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 유재현 온더로드 4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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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문화] 2009 여름호에 실린 서평입니다


“네팔을 제외한다면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들락거렸던 나라들을 복기하듯 돌아다닌 여행이었다. 10년은 무언가를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짧은 세월이었다. 아시아는 근본적으로는 변함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냉전의 붕괴와 한때 아시아 전역을 휩쓸었던 민주화의 열기, 그리고 짧게는 1997년 태국을 시작으로 아시아를 덮친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말레이시아의 암노(UMNO)는 여전히 강고했으며,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아로요 치하였고 신인민군은 무력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일당독재와 일인 독재의 그늘 아래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경제위기의 직격탄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태국은 시대착오적인 군주제와 군부의 망령 이래 휘청거렸고, 미얀마는 장기 군부독재의 잔혹한 후안무치함에 짓눌려 있었으며,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완성한 기묘한 도시국가적 결벽증에 질식해 있었고. 홍콩은 중국공산당과 쉽지 않은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머리말 중에서)


국제부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해오면서 국제문제를 다룬 책이라면 물리도록 읽었다. 여러 지역을 다룬 역사책이나 정치 관련 서적들, 혹은 인도적 개입·기후변화와 환경·노동문제·난민문제 등의 개별 이슈를 다룬 책들을 수도 없이 접했다. 국제부 기자는 항상 ‘현장’에 목마른 법이다. 분쟁과 이슈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현장을 목격하고 그곳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기회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 ‘관광객’으로서는 찾아가기 힘든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신문사의 국제부 기자치고는 비교적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외신이라는 ‘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하는 처지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늘 생각의 족쇄로 작용한다. 어느 한 나라, 지역의 역사적·정치적·사회문화적 배경을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국제문제에서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때로는 현장을 찾는다 해도 일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에 수박 겉핥기로 시민들의 몇 마디만 전해 듣고 돌아오기 십상이다.
부족한 것들은 결국 책으로 때워야 하고, 스스로 꾸준히 지식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국내 필자들이 쓴 책은 일부러라도 피해 다녔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중동·아프리카 등 한국인들이 그동안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일단은 지역 문제에 대해 국내 학자들이 쌓아놓은 지식이 외국 학자들에 비해 낮았던 데다가 출간돼 있는 책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이 컸다. 특히나 여행기 식으로 되어있는 책은 필자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들춰보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았었다. 지나다니다 본 풍경을 너무 대단한 것인 양 과시하듯 펼쳐놓는 것이 싫었고, 현지에 대한 ‘공부’ 없이 인상비평을 늘어놓은 것들이 독자인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아시아의 오지나 중동 혹은 아프리카를 다녀와서 ‘미국의 적은 우리 편’, ‘반서구적인 곳들은 좋은 곳’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발상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기에 기대치가 한껏 낮아졌던 탓도 있다.

‘아시아를 걸어온’ 작가 겸 저널리스트 유재현의 책은 머리말에서부터 내 선입견을 무너뜨렸다. 앞에 인용해놓은 머리말은, 이 책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님을 짐작케 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10년 넘게 아시아, 아시아인을 고민해온 저자가 들려주는 ‘지극히 정치적인 아시아 여행기’다.
책은 <유재현 온더로드>라는 시리즈의 네 번째 것으로,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무화과나무 뿌리 앞에서> 등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포착해온 저자의 오랜 아시아 순행(巡行)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버마), 네팔, 홍콩. 한권에 담기엔 너무 많은 곳들을 다루고 있어 짤막짤막하고 파편적이다. 하지만 기나긴 여정에서 지나치는 곳들, 저자의 이성과 감성에 꽂힌 것들이 하나도 가벼운 것 없이 너무도 무겁고 ‘정치적’이다.
인도네시아에 가면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의 힌두교·불교 유적들을 주로 찾아가는 관광객들과 달리 이 사람은 자바섬 동부 솔로의 술탄 왕릉들 곁에 자리한 수하르토의 무덤을 향해 간다. 이어지는 행로는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가 우울한 말년을 보냈던 보고르의 대통령궁, 그리고 비동맹회의로 유명한 반둥의 기념관이다. 필리핀에서는 케손 시의 쓰레기산을 돌며 아시아의 도시가 안고 있는 거대슬럼의 단면을 짚는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는 ‘어제의 공산주의’가 ‘오늘의 땅투기’ 혹은 ‘자본주의의 음험한 네온사인들’로 바뀌어가는 장면을 포착한다. 네팔에서는 히말라야보다 더 ‘참신한’, 21세기 민주주의를 내세운 공산당의 실험에 주목한다.

‘스케치’ 이상의 지식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부분은, 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분석들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저자는 부미푸트라(말레이계 무슬림)와 나머지 국민들 사이를 갈라놓는 구조적인 차별에 관심을 쏟는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상대적 ‘안정’의 부리에는 2차대전 전 술탄군주제의 말레이계 지배세력을 온존시키고 중국계가 이끌던 좌파 세력을 초토화한 영국 식민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의 차별구조는 결국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태국에 이르면 저자의 말투는 유독 까칠해진다. 왕실모독죄라는 전근대적 법률, 아니 사실은 군부독재의 산물인 이 ‘근대적 법률’이 온 국민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이 저자를 너무나도 분노하게 만들었던 탓일까.
태국에서는 탁신 치나왓 전총리를 지지하는 ‘친탁신’ 파와 ‘반탁신’ 파 사이의 대결이 몇 년 째 반복되고 있다. 저자는 국왕이 쿠데타를 사주·승인해 국민이 선택한 정부를 몰아내는 것이 정당화되는 태국의 현실을 과격한 어조로 비판하면서, “푸미폰 국왕은 미국과 군부의 후원 아래 수십 년의 성장을 통해 완성된 괴물”이라 지탄한다. 태국 사태에 대해 형식적 양비론 혹은 중계방송 식의 보도만 접해왔던 이들에게는 유재현식 해설이 과격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더 네이션> 등 태국 언론들은 정부가 친탁신계 인터넷 사이트 60여개를 폐쇄했다는 기사들을 전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아웅산 수치와 달라이 라마의 영웅 신화에 대한 비판이다. 수치 개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미얀마의 모든 문제가 수치의 복권으로 해결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얀마 문제 혹은 수치 여사에 대해서는 국내에도 이미 여러 종류의 책이 나와 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분리운동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티베트 인권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중국 점령 이전 티베트 봉건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현대 중국의 통치가 더 진보적이고 더 낫다”고 단언한다.
지난해 유혈사태로까지 이어졌던 티베트 봉기는 경제개발에 나선 중국 중앙정부의 자원 수탈에 맞선 ‘중국 민중’의 저항으로 보아야지 ‘티베트 대 중국’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달라이 라마의 봉건적 사고방식과 비민주성을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중국의 티베트 통치는 ‘민주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와 ‘달라이 라마’라는 신화를 깨뜨려야만 미얀마와 티베트의 현실과 미래를 직시할 수 있으리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아시아’인가. 왜 아시아의 ‘오늘’을 보아야 하는가.  

우문우답 같지만, 우리가 아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의 유산과 갈등, 전통사회와 현대의 충돌,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로 인한 그늘, 청산되지 않은 독재와 민주화의 허상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들이다. 우리는 유재현이 걸어 다닌 나라들과 똑같은 과정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래서 책에 실린 아시아인들의 삶의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일례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최근 이슬람 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지만 그 한 구석 바탐에서는 섹스관광이 기승을 부린다.
이슬람 정당을 이끌며 집권 연정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유수프 깔라 부통령은 몇해 전 “중동의 돈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급 빌라 지역에 과부촌을 만들자”는 주장을 해서 여성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었다. 보수주의의 얼굴을 한 이슬람의 두 얼굴을 비판하기 이전에, 여성들을 사고 팔아온 아시아라는 거대한 기지촌- 아니 ‘기지 국가’의 두 얼굴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아시아의 오늘은 그렇게 어제와 이어져 있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와 연결돼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오늘의 단면을 짚어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저자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서울의 도심에서 ‘백만 개의 촛불’을 보았다고 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자찬하는 서울의 현주소는 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야 하는 역설의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건설사업가 출신 대통령의 노골적인 부자 편들기 정책 때문에 철거민들이 숨져 나가고 인터넷조차 재갈이 물려진 이 나라에서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시아의 민주화 시대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고 시장과 경쟁, 경제발전이 다른 모든 가치, 특히 민주주의를 호도했다. 파시즘의 전통적 배양자였던 제국주의적 패권은 파시즘 대신 신자유주의를 공급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 그 현상은 특히 두드러졌다. 전 통적 지배 세력들은 신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의회를 장악했다. 노골적 파시즘은 청산되었지만 손은 바뀌지 않았다. 서구식 의회민주주의가 소수 지배 세력의 전통적 기득권을 포기하기는커녕 강화할 수 있는 방편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시아를 보는 것은 곧 거울 속의 우리를 보는 일이다. 과거회귀적인 아시아의 오늘 속에 우리의 모습이 비쳐지는 것은 슬프다. 더 슬픈 것은, 10년 뒤 저자가 다시 내놓을(지도 모를) 책 속에 지금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의 배반, 그 악순환은 언제 깨어질까.

가끔은 좀 거칠고, 가볍고, 냉소적인 어조들 말투 때문에 거슬렸던 적도 없지 않았지만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여행기’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려 주었다. 해박한 지식과 아시아에 대한 애정, 그러나 동시에 냉정한 시선. 저자는 자신이 애정을 갖고 다녀온 곳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여행기로서는 대단한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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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05-27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오늘 읽은 리뷰네요.^^

딸기 2009-05-28 09:17   좋아요 0 | URL
ㅋㅋ 제 책상에도 지금 로쟈님의 책과, 로쟈님의 서평이 실린 계간지가 놓여 있습니다.
 
발칸의 전설 대산세계문학총서 49
요르단 욥코프 지음, 신윤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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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인이 벨라루스에 공부하러 갔을 때에 보내주려고 사놓았던 책이다. 동유럽 문학작품은 별로 접해본 일이 없던 차에 ‘불가리아 국민작가’의 소설이라고 해서 내가 꿍쳐두고 야금야금 읽었다.
단편모음인데다, 편당 분량도 적다. 책 두께도 얇다. 하지만 읽는 동안, 읽고 나서, 내내 마음이 묵직하다.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아서다. 이리 쓸리고 저리 얻어맞는 민초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정국과 빨치산 투쟁에 이르는 시기 우리의 근현대사를 담은 문학작품들이 내내 머리 속에 교차됐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수백 년 간 점령된 발칸의 민중들. 그들을 괴롭힌 것이 어디 제국의 졸개들뿐이랴. 험한 자연과 겨울과 전염병과 산적들, 때로는 사랑도 험난한 시대 힘없는 이들에게는 독이 된다. 작가가 그려내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일그러져 있다. 주제는 ‘사랑’인데, 이야기들은 비극적이다. 사랑, 함정, 비극, 슬픈 전설.
백성의 저항은 언제나 멋지고 용감하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저항은 은근하고, 처연하고, 슬프고, 얼핏 보아서는 드러나지도 않는다. 휩쓸려 다니면서도 자기 것들을 지키고, 때로는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고 얻어맞으면서도 자기네 땅의 노래를 잃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저항’이라기보다는 그냥 ‘삶’ 그 자체다. 슬프면서도 저 깊숙한 곳에 삶의 힘이 느껴지는 짧은 노래들. 욥코프가 들려주는 ‘발칸의 전설’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은 그냥 산문이지만, 꼭 노래처럼 들린다. 묘하고 신비스러운, 불가리아식 ‘마술적 사실주의’에 매료됐다.


  “총이 불을 뿜었다. 창문이 드르륵거리고, 집들이 흔들리고, 검은 그림자가 땅을 덮쳤다. 시빌이 멈춰섰다. 염주를 끊었지만, 카네이션은 버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잠시 기다렸다. 일 초 이 초. 병졸들이 다시 총알을 장전하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마을 아래 광장에서 들려왔다. 시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벨리코 케하야의 대문에서 들려오는 또다른 비명. 시빌이 돌아보았다. 라다였다. 그녀는 마치 그를 보호하려는 듯, 양팔을 벌린 채 달려오고 있었고, 그는 마치 그녀를 껴안으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다시 총이 불을 뿜었다. 시빌이 쓰러졌다. 처음에는 얼굴이 땅을 향해 고꾸라지더니, 잠시 후에 하늘을 향하며 바닥에 누웠다. 그 옆으로 라다도 쓰러졌다. 그것으로 사방은 잠잠해졌다. 태양이 포석을 내리쬐고 있었다. 핏자국인 양 카네이션이 두 주검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교회 앞 찻집,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하얀 수건을 절망적으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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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s Adventure 20종 세트 (Paperback 20권 + CD 20장) Arthur's Adventure 2
Marc Tolon Brown 지음 / Random House Books for Young Readers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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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원에 안 보내고 초등 2학년 딸아이 영어공부를 집에서 시키고 있다.
별다른 방법은 없고, 그냥 영어 책 사주고 CD 틀어놓고 들으라고 한다.
최근 발견한 최고의 교재는, 알라딘에서는 팔지 않지만,
국내 월드컴이라는 출판사에서 판매하는 [Brain Bank][Magic Reader] 시리즈다.

[매직 리더]는 1~6단계까지 있는데, 한 문장 한 문장 따라읽기 순서가 있어 매우매우 좋음.
다만 1단계 500단어, 2단계 750단어, 3단계에 이르면 벌써 1200단어 수준이다.
사실 3단계 정도부터는 영어에 익숙지 않은 어른들이 들어도 될 것 같다.
(여기저기 어린이 영어교재 사이트 들어가서 엄마들이 소개해놓은 거 보면,
아이들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포장해 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엄마들은, 나를 비롯하여, 그렇게들 영어 잘하는 거 아니지 않나요?)

[브레인뱅크]는 킨더가튼 단계(Grade K)와 그레이드1 단계가 있는데, 우리 애는 그레이드1단계로 하고 있다.
우리 애처럼 학원도 안 다녀서 영어가 뭔지도 잘 모르는 애들,
하지만 집에 있는 비디오나 DVD 정도 들은 풍월 있는 애들은 1단계로 하면 좋을 듯. 짱 좋음.
Society, Science 각각 20권씩 40권 & CD 40개로 구성돼 있는데 짧으면서 내용도 재밌고 좋고...
따라읽기도 잘 되어 있다.
특히 Workbook이 쉽고 재미있게 되어있어서, 공부 안하는 우리 애도 놀이삼아 아주 잘 하고 있다.
심지어는 다른 영어책들에도 워크북이 다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
한 페이지 풀 때마다 '칭찬스티커' 붙여주니까 아주 좋아라 한다. ^^

알라딘에서 [스콜라스틱 헬로리더] 2단계 몇 권을 사서 역시 CD랑 같이 들려줘 봤는데,
이거는 문장별 따라하기가 없다. 내용은 대략 재미있고 그림도 귀여운데, 그것이 매우 아쉬움.
그래서 [헬로리더 3, 4단계] 세트로 나온 것 사려다가 말았다.

얼마 전에 챕터북 시리즈 중에서 유명한 [Junie B. Jones]를 샀다.
이건 따라 읽는 것은 아니고 그냥 들으면서 책 보는 것인데,
한 권 보여줬더니 흥미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제 겨우 [브레인 뱅크] 하는 우리 애한테는 좀 이른 듯.
그리고 말이 많이 꼬여있어서(주니비는 어린애 주제에 씨니컬하다;; 그리고 미국식 유머가 많은 듯)
일단 보류하고, 아서 어드벤처를 샀다.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면,


 




한 페이지에 들어 있는 글의 양은 이 정도. (사진은 무단으로 퍼온 거예요;;)

글의 양은 초등 1~2학년이 보기엔 적당하다. 영어를 못한다 해도,
줄거리 자체가 너무 쉽고 애기용(?)같으면 애들이 흥미를 못 느끼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할 듯.
하지만 문장이 쉬운 것은 아니다.

Before they knew it, they heard another voice.

윗그림에 나오는 문장인데, 이 정도면 초딩 저학년 꼬맹이들한테는 쉽지 않다.
(심지어 어른들도, 회화에서 저 정도 복문이 자동으로 입에서 나오려면 상당한 실력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아서 어드벤처]는 그림은 귀엽다.
그림이 영상물로 나온 것들에 비해 안 귀엽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이것도 충분히 귀엽다.

CD케이스 문제는 80% 해결됐다.
책 뒷부분에 넣고빼기 힘들게 붙여놨다 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종이 케이스로 포장을 바꿨다. 다만! 이왕 바꾸려면 좀더 친절하게 할 일이지...
CD 다섯장을 포켓처러 종이케이스 하나에 넣게 만들어서 좀 엉성하다.
뒤쪽 비닐에 넣는 것보단 낫지만... 비닐에라도 좀 싸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앞부분에 노래를 집어넣는 것이 이 시리즈의 컨셉인 모양인데,
책 분위기하고 안 어울리게 노래가 너무 무겁게(심지어 약간은 무섭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_-a
전반적으로, 주니비보다는 이 쪽이 쉬워 보인다.
이거 들려주고 나서 [아서 챕터북]은 내년 쯤 고민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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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uko 2009-05-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 노래가 책마다 조금씩 달라요. 전 몰랐는데 울집 꼬맹이들이 따라부르는 걸 들으니 2절은 다 다르더라구요. 애들은 노래 무지 좋아하던데...^^

딸기 2009-05-13 18:1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 그럼 제가 들은 것이 좀 엄숙한;; 노래였었나봐요
 
천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율리아 수리야쿠수마 지음, 구정은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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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해 전 삼림파괴와 기후변화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갔었다. 자와(자바)섬의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 도심까지 들어가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울에 오는 외국인들도 같은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강남의 테헤란로 부럽지 않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마천루들과 초현대적인 주상복합아파트 단지들은 인상적이었다. 더 인상적인 것은 호화로운 첨단 건물들 바로 옆을 흐르는 쓰레기투성이 개천과 골목들이었다. 아시아의 거대 개도국 인도네시아의 두 얼굴을 보는 듯했다.
자카르타에서 이틀을 보내고 자와섬 중부의 소도시를 거쳐 탈탈거리는 소형 비행기를 타고 깔리만탄(보르네오섬)으로 가니, 그곳에는 이 나라의 세 번째 얼굴이 있었다. ‘빈부격차’를 논하기조차 힘든 미개발된 지역, 강물 위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속에는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미개발’이 ‘가난’을 뜻하는 말이라면 깔리만탄은 미개발 지역이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자연과 삶을 착취당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 곳 사람들은 결코 ‘미개발 지역의 원주민’이 아니었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운영하는 거대한 야자(팜)농장들과 속살까지 파헤쳐진 밀림은 그 곳이 세계화와 초국적 자본주의의 개발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은 곳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원이 많고 땅이 넓고, 오랜 역사와 다양성을 지닌 나라다. 자와섬 중부 욕야카르타의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에는 세계 어느 유적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찬란한 힌두·불교 유적이 있다. 깔리만탄과 이리안 자야(뉴기니섬 서부)의 원시림은 아마존과 함께 지구의 허파로 불린다. 발리의 전통문화와 아체의 석유, 자카르타의 마천루 모두 인도네시아가 자랑하는 자산들이다.
인도네시아는 가진 것만큼 상처도 많은 나라다. 이렇게 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2004년 쓰나미에 지진, 산사태, 한국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진흙화산 분출’, 항공기 추락과 유람선 침몰이 빈발하는데 심지어 조류독감까지... 재난과 사고가 끊이지 않아, 신문사 국제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인도네시아는 국가 차원에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씁쓸한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찢기고 1998~99년 금융위기에 타격을 받았지만, 뒤늦게나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체제를 다시 세우려 애쓰는 나라. 그 곳이 인도네시아다.

이 책은 인도네시아 여성 칼럼니스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인도네시아 최대 일간지인 <자카르타포스트>와 유력 잡지 <템포> 영어판 등에 쓴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과 유럽에 쏟는 만큼의 관심을 아시아에는 쏟지 않는 편인 것 같다.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비교적 가까운 나라이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속속들이 알려지지는 않은 나라다. 아마도 대다수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수만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 ‘쓰나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자원이 많은 나라’ 정도가 아닐까.
율리아의 글들은 인도네시아라는 ‘크지만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속속들이 엿보게 해준다. 전통사회와 현대의 충돌,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로 인한 그늘, 독재와 민주화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칼럼들에 녹아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들이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과정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조곤조곤 얘기하는 인도네시아의 삶의 모습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이슬람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민주적,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율리아는 호주인 이슬람학자와 결혼한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으로서, 이중의 편견에 맞서 목소리를 내려 애쓰고 있다.
첫째는 이슬람 보수파들을 향한 것이다. 이슬람은 여성들을 탄압하고 성(性)을 억압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 종교의 겉치레에서 벗어나 이슬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 중 큰 줄기를 차지한다.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율리아의 주장은 그런 의미다.
두 번째는, 이슬람을 ‘여성을 탄압하는 나쁜 종교’로 보는 외부의 시선을 향한 것이다. “이슬람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이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을 빙자해 테러와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이 나쁜 것이다.” 그러면서 율리아는 이슬람의 폭력성을 들쑤시고 부추기는 서방의 오만함을 질타한다. 율리아는 특히 여성학자로서 젠더·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이슬람권에서 어떻게 관용적으로 다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판에 박힌 이슬람 옹호론을 벗어나 발랄한 사고를 선보인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슬람과 여성’이라는 주제는 아프간 탈레반 집권 이래 서방에서 줄곧 제기해왔던 문제였다. 1996년 이슬람 순니파 극단주의자 그룹인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여성들에게 ‘부르카’로 알려진 검은 옷을 입히면서 이슬람 여성의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부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카’는 검은 베일에 갇혀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을 잃고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린 이슬람 여성의 상징이 됐다.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인가? 그렇다면 그 억압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슬람의 여성차별은 꾸란에 규정돼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슬림들이 꾸란을 곡해하면서 나타난 현상인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가 될 것이다.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는 물론 아니다. 이슬람 옹호론자들은 율리아처럼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며 꾸란에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보호’ 혹은 ‘재산권 인정’ 등을 규정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아내가 돈 많은 과부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율리아의 글에도 등장하는 소재다). 어떤 이들은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풍습 등 ‘이슬람의 여성차별’로 알려진 관행 상당수가 아랍인들의 유목생활에서 온 잔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유를 이슬람 교리 자체에서 찾든, 아니면 아랍의 부족문화 유산에서 찾든, 이슬람 여성들이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요르단 등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명예살인’은 대표적인 예다. 몇 해 전 파키스탄 동부 펀자브 주에서는 40대 남성이 4세부터 25세까지의 네 딸을 아내 앞에서 모두 흉기로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단 하나, 큰 딸이 바람을 피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프간 남부에서는 지금도 탈레반 추종세력들이 여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염산을 퍼붓는 테러를 가한다. 극단주의자들의 공격, 혹은 극단적·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슬람권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구조적인 범죄’들이다.

‘히자브’ 논쟁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권의 여성들이 쓰는 머리수건을 보통 ‘히자브’라고 부르지만 형태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얼굴까지 내놓는 검은 겉옷은 ‘아바’라고 부른다. 율리아의 글에 나오듯 인도네시아에서는 ‘질밥’이라 한다. 이란 문화권에서는 몸을 모두 덮고 얼굴만 내놓는, 혹은 얼굴까지 가리는 검은 겉옷은 보통 ‘차도르’라 불린다. 아프간의 ‘부르카’는 여성의 눈까지 모두 망사천으로 가려 밖을 제대로 볼 수도 없게 만든, 극단적인 형태의 차단막에 해당된다.
부르카든 질밥이든 개인이 원하면 쓸 수 있다. 유럽에서는 몇 년 전부터 히자브가 이슬람의 여성탄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서 ‘사회적 가치관에 위배된다’‘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공공장소 착용을 금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이 히자브를 마음대로 입을 권리를 달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민자 2세인 무슬림 여성들은 “우리가 원해서 히자브를 쓰고자 하는 것”이라며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 싶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언론들이 이를 다뤘지만, 논점은 대략 ‘이슬람의 여성탄압이 문제냐, 유럽 우월주의 잣대가 문제냐’ 하는 것으로 모였다. 서구가 이슬람을 대할 때 보여준 오만함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히자브 착용론’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맹목적 반미론자들처럼 ‘미국의 적은 우리 편’으로 보거나, 대테러전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서 이슬람의 억압적 기제들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편들어주기만 할 수는 없다. 수억 명의 무슬림 여성이 자의로 머리수건을 쓴다 하더라도 히자브 혹은 차도르, 부르카, 질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거나 탄압받는 사람이 단 몇 명이라도 있다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존중한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슬람권의 여성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이 서구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에 비해 ‘현대화’가 늦어졌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보다는 이슬람국가 내부의 사회경제적 모순 구조가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 여성에 대한 린치와 테러가 일어나는 측면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자(혹은 국가/사회제도)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대개 동성애자를 극형으로 처벌하고 있으며, 에이즈에 대해서도 “부도덕한 자들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는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과 여성, 이슬람과 마이너리티에 대한 주제는 어렵고 복잡하다.

이슬람의 여성차별·마이너리티 탄압과 인권침해는 뿌리 깊은 문제인 동시에, 비교적 최근에 두드러져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 역설은 최근의 ‘근본주의화’ 현상과 관련 있다.
이집트, 이라크, 이란 등 이슬람권 주요 국가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종교와 거리를 둔 세속주의 근대 국가였다. 독재와 분쟁 등의 문제는 있었을지언정,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 같은 극단적 이슬람주의로 인한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도 여성이 운전을 할 수도, 사회생활을 할 수도 없는 국가이지만(여성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정치적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나라는 모든 국민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아랍-이슬람권 국가들은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 그들 나름의 근대화 과정을 걸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근대화 과정은 정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극도로 왜곡됐다는 점에서 서방의 궤적과는 차이를 보였다. 이 지역의 독재는 냉전 구도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냉전 체제가 끝난 뒤 이슬람권의 변두리 격인 아프간에 탈레반 정권이 등장한 데에서 보이듯, 근본주의화 현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만 보더라도, 헌법상으로는 ‘이슬람 공화국’이 아닌 세속주의 국가여서 이슬람을 포함한 5개 종교를 공식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로 보면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인도네시아는 좌파 민족주의에 경도됐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1999년 쫓겨난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정-교 분리를 엄격히 지켰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슬람 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이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지에서 넘어온 이슬람 과격세력들의 활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02년과 2005년의 발리 연쇄테러, 2003년 자카르타 JW매리어트 호텔 폭탄테러 등은 이 과정에서 벌어진 초대형 테러사건이었다.

극단주의가 민주화를 비집고 들어오는 현상은 인도네시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세속주의 독재 혹은 권위주의 통치에서 민주주의로 어렵사리 옮겨가고 있는 이라크, 이집트, 터키 등 이슬람권 여러 나라들이 모두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안정된 말레이시아에서도 이슬람주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2000년대의 현실이다.
이렇게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것을 가리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슬람권의 사우디아라비아화(化)’라 부르기도 했다. 현대화된 도시의 이슬람이 오히려 퇴조하고 사우디 오일달러에 힘입어 ‘사막의 이슬람’ 즉 전근대적이고 교조적, 극단적인 교리가 이슬람 문화권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밖’을 향한 공격을 상징하는 것이 9·11 테러였다면, ‘안’을 향한 공격은 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슬람의 여성탄압은 전근대적인 종교·제도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탈냉전기 이슬람권의 사회변화와 연결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율리아 역시 인도네시아 사회가 ‘민주화’와 함께 어떤 왜곡을 겪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 이슬람권으로 퍼지고 있다. 이 점에서, 이슬람의 전근대성을 질타하는 미국과 서방도 근본주의화에 일단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함을 느꼈던 부분도 적지 않았다. ‘율리아의 지하드’라고 했지만, ‘왜곡된 이슬람에 맞서기 위한 한 여성학자의 성전(聖戰)’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온건하고 너무 모호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많았다.
율리아는 이슬람 사회를 비판한다면서도 극히 온건하고 부드러운, 에둘러가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이슬람’이라고 명시하는 대신 ‘종교’라는 말로 대신하며 피해가기도 한다. ‘이슬람 극단주의’라 쓰지 않고 ‘종교적 극단주의’ ‘종교적인 문제’ ‘종교적인 보수파’라 바꿔 부르는 식이다. 이런 것들이 좀 더 강력한 ‘내부로부터의 목소리’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율리아가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율리아는 이슬람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극단세력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는 율리아 같은 여성 비판론자들,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테러가 수시로 일어난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율리아의 글에 나타난 이슬람 비판의 강도를 머리 속으로 조율해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주로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에 대한 것이지 ‘이슬람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권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특히 열대의 섬들로 이뤄진 나라다. 사막의 유목문화에서 출발한 아랍 ‘본토’의 이슬람과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례로 라마단 끝 무렵 고향을 찾아가는 인도네시아의 르바란 문화는, 농경문화가 약하고 추석이 없는 아랍의 라마단 명절 풍습과는 다소 다르다.

책의 전반부가 이슬람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글들이었다면, 뒷부분은 인도네시아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수하르토 정권의 억압 메커니즘은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일상생활을 지금도 구석구석 지배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독재정권의 그늘이 가시기는커녕 최근 들어 오히려 억압통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인도네시아에서 한 여성 지식인이 느끼는 참담함이 2부와 3부의 신랄한 글들로 묶여져 있다.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듯 율리아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상류층이다. 외교관 부모 밑에서 유럽을 돌며 자라났고,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호주인 교수 남편을 둔 유명 칼럼니스트다. 그의 글에선 운전기사, 가사 도우미, 자신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 교외의 고급 주택단지가 종종 등장한다. 자카르타 교외에는 별도의 경비인력을 둔 상류층 주택단지, 이른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들이 많이 형성돼 있다. 율리아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의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의식이 엿보인다. 특히 자기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들이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거북살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 훌륭한 인도네시아 안내서, 이슬람 안내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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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9-04-30 14:13   좋아요 0 | URL
^^
잘 지내지?

구본씨 2009-04-3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축하해. 재미있겠군. 이런 책들이 어느 정도 팔려줘야 하는데 국제화 시대에 맞게 말이야.

딸기 2009-05-01 09:39   좋아요 0 | URL
편집자가 매우매우 훌륭하게 <깊이보기> 코너들을 중간중간 넣어줘서, 책이 잘 나왔어.
이슬람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소개하는 안내서 성격으로.

군자란 2009-05-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었던 이슬람의 세계사1,2를 읽으면서 이슬람의 신앙방법이나 기독교의 신앙방법이나 이름만 다를뿐 거의 같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저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의 이별을 통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종교라는 문화 자체가 죽음을 먹고존재하는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사후세계란 거의 무방비상태의 무장해제를 해버리는 기능이 있어서 거의 종교라는 존재는 본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마음을 가끔씩 들여다 보면 그 생각이 정말 실감이 날정도로....누군가의 책에서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종교란 한번 걸려들면 마치 치명적이고 헤어나올수 없는 덪이 아닌가

딸기 2009-05-05 14:04   좋아요 0 | URL
이슬람의 세계사 재미있나요? 한번 보고는 싶은데...
종교에 대한 말씀, 저도 공감합니다. 본능적인 것일 수 있지요. 하지만 본능을 따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해요. 종교의 부작용;;에 아주 신물 느끼고 있거든요, 요즘. ^^

군자란 2009-05-0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는 있어요.읽을려면 초등학교 지도책정도는 옆에 끼고 읽어야 됩니다.....

딸기 2009-05-07 09:0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지도보는 것이 일인 걸요 ^^

hnine 2009-05-09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딸기님이 번역하셨군요 ^^
이제 봤어요.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이렇게 결과물로 나온 것을 볼때 뿌듯함이 참 크시겠어요.
축하드립니다.

딸기 2009-05-09 21:49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책의 절반은 편집자가 만들었어요. 대단히 능력있는 편집자... 존경하고 있답니다 ^^
그리고 저기 올려놓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책의 내용>은 아니예요. 책의 내용에 대한 보충 성격의후기랄까요.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1
츠츠미 미카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제목이 그럴싸하다.
책은 얇지만 내용은 기대 이상이다. 신문 서평에서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책’이라는 평가를 이미 보았던 탓에 기대치가 적당히 높아져 있었는데, 분량에 비해 아주 제대로 된 르포였다.

말 그대로, ‘빈곤대국 아메리카’. 세계에서 가장 강하면서 가장 취약한 나라, 가장 부자면서 가장 가난한 나라. 출발점은 지난해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 아니 그 전 해에 이미 터져 나왔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미국의 주택 분양이 침체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업자들이 새로이 주목한 대상은 국내에 증가하기 시작한 불법 이민자와 저소득층이었다. 파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주택 융자를 받을 수 있다고 떠들어 대면서 고객을 확보했던 것이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단순히 금융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격한 시장원리가 경제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빈곤 비즈니스’의 하나였다.”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하고 9·11을 거쳐 미디어들이 존재의 근원부터 훼손당하는 것을 본 저자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미국 사회의 현실을 일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 테면 앞서 인용한 서브프라임 문제라든가 이라크전 참전군인 모집난 등을 ‘빈곤사회’의 구조와 연결짓는다.
그의 눈에 비친, ‘가려진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 목숨줄이라도 내다팔아야 할 처지로 몰아붙이는 ‘신자유주의-민영화-폭주하는 자본주의’가 이 모든 사태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2005년8월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천재(天災) 아닌 인재(人災)’라는 이야기는 많이 나왔다. 저자는 연방재난보호청(FEMA) 전직관리들의 말을 통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얼마나 계획적, 구조적으로 재난구호를 ‘민영화’했는지를 추적한다.
많이 알려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루이지애나 남부의 ‘흑인 빈민층’을 정부가 완벽하게 무시해 떼죽음으로 몰아붙였다는 것도 충격적이고, 부시는 재난이 났을 때 ‘의료사업 민영화’를 홍보하러 다니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적이고, 재난을 맞아 삶의 터전을 잃은 아프리카계 빈민들을 정부가 또다시 저버렸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가 포착한 루이지애나의 현실 중 가장 처참한 것은, 재난을 맞은 그 땅이 이제는 부자들의 투기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후일담이었다.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 시에서 선출된 리처드 베이커 하원 의원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개답했다. ‘마침내 뉴올리언스의 빈곤자용 주택이 정리되었다. 우리가 못 한 일을 신이 대신하여 해 주신 것이다.’ 인적이 사라지고 깨진 벽돌만 널려 있는 거주 지역에서는 저소득자용 공공 단지가 헐리고, 고급 콘도미니엄군과 쇼핑몰이 건설되었다. ‘저지대 제9구’와 같이 해발 밑에 있는 빈곤 지구의 일부를 부 유층 지구를 지키기 위한 저수지로 개조하려는 계획도 이미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의료체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에 대한 고발들은 점입가경이다. 망가졌다 망가졌다 하지만, 이 책에 드러난 구체적인 실태를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행여라도 미국에 거주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다. 부시가 내세운 이른바 ‘교육개혁’이 어떻게 ‘이라크 파병’으로 이어졌는지는 더 충격적이다.
“낙오학생방지법은 표면상으로는 교육개혁이지만 그 안에 이런 항목이 있어요. ‘미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학생의 개인 정보를 군 모병관에게 제출하라. 만일 이를 거부할 시에는 후원금을 중단하겠다’고 말이에요.”
현직 교사가 들려준 말이란다. 책의 중반부터는 ‘파병’-‘모병’과 가난이 미국 사회 안에서 어떤 사슬로 묶여있는지를 파헤친다. 가난한 미국인들, 혹은 미국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불법이주자들은 미군에 등록하고 이라크에 간다. 가서, 죽거나 다치거나 정신질환자가 되어 돌아온다. 문제는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주겠다며 외국인 병사들을 미군으로 불러 모았는데 합격한 사람들 중 절반이 한국어 사용자, 즉 한국인이었다는 보도였다. 아메리칸이 되기 위해 기를 쓰는 한국인들이 어디 한둘이랴마는.

츠츠미 미카는 미군 병사가 되어 전장으로 가는 미국인들, 불법이주자들, 미국의 ‘전쟁산업 민영화’에 맞춰 파견직으로 이라크에 보내지는 가난한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제3국의 가난한 이들의 사연들을 모아 들려준다. 네팔 등지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알선료까지 내고 ‘속아서’ 혹은 ‘알면서도’ 이라크에 가서 총알받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국 내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인들을 충원할 수 없게 된 미 국방부가 하는 짓이 저런 것이다. 이라크에서 어처구니없게 희생된 김선일씨가 일했던 회사가 ‘켈로그 브라운 앤드 루트(KB&R)’의 하청업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전쟁산업 파견근로자들도 바로 그 회사, 딕 체니가 경영했던 핼리버튼의 자회사인 KB&R과 연결돼 있다.
저자가 인터뷰한 이라크 파견자 중에는 ‘제3세계 빈민’ 뿐 아니라 일본인도 포함돼 있다. 우익들의 평화헌법 수정운동이 한창인 나라 일본,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 나라 일본 사람이 이라크로? 2005년에 실제로 일본인이 이라크에서 숨진 적 있었다. 파병도 안 했는데 왜? 신문 사진에서 본 그 일본인은 깍두기 헤어스타일에 다부진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아마 용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빈민들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이라크 전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라크로 가는 군인과 민간인들 모두에게 남는 것은 병들거나 다친 육체,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 가난뿐이다.
미국 정부가 교육재정을 줄이고 장학금을 삭감하면서, 등록금 때문에 빚더미에 앉고 신용불량자가 된 대학생들이 넘쳐난다. 이런 가난한 대학생, 가난한 고등학생들은 군인 사냥꾼들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참 대단한 모병제의 나라다. 여기서 얼마 전 미국 언론에 실린 또 하나의 기사가 겹쳐진다. 군 모병관들이 ‘군인 모집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는 거였다.
아니, 신병 모집이 얼마나 힘들기에 죽기까지 해? 그 답이 이 책에 나와 있다. 가난한 이들이 군인이 되어, 자기 나라에 붙어 있으려고 모병관의 길을 택한다. 모병 실적이 좋지 않으면 이라크에 끌려간다! 이것이 세계 최강 미군의 실태라니 허망하다 해야 하나.
책 표지에는 기나긴 설명이 붙어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극단적인 민영화의 폐해와 실상, 국민의 생존권과 관계된 분야까지 시장원리를 끌어들인 미국의 현실태가 전하는 경고!” 더 말해 무엇 하랴. 한국 정부는 미국 부시행정부가 했던 한물간 신자유주의 돈 놀음을 더 신이 나서 따라하려고 지랄을 떨고 있다. ‘빈곤대국 아메리카’가 ‘빈곤대국 대한민국’으로 재연되는 모양을 지켜보려니 기가 차다.

(번역에는 문제가 좀 있다. 일본어를 그대로 옮겨서 국방부를 ‘국방총성’이라 반복해 표기한 것은 매우 눈에 거슬린다. 이 책 뿐 아니라 아직도 상당수 책들, 그리고 한국 학자들이 ‘국방성’, ‘외무성’, ‘수상’ 같은 말을 쓴다. ‘국방부’, ‘외무부’, ‘총리’다. 런던 ‘경시청’이 아니고 ‘경찰청’이다. 이 책에는 ‘유유아’라는 말도 나온다. 乳幼兒를 그냥 발음대로 읽은 것 같은데 우리 식으로 하면 ‘영유아’다. 우라늄을 일본식으로 ‘우란’이라 거푸 쓴 것도 짜증난다. 그 정도는 알고 번역해줘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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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04-2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땡기네요... 근데 마지막 괄호 안의 내용은 윽윽윽 ;;;

딸기 2009-04-21 17:20   좋아요 0 | URL
전반적인 번역 문장은 괜찮아요. 제가 트집을 좀 잡은 거예요. ^^

구본씨 2009-04-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유유아나 우란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돼.
저건 번역 이전에 편집자의 기본을 엿바꿔 먹은 것이야.
일본 경찰에서 경시청은 도쿄뿐. 나머지 도시는 경시청이 아닌데 다 경시쳥으로 쓰는 책들도..

딸기 2009-04-22 09:12   좋아요 0 | URL
좀 그렇지? '국방총성'에서 허걱하고, '우란'에서 완전히 깼어.
그것도 그냥 우란이 아니라 '열화 우란'... ㅋㅋ

[해이] 2009-04-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번역과 교열에 조금 문제가 있나봐요^^ 섬세한 지적 도움이 많이 될듯

딸기 2009-05-12 18:15   좋아요 0 | URL
문제가 좀 있었지요... 아쉬운 부분이예요. 그래도 책은 재미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