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질은 중요하다. 건강해야 행복하고, 행복해야 건강하다. 잘 살아야(돈도 좀 있어야) 건강도 행복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먹고 살만해진 지금 우리는 왜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점점 많은 질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저자는 우리가 “불평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얼핏 당연한 얘기인 듯도 하고, 얼토당토 않은 얘기인 듯도 하다. 당연한 얘기로 들리는 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느낌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난할수록 보건 혜택도 못 받고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도 많은 것은 당연하다. 아프리카의 영유아 사망률만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얼토당토않은 주장처럼 들리는 것은, 앞서 말한 ‘당연한 이유’에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건강하기 힘들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부자 나라로 불리는 미국 같은 나라(우리도 마찬가지이겠지만)에서조차 건강과 행복이 마구 증진되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것이 상대적 박탈감 같은 불평등과 관련 있다고 하면 너무 심리 지향적인 해석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돈이 없다고 꼭 일찍 죽으란 법도 없다. “가난하지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그 많은 이야기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저자는 사회적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통계조사들을 검토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사회적 지위 격차, 즉 ‘권력의 격차’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린다. 말단 공무원이 고위공무원보다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4배 이상 높다는 영국의 연구결과도 있다. 두 번째는 소득 불평등이다. 비록 소득의 총량에서는 6% 정도의 차이 밖에 없을지라도, 이것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질 때에는 40~50%의 격차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가 실려 있다. 세 번째는 빈약한 사회적 관계다.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로도 불린다. 경쟁적, 공격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소외감과 모욕감이 커지고 사회적 자본 즉 관계가 깨져나간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 혹은 결과가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연결된 사회적 불평등이 총체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권위적이고 상하 간 권력 불평등이 크고 경쟁적인 분위기의 사회에서 권력-부(富)의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 “마음이 병을 만든다”는 통념을 넘어, 저자는 진화심리학적 연구들을 분석해 인간이 타인을 의식하고 서열을 의식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끼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마찬가지다. 남성들의 경우 폭력성이 증가하고 여성들은 우울증이 늘어난다는 현상적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지위/서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책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장류 사례 연구와 사회심리학 스터디들을 검토한다.

불평등이 스트레스를 가져온다는 점을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한 저자는, 스트레스가 질병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해 생리의학적 연구들을 동원한다. 이를 테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에게는 ‘투쟁-도주 메커니즘’이라는 생리학적 기제가 있다. 위기를 느끼면, 즉 스트레스를 받은 인간은 생체 자원의 배치와 생리적 우선순위를 바꾼다. 몸의 생리작용은 에너지를 근육활동에 집중시켜, 여차하면 싸우거나-혹은 도망치기 유리하게끔 대비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자원이 싸움-도주에 집중되는 동안 생체 조직의 유지·치유와 면역, 성장, 소화와 재생산 능력은 저하된다.

“그런데 몸싸움이나 도주가 필요 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정신적인 각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지방조직으로부터 혈액으로 방출된 지방산이 사용되지 않아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쌓인다. 따라서 지속적인 무기력과 근심은 심장질환의 발병률을 높인다."

“문제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다. 우리의 육체가 경계 상태나 생 리적 각성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 자원 분배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리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만성 스트레스 상태는 급속한 노화와 비슷해서 다양한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전체적으로 화시키며, 인간을 외부환경에 취약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에너지의 축적, 소화, 성장과 관련된 부교감 신경계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교감 신경계만 활성화된다. 이 또한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피가 근육으로 흐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스트레스에 대한 또 다른 생리적 반응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생물학적 우선순위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며, 인슐린만이 아니라 성장 호르몬과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테스토스테론 같은 재생산 호르몬의 분비도 억제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가 면역 체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로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을 통해, 그리고 교감 신경계의 지나친 활성화를 통해 이뤄진다.”

“불안이나 생리적 각성 상태가 몇 주, 몇 달, 몇 해에 걸쳐 너무 자주 발생했을 때 건강에 미치는 위험은 단순히 생리적 우선순위가 바뀌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각성 상태가 일정 기간에 걸쳐 계속되면 정상치로 회복되는 피드백 메커니즘이 파괴되어 버린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겨나는 코르티솔 수치를 제어하는 피드백 센서가 무뎌진다는 뜻이다. 피드백 센서가 둔해지면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코르티솔의 반응도 둔화된다.”


코르티솔수치가 높아지면 인슐린의 신호가 억제된다.

“보통 만성 스트레스의 부작용이 누적되었을 때 신체가 지불해야하는 생리적 비용을 ‘알로스타 부하’ allostatic load라고 부른다. 이는 코르티솔의 기본수치와 혈압이 높으며, 인슐린 저항을 유발시키고, 혈액이 쉽게 응고되며, 복부 비만과 면역 기능이 감퇴하는 현상을 포함하고 있다. 알로스타 부하가 클수록 심혈관 질환, 암, 감염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고, 나이가 들었을 때 정신적 기능이 빨리 저하된다.”

길게 인용했는데, 사회적 스트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건강과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저자는 ‘평등해서 건강하고 불평등해서 건강하지 못한’ 사례들을 펼쳐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이탈리아인 집단 거주지였던 로세토 마을이다. 상대적으로 전통 문화와 주민들 간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이 지역 이탈리아인들은 주변 다른 주민들이나 다른 지역의 이탈리아인들에 비해 건강했다. 그러나 미국식 문화에 점차 젖어들고(이탈리아 문화가 미국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유대관계가 깨지고 소수민족이라는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건강도도 낮아졌다.
더 분명한 사례는 동유럽일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은 1980년대 동유럽 연구를 통해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동유럽 사회가 비슷한 경제수준의 다른 사회보다 건강 면에서도 훌륭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뒤 ‘건강의 구조’는 모두 무너져 내렸다.
카스트제도 등으로 인한 차별이 어느 나라보다 심하다는 인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인도의 케랄라 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카스트와의 싸움이 많이 진전됐고, 토지개혁과 교육확대, 빈민 보조, 여성권익 향상 등에서 다른 지역보다 앞서 있었다. 케랄라 주의 평균수명은 1인당 GNP가 1000달러 안팎이던 1990년대 후반에도 미국보다 3, 4년 정도 짧은 수준으로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한국의 사례도 등장한다.

“사실 정부와 통치자들은 항상 소득 분배와 사회 통합이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건전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 사회를 통합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부가 전략적으로 평등주의적 정책을 도입했던 사례들도 많다. 한때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면서 빠르게 성장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1960-80년대에 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들8개국(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은 세계은행이 ‘동반성장’이라 부르기도 했던 정책 하에서 급격히 성장했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이 8개국 정부들은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 대중의 승인과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은 북한이라는 경쟁자가 있었고, 대만과 홍콩은 중국 본토와 관련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의 위세가 꺾이면서 급속하게 평등주의적으로 변모했다.”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촘촘히 분석하고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 성과들을 종합한다. “불평등의 사회학”에 대한 과학적 해설이라 보면 되겠다. 현실적인 함의는 분명하다. 우리가 부국에 살든 빈국에 살든 ‘평등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50개 주를 대상으로 각 주의 소득 분배 정도와 개인의 소득 수준에 따른 사망률을 조사했더니 불평등한 주에 빈민층이 많아서 건강 수준이 미국의 전체 평균보다 낮아지는 현상은 불평등과 건강의 관계를 3분의 1 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소득 불평등과 건강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나머지 3분의 2는 건강에 미치는 불평등의 맥락효과였다. 다시 말해 어떤 수준의 소득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더 불평등한 사회에서 생활한다면 평등한 사회에 사는, 자신과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보다 사망률이 높게 나타났던 것이다.”

역으로, 종업원 지주제를 확대해 노동자들의 결정권을 높이고 민주적인 기업구조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직장 내의 스트레스는 확 줄어든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작은 노력(그러나 굳은 정치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만으로도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심리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빈곤의 물질적 측면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심리사회적 요인은 빈곤과 소득 불평등을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추가적인 근거이지 결코 반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여 사회적 위계질서와 불평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경제 성장 다음으로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의 정도는 사회 전체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됐든 뭐가 됐든, 불평등을 양산하고 사회를 균열시키고 인심 나빠지게 만드는 정책들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더 설명할 것도 없는 요즘의 우리 사회 모습이다.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 넘기고 난 뒤끝은 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약회사는 어떻게 거대한 공룡이 되었는가 - 전 세계 보건의료 체계의 일그러진 초상화
재키 로 지음, 김홍옥 옮김 / 궁리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책 참 별로다. 내용은 지지부진 중구난방, 번역은 지리멸렬. <질병판매학>과 <몸 사냥꾼> <인체시장> 등등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책들이 많이 있는데 평점 주자면 <질병판매학>은 95점이고 이 책은 5점이다. 영국 미국 얘기 뒤죽박죽에,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왜 하는 건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제목장사 너무 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 - 에너지.경제.환경의 통합적 전망과 대안
바츨라프 스밀 지음, 허은녕 외 옮김 / 창비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작이라면 대작이고, 지루하다면 지루하다. 저자는 체코 출신으로 프라하대학을 나와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인데, 요즘 유행하는 지속가능성이나 저널리스틱한 환경-에너지 연구를 해왔던 사람이 아니라 화석연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잘 쓸 것인지를 평생 연구해온 학자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방대하고, 구체적이다. 이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국내 출간본에 붙은 세련된 제목과 깔끔한 표지만 보고 ‘에너지-환경문제를 트렌디하게 다룬 책’으로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옛소련과 동유럽 석탄연구에서부터 미국과 유럽의 재생가능 에너지 최근 연구현황까지를 꿰뚫고 있는 저자는, 그래프까지 잔뜩 동원해가며 세계 에너지 실태를 설명한다. 책은 제목과는 달리 ‘미래 에너지 디자인’에 대한 개론서라기보다는 ‘지구촌 에너지 종합연구서’에 가깝다. 미래의 에너지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센세이셔널한, 재미나고 상상력 넘치는 아이디어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책은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새로 나온 원자로, 요즘 많이 쓰이는 석탄 오염방지 기술, 최근에 많이 팔리는 풍력발전터빈의 설계 같은 것들을 설명한다. 기후변화-에너지를 다룬 다른 책들처럼 저널리스틱하고 생동감 넘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지만 진지하고 묵직하다.
저자는 기후변화-재생가능에너지 담론의 ‘센세이셔널리즘’을 배척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로의 이행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석유 피크론’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이행을 주장하는 이론 중에는 여러 부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는 “석유가 이른 시일 내에 고갈될 것이므로 다른 에너지원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셸, BP 등의 메이저 석유업체에서 일하다 ‘석유시대 종말론’의 선두주자가 된 콜린 캠벨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른바 ‘허버트 종형 곡선’이란 것을 제시하면서 21세기의 초반에 석유생산의 정점(peak) 즉 ‘이미 파낸 양이 남아있는 양보다 많아지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세계의 석유생산은 2010년 이전에 정점을 지나가거나 지나간 것이 된다. 국내에서는 이필렬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등이 대표적인 ‘피크론자’다.
하지만 바츨라프 스밀은 “석유 탐사·시추·채굴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석유자원의 고갈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얼핏 석유체제 옹호론자의 말처럼 들리지만 분명 차이는 있다. 석유 중독자들은 “그러므로 석유를 더 펑펑 써도 된다, 괜히 재생가능에너지에 헛돈 들일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스밀의 논지는 다르다. “석유가 곧 말라버린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에너지 시스템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석유시대의 종말은 21세기 100년 이상에 걸쳐 서서히 올 것이다. 이는 석유가 고갈되어서가 아니라, 석유가 경쟁력 없고 환경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석유가 갖고 오는 환경적 폐해를 받아들이기 싫다고 생각하게 될 때, 석유보다 재생가능에너지의 수급비용이 더 싸게 먹히는 때가 되면 석유시대는 끝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석유 곧 떨어진다더니 아직도 펑펑 나오네, 하면서 석유시대 종말론자들을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환경주의자들을 ‘양치기 소년’ 취급하곤 한다. 스밀은 양치기 소년들이 불러오는 역작용을 경계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시뮬레이션에 대한 거부감이다. 옮긴이들이 잘 설명해놓았지만, ‘컴퓨터 이전 세대’의 과학자인 저자는 “나도 처음에 시뮬레이션이라는 거 나왔을 때 홀딱 반한 경험이 있지만 뒤에 돌아보니 헛물만 켠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에너지-기후변화 연구의 제반 작업들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편협해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몽땅 틀린 것으로 판가름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 예측은 몽땅 헛일이네, 하고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예측 시나리오를 과신하지는 말자고 그는 말한다. 미래를 점치며 어느 한 쪽에 올인하기보다는 규범적인(즉 환경과 성장의 공존을 위해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할) 미래의 룰을 만들고, 현실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가자는 주장이다.
이 ‘규범적, 현실적인 미래의 룰’을 직접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책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유추하건대 현실적으로 지구상 수많은 이들이 쓰고 있는 석탄에서는 청정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역시나 지구상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연료인 땔감(거창하게 말하면 ‘바이오매스’)도 환경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도와 에너지 결핍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재생가능에너지로 각광받는 태양광·풍력·조력 등의 연구와 실용화를 지원하고, 탄소세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나가도록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하자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되, 너무 폼 잡고 너무 과장하지는 말자, 재래식이라고 몽땅 배제하고 없애자 주장하지는 말자, 하는 것.
상식적인 내용을 방대하게 구술해놨으니 ‘재미있는 책’이라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넘쳐나는 에너지 관련 책들 중에 이 책이 ‘대작’인 것은 분명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식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하나를 끼고 몇 년 씩 뒹구는 것은 내게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칼비노의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서는 하도 오래전부터 집착 수준의 애정을 갖고 있던 터여서,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지인들도 있겠다.
너무도 오래 전, 조너선 스펜스의 <칸의 제국>을 읽을 때에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로 인용돼 있는 것을 옮겨 적어 놨었다. 그 때만 해도 이 책이 제대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을 때였던지라, 인터넷에서 용케도 번역물이 돌아다니는 것을 찾아내 프린트를 해서 뒤적거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묶여 국내에 제대로 출간된 것은 2007년이다. 참 늦게도 나왔다. 너무도 기다렸는데. 회사에서 이 책이 말 그대로 ‘버려져 굴러다니는’ 것을 후배 녀석이 집어 들었고, 나는 눈빛 번득이며 그것을 다시 가로채어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나와 운명으로 얽혀있으니까!
너무 아까워서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 나는 이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제대로 된 책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은 출간된 그 해 6월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때였다. 나는 그 여행에 이 책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타슈켄트의 기차역, 사마르칸드, 부하라, 히바. 역사 속에서 끄집어낸 듯한 그 몽환의 도시들, 사막의 오아시스들에서 나는 칼비노의 책을 읽었다.


“이 도시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들의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은 어떤 양철 판으로 덮여 있는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황제에게 보여주는 도시들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든 있는 곳들이다. 어쩌면 그것들은 고향, 자아, 혹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각 도시마다 정확하게 말로 표현되는 기본적인 정보들에 뒤이어,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거나 손등 혹은 옆면을 보이기도 하고 곧게 혹은 사선으로, 격렬하게 혹은 천천히 움직여 소려 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대화 형태가 자리 잡았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낀 칸의 하얀 손이 베네치아 상인의 민첩하고 활기 찬 손에 품위 있게 대답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자라나면서 손의 움직임은 안정되기 시작했고 손을 바꾸거나 움직임을 되풀이할 때 그 각각은 영혼의 움직임과 모두 일치했다. 사물에 관한 어휘가 상품의 새로운 견본에 따라 새로워지는 반면, 소리 없이 몸짓으로 이루어진 설명 목록은 제한되고 고정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의지하는 기쁨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차츰 줄어들었다. 그들 대화의 대부분은 소리 없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자네가 말하지 않은 도시가 하나 남아 있네.”
마르코 폴로가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칸이 말했다.
마르코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린 게 베네치아가 아니라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자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본 적이 없네.”
“도시들을 묘사할 때마다 저는 베네치아의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다른 도시들에 대해 자네에게 물어볼 때는 그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지. 그러니 베네치아에 대해 물어볼 때는 베네치아 이야기를 해야 해.”
“다른 도시들이 지닌 특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잠재하는 최초의 도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게 그 도시는 베네치아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베네치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도시에 대해 자네가 기억하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묘사해야 했을 걸세.”
호수의 수면 위에 잔물결이 일었다. 송나라 때 지은 오래된 구릿빛 왕궁의 그림자가 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기억 속의 이미지들은 한번 말로 고정되고 나면 지워지고 맙니다. 저는 어쩌면, 베네치아에 대해 말을 함으로써 영원히 그 도시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도시들을 말하면서 이미 조금씩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저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상상을 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담뱃대에서 천천히 위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한줄기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기도 하고 공중에 그대로 걸려 있기도 했다. 대답은 그 연기 속에 있었다. 연기를 실어 가는 바람을 맞으며 마르코는 드넓은 바다와 산맥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생각했다. 안개가 걷히면서 공기가 메마르고 투명해지고 그와 함께 멀리 있는 도시들이 그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의 시선이 가 닿고 싶은 곳은 그런 변덕스러운 안개와 구름의 막 그 너머에 있었다. 사물들의 형태는 멀리 있을 때 더 잘 구별되었다.
혹은 연기가 입에서 나가자마자 자욱하게 모이면서 천천히 멈춰버렸고 다른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 광경은 대도시의 지붕 위에 고여 있는 증기들, 흩어지지 않는 불투명한 연기, 아스팔트 거리 위로 무거운 유독가스를 내뿜는 굴뚝같은 것이었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기억 속의 안개나 건조하고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도시의 상처에 딱지를 앉게 하는,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에 의해 부풀어 오른 스펀지, 움직이고 있다는 환영 속에 빠진 화석화된 존재들을 가로막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다. 당신이 여행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쿠빌라이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의 대화는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가진 두 거지들이 하는 대화인지도 모르네. 두 사람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녹슨 잡동사니, 천 조각, 폐지들을 모아 쌓지. 싸구려 포도주 몇 모금에 취한 두 사람이 동방의 보석들로 주위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폴로가 말했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쓰레기로 뒤덮인 황량한 땅과 칸 왕궁의 공중 정원만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나누어놓는 것은 우리의 눈꺼풀이지만 어떤 게 안이고 어떤 게 밖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쿠빌라이가 마르코에게 물었다.
“서양으로 돌아가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고향 사람들에게 해줄 건가?"
“이야기하고 또 할 겁니다.”
마르코가 말했다.
“하지만 제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기대했던 말만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폐하께서 귀 기울이시는 세계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고 제가 돌아가는 날 저희 집 거리를 오갈 짐꾼이나 곤돌라 뱃사공들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또 제가 만약 제노바 해적들에게 잡혀 모험 소설을 쓰는 작가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경우, 말년에 작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
“가끔 내가 화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현재에 포로가 되어 있을 때, 그럴 때면 자네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려오곤 하지. 그 현재에서는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가 그 순환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해 있는데,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의 목소리를 통해 도시들이 살아가는. 그리고 어쩌면 죽은 뒤에도 다시 살아나게 될 보이지 않는 이유를 듣게 된다네.”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제노비아,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알아봐 달라고 애원하는 아델마, 서로 떼어질 수도 서로를 바라볼 수도 없는 앞면과 뒷면의 평면 만으로 이루어진 도시 모리아나,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스스로의 과거를 파괴하는 클라리체, 산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근심걱정을 지하의 쌍둥이 복사판에 묻어버린 에우사피아, 완벽함을 쌓아가는 일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의 텅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우는데 골몰하는 베르셰바, 풍요를 느끼기 위해 매일매일 쓰레기를 쌓는 레오니아, 멸균의 도시를 꿈꿨으나 결국은 오래된 책들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에 점령당해버린 테오도라, 정직과 부정직이 뒤섞여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베레니케.

그렇게 오래도록 끌어왔는데도, 칼비노와의 여행을 끝내고 나니 허전하고 아쉽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리 2009-09-09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 저는 이 책... 너무 어려워요. ㅠㅠㅠ
지금 반쯤 읽는데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가.......

딸기 2009-09-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울 게 머가 있어? 걍 스스슥 읽고 지나가면 되지....
 
인도적 개입 - 정의로운 무력행사는 가능한가
모가미 도시키 지음, 조진구 옮김 / 소화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저자는 국제기독교대학 대학(부설 평화연구소 소장 역임)에서 국제법 및 국제기구론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법의 권위자다. 일본 학자다운 꼼꼼한 사례분석을 통해 인도적 개입과 관련된 이슈들을 층위별로 다룬다. 일본어투를 그대로 번역으로 옮겨 놓아 문장은 지리멸렬해보이지만 반드시 한번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들이다. 좋은 공부가 됐다.


▶ 예전에 평화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침략하지 않고 죽이지 않고 빼앗지 않는 것이야말로 평화였다. 1920년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집단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거기에 ‘침략을 진압한다’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침략하지 않을 것’에 ‘침략한 국가를 징벌한다는 것’이 평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국제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침략과 전쟁의 위법화, 무력행사의 금지, 다른 국가에 대한 간섭의 금지, 주권의 존중 등과 같은 원칙의 확립·강화를 의미한다. 사상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절대평화주의의 입장과 중복되어 있다. 침략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평화주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서 집단안전보장에 입각하여 “침략한 국가를 징벌한다”는 평화는 아마 절대평화주의와는 양립하지 않을 것이다.
인종차별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국제평화와 관련된 문제로서 대두된 것은 l960~70년 유엔이 그러한 침해에 ‘국제적인 관심사항’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나서였다. 그러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지탄받았던 국가에 대해서는 유엔이 ‘개입’하여 제재를 가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때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백인정권에 의한 유색인종의 탄압이 심했던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인도적 개입은 1999년 3~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했을 때 각광을 받았다. 폭격 자체는 인도적 개입의 모델 케이스로 간주하기 어렵다. 코소보 자치주에서 인도적 행위가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취한 수단(=폭격), 절차(=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시), 얻은 결과(=박해의 순환) 등 어느 것을 보아도 의문이 남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서문)

▶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제노사이드 조약(집단살해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에서 규정된 ‘제노사이드’는 다음과 같은 행위를 말한다.
1.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2. 집단 구성원에 대해서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3. 집단에 대해서 그 전부 또는 일부에게 육체적 파멸을 목적으로 생활조건을 고의적으로 부과하는 것
4. 집단내의 출생을 방해하기 위한 조치를 강제하는 것
5. 집단의 어린이들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적으로 이송하는 것

▶ 영국의 국제정치학자 아담 로버츠의 정의에 따르면, 인도적 개입이란 “어떤 나라에서 주민에게 대규모의 고통과 죽음이 초래되었을 때 그것을 막을 목적으로 그 국가의 동의 없이 군사력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협의의 인도적 개입’이라 부르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도적 개입의 공통적인 정의의 조건을 들면
1. 극도의 인권침해 또는 인도에 대한 죄라고 부를 수 있는 심각한 박해가 있을 것
2. 해당국 정부가 그러한 박해를 자행하고 있거나 주민간의 박해를 멈추게 할 의사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
3. 개입하는 것은 통상 다른 국가 또는 복수의 국가일 것. 복수의 국가에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도 포함 된다(논자에 따라서는 유엔과 같은 세계 규모의 국제기구도 포함시키지만, 첨예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외의 경우이다)
4. ‘개입’은 통상 군사력을 사용한 ‘무력개입’일 것(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무력을 사용할 경우가 첨예한 문제가 된다)  (22쪽)

▶ 하나는 합법적이라고 해도 어떠한 종류나 형태의 인도적 개입이 합법적인가는 별도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 인도적 개입이 될 수 있을지 논란을 빚는 사례들
(1) 파키스탄에 대한 인도의 개입(1971년): 유엔에서 호응을 얻지 못함
(2)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개입(1978~79년): 흥미로운 것은 베트남은 인도적 개입을 정당화의 근거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전개한 것이 ‘이전론’ 즉 ‘두 개의 다른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또 베트남군은 1980년 말까지 캄보디아 영내에 주둔했다는 점이다.
(3) 우간다에 대한 탄자니아의 개입: 1971년 아민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1979년 추방당 할 때까지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조사에 의하면 약 30만 명에 달한다(5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한 우간다에 대해 1979년 l월 20일, 3-4만 명의 탄자니아군이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박해받는 희생자의 구제가 아니라 가해자의 처벌을 목적으로 한, 인도적 개입이 용인될 수 있는가는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니에레레 등의 발언에는(만약 탄자니아의 행동을 인도적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인도적 개입의 모습을 둘러싼 또 다른 어려운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유엔과 아프리카연합 등 국제사회는 탄자니아의 행동에 침묵 혹은 묵인했다.

▶ 인도적 개입이 유엔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은 주로 법적인 이유에서다. 즉 인도적 개입이라고 하면 무력행사를 수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엔헌장 상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유엔활동은 ‘강제행동’(유엔헌장 제7장 특히 제39조와 제42조)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개입’과는 다른 합법성이 분명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평화유지활동을 위한 평화유지군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설치되었다. 평화유지활동의 경우 병력의 전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동의에 입각하고 있어 상대의 의사에 반할 경우에도 행해지는 강제행동이나 개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무력행사에도 많은 제약이 있으며 대상국에 명령할 권한도 없다.
유엔은 소말리아나 르완다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기아와 살육이 발생하였을 때 대응을 요청받고 평화유지활동을 했다. 하지만 미묘한 형태로 행해진 활동이기 때문에 제약도 많았다. 세 경우 모두 문제점을 남긴 사례이기는 하지만 조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유엔에 의한 ‘구호 활동의 과잉과 과소’라고 요약할 수 있다.

1. 소말리아- 과잉개입이 낳은 비극
1992년 l월에 취임한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소말리아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안보리와 연계하면서 일련의 ‘인도적’ 활동을 시작했다. 안보리 결의안 제733호에는 그때까지의 안보리 결의안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도적’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왔다.
1992년 12월 3일 유엔평화유지군인 UNOSOM I과는 별도로 가맹국이 제공하는 병력으로 구성되는 ‘통합기동부대(UNlTAF·United Task Force)’ 부대의 설치를 결정했다. 최초로 인도적인 이유에서 무력행사를 용인한 이 결의안 제794호는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주일 후인 12월 10일 미 해병대가 모가디슈 인근에 상륙하는 장면이 미국 방송들에 의해 전 세계로 방영됐다.
1993년 3월 26일의 안보리 결의만 제814호에 입각하여 설치된 것이 제2차 유엔 소말리아활동 (UNOSOM II)이었다. 그러나 UNOSOM II가 강제적으로 무장 해제를 추진하고 특히 아이디드 장군파와의 대립을 심화시킨 결과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임무 개시 한 달이 지난 6월 5일 파키스탄 부대가 습격당해 24명이 숨졌다. 같은 해 10월까지 사태는 유엔평화유지군(혹은 유엔평화강제부대)과 현지의 무장 세력 간의 전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르완다- 내버려진 사람들
1994년에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던 르완다는 과소개입의 예다. 현지에는 두 개의 평화유지활동이 전개되었다. 유엔 우간다 르완다 감시단(UNOMUR·1993년 6월~94년 9월 양국 국경지대에 전개됨)과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1993년 l 월~96년 3월)이 그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며 어느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큰 문제점은 안보리가 원래 이 지역에서의 평화 유지활동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UNAMIR의 임무는 주로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고 총선거 때까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요원 수도 모두 2500명 정도로 소규모였으며, 인도적 긴급 사태에 대응할 만한 장비도 경험도 없었다.
1993년 1994년 내전이 격화되어 벨기에군 병사 10명이 살해당했다. 이에 벨기에가 철수를 결정하였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뒤를 따랐다. 이미 2000명으로 줄었던 군사요원은 한꺼번에 1500명 정도로 줄었다.
유엔 및 국제사회의 조치는 너무 늦었으며 너무 적었다. 조기에 충분히 무력을 행사했어야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기에 비무력행사 형태로 병력과 경찰을 파견하였더라면 50만 명이나 되는 학살은 막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오래된 부족간의 원한의 충돌이었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제사회가 막아야 했던 것은 분출하는 역사적 원한 그 자체가 아니라 삽과 괭이를 사용한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일이 전혀 불가능했을 리가 없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어떻게 하면 인도적 개입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인도적인 예방활동이 가능한가를 묻는 사례였다.

3. 옛 유고연방 인종청소의 충격
유엔에 따르면 인종청소는 한 지역을 지배하던 민족 그룹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을 말살하는 짓이며 살인 이외에 악질적인 괴롭힘, 차별, 폭력행위, 고문, 강간, 재판 없는 처형, 강제이주, 재산의 약탈, 종교시설의 파괴 등 다양한 수단을 포함한다.
이러한 만행이 빈발하는 가운데 유엔은 단계적으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1992년 2월에는 유엔보호군(UNPROFOR)를 파견해 1995년 12월까지 주둔시켰다. 인종청소를 왜 막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분쟁 당사자의 행동이 상궤를 벗어나 있어 국외자가 예측할 수 없는 경우 그것을 신속하게 막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광기가 폭발했을 경우 누군가가 그것을 멈추어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라도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셋째, UNPROFOR가 잔혹행위를 막기 위해 필요한 권한이나 장비를 제공받았으며 그러한 의사와 능력을 갖췄는가 하는 것도 문제다.

4. 스레브레니차의 참극
사라예보 동북쪽 60km 스레브레니차는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역’이었으며 공격이나 침입이 모두 금지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세력은 1999년 7월 6일 총공격을 시작했다. 코피 아난(Kotì Annan) 사무총장의 보고서는 이 학살에 관해서 유엔이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일관되게 지적했다. 첫째, 네덜란드 부대가 충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현지부대와 사령부 사이의 통신과 의사소통이 나빴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무력행사를 할 것인지 스레브레니차가 함락될 때까지 유엔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아난 사무총장의 죄책 고백”이리는 제목으로 이 보고서를 보도했는데 말 그대로 결론은 통한의 반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유고 폭격은 인도적 개입인가
-1999년 3월에 이르러 코소보의 상황은 사건의 사무총장 보고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비인도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따라서 희생자를 구하려는 행위를 인도적 개입이라고 부 르는 것도 일단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할 것은 피해자 중에는 세르비아계 주민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상대적으로 희생자가 많은 쪽을 구하는 것을 ‘인도적 개입’이라 간주하게 되는 것일까?
-인도적 개입의 사례 중 많은 경우가 그랬듯 이 작전도 순수하게 인도적인 동기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른 목적이란 무엇인가? 최소한 밀로셰비치 정권이 NATO가 바라는 유고 평화협정안을 수락하게 하는 것이다.
-NATO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징벌적 폭격’이라는 표현도 간간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을 박해했던 것에 대한 징벌일지도 모르고 랑부예 합의를 거부한 것에 대한 징벌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든지 ‘징벌’은 ‘구제’와는 이질적이며 사후적인 행위다. 그리고 ‘박해’ 현장인 코소보 이상으로 베오그라드 주변 특히 산업시설이나 생활 관련 인프라를 공격하는 작전이 많았다는 것은 단순한 보급·병참선의 절단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폭격은 ‘징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수적 피해’가 많이 발생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자신의 생명에 위험이 미치지 않도록 NATO군이 15,000피트라는 고공에서 폭격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고도가 높으면 정확하게 군사목표만을 폭격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특히 베오그라드에서 인구밀집지역에 있는 공장이나 발전소, 방송국이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중 몇 개가 ‘군사목표’ 라 해도 그런 곳에서 폭격을 하면 부수적인 피해는 거의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과실이라기보다 고의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인도적 효과’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무엇보다 유고군의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폭격을 계기로 강화되었다고 전해진다. 확실한 것은 폭격으로 난민과 피난민이 된 85만 명의 대부분이 알바니아계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폭격을 한 것이었는데 그 사람들의 고통을 더욱 증가시킨 결과가 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모든 것이 폭격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박해를 연쇄적으로 발생시킨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데 폭격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 불개입 원칙은 유엔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의 관습법이라는 성격이 강한 데 비해서 무력불행사 원칙은 유엔헌장에서 확립된 규범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더구나 무력불행사 원칙은 등장하면서 바로 ‘보통’이 아닌 규범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렇게 해서 “일탈을 행하기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개별 국가에 의한 인도적 무력개입의 합법성을 긍정하려는 논자가 극복해야 할 l차적인 장애물이었다.
예외를 드러내기 위해 인도적 개입의 긍정론자가 내세우는 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무력행사의 일반적인 금지는 유엔의 안전보장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에는 개별국가의 무력행사가 허용되는 경우도 생긴다는 주장이다.
둘째, 인권보장은 무력행사와 함께 유엔의 대목적(大目的)이라는 점이다.
셋째, 헌장 제2조 제4항은 타국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는 무력행사만을 금지하는 것으로 그 외의 (타국의 영토를 점령하거나 전복하는 것이 아닌) 무력행사는 허용된다는 해석이다.

▶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한꺼번에 ‘중립성과 비폭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새로운 역할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해하는 주체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하는 경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박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인도적 구호물자를 전해 주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것을 실효성 있게 행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인도적 개입’의 정책적 과제가 아닐까.

▶ 정전(正戰)론에 반대하며
-정전이란 말 그대로 정당한 전쟁이며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전쟁이다. 무력을 기본으로 하여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싸워야 할 정당한 전쟁을 설정하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을 붙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특정 국가의 판단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며 국제 사회의 총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공격하는 상대방이 아무리 ‘악’해도 통상의 전쟁과는 달리 상대방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격하는 대상이나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권을 침해당하고 구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자신이 그러한 방법으로 구호를 받고 싶어 해야 한다.
-만약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보다 인권’을 주장할 경우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인권(생명에 대한 권리·평화에 대한 권리·식량에 대한 권리·가족생활의 권리 등)을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해당국의 주권을 일축하며 죄 없는 시민들을 말려들게 할 가능성을 내재하면서 징벌적인 무력 공격을 하는 것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극도의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은 제한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해당 국가가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타국 또는 국제기구 혹은 다양한 인간집단이 보호하고 구호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할 권리를 해당 국가는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