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까지 100마일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가족의 문제를 치밀한 구성과 농익은 문장으로 재미나게 들려주던 아사다 지로가 아예 독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기로 결심을 했나보다.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그리고 탁탁 내뱉는듯한 작가 특유의 말투를 잠시 누그러뜨리고 최루탄을 펑펑 터뜨린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모든 것을 다 바친 어머니에게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그리고 무엇을 해드릴 수 있냐고.

이 책은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그리고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도 별로 없는 한 못난 중년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40줄에 접어든 키도코로 야스오는 거품경제의 단물에 빠져 흥청망청 살다가 어느날 회사의 부도로 급전직하한 '고개숙인 남자'다.

홀어머니의 '등거죽까지 벗겨먹으며' 자라난 두 형과 누나는 제잘난 맛에 어머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철부지 막내아들 야스오는 병상에 누워 수술대에 오를 날만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이제사 무심함을 뉘우치지만 정작 돈이 없다. 잘난 상류층 형제들과 효심 깊지만 무능력한 막내아들.

너무 전형적인 구조라서 대체 이 안에서 어떤 감동이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만 작가는 기어이 독자를 울리고 만다. 야스오가 어머니를 너덜너덜한 승합차에 눕히고 100마일 떨어진 시골마을의 명의를 찾아가는 이 여행에 작가의 '진심'이 배어있기 때문일까.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내가 대학시절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날 이불깃을 만들어주시던 모습을 떠올릴 것 같다. 이상하게도 나는 '별것 아닌' 그 장면이 우리 엄마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떠올려진다. 흰 천에다가 노란 천을 덧대어 모양을 넣고 계시던 모습.

그냥, 궁상맞아 보였고, 가난해 보였고, 너무 피곤해보였고, 가게에 가면 이쁜 이불보가 쌓여있는데 재봉틀과 손바느질을 번갈아가며 새벽까지 바늘끝을 들여다보고 계신 모양이 감동적이면서도 우울해보였기 때문일까.

하숙할 때, 자취할 때, 취직하고 나서 원룸에 나와 살 때, 그리고 결혼한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는,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꽃무늬천이 박혀있는 그 하얀 이불보를 보면 난 안 어울리게 감상적이 된다. 난 이불보의 모양 같은 거 신경도 안 쓰는데 그걸 붙들고 계셨던 이유는 안 물어봐도 안다. 아마 기숙사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방을 쓰는데 이쁜 이불보를 가져가야 할 것 같아서 그러셨을 거다. 엄마가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을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을테고.

야스오는 100마일을 힘겹게 여행하며 어머니와 그동안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얘기를 나눈다. 자식이 넷이나 딸린 젊은 과부였던 야스오의 어머니에게도 한때 '남자'가 있었다. 과부를 좋아했던 이 총각은 자신의 성(姓)을 버려가면서라도 함께 있겠노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너무 미안해서 거절을 한다.

우리 엄마에게도 내가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 기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기회들을 자식들 때문에 포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엄마와 함께라면 1000마일이라도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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