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 세 딸을 폭격으로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이야기
이젤딘 아부엘아이시 지음, 이한중 옮김 / 낮은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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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아이들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집에 포탄이 떨어진다. 목숨과도 같던 사랑스런 딸들은 ‘조각난 몸뚱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졌다. 목이 달아난 딸들의 몸, 잘린 손발을 발견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아버지는 그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식들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낸’ 자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 의사로, 이스라엘군 공습에 세 딸을 잃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58·사진)가 그 사람이다. 삶을 파괴당한 뒤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팔 평화공존 운동에 나선 아부엘아이시는 “전쟁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서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서울을 찾은 그를 20일 만났다.

악수를 하려고 내민 그의 손을 붙들고 나는 "당신 책을 보면서 울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니 그걸 읽고 우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면서 웃었다. 그는 “남북한이 갈라져 긴장상태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팔 분쟁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닐 것”이라며 ‘비극이고 전쟁이었던’ 인생에서 희망을 찾아온 자신의 인생을 얘기했다.

아부엘아이시는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랐다. 인구 170만명,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가자는 그 자체가 거대한 난민촌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자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이 곳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델릴라가 삼손의 머리칼을 잘라낸 곳이 오늘날의 가자지구”라고 소개했다. 그의 집안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해 터잡고 살던 곳에서 가자지구로 옮겨갔고, 그 후로 60년 이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구적인 난민’이 됐다.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은 전후의 힘겨운 삶을 살아낸 한국의 옛 세대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구호기구에서 준 ‘멜빵바지’를 처음 보고 어떻게 입고벗나 고민한 적도 있다”며 “유엔이 주는 우유배급표를 모아 우유를 받아 팔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지우개를 잃어버릴까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며 글을 배운 그의 꿈은 “교육을 잘 받아 난민촌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집 잃고 땅 잃은 부모도 9남매의 장남인 그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 해 이집트에 유학한 뒤 의사가 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대가족 중심이고, 그도 여덟 남매를 뒀다. 하지만 성공적인 듯했던 그의 삶에 2008년부터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내 나디아가 급성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불임치료 전문가인 그는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병원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아픈 아내를 이스라엘의 병원으로 옮기고, 숨진 아내의 주검을 다시 집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그는 ‘검문소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운명을 맡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없어도 그만인 그림자 같은, 최소한의 존엄도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모멸감”을 겪으며 아내를 떠나보냈다.

2009년 1월 16일,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있었다. 아내가 숨진 지 몇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스라엘 친구가 많은 팔레스타인 의사였기에, 이스라엘 방송에 매일 전화로 가자지구의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의 참상을 자국민들에게 감추려 했지만 진보적인 유대인 저널리스트 슐로미 엘다르는 아부엘아이시의 목소리를 TV에 내보내며 전쟁 소식들을 전했다. 공습으로 아부엘아이시의 세 딸이 숨진 직후에도 전화는 연결됐다. 고통에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스라엘에서 전파를 탔고, 유튜브를 통해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의 호소는 가자 침공의 참상을 알리는 상징이 됐다.

4년이 지났지만 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처지를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지만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보복과 응징 대신 공존을 믿지만 왜 딸들은 죽고 나는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책에는 '그 날'의 풍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 글 앞머리에 올린, 산산조각난 딸들의 몸과 그 방의 풍경이. 그걸 눈으로 보고도 어떻게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처음엔 '증오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책 제목을 보고 화가 났다. 왜 증오하지 않는가? 그런 짓을 당하면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당신이 힘 없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마도 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같은 것으로 혼동했나보다. 아부엘아이시를 만났을 때,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얼마나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이들도 다 (증오를 극복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부엘아이시의 책에 당시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한 구절 나와 있다. 딸들이 희생된 뒤 자신 앞에는 '어둠(증오)의 길과 빛(용서와 공존)의 길' 둘 중 하나로의 선택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를 증오가 아닌 평화의 전달자로 일으켜세운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은 다른 자식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의사들이 도와줬다. 팔레스타인 테러로 딸을 잃은 이스라엘 아버지를 만나 마음을 나눈 경험도 있었다. 실상 이스라엘에도, 아부엘아이시처럼 '화해하고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다. 그들이 다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아예 없지는 않다. 팔레스타인이 약하다보니 용서와 화해를 강요받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속좁은 의문은 거둬두기로 했다.

물론 딸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류해온 경험이 있었다. 어릴 때 돈을 벌려고 유대인 농가에서 일했던 경험, 훗날 의사가 되어 찾아갔더니 그 농가 주인이 아들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더라는 경험, 불임치료 연구를 하고 석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스라엘 의사들과의 만남 등등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경험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유독 그만의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유대인(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사 이래로 그 곳에서 공존해왔고, 지금도 실상 경제적으로 서로 얽매여 있는 처지다. 정치인들이나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교류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  “안전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호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아들딸을 보며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생각하라”고 말한다. 보복의 악순환으로는 아무것도 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코소보,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아일랜드 분쟁이 모두 풀렸다”며 “중동 분쟁이라고 해법이 없을 리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다. 환자가 낫지 않으면 잠시 치료를 멈추고 환자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 치료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의사의 일이며,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2010년 ‘생명의 딸들(Daughters for Life)’이라는 재단을 만들었다. 숨져간 세 딸, 베싼, 마야르, 아야를 기리며 팔레스타인 여성 교육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재단이다.

분쟁의 와중에도 두 나라 사이엔 풀뿌리 연대운동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 평화캠프나 여름학교, 평화의 전화, 교육·의료 프로그램이 활발히 이뤄진다. 아랍계와 유대계가 함께 하는 농구 리그도 있다. 아부엘아이시는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여성에게 주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지위향상은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평화를 앞당기는 길이라 믿는다. 그는 “여성들을 가르치고 평화에 앞장서도록 하는 것이 내 딸들을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팔 공존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을 뿐이다. 벨기에 정부는 2010년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아부엘아이시는 2009년 여름 아이들과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영구 이주는 아니며 가자지구로 조만간 돌아갈 예정이다. 아이들은 가자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물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아있을 터이니 말이다. "아이들 뜻은 아직 모르겠지만, 존중해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자로 돌아가는 시기를, 아이들이 원하는 시기에 맞추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자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 사회(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자가 그에게는 "대가족이 남아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한신대학교,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등을 방문해 의료관계자와 독자들을 만난다. 1시간 반 정도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꼭 가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8월에 가자지구로 돌아가 잠시 체류할 예정이니 혹시 올 수 있다면 꼭 방문해달라"고 했다. 그럴 기회가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겪은 일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증오와 불의의 하나일 뿐”이라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분쟁의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해줘야 할 역할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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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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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르포로 구성된 노예제 추적기라면, 이 책은 통계자료와 개념과 국제법과 국제 규약을 가지고 현대판 노예제의 실태를 전한다. 르포가 아닌 보고서에 가깝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따지자면 스키너의 책이 훨씬 앞선다. 하지만 스키너의 책이 미국 정부의 노예제에 대한 입장과 세계 각지 노예 현실 르포를 뒤섞어 산만한 느낌이 드는 데 비해 이 책은 건조하지만 훨씬 짜임새 있다. 학자들의 '보고서'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책은 먼저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를 소개하고, 현대의 '노예제'라는 이 낯익고도 낯선 개념에 대한 정의와 다양한 형태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노예제가 글로벌 경제 속에서 어떤 식으로 이윤을 창출하는지 살핀다. 


이어지는 장들은 현대의 노예제가 갖고 있는 특징적인 양상들에 대한 분석이다. 아직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 노예들에게 유독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의 양상, 현대의 노예제에서 인종과 종족과 종교가 미치는 영향, 현대의 노예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인 무력 분쟁과 환경파괴, 그리고 현대판 노예들이 겪고 있는 건강상의 위험(신체적 정신적 위험이 모두 포함된다)과 그 결과들이다.


코트디부아르에는 코코아 농장이 약 80만개가 되며 여기서 전세계 코코아 공급량의 대략 절반이 생산된다. 대개 말리와 같은 인근 가난한 나라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이들 중 일부는 외딴 시골 농장에서 노예로 일한다. 노예를 이용하는 농장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넉넉히 잡아도 5%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장주들이 코코아를 도매업자에게 넘길 때 노예들이 재배한 그리 많지 않은 코코아는 '자유' 코코아와 뒤섞이는데 이 둘을 구별할 방법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가 코코아 협약이다. 2001년 체결된 이 협약은 전 세계의 초콜릿 업계, 몇몇 노에제 반대 단체들, 노동조합들과 ILO를 결집시킨다. 이 협약은 전 세계 코코아 재배지역에서 모든 단체 간의 조약으로 기능하며, 한 업계 전체와 노예제 반대운동 간에 맺어진 최초의 조약이다. 이 협약에 따라 국제코코아기구라는 재단이 설립됐다. 재단은 초콜릿 업계로부터 2002~2008년 900만달러 이상을 제공받았다. 재단은 농장들이 노예노동을 인정하고 이를 포기하도록 종용했고, 노예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는 보호시설을 준비했다. 이와 별도로 1백만 달러가 ILO에 전달돼 '상업적 농업에서 아동 노동 착취 근절을 위한 서아프리카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업계에서 총 1000만달러를 희사한 셈이다. 

협약에 따라 초콜릿 회사들은 코코아 재배에 아동이나 노예 노동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자발적인 업계의 기준'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코코아를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업체 상당수가 협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한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스웨덴의 새 법률에 따르면 성을 파는 것은 합법이지만 그것을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성을 구매하는 것만을 범죄로 정한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의회는 성을 파는 여성과 그것을 사는 남성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몸을 살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은 일종의 남성 우월권으로 간주하여 저항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방식은 윤락업소를 합법화하고 정규화해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수요를 줄이고자 한 독일과 네덜란드 법률과 대비된다. 독일에서는 2002년 성매매가 합법화됐는데 노예제를 종식시키는 데에도 일부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엔은 여전히 독일을 성적 착취를 위한 인신매매 여성들(주로 중부 유럽과 동유럽 출신)이 흘러들어가는 '최상위' 도착지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스웨덴은 소비 부문에서 성매매와 인신매매 수요를 없애고자 한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그와 달리 인신매매범을 체포함으로써 공급체계 내에서 노예들로 운영되는 성매매를 줄이고자 한다. 현 시점에서는 어던 접근방식이 실효를 거둘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의 노예 이용에는 경제적 기능이 있다. 미얀마에는 국가 주도 노에제가 거의 20년 동안 널리 퍼져 있어서, 오늘날 아태 지역에 존재하는 국가 주도 노예제 피해자 200만명 중 상당수가 미얀마인이다. 1990년 군부 정권 집권 뒤 요직에 앉은 장성들은 나라를 개인 사업체처럼 운영했다. 노예들이 임금 한푼 못 받고 나무를 베고 광물을 캐고 길을 닦고 기간시설을 건설했다. 그 중 많은 수가 인종적, 종교적 소수민 출신으로 무장 민족단체의 지원줄을 끊으려는 정부의 의도에 따라 노예화됐다. 1990년대 이후 미얀마에서는 인신매매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성 수천명이 인신매매돼 태국에서 강제 성매매에 종사하고, 남녀 성인과 아이들이 중국,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한국, 마카오로 팔려가성 착취를 당하거나 가정부로 일하거나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미국 정부는 인권 침해에 대한 대응으로 미얀마에 제재를 가했지만 미국 업계는 미얀마 군사정권의 전략을 용인해 비난을 받는다. 군사정권이 진행한 사업 중 하나는 미국 석유회사 우노칼, 프랑스 토탈, 태국 회사 PTT익스플로레이션 랜드 프로덕션(태국 정부가 일부 지분 소유)과 제휴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수천 명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을 이용했다. 

미얀마 정권은 아동병사를 징집하기도 했다. 수단 정부와 달리 미얀마 정권은 이런 관행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2003년 당시 정부군에는 아동 7만명이 존재했고 일부는 열한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 해 모집된 신병 중 40퍼센트가 아동이었다. 
파이프라인 사업에서는 현대 노예제의 또 하나의 요소가 드러난다. 환경파괴다. 노예들은 정부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의 산림을 파괴했다. 그러자 이제 이 사업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마을 주민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정부가 노예를 동원해 나무를 벌목하면 티크 숲은 파괴된다. 그리고 목재 판매로 얻은 수익은 땅 파괴에 반대하는 소수민족들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인다. 인권 침해가 곧 환경 침해로 이어지며, 그 역도 성립하는 것이다.


남아시아 강제 성매매 여성 중 많은 수가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된다. 에이즈에 걸릴까봐 사춘기 이전의 어린 여자아이를 찾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성년 소녀들은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에 보호기구 없이 성관계를 가질 경우 외상을 입거나 성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특히 크다.

어린 여성의 경우, 생식기 내부에 형성된 점막질 표면의 영역이 얇고 덜 성숙해 외상이나 감염 위험이 높다. 게다가 강제 삽입이 이뤄지는 난폭한 성행위는 작고 덜 성숙한 질과 자궁경부에 외상을 입히기 더더욱 쉽다. 게다가 알코올과 같은 가벼운 수렴성 용액으로 질 세척을 해 질을 건조시킬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건조된 질 점막은 약한 충격에도 찢어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성명에 걸리기 쉬워지고 HIV에 감염될 위험성 또한 커진다. 성병에 감염된 성매매 아동들은 HIV에 감염될 확률이 4배로 높아진다.


지금 지구상에 '노예'로 불려야 마땅한 사람들이 2700만명이나 존재한다는 기본 '팩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스키너의 책을 비롯해 노예제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다 마찬가지다. 지구상에 유사 이래 이렇게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지구상에 지금처럼 인구 자체가 많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들은 "노예의 수는 유례 없이 많지만 노예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제에서 사실 인간의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목화 따위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 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세계 목화 시장 규모에서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된 목화의 비중은 굉장히 적다. 이를 테면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그토록 많은 까닭은?

핵심은, 노예를 구하고 부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사상 유례없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이 노예무역에 매달릴 때에 비해, 지금의 노예들은 운반비를 비롯한 모든 비용이 턱없이 적게 들어간다! 세상에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 수가 너무 많기 때문, 사람 값이 그만큼 싸졌기 때문이다. 비록 비중은 얼마 안 되지만, 워낙 노예가 싸기 때문에 이 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예를 부리는 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노예제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작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값싸고 양 많은(!) 노예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공급망의 모든 단계에 있는 이들이 제품 생산에서 노예제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면 노예 착취 농장이나 의류공장에 노예제 반대 활동가들을 파견하는 것은 쉬워진다. 코코아 협약은 업계가 인권단체, 소비자단체, 노동조합과 협조하면 노예제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는 마틴 기타 회사다. 이 회사는 환경단체들과 협조해 최고급 기타 제작에 필요한 마호가니 나무를 노예 없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벌목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안은 벌목장에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또다른 예로 러그마크 재단(책에는 러그마크 재단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굿 위브 인터내셔널'로 바뀌었음)을 들 수 있다. 1994년 설립된 국제 자선단체인 이 재단은 남아시아 카펫 공장들을 조사해 인증서를 발부한다. 인증을 신청할 때 제조업자들은 열네 살 이하의 아동은 고용하지 않으며 성인 직조공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할 것임을 약속한다. 가내 공장의 경우 보조자로 고용된 아이들이 정규교육을 받게 해야 하며 직기 소유주 자신의 아이들만 일할 수 있다. 
러그마크 라벨에는 고유의 일련번호가 부착돼 어떤 카펫이든 제조된 직기에서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유럽과 미주의 카펫 수입회사들은 카펫 가격의 약 1%를 러그마크 재단에 지불한다. 이 돈은 카펫업계에서 노예로 일하다 해방된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재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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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대공황 - 앞으로 20년, 저성장 시대에서 살아남기
시바야마 게이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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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미있었다. 순식간에 책장을 넘겼다. 

2008~2009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왜 일시적 위기가 아닌 '공황'에 가까운 것으로 봐야 하는가, 그것이 진정 위기라면 그간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1%가 아닌 99%의 사람들, 우리 필부필부에게 이 상황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우리가 상상해야 할 신자유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들이라 개미만한 독자, 지구인 하나하나가 생각하기엔 버거운 주제처럼 들린다. 책은 얇고, 케인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빌려 궁리의 단초들만 제시해줄 뿐이다. 그런데도 뭔가 머리 속이 정리되는 느낌. 


(25쪽)
왜 1920년대에 필적할 거대한 버블이 방치돼온 것일까? 미국 경제학자 라구람 고빈드 라잔에 따르면 그 배경에는 재분배와 관련한 정치의 실패가 있다. ...계층 분리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를 바로잡는 수단은 세제와 소득재분배다. 그런데 미 연방의회는 이런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 대신 주목한 것이 정부에 의한 융자 확대, 그중에서도 주택과 관련한 융자 확대였다. 이는 교육과 복지의 재정립을 통한 중간층 육성이라는 번거로운 선택을 피하고, 손쉽게 저소득층에게 경제성장의 과실을 배분하려든 정치적 선택으ㅔ 결과였다고 라잔은 지적한다. 격차확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고로움과 비용이 들고, 세금을 늘리려 할 경우 고소득층의 반발도 무릅써야 한다. 중간층 육성에 힘을 쏟기보다 내집 마련을 쉽게 해주는 것이 호경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훨씬 손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156쪽)
도쿄,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권에는 인구가 몰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세계화의 영향만이 아니라 서비스 경제화의 영향도 있다. 대인 서비스업의 발전은 인구 밀도에 비례한다. ...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셔터 상점가 현상'이다. 인구가 감소국면으로 접어든 지역에서는 손님을 광역화하여 자동차를 이용한 쇼핑객을 겨냥한 대규모 체인점밖에 살아남지 못한다. 
인구구조의 전환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 이후 도시 주민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대도시 출신 정치가의 영향력도 덩달아 커졌다. 2000년대의 구조개혁에서는 공공사업 삭감과 지방교부금 수정이 추진됐는데, 이를 추진한 인물이 가나가와현 출신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였다. 현재도 추진 중인 지방분권 개혁은 이런 흐름 위에 있다. 그 단적인 예는 나고야의 '독립'을 선언한 가와무라 다카시 시장, '오사카로부터 일본을 바꾼다'고 주장하는 하시모토 도루 시장일 것이다. 

(166쪽)
'커다란 정부' 노선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세계화가 초래하는 경제 사회의 불안정을 견뎌낼 수없다. 그러나 세계화와 '큰 정부'의 조합은 과연 바람직한가?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큰 정부에 의한 복지국가화를 도모하는 것만이 일본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일까? 아니면 세계화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며 시간이 걱릴 지라도 가족과 공동체를 재생시켜 나가면서 도시와 지방, 나아가 산업 간의 균형을 도모하는 선택이야말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일까? 

(178쪽)
1936년 '일반이론'에서 케인즈는 '투자의 사회화'가 20세기에 안게 될 최대의 과제라고 썼다. 통상적으로 이는 정부에 의한 공공투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좀더 확장시켜 생각해보고 싶다. 물적 자본의 투자만이 투자는 아니다. 최근 주목받는 사회관계자본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동체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 혹은 호혜의 네트워크를 일종의 자본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유지와 확대의 프로세스에 주목하는 접근법이다. 이런 생각에서 보자면 공동체의 인간관계는 자본이다. 자본에는 물적 자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인간관계나 조직의 신뢰같은 무형의 자본도 들어간다. 화폐로 환산가능한 유형의 자본뿐만 아니라 무형의 자본도 늘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이 풍요로워지지 않게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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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조너선 스펜스의 <천안문>을 '범아시아 버전'으로 읽은 듯하다. 실제로 등장인물 중 중국의 상당수(캉유웨이, 량치차오, 천두슈 등)가 겹치기도 한다. 


인도 출신인 저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공격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가 서양을 이기기 위해 어떤 고민과 모색을 했는지 보여준다. 아시아 대륙의 이 끝과 저 끝을 오가는 '근대 초기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편력'이 화려하고 또한 음울하게 전개된다. 이 지적편력기의 주인공은 크게 두 사람이다. 이슬람권에 두고두고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슬람 테러범들'로 숱하게 폄하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창시자 격인 알 아프가니가 첫번째 인물이다. 알 아프가니에 대해서는 9.11 테러가 난 뒤 -_- 공부를 좀 해보려 했으나... 안 했다. 그러다가 이제야 그의 행보에 대한 좀 상세한 설명을 읽은 셈인데, 그의 생각틀 자체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니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두번째 인물은 량치차오다. <천안문>의 세 사람 중 한 축인 캉유웨이의 제자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쑨원과 마오쩌둥, 옌푸와 탄쓰퉁을 비롯한 중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행로가 그려진다. 인도에서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모한다스 간디, 무함마드 이크발의 이름이 나온다. 사아드 자글룰, 사이드 쿠툽 같은 이집트의 지식인과 이란의 알리 샤리아티, 아야툴라 호메이니도 한 자리 차지한다. 일본의 근대를 형성한 오카쿠라 가쿠조, 미야자키 도텐, 베트남의 호치민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보여주는 '아시아 지식인들의 저항'은 모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서구라는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그들의 모색이 혼돈을 맴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세밀화가들이 전통과 개혁,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처럼.


재미있었다. 책은 '일본의 개가에 환호하는 범아시아인들'로 시작하며, 일본이 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아무래도 '우리 조선의 후예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혹은 눈감으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라 생각할 수밖에.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궤적에는 좌절과 희망이 수시로 교차한다. 어찌 되었든, 과거는 과거다.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미 테러와의 전쟁이 금세기의 첫 10년을 망쳐놓았다. 그렇지만 미래에 되돌아보면, 그 10년은 이미 근대적인 경제는 물론이고 근대화 중인 경제에도 필요한 귀중한 자원과 원자재를 차지하기 위해 더 큰 규모로 더 많은 피를 흘린 분쟁의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제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도록 부채질하는 희망- 인도와 중국의 소비자 수십억 명이 언젠가 유럽인과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은 알카에다가 꿈꾸는 공상 못지않게 터무니없고 위험한 공상이다. 이 공상은 전 세게의 환경을 더 빨리 파괴하고 있고, 수억 명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허탈한 분노와 절망의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서구 근대성의 보편적인 승리라는 이런 씁쓸한 결과로 말미암아, 동양의 복수는 어딘지 음울하고 모호하게 변해가고 있으며, 서구가 거둔 모든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로 바뀌고 있다."

저자의 맺음말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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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11
살바도르 아옌데.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노체트의 쿠데타군에 숨지기 전, 마지막 방송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칠레, 또 다른 9·11>(서해문집)에는 아옌데의 저 말이 붙어 있다.


"라디오 마가야네스는 곧 끊어질 것이고, 차갑게 식은 금속 장치에 갇혀 제 목소리는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겠지요. 저는 언제까지나 여러분들 곁에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 나라를 사랑하는 존엄성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민중은 무너지거나 총탄세례에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민중에게 굴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를 믿고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기승을 부리면 또 다른 이들이 이 어둡고 비통한 순간을 극복해낼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머잖아 드넓은 길이 열리고,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아옌데의 고별연설 일부분이다. 책에서 옮겨온 것은 아니고, 이태전 올린 포스팅에서 가져왔다.  이번에는 책에 실린 1971년 아옌데의 연설에 담긴 '각오'를 옮겨본다.


"칠레혁명을 지켜내겠습니다. 인민의 정부를 방어해내겠습니다. 그게 바로 인민들이 제게 부여해준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제게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아옌데가 산티아고의 어느 경기장에서, 쿠바 대표단을 환송하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은 아옌데가 쿠데타군과 맞서 싸우다 숨진 뒤(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싸우던 아옌데가 마지막 순간에'자살'한 것으로 거의 결론났지만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아바나에서 연설하며 아옌데의 이 말을 인용했다.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라 했던 아옌데는 스스로의 예언대로 적들의 총탄에 숨졌다. 그 날은 1973년 9월 11일이었다. 그날의 참사를 뒤에서 조종하고 죄악을 저지른 미국이 뉴욕에서 뜻밖의 보복을 당하기 28년 전 벌어진 일이었다. 


책은 '9·11 이전의 9·11'에 대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아옌데의 딸 베아트리스가 전하는 아버지와의 작별 순간, 파블로 네루다의 처절한 싯구와 네루다의 아내 마틸데가 전하는 '시인의 죽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칠레 쿠데타와 미 제국주의에 대한 카스트로의 통렬한 비판도 나온다. 


아옌데 집권 전부터 시작된 미국-칠레군부의 혁명 전복 공작을 연표로 정리한데다가, 옮긴이인 한겨레신문 정인환 기자의 칠레 취재 뒷얘기가 함께 실려 있어 얇으면서도 튼실하다. 카피라이트를 보니 도르프만 이름으로 돼있는데, 국내에선 도르프만으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이라 돼 있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나누어 읽었다. 빅토르 하라가 남긴 시, 그의 아내 조안 하라가 재구성해 전하는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일주일을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것은 힘들었다. 언제 눈물이 쏟아질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런 글을, 카페에 앉아 유유자적 읽을 수도 없지 않은가. "공포를 노래할 수밖에 없을 때 노래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라는 시인의 절규를, "살아 있어 느끼는 공포 죽어가며 느끼는 공포/너무나 많은 순간 속 나를 본다/저 무한의 순간 침묵과 비명이 내 노래의 끝이다"라고 외치는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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