 동원한다. 공급 사슬 보안은 교란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위험물을 식별하고 이들을 순환 시스템에서 떼어 놓는 위험 관리에 의지한다. (123쪽)


글로벌 공급 사슬의 관리는 그 이전 시대의 ‘글로벌 분업체계’와는 의미도 맥락도 다르다. 한국은 섬유제품을 생산하고 미국은 사가는 식의 분업이 아니다. 이 공급 사슬은 자원과 노동력과 인프라와 세금 등의 여러 요소를 놓고 움직이며, 진화한다. 동시에 이 사슬은 세계의 지도를 바꾼다. 로지스틱스가 창출하는 새로운 세계지도 mapping는 공급 사슬의 교란을 막는 것을 우선 과제로 한다. 해적을 막을 유럽의 군대를 배치하고 이라크에 미군 토마호크 미사일을 퍼붓고 남중국해에서 미군 항모가 중국 함정과 대치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 단위의 지정학인 동시에 ‘물류’ 그 자체다. 


9·11의 직접적인 여파로 미국 관리들은 항구에 대한 새로운 보안 계획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 공간뿐 아니라 전지구적 보안을 개조할 것이었다. 미 당국이 규정하고 관리하는 컨테이너보안협정 CSI은 미국행 화물을 검사하기 위해 수십 개의 외국항에 관세국경보호청 직원들을 파견한다. 더불어 세관원들은 ‘테러리스트나 테러 무기가 미국으로 오기 전에 고위험 화물 컨테이너를 식별하고 미리 걸러낸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관세청이 고위험 컨테이너가 입국 항구에 있는 동안 표적으로 삼고 검사한다. (131쪽)


방글라데시에서 1500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2010년 10월 치타공 항만국의 컨테이너와 화물운영 민영화에 저항하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을 때 정부는 군대를 동원했다. 정확히 1년 뒤 미국은 워싱턴 주의 노동분쟁에 개입했다. 곡물 기업 EGT는 롱뷰항에 새 가공시설을 만든 뒤 국제항운노조가 아닌 노동자와 불법으로 계약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EGT의 배를 경호하기 위한 연안경비대 동원을 승인했다. 로지스틱스에 관련된 노동 행위를 국가안보 문제로 취급하는 일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177쪽)


소말리아 해적은 로지스틱스의 세계에서 삐져나온 송곳이고, 뚫린 구멍이다. ‘공해 상’ 혹은 ‘통제 밖’의 해적들이 물류를 끊는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안보리 결의와 ‘지부티 강령’ 등의 이름으로 군사행동에 나서 해적 퇴치작전을 벌이고 있다. “소말리아에서 영국은 1960년에 포스트식민적 영토분할을 했다. 1990년대 초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 지상전과 유엔이 개입된 폭력이 소말리아에서 일어났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해적 행위가 늘어난 주된 요인이 된 사건은 불법 남획과 유독성 폐기물의 불법 투기였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소말리아 어업을 완전히 파괴해버렸고 해안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중요한 생게 원천을 제거해버렸다. 유독성 핵폐기물이 그 바다에 불법 투기되고 있다. 소말리아 해역은 유럽 산업폐기물의 무료 쓰레기 하치장이 됐다. 유럽 기업이 아프리카의 뿔에 우라늄을 버리는 데에는 톤당 2.5달러가 든다. 유럽에서 처리하는 비용의 100분의 1이다.”(219-220쪽) 


이런 사실은 가려지고, 해적은 세계의 공적이자 안보 위협이 된다. 선박에 무장 경비원을 태우거나 무장 호위선이 따라붙게 함으로써 수에즈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안보 민영화’의 실험장이 된다. 붙잡힌 해적들은 지구상 어느 나라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카리브 해적’의 낭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지구의 사생아들이다. 


“해적 사건을 기소할 시스템은 개발되지 않았다. 어떤 국가들은 미심쩍은 해적들을 풀어주지만 어떤 국가들은 그들을 구금하고 국내 법정에 세운다. 또 다른 국가들은 마주친 장소에서 그냥 살해한다는 소문도 있다. 점점 흔해지는 것은 소말리아에 이웃한 가난한 국가들이 돈벌이를 위한 감금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연합은 모두 케냐와 협정을 맺어 해적을 기소하게 했다. 2006년과 2011년 사이 20개 국가가 1063명의 소말리아 해적을 기소했다. 그중 5개 국가는 유엔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해적을 기소하고 있었다.”(238쪽)


이 지구에서 사람들은? 노동자는 탄압받을 수도 있고,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인 소비자는 편할 수도 있다. 소비자의 다른 얼굴인 시민은 감시를 받을 수 있고, 세계화라는 이름의 물류가 저지르는 폭력에 맞서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이미지와 달리 이제 지구상 수많은 노동자들은 총체적인 의미에서 ‘물류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노동자들 자체가 물류의 대상이다. 생산은 어느 지역 어느 한 공장에서 수십년간 이뤄지는 게 아니며,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 지역에 수십년 간 머무는 이들이 아니다. 생산과 수송은 모두 섞여 지구를 가로지른다. 


로지스틱스 혁명 와중에 지구적으로 심화된 경향성들은 모두 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저자는 그 세 가지로 1)우발성의 증가(임시직과 계약직 등 불안정한 노동형태가 늘어난다), 2)노조의 약화 3)인종화를 든다(151쪽). 경제적으로 취약한 (인종)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은 그 취약성 때문에 글로벌 물류 속에서 약한 곳에 자리하게 되고, 그래서 더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항구 트럭 운전사들의 30~50퍼센트는 불법 이민자들이며, 그들에게는 ‘인증증명서’가 있을 뿐 노동 보호는 없다. 책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프리카의 트럭 운전사들 상당수는 마사이족등 취약한 유목민이고, 어디에서나 국경을 오가는 트럭 운전사들은 불법 이주와 합법 노동의 경계 사이를 넘나든다. 두바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파업과 노조는 불법이며, 이들의 ‘임시노동허가’는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 


두바이 물류그룹이 미국 항만을 인수할 거라 해서 조지 W 부시 때 의회가 난리를 치며 막아섰지만 아랍에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덧씌운 ‘이미지 안보 장사’가 낳은 헤프닝이었을 뿐이다. 두바이 물류그룹이 아니라 두바이라는 물류 모델 자체가 로지스틱스의 중심을 지향하는 세계의 거대도시들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 회사가 이라크 남부에 만든다는 ‘바스라 로지스틱스 도시’, 필리핀의 ‘국제관문 로지스틱스 도시’ 등의 프로젝트들을 저자는 사례로 들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은 업체 보도자료를 너무 확대해석한 것같은 느낌.)


저자가 중요하게 본 포인트 중 또 하나는 로지스틱스의 지도 속에선 인간의 '몸’에도 이전과 다른 정치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행위가 일어난 뒤에 대처하면 늦다. 예방적 안전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소비자/시민의 몸을 장악하는 것이다. 테러용의자나 파괴분자 혹은 과격파를 미리 구분해 격리하고 차단하기 위해. 자연의 순환도, 노동력과 물자의 이동도, 우리의 몸 자체도 이 지도 위에 표기돼야 할 생산과 공급의 관리 요소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몸은 자원이자 비용이다. 가져다 쓰고 다른 곳에 버리는 노동력들에게, 이제는 20세기에 필요했던 훈육(트레이닝)조차 필요가 없다. “공급 사슬 관리자들이 자동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많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자원이다. 관리자는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171쪽) 노동자들은 그저 코드로, 데이터로 존재할 뿐이다. 


헤쳐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공동체와 내 몸을 저항하는 것밖에.


“2011년 항만 용접공이자 활동가인 김진숙은 한국 부산항의 갠트리 크레인을 점거했다. 노동자를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려는 한진의 계획에 맞선 그녀의 점거는 땅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살쾡이 파업과 연계하여 2011년 6월에 시작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결국 계약에 대한 양보안을 받아들였지만 김진숙은 자리를 지켰다. 수천 명이 땅 위에서 그녀를 중심으로 대열을 만들었다. ‘희망버스’라고 불린 이것은 그녀에게 로지스틱스적·정치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309일이 지난 뒤 진숙의 점거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동자들은 재고용됐고 체불임금을 받았다. 한국에서 15년만에 처음 있는 노동의 승리였다.”(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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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불쾌한 진실
슐로모 산드 지음, 알이따르 옮김 / 훗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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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에서 나온 <유대인, 불쾌한 진실>을 읽었다. 저자인 슐로모 산드는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디시(동유럽 유대인) 문화 속에서 자랐다. 지금은 텔아비브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 '유대 국가 이스라엘'을 맹렬히 비판하는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유대 민족의 발명>, <이스라엘 국가의 발명>같은 책을 통해 현대 이스라엘의 형성과정을 비판하는 좌파 지식인이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미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 불쾌한 진실>은 그가 2013년 쓴 'How I Stopped Being a Jew'를 번역한 것이다. 한국어판은 '알이따르'라는 공동번역집단에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슐로모 산드


산드의 이 책은 이스라엘 문제(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조금 알고서 읽는다면 더 재미있겠지만, 굳이 몰라도 큰 상관은 없다. 저자는 '유대인들'과 그들이 겪은 홀로코스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유일무이한 재난'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는지,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현대 국가의 점령통치와 자국내 아랍계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됐는지를 짚는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며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자기네 문화가 왜곡되고 심지어 남을 겨냥한 무기가 되어가는 걸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털어놓은 에세이다. 


어조는 담담하고 서술은 느슨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번득이는 문제의식은 치열하고 감정은 격렬하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에서 그가 말을 거는 독자들은 유대인 혹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다. 


나는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화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유대인성의 정의 방식에 때로 뭔가 불편함을 느껴 왔다. 어떤 면에서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자라는 인상이 점점 강해졌다. 시오니스트 제창자들은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를 동일시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고 외쳐대고 있다. (중략)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 대학살로 막을 내렸던 끔찍한 유대 혐오의 위협은 오늘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세속화된 그들의 후손에서 갑자기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다. 오늘날 그 어떤 정치인도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할 수 없다. 아마도 중부 유럽이나 새로 형성된 이슬람 민족주의의 범위 안에 있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21쪽)


오늘날 남아 있는 극소수의 반유대주의와 강력한 주류였던 과거의 유대 혐오를 동일시하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기독교적 현대 문명에서 표출되었던 유대 혐오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신비로운 특성이 있는 ‘혈족’으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인식은 여전히 팽배해 있다. (22쪽)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못된 짓을 할 때는 많다. 아이들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식의 '학살'도 포함해서.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박사모가 태극기와 이스라엘 깃발을 함께 들고 설쳐대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에서조차,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믿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기독교도들이 상당수인 것으로 보이는 한국에서조차 가자(팔레스타인) 침공이 일어나면 반이스라엘 시이가 벌어지는 마당에.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의 악행에 맞서 보이콧 운동이 벌어진지 오래됐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이 꺼내드는 카드는 '반유대주의'다. 서구인들의 죄의식을 공략하는 이 프레임은 이젠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가는 카드이기도 하다. 



슐로모 산드의 책은 과거의 희생을 오늘날 자기네가 저지르는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반유대주의'를 만병통치약처럼 들먹이면서 스스로를 옹호하지 말라고.


오늘날의 ‘포스트 쇼아 고임post-Shoah goyim(홀로코스트 이후의 비유대인)’에게서 우리는 한데 섞인 공포와 죄의식, 그리고 무지를 발견하며, 때로는 ‘신유대인들’의 희생자 노릇, 자아도취, 허세, 게다가 터무니없기까지 한 무지를 마주하곤 한다. 종족, 즉 불변의 혈족-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정체성과, 먼 땅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 또 거의 50년간의 점령 정권에 복속되어 권리를 박탈당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비유대인 시민들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정책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다. (23쪽)



책의 상당부분은 '유대인 되기-유대인 만들기'를 비판하는 데에 할애돼 있다. 그가 보기에 유대교는 배타적이다. 유대교 교리에는 배타적인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사실 유일신앙은 그 자체로 배타적이고, 같은 아브라함 종교들인 기독교나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다만 기독교는 근대 이후에 그런 배타성을 많이 덜어냈고, 이슬람은 근대 이전 제국시절에 오히려 관용적이다가 20세기 후반 이후 오히려 폐쇄성이 커졌다. 유대교가 남들 보기에 배타적으로 보이는 것도, '애당초 배타적인 교리여서'가 아니가 기독교-이슬람에 둘러싸여 자기네들 종교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측면이 많다고 산드는 지적한다. 문제는 유대교에 대한 배타적인 해석이, 지금 현재 팔레스타인을 몰아붙이고 억압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1세기 후반과 2세기 초반, 이교도에 대항하여 일어난 세 번의 항쟁이 패배한 후 유다 왕국은 랍비 유대교와 바울 기독교라는 두 개의 주요 흐름으로 쪼개졌다. 이후, 이들의 격차는 점점 커져만 갔다. 덜 강력한 랍비 유대교는 미쉬나와 탈무드를 세상에 가져왔다. 상대적으로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바울의 기독교는 신약을 낳았다. 기독교는 쉽게 숭리했고 패배한 경쟁자를 길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상황에 놓이게 했다. 

구약 일부가 증명하듯이 유대교의 교리는 그 기원부터 배타적인 원칙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통념과는 달리 자기 폐쇄성이 교리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종교의 분파적 기반이 재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기독교와 이후 이슬람이 보낸 위협 때문이었다. 유대교의 자급자족적인 자기 폐쇄성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영구적인 위협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63쪽)


하가다로 알려진 이 모음집은 오랫동안 유대 문화생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첫 판본이 만들어진 때는 9세기로 알려져 있지만 유대의 하느님을 믿지 않고 감히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모든 민족을 전멸시켜 달라는 노골적인 요구가 정확히 언제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약하고 박해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행동과 말을 합리화할 필요 없이 복수를 부르짖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파리나 런던, 뉴욕의 그 ‘세속적 유대’ 지식인들이 열정과 자기만족을 가지고 하가다를 읽으면서도 고임(비유대인)에 대한 그 분노의 구절을 지우지 않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곤란한 질문들은 더 많다. 이 불행한 문장이 중동의 하늘을 지배하는 이스라엘 조종사들이나 점령된 서안 지구의 무력한 아랍 마을들을 순찰하는 무장 군인들에 의해 읽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131쪽)


유대인의 발명, 이스라엘의 발명에 대한 부분은 대단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어서 그냥 쓱쓱 넘겼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이디시'와 '히브리'라는 유대인들의 두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다. 동유럽 이디시 유대인들의 전통주의적이고 의식(儀式)적인 문화에 정교가 미친 영향은 처음 들은 것이라 눈길이 간다. 더불어,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19세기 이후 왜 유대계 중에 두드러진 사회주의자나 혁명가가 많았는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한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해석은 매우 여러가지이겠지만.


저자는 동유럽에 면면히 이어져내려오던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가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지워지고 새로운 유대 정체성이 탄생하는 과정을 비판할뿐 아니라, 애잔한 감성을 가지고 바라본다.


1960년대까지, 시오니스트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유대교 역사가들은 인구 통계적 증가에 대한 한 가설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동부, 그리고 코카서스의 스텝 지역에 있었던 중세 유대 카자르 왕국의 존재가 아마도 현대 유대 역사에서 가장 큰 인구 통계적 증가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의 다른 유대 공동체들과 달리, 동부 유럽의 유대 인구는 비유대인 이웃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문화를 보존해 왔다. 프랑스, 이탈리아, 서부 독일,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그리고 비옥한 초숭달 지대를 아우르는 북부 지방에서 유대인들은 개종한 토착민들이건 이주자들이건 상관없이 주변 이웃들과 일상생활 방식을 공유했다.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수 세기 동안 분리된 구역이나 별개의 지역에서 다수 집단 혹은 최소한 큰 소수 집단을 형성하며 무리지어 있었다. (75쪽)


유연하고 비교적 상징적인 종교 관행을 받아들인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소규모 유대 공동체와는 달리, 동유럽의 이디시어 사용자들은 자신들을 비유대인 이웃들이나 환경과 확실히 구분시키는 엄격한 예배 방식을 고수했다. 많은 면에서 이러한 형태의 종교 근본주의는 가장 엄격한 기독교 정교회의 풍조와 닮아 있다. 

하지만 현대화와 세속화가 시작되면서, 이 완고한 명령의 세계는 유대 가족들의 세속화된 상당수 후손에게 명백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종교 전통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많은 아들딸이 무신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차르의 손아귀에서 범슬라브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억압을 조작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래서 범슬라브주의 내부와 그에 대항하는 쪽 모두에서 여러 언어와 종교로 말미암은 지역적이며 분열된 민족 요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경향을 지닌 현대의 불관용을 극대화한 것은 이디시 인구의 존재였다. 

1880년대 차르에 의한 포그롬의 시작,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제국 내 유대인 정착지의 견딜 수 없는 생활 조건은 유대 공동체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이주민들이 비엔나, 베를린, 런던, 뉴욕,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최소한 3백만 명이 터전을 잃고 길 위로 내몰렸다.

19세기 말 근대화 과정이 시작되면서 이디시인들은 형태를 갖추며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포그롬과 추방은 이들이 대면했던 첫 번째 타격이었다. 두 번째 타격은 볼셰비키 혁명에서 나타났으며, 그 혁명은 유대라는 특정 문화의 다양한 표현들을 행정적인 수단을 통해 억압하려 했다. 세 번째이며 윤리적인 타격은 나치가 일으켰으며, 이들은 유럽에 남은 유대인 중 다수를 물리적으로 절멸시켰다. 그리고 시오니스트가 이디시 언어와 문화적 관습을 쓸어버리면서 네 번째 타격이 가해졌다. (75-79쪽) 


풍부했던 이디시 문화는 이제 사라졌다. 이 동유럽 유대인의 언어를 수업으로 듣는 학생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 언어로 소통하거나 창작을 하지는 않는다. 

또 사라진 것은 현재 폴란드 지역인 러시아 제국에 있었던, 거대한 유대 사회 민주주의당인 분트의 섬세한 꿈이다. 시오니즘과 달라 분트는 생생한 민중 문화에 기반을 두었고 그래서 유사 민족적 계급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종교의 탈을 쓸 필요가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이디시어의 여러 방언으로 말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1세기 초에 이들은 겨우 수십만 명으로 줄었고, 주로 엄격한 정통파인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 God fearers’ 즉 하레딤 사이에 남아 있다. 이디시 민중 문화는 지워지고 완전히 사라져서 소생할 희망이 없었다.

이디시 식민주의자들은 멸시받는 자신들의 모어를 재빨리 버렸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첫 번째는 전 세계의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언어였다. 그래서 초기 시오니스트들은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정착지의 비참한 마을들뿐 아니라 자신들의 부모와 조상이 가졌던 민중 문화와도 결별한 신유대인들을 만들기로 했다. 

새로운 언어의 주요 어휘는 성서에서 가지고 왔다. 하지만 그 형식은 아람어와 아시리아어였으며(즉, 히브리적이라기보다는 미쉬나에서 가져온) 구문은 대부분 이디시어와 슬라브적인 언어로, 결코 성서의 언어와 비슷하지 않았다. 이 언어는 오늘날 ‘히브리어’로 잘못 불리고 있으나 진보적인 언어학자들의 주장을 따라 ‘이스라엘어’로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86-88쪽)


이스라엘 국가가 만들어진 기반을 마련한 것은 여러 동유럽 국가들에서 온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 개인들은 유대교에 맞선 세속주의자들이었지만,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의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이 땅에 대한 합법적인 소유권을 제시하는 성서에 호소했다. 그 후 시오니즘은 다양한 유대 공동체들의 과거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혼합 집단들의 밀도 있고 다양한 프레스코가 아닌 고향 땅에서 쫓겨나 떠돌아다니면서 2천 년 동안 그 땅에 돌아올 염원을 했다고 하는 어떤 한 인종의 직선적인 역사로서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오니스트 사업은 그런 모순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이 바빌론에서의 추방의 과거와 함께 완전히 무너져 버렸던 문화를 창조해내고자 했다. 한 예를 들자면, 문화적 엘리트들과 좋은 가문 출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배 시기의’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크게 퍼져 갔다. 신세대 부모들은 열광적으로 성서를 넘기면서 소위 촌스러운 모세, 야코브, 다비드, 슐로모와 같은 이름들과는 다른, 드물고 강인한 이름을 찾고자 애썼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고리타분한 탈무드 랍비의 이름들도 제외되었다. 

유대 전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나안식 이름들이나 유대인들이 입 밖에 내 본 적도 없던 이름들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다비드 그린은 다비드 벤 구리온에게 그 자리를 물려 주었고, 시몬 페르스키는 시몬 페레스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츠하크 라빈은 원래 루비트조프였고 에후드 바락은 브록이었으며, 아리엘 샤이너만은 샤론이 되었다. 그리고 베냐민 네타냐후의 아버지는 원래 밀레코프스키였고, 샤울 모파즈는 젊은 시절 샤람 모파자카르였다. (100-101쪽)


원래 색깔을 버린 동유럽계 유대인들의 '현대 이스라엘-유대인 만들기'는 내부의 위계와도 관련 있었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이 세계 여기저기서 유대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해 멋대로 지은 정착촌의 유대인들은 대개 건국 이후 한참 지나 입국한 가난한 유대인들이며, 중동에 뿌리 내리고 수천 년 살아온 미즈라히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받으며,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온 '흑인 유대인'들은 이주노동자 처지로 살아간다.


이런 히브리적 정체성은 그 국가가 창조되기도 전에 만들어졌으며, 이스라엘 안의 노동 계급을 형성했던 이주자 대중과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차별화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히브리성 Hevrewity’은 주로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엘리트들의 관행 상의 성격이었다. 

그들은 이 작업을 위한 두 가지 고삐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나는 교육 제도였고 다른 하나는 군사 기관이었다(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언론도 있었다). 모든 학교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스라엘인으로서 말할 것과 히브리어로 읽을 것을 가르쳤고, 영웅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로 성서를 가르쳤다. 역사에서 중요했던 것은 고대에는 상상 속의 히브리 주권 국가였고, 현대에는 현실의 이스라엘 주권 국가였다. 의무 교육과 함께 군 복무는 강렬한 용광로였으며,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 엘리트와 이주자 대중들은 이 위계적인 기관들을 통해서 가장 강력하게 접촉했다. (102-103쪽)


유대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건국 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 희생자들을 원치 않았고 박대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는 1970년까지도 대학살을 학교 교과 과정에 등장시키지 않았다. 전 세계 유대 기관들이 그 주제를 극도로 꺼렸으며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이 시기에는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고통에 대한 증언을 듣거나 영상으로 남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수치스러워했던 것이다. (119쪽)


1960년대 이래 서서히 절대적인 공포에 대한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냉전은 새로운 분위기를 요구했고, 독일은 막대한 양의 돈을 이스라엘에게 지불하며 생존자들에게 보상한 후 서구의 정치 문화와 NATO의 군사 기관에 무난하게 통합됐다. 이스라엘 역시 같은 기간에 대서양 동맹, 그리고 중동에서 미국의 완전하고 충실한 파트너가 되었다. 

1967년 전쟁 또한 이런 전환점이 만들어지는 데 공헌했다. 소위 이스라엘 방위군의 번개 같은 승리 덕분에, 이스라엘 엘리트를 괴롭혀 오던 ‘수치심’이 사라졌다. 이스라엘은 강자가 되었던 것이다. 어제는 약하다는 이유로 숨겨졌던 유대인 희생자들이 이제는 유대 순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학살에서 가장 돋보이는 자리를, 역사 속에서 다른 범죄의 희생자들과 결코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게 된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기억이 서구의 기억 속에 새겨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고통에 대한 특별하고도 독점적이며 전적인 민족적 소유권을 요구했다. 단지 경제적 자본뿐 아니라 명성에 관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대화하는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이 시점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희생자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 대학살은 오직 유대인만의 문제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 민족의 학살과 비교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모든 과거와 현재의 범죄들은 2차 세계 대전 중의 유대인 대학살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어야 했다. (120-121쪽)


시오니스트의 수사법은 점점 더 처형자가 아닌 희생자의, 나치가 아닌 유대인의 영원한 특수성을 고집해 오고 있다. 다시 말해, 히틀러와 같은 학살자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유대인과 같은 희생자들은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었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신히틀러’라고 불린 첫 번째 사람이었고,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그 뒤를 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게 이 역할이 돌아갔다. 

이스라엘에서는 1970년대 쇼아 ‘2세대’라는 공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3세대’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렇게 다른 자본과 마찬가지로 과거 고통에 대한 상징적인 자본도 증여될 수 있는 것이다. ‘선택된 민족’의 옛 종교적 정체성은 점차 ‘선택된 희생자’일 뿐 아니라 ‘독점적인 희생자’라는 현대의, 그리고 매우 효과적인 세속적 문화에 자리를 내주었다. (123쪽) 


가장 역설적인 것은, 그래서 이 '유일무이한 희생'을 강조하고 자기네 상징이자 상표로 동원하느라 이스라엘이 세상의 모든 차별과 학살을 폄하한다는 것. 자기네가 팔레스타인 아랍계에 가하는 차별은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우기고, 세상 어떤 다른 재앙에도 '홀로코스트'같은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인종차별 철폐회의가 열렸을 때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문제삼으려 하자 '인종문제 아니다'라고 발광하던(미국이 이스라엘 편들어줌) 기억이 난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조차 떼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물었다. “눈 때문이지."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 눈은 파란색이었는데요?" “모양이냐 색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표정을 말하는 거다." “무슨 표정이요?" “무상하면서도 슬픈 표정, 두려움과 깊은 불안의 표식이지."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그런 식으로 폴란드에서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을 찾아내기도 했단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더는 그렇지 않단다." (59쪽)


내 주변의 유대 이스라엘인들은 마치 그녀가 완전히 투명인간인 것처럽 그녀를 못 본 척했다. 이것은 탑승 시의 일반적인 광경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항상 다른 승객들과 분리되어 특별 심문과 검색을 받는다. 그녀의 표정은 아버지가 유대인의 눈에서 보는 그 표정의 내용과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지만, 거기에도 역시 슬픔이, 공격을 당한 경험이, 그리고 깊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나를 향해 미소지었고, 그 표정은 곧 체념으로 바뀌었다. (150쪽) 


책 앞머리에서 슐로모 산드는 자기 아버지와 유럽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외양으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유대인'으로 콕 집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놀라움.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들의 설움과 슬픔이 표정에 묻어난다는 건 누가 뭐래도 마음 아프다. 현대 이스라엘의 악행과 상관없이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원죄 격이다. 저자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 



뒷부분에서 산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저자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스라엘 국민의 20% 이상이 아랍계 이스라엘 국적자다)에게서 그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두려움과 슬픔의 표정을 본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국가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여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이라는 건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아닌, 특히 아랍인인 사랍들에게는 거부된 특권을 누리는 혜택받은 시민들이라는 뜻이다. (163쪽)


종교적인 신앙인이 아닌 단지 휴머니스트이고 민주주의자고 자유주의자인, 최소한의 정직함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유대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자신을 이스라엘 국가 내의 유대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자기 주변에 참을 수 없는 불의를 만들어 내는 특권을 가진 카스트에 귀속되는 바로 그런 행동인 것은 아닐까? (165쪽)


그의 자각은 이제 '유대인이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으로 나아간다. 그 나라 국민임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에 귀화하지 않는 이상, 이스라엘에서 그는 신분증명서에 '유대인'이라고 찍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언한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에 대해 집착했던 것이 박해자와 그 지지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적 종족에 동화되었던 결과라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에는 내가 선민과 그 신봉자들로 구성된 배타적인 당파의 한 일원으로 보였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유대인이기를 그만두고 나 자신을 더는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184쪽)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가능성을 구체화하고 공고화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부족적 신비주의를 버리고, 타자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반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 정책을 바꾸려는 생각 이전에, 우리는 저주받은 점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 점령은 끝도 없이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다. 마치 너무 큰 제물을 삼킨 신화 속의 뱀이 그걸 뱉기보다는 숨이 막혀 죽는 쪽을 택하는 것과 같다.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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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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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 그래도 나는 끄떡없다.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내가 개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기껏해야 저들은 내게 채찍질밖에 안 할 테니까 말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의 향기가 저 어둠으로부터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는 지금,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15쪽)


반딧불이 쿠데마유의 초록 불빛이 꼭 감고 있는 내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다. "내가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날이야." 나는 눈으로 반딧불이 쿠데마유에게 말한다. 그러자 반딧불이가 초록 불빛으로 내게 대답한다. "그날 너만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은 아니야." (55쪽)


그 작은 양털 실오라기에서 마른 장작, 곡물 가루, 우유, 꿀,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의 냄새가 난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는다. 내가 근처에 있고, 만나러 갈 거라는 사실을 아우카만에게 알리기 위해 울부짖는다. 다른 건 몰라도 고통에 찬 목소리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 법이기에, 미친 듯이 울부짖는다. (76쪽)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이다. 세풀베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던지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문화부에서 책을 종종 얻어오다 보니, 나의 몇 권 안 되는 독서는 거의 내 취향이 아닌 얻어보기 수준에 걸려 있다. 어차피 취향이 그리 뚜렷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얻어걸리는 책들 중에 마음이 얼얼하게 좋은 것들이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 행진 소식이나 땅 싸움 얘기는 외국 언론 보도에서 몇 번 읽었으나 이런 동화를 통해 접할 때에는 또 다르다. 


노란 색의 얇은 책을 읽는데 늘 그랬듯 몇 주가 걸렸다.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림자 박물관> 그리고 이 책. 할아버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금씩 아껴가며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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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셸터스 :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정림건축문화재단 지음 / 프로파간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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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렛같은 소책자여서 가뿐한 마음으로 펼쳐들었는데, 뜻밖에 알차고 재미나다.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은 건축가들과 여러 장르의 예술가, 연구자들이 난민 문제를 놓고 벌인 전시회와 포럼 같은 작업들을 정리해 소개한 책이다. 유기견 문제에서 홍세화와 서경식의 대담까지, 얇은 책자에 여러 내용을 묶었다. 중구난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은 난민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가 '남의 일' 혹은 '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실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세계시민으로서의 공존이 시작된다는 것, 인권과 평등과 공존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되짚어보고 서로를 위해 고민하면서 이뤄낼 수 있는 가치라는 것.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다. 난민 문제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그걸 정리한 책이 나온다 해서 우리 사회가 뭐 그리 변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이뤄진다는 것, 누군가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마치, 등대의 불빛처럼. 바다 전체가 깜깜해도 이런 등대가 있으면 최소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은 해보게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우리 각각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이면 사회가 나아지고, 난민들의 삶이 바뀐다. 


건축과 관련된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이 책에서 무언가 새로운 '난민 하우스'의 형태나 건축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난민들의 삶을,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어떻게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건축가들과 연구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낫게 만드는 방법'이다. 김찬중 건축가의 표현을 빌면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타지 사람이 들어와 살 공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기존 인프라를 잘 연구하고 활용하는 것, 셸터와 개인을 어떻게 매칭해 최적의 장소에서 머물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뉴 셸터'라는 것은 우리의 기본 인프라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20쪽). 


국제규약상 난민의 범주는 매우 좁다. 이 책에 실린 작업을 한 이들은 이주노동자들, 탈북민들, 북한 비상사태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탈북민들까지 모두 난민의 범주에 넣고 이들과 토착민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살핀다. 빅데이터를 이용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어떤 곳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수요와 공급의 계획을 세울 프로세스를 만들자는 제안이 눈에 띈다. 한국에 건물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난민촌을 세울 시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업자들이 보는 '기존의 인프라'에는 "현재 우리가 가진 물적 토대를 네트워크 또는 어떤 관계 속에 위치시키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으며, 이것이 곧 시스템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20쪽). 


현재 한국의 이주민, 난민들의 주거현실은 열악하다. 책에는 비닐하우스에서 몇 명씩 생활하는데도 매달 '월세'를 고용주에게 30~40만원씩 내는 농촌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이 나온다. SoA라는 건축사무소에서는 이런 이주노동자들의 주거 실태를 조사한 시민단체의 자료들을 모아 '주거도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뛰어넘는다. 가령 화장실이 없거나, 문고리가 없어서 문을 잡고 잔다거나, 전류가 흘러 벽에 손을 갖다 대면 전기가 통한다거나 하는 수준이다. 남녀 혼방도 많다. 그들이 무료로 사는 것도 아니고 적지 않은 월세를 지불함에도, 집주인이 막 들어와 물건을 꺼내기도 한단다."(50쪽)  


자물쇠도 없는 '집'에 살면서 성폭행 같은 위협에 노출돼 있는 이들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는 구조. 이들에게 필요한 집의 모양을 넘어, 이들이 제대로 된 주거공간에 살 수 있게 해주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 대안은? "비닐하우스 외에 대안이 없다면 그 비닐하우스라도 쾌적하게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게 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주노동자가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든지, 그래서 그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매우 적극적이다. 단지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여유가 없을 뿐이다.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자신이 살 공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52쪽) 


건축가들이 이주민과 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인프라를 얘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최소화된 주거'의 필요성은 거주나 정주가 아닌, 거기 머무르는 사람들이 거쳐간다는 것을 전제로 말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사실 '살아가고' 있다. 이 나라에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의 일상과 똑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52쪽) 


난민이나 이주자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오기 전에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꾸려왔던 사람들이다. "안전이란 개념은 없고, 휴식을 취할 수조차 없는 거리와 집의 경계지가 이주여성의 '집'이다. 한국 사람들은 경제 빈국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야 하거나 감수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방문해본 이주자 본국의 집은 비록 현금이 부족하여 시설은 열악하지만 주거 환경은 매우 풍요로운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떠나온 캄보디아나 베트남의 집은 넓은 공간에 자는 곳과 요리하는 곳이 잘 분리돼 있고, 망고 등의 과일나무로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며, 각종 채소가 자라고 닭과 개들이 뛰어노는 것이다. 또한 동네 사람들과의 친밀감과 오랜 신뢰로 지역사회로부터 안전과 도움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87쪽) 


한국에 난민이 대량으로 유입되는, 이를 테면 북한의 유사시 탈북민이 대규모로 밀려들어오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미 있는 인프라, 즉 전국 곳곳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을 캠프화하는 문제를 황두진 건축가가 연구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발한 시스템이나 물건을 만들려 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보유한 상당한 자원을 어떻게 소싱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제도나 조직, 사회적 자원의 집합체로 군, 건설산업, 렌탈산업, 캠핑산업을 꼽았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들을 받아들이되 우리가 이미 보유한 자원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장을 캠프로 바꾸되 '마을' 개념을 적용하자는 문제의식이 눈에 띈다. "임시의 잠정적 시설이긴 하지만 일상생활, 북한 커뮤니티의 삶이나 방식도 존중돼야 한다. 오랜 기간 인류가 함께 고민해서 만들어온 국제적 기준이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다."(64쪽)


책의 후반부는 한국에서 난민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즉 우리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고시촌으로 상징되는 우리 내부의 거주 난민, 출생국의 GDP로 그 나라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는 풍토, 다양성을 경험해보지 않아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획일화된 심리와 순혈주의, 재일동포와 탈북자들이 '간첩 조작'의 희생양이 됐던 역사, 경계인은 곧 적으로 보는 배외주의, 미국이나 유럽은 '백인들의 나라'일 것이라고만 보면서 그쪽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무지 등등. 


그런 우리 사회에서 "난민과 이주자에게 안전한 집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들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존재가 아니며 떠난다 하더라도 우리와 공존하고 자원을 공유하는 동시대적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들의 안전한 삶에 대한 우리의 책무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예측 불가능한 위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환기된다."(89쪽) 실제로 1950년 한국전쟁 뒤 전쟁고아 2명이 시리아로 입양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조효제 교수에 따르면 "반세기 전만 해도 시리아는 한국의 오갈 데 없어진 아이들을 받아들이던 나라였다." (135쪽)


고민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실상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보면 "그래 한달에 얼마나 벌어"하면서 멋대로 반말을 풀어놓는 수준이 아니던가. '옆집에 난민이 이사 왔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김찬중 건축가의 답변.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 것 같다." (22쪽) 


조효제 교수는 난민들을 대하는 우리 개개인의 태도와 관련해서, 네덜란드에서 들은 얘기라며 '호의적인 무관심'이라는 개념도 있다고 소개한다. 그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에 관여 하지 않은 채로 "존중하면서 그냥 살자.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거나 적극적으로 차별하지 말고 그냥 호의적인 무관심을 갖고 소가 닭 보듯이 살자. 그것만으로도 사실 굉장히 문명화되고 개방된 사회가 아니겠느냐."(156쪽)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문제를 양산하는 근본 원인, 즉 질서라든지 식민지의 유산이라든지 강대국의 횡포라든지 전쟁을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 등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민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면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과 일상생활 속에서의 무덤덤한 보편적인 실천 모두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157쪽)


우리 밖에서 온, 우리 안에 있던 '다름'과 '차별'을 인식하고 고쳐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뉴 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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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 그저 살다보니 해직된 MBC기자, 어쩌다 보니 스피커 장인이 된 쿠르베 이야기
박성제 지음 / 푸른숲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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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네 얼굴이 빨개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어. 넌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연못의 수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 그런 네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물에 비치는 달빛 같은 사람이라야 너의 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준비에브, 애인 있어?" 넌 깔깔대고 웃으며 고개만 내저었지. 네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한 계절은 꽃을 피우고, 한 계절은 열매를 맺고, 다시 어떤 계절은 사랑을 가져다주었지.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생 텍쥐페리의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린왕자>나 <야간비행>보다, 나는 이 구절이 실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책을 더 좋아했다. 특히나 저 문구의 마지막 문장,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연상케 하는 청춘의 한 때. 먼 훗날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적어도 삶의 어느 한 때에 나는 인생이 그렇게 쉽다 생각했다고, 웃으며 돌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삶은 쉬이 흘러가지 않는다. 넘기 어려운 고비나 간난고초가 아니더라도 인생에는 늘 우연이, 때론 수상쩍은 사건이 끼어든다. 6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려 본다. 여름휴가 전날이었다. 일은 많았고, 뭐라도 좀 해놓고 휴가를 떠나야 했기에 늦도록 회사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회사 문을 나서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그 사람들의 무리 속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었던 것만 말해두자. 아무튼 나는 그날 밤,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일해왔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우연은 끼어든다.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사건이. 어쩌면 그래서 삶은 재미있고, 때로는 힘겹고, 앞날은 예측불허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MBC 노조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해고된 박성제 기자의 책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를 읽었다. 이런 종류의 에세이에 나는 익숙지 않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 가을날의 햇살을 받으며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책은 재미있고 우습고 아프고 슬펐다. 아마도 책의 앞쪽 3분의 1을 읽으면서는 좀 울기도 했던 듯 싶다. 책은 "그저 살다 보니 해직된 MBC 기자, 어쩌다 보니 스피커 장인이 된" 사람의 이야기다. 띠지의 표현을 빌면 "20년째 다니던 직장에서 졸지에 쫓겨난 중년 아저씨의 우여곡절 인생 2막 개척기"다.


"만약 내가 헐크였다면 그 순간 인사위원회장은 풍비박산 났을 것이고, 내가 늑대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갈가리 찢긴 시체가 됐을 것이며, 내가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할 수 있었다면 모두들 시커먼 숯덩이로 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해고는 정해진 것. 차분하게 대처하자. 그게 이기는 거다. 억울함과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면서, 천천히, 경고하듯, 최대한 냉정해 보이도록, 나는 말했다."


한국의 밥 우드워드를 꿈꾸며 특종을 줄줄이 했던 잘 나가는 기자의 취재 스토리라면 애당초 나 같은 아둔하고 꿈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 책장을 펼칠 일도 없었을 터다. 어쩌다 보니 해고됐고, 직장 잃고 마냥 놀 수만은 없으니 '인격수양' 삼아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고, 식탁과 와인장 따위를 만들다가 어릴적부터 좋아했던 스피커 만들기에 도전했고, 하다 보니 디자인에 소질이 있어서 스피커 회사를 차려 나름 '사장님'이 된 아저씨. 그는 '어쩌다 보니'라 말하지만 우린 안다. 인생의 '어쩌다 보니'에 100%의 우연은 없다는 것을. 


사실 나는 기자로서 그의 모습을 잘 모른다. 어떤 분야에서 주로 취재했고 어떤 스타일의 리포트를 했으며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른다. 방송 뉴스조차 제대로 안 보는 나같은 게으름뱅이는 보도를 하는 그의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가 '어쩌다 보니'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그는 '부작위'의 혐의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나는 그가 한 커뮤니티 웹사이트에 올려 놓은 목공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상 속 그는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 관련 동호회 사이트에 올린 동영상이었지만 배경음악 하나, 대사 한 마디 없이 그는 정말 사포질만 했다. 만약 그가 차인표 같은 배우였다면 '분노의 사포질'이 됐을 것이고 김동성 같은 선수였다면 '분노의 질주'가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동영상 속 그는 얼굴도 몸매도 '분노의 OOO'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앞치마를 걸친 곰처럼 그저 사포질만 하고 있었다. 그가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그가 된 건 그렇게 사포질 하듯 살아왔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 텍쥐페리의 책으로 돌아가 본다. "캄캄한 어둠 속을 비행하며 우리는 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빛, 어둠을 뚫고 새어나오는 불빛들. 몇몇은 외로운 집에서 나오는 빛이리라.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등잔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농부는 자기의 소망을 누군가 알아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기의 소망이 빛을 품고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등잔이 자기 집의 초라한 식탁만을 밝혀 준다고 생각하지만 절망하듯 비틀거리며 타오르는 그 불빛의 소리를 누군가는 먼 곳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책 한 권으로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은 재미있지만 어떤 사람의 삶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책에는 익살이 넘쳐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튄' 아빠 같이 태평하다. 그러나 책은 소설이 아니다. 유신 시절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평생 언론민주화 투쟁을 해온 성유보 선생이 며칠 전 돌아가셨지만, 우리 앞에는 우리 시대의 해직 기자(언론인)들이 남아 있다. "그 때,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라고 언젠가는 이 중년 아저씨도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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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15-12-07 21:40   좋아요 0 | URL
앗 순오기님 이 댓글을 이제야 봤어요. 감사합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위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