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미래 - 총.달러 그 이후... 제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지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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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해부터 읽기 시작해서 한동안 책장을 덮어두고 있다가 얼마 전 마음잡고 다시 펼쳤다. 결국 이 책이 2010년에 처음으로 읽은 책이 되어버렸다. 별로 의미 없는 짓이긴 하지만, 나는 해마다 그 해 처음으로 독서기록장에 남길 책을 나름 선별하는 습성이 있다. 내가 올해 첫 책으로 삼고 싶었던 것은 이 책은 아니었다. 벌써 1년도 넘게 조금씩 읽고 있는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첫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제국의 미래>가 생각보다 술술 읽혀서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은 술술 읽힌다. ‘찾아보기’까지 포함하면 558쪽, 하드커버의 두꺼운 책이지만 저자 후기부터 찾아보기에 이르는 뒷부분 곁다리들을 빼고 나면 본문은 477쪽 분량이다. 요즘 책들 다 그렇듯이 글씨는 크고 줄 간격은 넓고 글자들이 ‘공간을 넓게 쓰는 플레이’를 하고 있다.
물리적인 밀도 뿐 아니라 내용의 밀도도 낮다. 술술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며, 다 읽고 나서도 ‘대작을 읽었다’는 뿌듯함을 주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중국인의 ‘혈통’임과 미국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한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 법학교수를 하고 있는 미국인 이민자 2세로서 저자는 미국이라는 ‘현대의 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부터 로마, 중국(당), 몽골,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만, 명(明), 무굴, 영국에 이르는 과거의 제국들을 살펴보며 그들이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과 쇠망하게 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미국에 시사하는 바를 살핀다.

저자는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취급할 나라 혹은 제국’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의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 제국들이 커나갈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관용’이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여기서의 관용은 현대의 인도주의적 관용 개념하고는 다르다. 저자가 최초의 패권국가로 꼽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인도주의자, 인종평등주의자였겠는가. 그들은 전략적으로 인종, 종교, 혹은 민족에 상관 없이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인재를 등용하고 돈 벌 길을 열어 주어 그들의 두뇌를 제국의 두뇌로 삼은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관용은 이런 거다. 차별 없는 너그러움이 아니라, 두뇌와 기술을 쓸 수 있게 마당을 열어주는 것. 그렇게 해서 피정복민들을 제국의 동력으로 만든 것이 성공요인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관용에는 존중이 포함되지 않는다. (중략) 요컨대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사람들(두뇌와 기술)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나라로 흘러들어간다. 관용이 없어져 지배 분파의 배타주의가 강해지고 이민족을 핍박하게 되는 순간 제국은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케이스스터디라고 하는데, 과거의 제국들로 꼽은 나라가 8곳이나 된다. 사례는 많지만 깊지는 않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이 남들의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다보니 새로운 사례들이나 학술적으로 눈길을 끄는 내용보다는 ‘다 알려진 내용’을 중심으로 주장을 전개했다. 니얼 퍼거슨의 <COLOSSUS>나 세계체제를 다룬 책들에서 흔히 보던 내용을 논거로 들어서, 읽는 동안 새로운 디테일을 습득하는 잔 재미는 없었다. 그래서 동어반복이 심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런 부분들을 슥슥 지나가다보니 책장이 마구 넘어갔다.

충분히 새겨들을만한 논지이긴 한데, 가장 중요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제국이 관용을 잃어 쇠락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국이 쇠락해지다보니 관용이 없어지고 배타적이 되는 것인가?
저자가 예로 든 몽골의 경우 지배자들의 내분과 능력부족 등 여러 요인들 때문에 제국이 흔들리게 됐다. 그러자 “중국에 거주하는 쿠빌라이 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중국화’되어 허약해졌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례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관용을 잃는 것과 제국이 쇠락하는 것은 선후관계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문제일 것이다. 즉 관용이 사라져 제국이 망하는 측면도 있고, 제국이 쇠락하다보니 반작용으로 배타적이 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요새는 ‘미국은 제국이며 제국이어야 한다’는, 이 책과 비슷한 논지의 책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이 책의 저자도 재수 없는 니얼 퍼거슨 류하고 맥락을 같이 한다. 미국을 사랑하는 이민2세의 충정이라고만 해두자. 9.11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배타적이 되고, 이민자들에게 문 닫아걸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니 현대의 제국인 미국의 ‘관용 상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미국이 관용을 잃으면 안 된다고, 온 세상에 더 문을 열어젖히고 세계 모든 곳에서 몰려드는 이민자들을 받아 예전처럼 미국이 두뇌로 삼으라고 말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첫째 미국이 지난 10년간 보여준 배타적인 태도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인가, 혹은 그 배타적인 모습이 ‘이미 쇠락이 시작된 데에서’ 나온 반작용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 제국의 쇠망을 말하는 이들은 많다. 대테러전 이전부터 제국의 주기(週期)를 들어 쇠망을 우려한 논자들은 빼고, 대테러전 이후 미국의 옹고집을 보며 쇠락을 경고한 사람들도 많다. 즉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작태만을 놓고 걱정한 사람들이라면 오바마가 일방주의를 다자주의로 돌리겠다고 최소한 말로나마 선언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이 제국의 지위를 유지할 의지와 능력과 유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앞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으려면, 미국이 아닌 유라시아 변두리 땅에서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으려면 앞날을 예견케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두 번째로, 한국은 어떤가 하는 점이다. 한국도 ‘미국의 관용’의 덕을 보았고, 미국의 관용에 기대어 우러르고 혜택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얼마나 익숙한가.

제국이 되기 위해서 관용을 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전략적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관용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공동체가 성장하게 만든다. 제국 뿐 아니라 모든 사회는 관용(다자주의, 개방주의)이라는 토대에서 자란다. 제국의 관용만 이야기한 이 책을 읽으면서 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제국만이 관용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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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10-01-3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의 전작인 [불타는 세계]를 읽었었는데요.. 뭐랄까, 순진한건지 아니면 스스로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건지,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미국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볼까 싶더군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미국을 싫어할까", "또 미국이 그렇게 싫다면서 왜 다들 미국으로 이민을 못 와서 안달일까" 이런 걸로 고민하는걸 보고 있으려니 참.. -_-

딸기 2010-01-31 23:52   좋아요 0 | URL
이민자로서, 그런 모종의 '강박관념'을 느끼나봐요. 저도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TG삼보 2.5인치 외장하드 TG-RM25SS [500GB] SATA하드포함 - 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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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빠르고, 디자인 이쁩니다. 근데 이거 샀더니 자꾸 넷북이 사고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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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운즈 -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텔아비브 젊은이들의 자화상
루트 모단 지음, 김정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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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사람의 몸을 관통하면 앞쪽 총알 들어간 쪽의 상처보다 총알이 몸을 헤집고 나간 뒤쪽의 상처가 훨씬 크다고 한다. 총에 맞아본 적도 쏘아본 적도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총알 나간 커다란 상처를 ‘엑시트 운즈(exit wounds)’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맞은 자국보다 그 이후의 나간 자국이 훨씬 크고 치명적인, 그런 상처를 말한다.  
날카롭지 않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한 만화책인데, 제목에는 그런 상처를 그대로 끌어다놓았다. 책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폭력으로 따지면 세상 어느 곳 못잖게 지구상 폭력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는, 하지만 아프리카 난민촌 같은 곳과는 다르게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못해 첨단으로 발전해 있는 이스라엘의 대도시.
배경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 책이 테러 얘기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얘기로 이뤄져 있다는 건 아니다. 책은 그저 텔아비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테러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경은 아주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이 책은 그저 저런 배경을 바탕에 깐, 보통 젊은이들의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맞다.  


인격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아버지와 절연하고 살던 한 청년이, 아버지의 애인이었다는 여자를 만난다. 내 아버지가 테러를 당해 죽었을지 모른다고? 그 인간 죽었다 해도 하등 섭섭할 것 없지만 그래도 또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서 어찌어찌 여자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의 흔적들을 추적하게 된다. 찾아다니면 다닐수록 아버지가 얼마나 인간성 나쁜 종류인지를 확인하게 될 뿐이지만.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묘한 관계의 두 남녀,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여러 사람의 삶의 단면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엔 참 여러 종류의 아버지가 있고 가족 간에도 여러 종류의 갈등이 있다. 그런 아버지, 그런 갈등은 하나하나 특수한 사연들이지만 그런 아버지들(혹은 어머니들)의 존재, 그리고 그런 갈등들의 존재는 보편적이다. 특수한 배경 속의 보편적인 소재를 담은 것이 이 책이다.

모든 것이 비관적이거나 모든 것이 낙관적인 상황은 없다. 항상 슬픈 와중에도 희망은 있고 우울함 속에서도 재치와 낙관을 찾을 수 있으면 인생은 살만하다. 상처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 너의 상처로 나의 상처를 덮고 나의 아픔으로 너의 아픔을 다독일 수 있으면 되는 것. 마음의 ‘엑시트 운즈’를 치료하려면 상처들을 부비적거리는 수밖에 없다. 외상(外傷)과 내상(內傷)을 서로 보듬는 사이에 어느 새 책은 ‘치유의 이야기’로 가고 있다. ‘완쾌’는 없다. 상처를 후벼 팔지 보듬어 안을지, 앞날은 여백으로 남겨져 있다. 그래도 분위기는 해피 엔딩. 역시나 나는 해피 엔딩이 좋다.

요즘 내가 점점 살이 찌고 있어서 그런가? 만화 속 뚱뚱한 여주인공의 캐릭터도 좋다. 사랑이야기치고는 참신하면서도 정답다. 다만 나는 진즉에 자랐으니 주인공처럼 키까지 크게 자랄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난 이 책이 아주 재미있었고, 결론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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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aw Ramallah (Paperback, Reprint)
Murid Barghuthi / Anchor Books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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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읽은 얼마 안 되는 책들 중, 마음의 울림이 가장 컸던 책이다. 읽으면서 가슴이 시큰했고, 오며가며 책장 넘기다가 갑자기 서글퍼져 눈물이 핑 돌 때도 많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뿌리내릴 곳 없는 자의 슬픔. 저자인 무리드 바르구티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이것으로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되려나.

그의 고향은 라말라,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중심도시로서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소재하고 있는 곳이다. 바르구티라는 성(姓)은 아주 흔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열 명 중 하나는 바르구티’라고 한다. 실제로 PA 지도부에도 바르구티라는 성을 가진 이들이 여럿 있어서, 외신에서는 심심찮게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무리드 바르구티는 라말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인생은 자기 고향에서 보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고향을 다시 밟기도 힘들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유학을 갔던 그는 그곳에서 67년의 전쟁을 맞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앗아간 ‘점령(the Occupation)’으로 귀결됐던, 이른바 ‘3차 중동전쟁’이다. 그의 고향은, 라말라는, 요르단강 서안은,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점령’됐고 국경은 막혔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난민이 되었다.
1980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이스라엘하고 손을 잡아버린다. 중동아랍권의 맹주라는 이집트가 ‘아랍국가들 중 (요르단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버린 것이다. 이집트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의 편이 아니다. 이집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팔레스타인 망명단체들과 운동가들은 추방당한다. 카이로에서 대학을 나와 이집트 여성과 결혼해 시인으로 살고 있던 무리드 바르구티 역시 추방 대상이 됐다.
이렇게 그는 이중의 난민이 됐다. 역시 문인이자 대학교수였던 이집트인 아내와 돌배기 어린 아들을 카이로에 남겨둔 채, 그는 이집트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돈다. 이 책은 그렇게 뿌리 뽑힌 채 살아가야 했던 한 지식인의 자기 기록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 세상 어디에도 ‘나만의 풀뿌리 하나’ 심을 곳 없는 사람.

"떠돌이는 언제나 주거지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사람이다. 주거지등록 신청서의 빈 칸을 채우고 인지(印紙)를 사 붙인다. 떠돌이는 끊임없이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사람, 언제나 ‘어디 출신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혹은 ‘당신네 나라는 여름에 더운가요?’와 같은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떠돌이는 자기가 머무는 나라의 자세한 사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내부적인 정책’일 뿐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내부적인 정책’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떠돌이에게는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에게 두려운 일은, 모두 떠돌이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시위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비록 떠돌이는 그날 조용히 방안에 있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는 ‘시위에 끼어드는 요소’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떠돌이는 존재하는 장소와의 관계가 어긋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곳에 다가가려 하지만 동시에 그 장소를 밀어낸다. 떠돌이는 일관된 내러티브 속에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 순간만을 사는 사람이다. 기억조차 그의 명령에 저항한다. 그는 자기 안의 숨겨진, 고요한 곳에 머문다.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조심하고, 그것을 캐내려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떠돌이는 전화벨 소리를 반가워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친절한 이들은 그에게 “여기가 네 두 번째 집이라고, 친척들이랑 같이 사는 거라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낯선 티를 내면 무시당하거나 동정을 받는다. 동정을 받는 것이 멸시당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 월요일 정오에 나는 추방당했다."


displacement. 난민은 영어로 refugee 라 하고, 국경을 넘지 않고 한 나라 안에서 집을 잃거나 해서 떠도는 유민(流民)들은 (internally) displaced person 즉 ‘IDP’라 부른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67’이라는 공포의 숫자로 남은 그 전쟁으로 바르구티는 displaced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두번째 집’에서도 displaced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사실상 너나없이 모두 이렇게 정처를 잃었다. 아버지는 요르단에, 어머니는 팔레스타인에, 큰 아들은 돈 벌러 사우디아라비아에, 작은 아들은 공부하러 카이로에, 딸들은 시집가서 아랍에미리트에, 삼촌은 불법이주노동자로 프랑스에. 이런 일이 허다하다.
뿌리 뽑힌 바르구티는 곳곳의 아파트들과 호텔을 전전한다. 떠돌이에게는, 호텔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꽃병의 물을 갈아줄 의무가 없다. 그래서 그는 화분 하나, 꽃병 하나를 보면서도 슬픔을 느낀다. 그의 글은 너무 슬프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가족의 전화를 늘 기다리지만, 혹시나 그 전화가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은 어느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일까 늘 두렵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나날들.

93년 이츠하크 라빈과 야세르 아라파트는 빌 클린턴 중재로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다. 책에는 여러 가지 층위가 있고, 이 책의 제목과 관련된 두 번째 층위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오랜 방황 끝에 간신히 이집트의 집으로 돌아갔더니 어느새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어있다. 그리고 96년 어느 날 드디어 그는 고향 라말라에 갈 기회를 얻었다. 이스라엘이 국경을 ‘개방’해준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국경이라고는 하지만 그 국경의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다. 이-팔 공동 통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모든 권한을 갖는, 그런 협상, 그런 개방.

라말라.
책은 그렇게 수십 년 만에 단 며칠 동안 라말라를 방문한 그가 느끼는 것들, 그가 돌아본 것들을 담고 있다. 라말라로 가는 다리를 건너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천년의 시간이자 인생의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돌아간 라말라는 또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멈춰져버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이스라엘에 빼앗겨 버린 도시에서 그는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본다. 이 세상 모든 곳이 ‘발전’하고 있을 동안 라말라는 ‘헤브루 국가 주변의 언덕배기 시골’이 되어버렸다. 점령은 사람들에게서 상상력과 배움과 모든 기회를 앗아갔다. 바르구티는 미래에 대한 꿈을 이제부터 다시 꾸어야 하는 사람들, ‘고향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들과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애와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 얘기’에 치중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최소한도로 제한되어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조차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마음에 흐르는 생각들, 자신에게 강요된 느낌들을 보여주고 눈에 비친 것들을 전해줄 뿐이다.
바르구티는 나기브 마흐푸즈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다. 아랍어로 된 그의 글은 읽지 못했지만, 영어로 된 이 책의 문장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정제된 슬픔, 담담한 희망을 잘 전해주는 문체. 영역을 한 아흐다프 수에이프 역시 이집트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영문판은 2000년 출간됐고, 권두의 추천사는 바르구티처럼 팔레스타인 출신의 지식인으로 카이로에서 공부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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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으뜸 우리 음식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 3
최준식 지음, 김희연 그림 / 마루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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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짜쿵 공개, 우리딸 꼼양의 독서노트.
"그렇게 많은 김치가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 어처구니없는 표현력....

아이의 독후감을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세계 으뜸 우리 음식>?
어케 우리 음식이 세계에서 으뜸이지? 나라마다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고 체질이 다른데.

우리 것은 으뜸이다, 이런 종류 딱 질색입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마음에 안 드네요.

이런 식으로 책 만들어서 애들을 가르치려고 하니
어린 아이 독후감에서 '적들을 물리치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우리 딸이 생각하는 적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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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14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ㅋ

딸기 2009-06-14 19:42   좋아요 0 | URL
웃기죠? ^^

마냐 2009-06-1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꼼양 글 넘 잘 쓴다...@.@ 거으 4학년 수준인듯 ㅎㅎ

딸기 2009-06-15 10:06   좋아요 0 | URL
저게 잘 쓴 거야?
잘 쓴 걸로 뽑아서 올려놓은 보람이 있군 ㅋㅋ

노이에자이트 2009-06-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부터 국수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너무 주입하는 게 문제지요.최준식 씨 글에 은근히 그런 내용이 있는 편입니다.

구본준 2009-06-1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로 나온 책 3권을 보내줄테니
네 마음대로 이벤트를 해보셈~
책은 사인해서 다음주초에 퀵으로 보낼게.

글구,
세계 으뜸 우리 음식은 무척 심하군.
나라마다 기후와 풍토에 맞게 뽑아낸 최선일뿐인데
음식에 최고가 어딨어. 원참.

딸기 2009-06-18 14:16   좋아요 0 | URL
아라쏘~ 이벤트를 함 해보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